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삐용에 대한 추억 =
내가 중학생 시절, 나의 마을에서 약 10리가 떨어진 군내에 영화관이 있었다. 버스를 타면 15분 정도며 걸어서 가면 2~3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런데 그곳 영화관에서 "외국영화"라는 것을 상영한다고 선전을 하는 작은 용달차가 우리 마을로 지나갔다. "외국영화"라는 말이 어린 나의 마음에 이상야릇한 동경을 심어주었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영화표를 살 돈은 마련하였는데 버스비가 모자랐다. 버스비 까지 모으려니 시간이 걸렸고 그러다 보면 그 외국영화는 상영이 끝나고 말 것이었다. 용기를 내어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걸어서 마을 고개를 넘어서 다른 도시로 내려가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휩쌌다. 혹시나 나쁜 학생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어쩌지, 만일 시간이 늦어서 어두워지면 어떻게 우리 마을로 돌아가지... 혹시라도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그만 돌아갈까!' 몇번이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외국영화’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끝까지 마음을 고쳐먹고 군내까지 걸어서 갔다.
그런데 내가 난생 처음 보는 외국영화라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본 영화중에서 가장 좋은 영화 두세 개를 꼽으라면 꼽을 만큼 멋진 영화였다. 아마도 내 평생 가장 잘 한 선택 몇 개를 꼽으라면 그 때 영화를 보러 가야한다고 결심한 것도 들어갈 것이다. 그때 영화 제목은 <빠삐용>이라는 영화였다. 고등학생 때 그 영화를 비데오 테입으로 다시 본적인 있는데, 왠지 중학생 시절의 그 벅찬 마음과 몰입된 것이 적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여전히 신선하고 다시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몰입하여 볼 수 있었다. 그 영화의 주제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집념>이라는 것이었는데, 어린 나에게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영화의 메시지는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나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그 영화 속의 내용이 원작소설을 쓴 앙리 샤리에르의 '실제사실' 즉 '실화'라는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주인공의 이름(별명)이 빠삐용인데, 그는 가슴에 나비 문신을 하였기 때문에 - 나비를 불어로 '빠삐용'이라고 한다 -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빠삐용은 젊은 시절에 "살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 그런데 그는 ‘살인죄’라는 그 사실을 수긍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자신의 젊음을 감옥이라는 너무나 단순하고 열악한 삶으로 허비한다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탈출을 하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좀 더 늘어난다. 그리고 다시 탈출을 하다가 형이 또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음 탈출로 2년의 독방생활 두 번째 탈출로 5년의 독방생활을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형이 늘어날수록 그는 더욱 감옥생활 수긍할 수가 없었다. 상습범이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간수들의 학대도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잔인해져 갔다. 하지만 그는 독방 생활이 끝나고, 다시 일반 감방으로 돌아오자 말자 다른 탈출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몇 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다는 것은 차라리 죽기만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범죄자들도 탈출은 엄두도 못내는 감옥을 범죄적 지식이 별로 없는 빠삐용 같은 일상인이 탈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만 되면 탈출을 꿈꾸고, 또 다시 타출을 시도하게 되고 그리고 또 다시 붙잡히게 되는 일을 반복 된다. - 영화에서는 단지 두 번을 탈출하다가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원작에는 저자가 총 9번의 탈출을 시도 했다고 되어 있다 - 결국 거의 종신형이 선고되고 그는 더 이상 탈출이라는 생각자체를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말았다. 모든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그는 결국 탈출도 더 이상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그날 밤 그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그가 죽어서 천국 비슷한 곳에 도착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회랑이 있고 그 회랑의 끝에는 '예수그리스도 인 듯한 사람'이 앉아 있고 회랑의 양 쪽으로는 '성인인 듯한 사람들'이 길다랗게 줄을 지어서 서 있었다. 그는 가장 젊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멋진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를 한참 바라본 성인들이 각자 빠비용에게 판결을 내렸다. 한 성인이 '유죄'라고 외치자 그 다음 성인도 '유죄' 또 그 다음 성인도 '유죄'를 외쳤고 그렇게 모든 성인들이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빠삐용은 그 심판에 대해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고, 아무 죄도 없이 너무나 많은 고생을 치뤘는데, '유죄'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결백함을 '하늘'에서도 모른 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는 당당하게 따졌다. "내가 무고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알고 있지 않소, 만일 내가 유죄라면 나의 죄명은 무엇이란 말이오, 나의 죄명을 말해주시오!" 그러자 회랑 끝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당신의 죄명은 무의미하게 젊음을 허비한 죄입니다."
그 말을 듣고 빠삐용은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하게 된다. 그리고는 또 다시 탈출을 계획하게 된다. 비록 탈출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곧 자신에게 충실 하는 것이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당시로서는 사형선고 다음으로 큰 형벌인 <악마의 섬>으로의 추방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 섬은 남미 프랑스령에 있던 브라질 근처의 작은 섬으로 파도로 인해서 결코 섬 주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그리고 그 주변에 식인 상어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결코 탈출할 수 없다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자유를 향한 탈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와 있는 옛 감방친구인 ‘드가’의 도움을 얻어서 함께 그 섬을 탈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곳 지형과 파도의 유형을 관찰하여 일곱 번째 오는 파도를 타면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코코넛의 나무와 그 열매로 뗏목을 만들고 마늘을 담은 자루를 달아서 상어를 피하면서 탈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육지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드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 섬에 남기로 하고, ‘빠삐용’은 예상대로 탈출을 감행하고 결국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14년 동안의 길고 지루했던 감옥의 삶을 청산하고 드디어 자유인의 몸이 된 것이다.
빠삐용의 역을 맡은 '스티브 맥퀸'과 그의 친구 '드가' 역을 맡은 '드스틴 호프만'의 모습
마지막 순간에 탈출을 포기하는 친구와 작별을 하는 빠삐용
드디어 자유의 몸이되는 영화의 마지막 모습들
이상이 영화의 내용이다.
소식에 의하면 섬을 탈출한 빠삐용은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베네수엘라에 정착하여 자유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는 해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허락을 얻어 열흘간 파리로 돌아가 머물 수 있었다고 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몽마르뜨의 언덕에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신이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너의 삶의 주인으로서 이곳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빠삐용이 이후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았는지,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자유라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분명한 것이다. 그가 탈출을 포기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의 말 ‘유죄’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비한 죄’라는 것! 사람들은 죄란 자신에게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짓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엄밀히 보면 타인에게 짓는 모든 죄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짓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가장 먼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한 번 뿐인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 - 즉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타인이라는 사실 - 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사소한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자유가 박탈된 때이다. 대다수의 종교에서 '죄'의 결과는 '자유의 박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자유’란 바로 자신에게 의미 있고 자신이 주인인 삶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자유란 곧 ‘구원’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부처가 갈망한 것도 ‘자유’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체험한 것도 ‘자유’였다고 성서는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로 모든 철학적 사상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