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수선전도 (首善全圖)에 나타난 동대문-낙산-응봉 구간 성벽 김정호(金正浩) 목각(木刻) 고려대학교 박물관 연 대 : 1824∼34년, 크 기 : 67.5× 82.5 cm. 보물 제853호. 서울 성곽 동대문-낙산-혜화동-와룡공원 답사기를 한 편에 싣기는 사진과 글이 넘쳐 두 편-‘낙산’과 ‘혜화동’으로 나눈다. 답사는 동대문교회에 올라가 동대문을 내려다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언덕이 입체적으로 내려다 보기 좋기 때문이다.
동대문 교회는 1890년 선교사 스크랜튼(W.B. Scranton)이 세웠으니 꽤 오래된 감리교 교회다.
동대문-흥인문은 서울 성곽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다.
성문을 제대로 지키려면 옹성 설비는 꼭 필요하다. 그런데 왜 동대문에만 옹성을 만들었을까? 다른 대문 다 뚫린 뒤 동대문만 지킨다고 되는 일이 아닐 텐데? 동대문 옹성은 군사적 필요보다 풍수적 비보(裨補)와 또 이 일대 지반이 물러 그 보강차원에서 세웠다고 한다. 위 수선전도를 보면 동대문 근처에 연지(蓮池), 연지동(蓮池洞), 연화방(蓮花坊) 하고 연꽃이 들어간 지명들이 있다. 고종 때 동대문 중건할 때도 일대가 늪지라 애 먹었다고 한다.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흥인지문 (興仁之門), 지정번호 보물 제1호 ….태조 6년 (1397)에 처음 세웠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낡고 기울어 고종 5년(1868)부터 이듬해 3월 까지 성문을 쌓고 2층 문루를 다시 지었다. 중앙에 무지개 모양에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를 세웠으며 다시 그 위에 처마를 4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흥인문 안내판에서 옛 도성 4대문 4소문 중 동쪽 대문이 흥인문(興仁門)이다. 흥인문 문 이름 최근 불탄 숭례문에 대한 해설이 많이 나와 서울 4대문 이름에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들어갔다는 것 쯤은 이제 국민상식이다 옛날에는 뭐든지 오행(五行)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와 연결 지었으니 오방(五方: 동서남북 중앙)과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오행에 대응을 시켰던 것이다. 동쪽은 오행(五行) 중 목(木)이요, 오상(五常)에서는 인(仁)이니 동대문 이름에 인(仁)을 넣어 흥인문(興仁門)이라 한 것이다. 실록 태조 5년(1396 병자) 9월 24일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정식 이름은 흥인문이지만 그냥 편하게 부를 때는 동대문이었다.
사진: 흥인지문 현판-가운데 갈 지(之)자가 들어 있다. 이 지(之)는 영어의 of 정도로 불필요한 것이나 서울 풍수가 서쪽 인왕산은 웅장한데 동쪽 낙산(駱山)이 허하여 비보(裨補)차원에서 한 글자 더 넣었다. 비보(裨補)란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는 뜻으로 풍수에서 즐겨 쓴다. 성문 위로 반짝이는 점과 전선은 문이 얼마나 기우나 알아보기 위한 센서다. 사진으로도 성문 홍예(아치) 둘레 돌이 벌어진 것이 보인다. 지하수를 함부로 퍼 쓴 덕에 지반이 가라 앉아 동대문은 위험한 상태다. 건설할 때 문화재 밑을 지나간다고 말이 많던 지하철 철 구조물 덕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한다. 숭례문 앞에 가서 미안하다 울고 불기만 하면 다 되는 일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문화재는 너무나 많다. 이 동대문으로 임진란 때 왜군 제 1진 소서행장(小西行長) 군대가 들어 왔다. 실록 선조 25년(1592 임진) 5월 3일 ….전략… 적의 기병(騎兵) 두어 명이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장난 삼아 헤엄쳐 건너는 시늉을 하자 우리의 장수들은 얼굴빛을 잃고 부하들을 시켜 말에 안장을 얹도록 명하니 군사들이 다 붕괴하였다. 이양원 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김명원, 신각 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으므로 경성이 텅 비게 되었다. 적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러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시설이 모두 철거된 것을 보고 의심쩍어 선뜻 들어오지 못하다가 먼저 십 수 명의 군사를 뽑아 입성시킨 뒤 수십 번을 탐지하고 종루(鍾樓)에까지 이르러 군병 한 사람도 없음을 확인한 뒤에 입성하였는데,. .. 후략 임진년 왜적(倭賊)은 4월 13일 부산포에 내려 5월 3일 한양에 입성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닷새 만인 12월 14일 한양에 들어왔다. 왜적도 무인지경을 달리다시피 하여 20일 만에 왔으나 돌을 뜨다 동대문 교회에서 창신동 채석장이 보인다.
성곽 돌은 여기서 주로 떴다.
사진: 성곽 돌 중에는 돌을 뜨던 흔적이 있다. 아마 처음 저기를 뜨려고 하다가 뭐가 잘 못 되어 달리 뜬 것일 게다. 돌은 캔다고 하지 않고 ‘뜬다’는 말을 쓴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통나무 주로 밤나무를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가 불어나고 그 팽창력에 바위가 쪼개 진다. 이화대학병원은 북평관(北平館) 자리
이화대학병원은 옛날 여진족 사신을 재우던 북평관(北平館) 자리다. 세종 20년(1438) 2월 19일 …..왜관은 동평관 감호관(東平館監護官)으로, 야인관은 북평관 감호관 (北平館監護官)이라 호칭(呼稱)하도록 하소서…. 야인이란 여진족이다. 여진이 나중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차지한 뒤에는 전에 명나라 사신이 묵던 태평관(지금 소공동 조선호텔)을 쓴다. 답사 시작점 이제 동대문 교회를 내려와 동쪽 성벽에서 답사를 시작한다.
성벽 시작점 주위는 차와 스쿠터가 무질서하게 서 있어 몹시 심란(心亂)하다. 그 나마 조그맣게 “성벽이 시작하는 곳으로 주차 삼가 운운.. “ 써 놓았다. 각서(刻書)와 공사 실명제 성벽 시작점에 올라서면 돌에 새겨진 글씨-각서(刻書)가 보인다.
이패장 절충 (二牌將 折衝)이나 삼패장 사과(三牌將 司果)니 하는 것은 이 구간 성벽 공사를 맡았던 훈련도감(訓鍊都監) 장교들 직위다. 각 구간 공사 책임자와 도변수, 석수 등 기술자 이름을 이런 식으로 새겼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공사 실명제를 한 셈이다. 맨 끝에 강희(康熙) 45년 4월 개축(改築) 이라는 기년표시가 있다. 청 나라 강희 45년은 우리 숙종(肅宗) 32년 1706년이다. 그 아니라도 돌 쌓은 것이 숙종 때 형식이다. 그 위 흰 돌들은 최근 박조(朴祖-박정희) 때 것일 게다.
성곽-이대병원을 따라 아래 쪽으로도 길이 있지만 성곽 답사니 성곽에 바짝 붙어 걷는 것이 좋다. 덤불이 우거지고 쓰레기와 심지어 인분까지 나뒹군다. 영양분-똥이 있으니 파리와 모기도 꼬인다. 하여튼 그런대로 걸을 수 있으나 긴 바지 긴팔에 등산화 신는 것이 좋다.
사진 : 성곽-이대병원 바깥 쪽
사진 왼쪽으로 숙종 때 돌, 다음 세종 때 돌, 다시 숙종 때 돌이다. 위쪽 흰 돌과 여장은 박조(朴祖-박정희) 때 돌로 보인다. 각서(刻書) 동복시(同福始)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군데군데 각서(刻書)가 있다.
사진은 그 중 동복시(同福始) 다. 동복(同福)은 지금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일대로 옛날엔 동복현(同福縣)이다. 동복시(同福始)란 그 지점부터 시계방향으로 동복 사람들이 쌓는 구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구간이 부실하여 무너지면 동복 사람들 다시 올라와 쌓아야만 했다. 성곽 공사구역 태조 때 59,500 척 (18.2 km)의 성벽공사구역을 600척씩 97개로 나누고 각각을 천자문 글자 순으로 표시하였다. 오늘 날 가,나, 다 또는 A,B,C와 마찬가지다. 북악산 동쪽에서 천자문 첫 글자 ‘천(天)’으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낙산, 남산, 인왕산을 돌아 북악산 서쪽에서 천자문 97번째 글자인 조민벌죄 (弔民伐罪) 중 조(弔)로 끝난다. 각 구간은 다시 100 척씩 세분했는데 동복시는 그 소구간 중 하나다.
각서(刻書)와 낙서(落書)
사진: 좌룡정 각서. 낙산 꼭대기 바로 못 미처 있다. 두 번째 암문 못 미처 한글로 된 각서(刻書)도 있다.
그런데 각서(刻書)와 낙서(落書)의 차이는 무엇일까? 낙산(駱山) 모양이 낙타(駱駝) 등 같다고 하여 낙타산, 타락산 또는 낙산이다. 남산,인왕산,북악산과 함께 서울 내사산으로 풍수상 동쪽 좌청룡이다. 서쪽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산세가 길게 뻗지 못하고 허(虛)하다. 풍수상 동쪽은 장자(長子) 서쪽은 중차자(衆次子)를 나타내니 이를 보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보(裨補)적 조치를 한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에서 맏아들-동궁이 잘 안 풀리고 둘째 이하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이를 동쪽 좌청룡이 약한 지세 탓으로 돌리는 전설 내지 신화가 여러 버전으로 확대재생산 되며 내려온다. 사산(四山)과 사신사(四神砂) 내사산 외사산하고 보통 사산(四山)으로 쓰지만 풍수에서는 사신사(四神砂)라 하여 모래 ‘사’를 쓰기도 한다. 사(砂)란 혈(穴) 전후좌우에 있는 산과 물을 뜻한다. 사신사(四神砂)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다. 2번째 암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성 바깥쪽을 따라 갈 수도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도성의 스카이라인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왜식집 제 2 암문 안쪽에 낡은 왜식집들이 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고도 했던 왜식집은 필자 어렸을 때는 흔했지만 이제 드물어졌다. 이 일대도 머지않아 재개발한다고 하지 않을까? 남산(南山)
성안으로 들어가면 잊고 지내던 남산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남산(南山)은 목멱(木覓) 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중국 한자가 아니라 고유어 ‘마뫼’의 이두식 표기다. ‘마’는 ‘남(南)이요, 뫼는 산이니 ‘마뫼-목멱’은 바로 남산(南山)이다 방위 이름은 한자어가 석권하여 고유어는 바람이름에 겨우 남았다. 한자어와 고유어로 방위를 적어 보면 동(東)-새 동풍(東風)-샛바람, 서(西)-하늬 서풍(西風)-하늬바람, 남(南)-마 남풍(南風)-마파람, 북(北-뒤) 북풍(北風)-뒷바람이다. 남산은 달리 인경(引慶)이나 종남(終南)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풍수에서는 앞에 놓은 책상 같다고 하여 안산(案山)이라고도 한다. 호암 문일평 선생 같은 분은 남산과 북악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남산은 저 뾰족하고 날카로운 북악과는 반대로 선이 아주 부드럽다. 북악이 북국의 산이라고 친다면 남산은 남국의 산과 같이 어느덧 염려(艶麗)한 정조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호암 문일평 고층빌딩에 가리기 전 옛 남산을 250년 전 겸재 그림으로 살펴 본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필운상화 (弼雲賞花), 영조 26년 (1750)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 x 18.5 cm, 개인소장 낙산 반대편 서쪽 지금 배화여고/여대 자리 필운대(弼雲臺)에서 본 남산이다. 봉우리 위에 ‘남산 위 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른쪽 흐릿한 원경 (遠景)은 우면산, 산 오른 쪽 자락 기와집은 숭례문이다. 그 너머 뾰족뾰족한 화산(火山)은 관악산이다. 남산봉우리 모양은 마제잠두(馬蹄蠶頭) 형이다. “한양성 북쪽에서 보면 남산은 동쪽 봉우리가 약간 낮고 서쪽 봉우리가 약간 높아 마치 한 일자(一字) 를 써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이다. 서예에서 일자는 마제잠두법(馬蹄蠶頭法)으로 쓰라 한다. 붓을 대는 왼쪽 끝부분은 말발굽처럼 만들고 붓을 떼는 오른쪽 끝부분은 누에대가리처럼 마무리 지으라는 뜻이다 ;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중에서 백두산에서 도성의 진산(鎭山) 백악(白岳, 북악)에 이르기까지 백두(白頭) 큰 줄기-대간(大幹)이 함흥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다가 금강산 북쪽 철령에서 한 가지 서쪽으로 벋으니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한북정맥은 철원을 지나 경기도에 들어와 운악, 예봉 운길을 거쳐 불수사도북-불암, 수락, 사패, 도봉, 북한산 (삼각산)으로 이어져 도성 북쪽의 산들을 맺는다. 낙산에 오르면 운길부터 불수사도북으로 이어지는 산 줄기를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각이라 사진 한 장에 전체 잡기는 어렵다
백두대간-한북정맥을 지나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에 맺힌 용맥(龍脈)은 다시 북한산 (삼각산) 남쪽 연봉을 따라 꿈틀거리며 보현봉으로 간다.
사진: 북한산 연봉. 제일 왼쪽 뾰족한 암벽이 인수봉, 그 오른 쪽이 백운대. 만경대는 낙산에서 보이지 않고, 왼쪽 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보현봉이다. 보현봉에서 6시 방향 형제봉 능선으로 내려와 다시 왼쪽으로 틀어 백악 (白岳, 북악)을 맺으니 바로 도성의 진산(鎭山)이다. 백악(白岳 북악)과 보현봉(普賢峰- 窺峯)
위 사진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본 백악(북악)과 보현봉이다. 백악은 정확히 삼각형이 아니라 오른 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오른 쪽 보현봉은 마치 키 큰 남자가 남의 집 안뜰을 훔쳐 보듯 한양을 내려다 본다 하여 규봉(窺峯)이라고도 한다. 窺는 엿볼 규다. 전설에 의하면 한양 정도(定都)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배치하자 하고, 정도전은 무슨 소리냐? 도성이란 마땅히 남면(南面) 해야 하니 백악이 주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옥신각신 끝에 정도전이 이기자 무학은 앞으로 200 년이 채 못되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라며 탄식한다. 그 뒤 과연 200 년이 지나 1592년 임진년 왜적이 쳐들어 온다. 주산이 동쪽으로 찌부러지면 동쪽에서 난리가 나는지? 따지지 말자. 필자는 풍수 볼 줄 모른다. 그러나 낙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남산. 서울을 둘러 싼 산에 번갈아 올라가 살피며 이리 저리 궁리해 보아도 현재 상태-백악을 주산으로 하고 그 남쪽으로 시가를 배치한 소위 정도전 안이 최선이었던 같다.
사진: 낙산에서 바라 본 백악. 백악 산정(山頂)에서 정맥(正脈)은 바로 아래 청와대 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삼청동 쪽 동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 경복궁으로 들어가 정혈(正穴)을 맺는다. 그러나 풍수란 보기에 따라 얼마던지 달라지니 조선 초기부터 백악에서 내려 온 정혈이 실은 가회동 쯤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동궐-창덕/창경궁의 주봉이 응봉(鷹峯)이란 소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낙산에 올라와서야 이해했다. 백악에서 동쪽으로 줄기가 뻗어 성균관대 (사진 중 천문대 보이는 곳) 뒤에 얕은 산을 이룬 것이 응봉(鷹峯)이다. 응봉에서 8시 방향으로 이어 진 숲 속에 창덕궁이 있다.
제3 암문에서 성밖으로 낙산 위에서 성 안쪽 길은 곧 가톨릭 신학대학에 막히니 답사는 암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암문 근처 성벽 돌이다. 왼쪽 아래는 태조 때 돌, 중간은 숙종 때, 그 다음 다시 태조 때 돌이고 위 쪽 흰 돌들은 박조(朴祖) 때 돌일 것이다. 갈멜수녀원
사진 가운데 숲은 가톨릭 신학대학-5.16 때 장면이 숨었던 갈멜 수녀원이다. 이 양반은 어쩌자고 그 엄중한 순간에 아무 일도 않고 꼭꼭 숨기만 했을까? 한국 현대사 중 그것 참하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대목 중 하나다. 그러나 운석 장면(雲石 張勉)의 인품에 반한 사람도 또 있다. 숨어서 일체 외부연락을 끊은 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당시 인걸(人傑(?)들은 거의 사라졌으나 달빛에 바랜 신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성벽 위로 가로지른 철망이 가톨릭 신학대학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성벽이 무분별하게 훼손될 때 가톨릭에서 지켜 낸 공로도 있지만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시민들의 문화재 접근권을 돌려 줄 때가 되었다. 삼선교 쪽으로 내려가며 왼쪽 골목 안으로 성벽이 죽 이어진 것이 보이지만 접근할 수는 없다.
배낭 메고 등산복 차림에 다가가 한참 바라보니 뭐 하시는 건데요 하고 수상하게 여기기 까지 한다. 이상으로 다음은 이 구간 답사를 구글에 나타낸 지도다.
처음에 말한 대로 혜화문, 혜화동-성북동 구간 답사기는 글 꼭지를 달리 하여 올린다. |
출처: 구룡초부 원문보기 글쓴이: 구룡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