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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학교(향교와 서원) 스크랩 조운 선생(현대문학의 선구자)
원기소(오영님 추천 0 조회 115 13.03.16 11:1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900.7/22 영광읍 도동리136번지에서  창녕조씨 희섭의 3남5녀중 3남으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영광의 대표적인 행정수완가로 인정받았고 그의 어머니김씨는 기방출신으로 본처가않인 소실이였다.

그는 자신이 기생의 자식임을 결코 숨기려 하지않고 오히려 천민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훗날 일찍 여윈 아버지에대한 애뜻한 정 과 홀로된 어머니의 한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다 .

그가어릴적 늦가을 동네 사람들이와서 지붕을 엮으며 그의 어머니을보고"어이 월매 술갖여오게~"하는소리을 듣고 달려가서 당신들에게는 월매인지 모르지만 내게는 소중한 어머니다 자식된 도리로 그리부르는 것 을 더 들을수 없으니 앞으로 그렇게 부르지말라!"고 호통을 치니 다음부터는 그리 부르는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목포 산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중앙학원(지금의 향교 명륜당 )에서 교편을 잡으며 사회계몽 운동을한 시조시인으로 민족문화의 옹호자이며 현대문학의 선구자였다.

중앙문단에서 문필활동을 하면서도 향리를 떠나지않고  문화교육에 힘쓰며 항일운동(영광삐라사건 일명 체육단사건)에도 참여 만주로 피신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문단활동의 시작은 1918년 가람 이병기,서해 최학송(함경북도 북청)등과 교유하면서였다.

 

1918년 구식여성 김공주와 결혼 두딸을 낳았으나 이상이 맞지않아 1924년 합의이혼하고 1929년 영광보통학교 교사였던 노함풍씨와 재혼 아들셋을 낳았다.

 

1921년 동아일보에 <불살러주오>를 발표 민족주의적 감정을띈 현대시조를 짖기시작했다.

1922년 영광중앙학원에서 <자유예원>이라는 문학써클을 만들어 교원,학생,일반인 구별없이 장르에 관계없이 작품을 써오게해 월요일과 금요일 두번씩 학교벽과 문짝에붙여 누구나 와서 읽게하고 우수한 작품을 골라 <개벽>에서 발행하는 여성잡지<부인>에 실어주기까지했다.

그는이미 중앙문단에 인정을 받고 있었다.

영광중앙학원에 함께근무하던 박화성씨의 <추석전야>라는 단편 를 읽어보고 계룡산에서 휴양하고있는 춘원 이광수 선생에게 친히 가서 전해주어 1925년 조선문단 1월호에 실리게됨으로 박화성씨를 문단에 데뷰시켰다.

박화성씨의 생일날 조운선생님은 야국을 말려 봉투에 넣어 보냈는데 박화성씨는 야국을 뜯어다 말려서 벼개를 만들어 조운선생님께 보냈다는 로멘틱한 이야기도 전해지고있으며 목포에 문학관이 세워진 박화성씨는 죽기전 "나는 영광을 생각하면 향교의 명륜당 앞마당의 600년된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노란잎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던 아름다운모습과 조운선생님을 잊지 못한다"고 했었다고 한다.

.

1924년 11월 <조선문단>제2호에 실린 세편의 자유시<초승달이 재 넘을때><나의사람><울기만 했어요>로 등단하게되는데 당시 조선문단 기자였던 소설가 최서해의 도움이 컸던것 같다. 최서해 와 는 만주지방에서만나 절친한 사이가 됐으며 나중에 조운의 여동생 분여와 결혼해 매부가된다.1926년 최남선,가람 이병기등과 국민문학운동에 참여 시조부흥 한국현대시의 기반을 다졌다.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을 존경하며 청교도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마음을 비워 자연을 관조하고 자연과의 진지한 교감을 통해 몰아일체를 성취시킴으로서 높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시인이였다.

 

1941년 당시 새로 발족된 조선식량공단(대한식량공사의 전신) 영광출장소에 4년 서무계장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영광민립중학교(영광종고의 전신)응 설립하고자 정주연학회를 조직해 회장직을 맏아 기급마련에 노력하는한편 영광건국준비 위원회 부 위원장으로 학교운동장에 군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기도 했으나 한민당과의 불편한관계로 운신이 어려웠다.

또한 양분된 문단의 좌파인 <문학가 동맹>원으로 활동하다 서울로 이주 잠시 동국대에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를 강의했다.

1949년무렵 가족과 월북했으며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과 고전예술극장 연구실장등을 지낸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이름이 잊혀저 오던것을 1988년 월북 문인해금 조치후 학계에 재 평가받게 되였고 그의탄생 100주년인 2.000년 그의 시조를 묶은 <조운시집>이 복간되고 영광에 기념시비가 세워졌다.

우리말이 지니는 묘미를 중시하면서 정감어린 시 어 를 되살린 시인으로 한국 현대시의 기반을 다지는 구심적 역활을 했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시조집인 <조운시조집>은 <한국시조 큰사전>에 영인본으로 수록될 만큼 현대시조의 전범이 되고있다.

 

<구룡폭포>

사람이 몇생이나 닦아야 물이되며

몇겹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말고

옥류수렴,진주담 만폭동 다 고만두고

구름비 눈과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보느냐

 

<유자>

 

유자는 향기롭다

조국처럼 향기롭다.

이울줄 모르는 잎에 안겨 자랐노니

가시성 육백리 두리 한라산을 지킨다

 

물울 건너오면 탱자된다 하거니와

물을 건너면 탱자도 유자된지

밤마다 한라산 봉오리 별이 부른다.

 

<채송화>

채송화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리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도돔 하고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니

 

<상치쌈>

 

청상치 두손받쳐

한입에 우겨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채 내다보니

혼는 꽃 쫓이던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

 

<법성12경>

후산단풍;

옥녀조운;

구수청량;

응암어적;

선암모종;

마촌초가;

선진귀범;

정도낙안;

시랑모연;

동령추월;

통치낙조;

칠산어화

 

<석류>

투박한 나의얼굴 두툴한 나의입술

알알이 붉은뜻을  내가 어이 아뢰리까

보소라 임아보소라 빠게젖흰 이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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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5.17 16:52

    첫댓글 감사합니다, 스크랩도 해갈까 했는데 막아져 있어 눈으로만 보고 갑니다 자료로 참고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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