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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부산대영화연구소 「시선과 담론」 2014년호의 청탁으로 쓰인 원고입니다.
가와세 나오미의 '첫' 영화, 혹은 그 ‘여름’의 마지막 기록: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1. 죽음의 파도를 뚫고 나오는 생명의 씨실과 날실, 소년과 소녀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는 ‘현자賢者’라 할 수 있는 카메 할아버지가 염소를 도축하는 장면과 두 차례 만나게 된다. 영화 초입의 첫 번째 죽음은 카메 할아버지와 염소에게만 온전히 속해 있다. 증인들을 얻지 못한 채 기억 밖에 놓여 있는 이런 식의 죽음은 역사가 될 수 없는 ‘개인적 죽음’으로서,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바 있는 ‘호모 사케르’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영화 중반의 두 번째 죽음은 여러 증인들(카메 할아버지, 쿄코, 쿄코의 아버지 그리고 카이토)이 입회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첫 번째 죽음과는 사뭇 다르다. 약한 존재의 희생이 기억을 약속받는 ‘공동체적 죽음’의 기미를 지닌 두 번째 죽음은, 르네 지라르가 말 한 바 있는 ‘희생양’의 죽음과 궤를 같이 한다. 두 개의 죽음이 도출해 내고 있는 서로 다른 죽음의 범주인 ‘개인적 죽음’과 ‘공동체적 죽음’은, 각각의 염소 도축 장면들과 멀지 않은 지점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죽음, 즉 (1) 용 문신을 한 의문의 남성의 죽음과 (2) 가족․지인들의 민요․춤에 녹아들며 잔잔히 맞이하게 되는 쿄코 어머니의 죽음과 정확히 조응한다. 개인적 죽음과 공동체적 죽음이라는 거센 파도에 직면하게 된 소년과 소녀는 ‘어른’이 되기 위한 상실의 통과의례를 성장통 속에서 치르게 되고, 서로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는 위로의 힘들에 부축을 받아 나름의 애도를 수행한다. 그 결과, 소년소녀는 생명과 죽음, 사건과 사고로 출렁이는 ‘삶’이라는 바다 속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기꺼이 몸을 내어 맡길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죽음의 파도를 뚫고 나오는 소년소녀의 생명력을 씨실과 날실 삼아 삶의 이편과 저편의 간극을 한 땀 한 땀 기워가며, 아마미 섬의 풍경이라는 수틀 위로 소년소녀(로서)의 어느 마지막 여름날을 천천히 아로새겨 나간다. 아래의 글은,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라는 수놓음의 매무새를 어루만져 보려한 어느 가을날의 흔적이다.
2. 위로의 쇼트는 어디에서 느지막이 도래하는가
<너를 보내는 숲>(殯の森, 2007)이 ‘숲-그-자체’로 제 얼굴을 삼았다면,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얼굴은 ‘파도-그-자체’다. 관객에게는, 특히 일본과 이웃하고 있는 관객에게는, 아무래도 이 파도가 예사로 보이질 않는다. 후쿠시마 현을 집어삼켰던 ‘그 날’의 ‘그 파도’가 우리의 뇌리에는 여태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나타난 아마미의 성난 파도는 그리하여 3.11 대지진이라는 역사적 파도로 치환되어, 관객들의 기억 속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그날의 이미지들을 벼락같이 호출한다. 역사적 파도와 영화적 파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충증작용에 관객이 압도되고 있는 사이, 용 문신을 한 남성의 시체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한 카이토는 겁에 질려 온 힘을 다해 도망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문신’은 카이토에게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그러니, 카이토의 공포가 단순히 ‘죽은 몸’과의 대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카이토가 발견한 바다 속 시신의 용문신은, 도쿄에 있는 아버지의 분신(아버지의 몸에는 용문신이 새겨져 있다)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애인(이라고 소년이 상정하고 있는 누군가)의 표식이기도 하며, 자신이 떠나온 고향인 도시의 총화이기도 하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의미들의 경첩노릇을 하고 있는 ‘문신’이 카이토가 그리도 두려워하는 바다에게 잡아먹혀버린 것이다. 아마미 토박이 소녀 쿄코는 도시소년이 얻어버린 기이한 공포의 실체에 온전히 닿을 수 없고, 결국 카이토는 도쿄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마치 시골에서 상경한 조카를 삼촌이 맞이하듯 심드렁히 이어지는 도쿄에서의 장면들에서, 굳이 부자지간의 해후상봉이라 할 만한 감정의 동요나 사건적 만남의 뉘앙스는 도통 없다. 이토록 아무 곡절 없는 상봉장면을 대면한 관객은 웬일인지 깊이 흔들린다. 의식과 합리성이 암전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이 부자(父子)가 도쿄의 어딘가에서 무심히 먹고 마시고, 말하고, 걷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모습들 하나하나는 이미 무의식 속 필름 어딘가에 명확히 그 잔상을 남겼음을 관객은 깨닫는다. 10분 남짓 반짝거리다 사라져버린 도쿄에서의 몇몇 쇼트들은 영화의 안에서 밖으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등장인물들로부터 관객에게로, 마치 ‘도둑과 같이’ 메시아적으로 도래한 쇼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왜 그리도 메시아적이었던 것일까.
텅 빈 집에 덩그러니 놓인 식탁 위에는 언제나처럼 엄마의 쪽지가 남겨져 있다. 헝클어진 이부자리와 너부러진 브래지어가 엄마의 침상 위에 마치 또 다른 쪽지인양 보란 듯 놓여있다. 엄마는, 나만의 엄마였으며 내 아빠만의 아내였던 엄마는, 그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변해버린 엄마의 삶은 이제 파도다. 나는 그 파도가 무섭다. 아빠와 내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해 엄마라는 파도가 강렬히 또 은밀히 춤출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왜 아빠는 홀로 도쿄에 남기를 선택한 것일까. 왜 아빠는 나를 이 파도 속에 홀로 놓아 둔 것일까.
아마미의 거센 파도와 하나가 되어버린 엄마로 인해 번민하던 카이토는 ‘굳이 도쿄이어야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드디어 묻는다. 그 질문에 카이토의 아버지가 가만가만 답하는 동안, 카메라는 마치 저만의 야간산책에라도 나선 듯 도쿄의 저녁풍경을 이곳저곳 포착한다. 도쿄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감독의 고향인 나라(奈良)현의 웅숭깊은 숲을 응시하던 옛 작품들의 정감과 다를 바가 없으며, 카메라의 시선에 보이스오버 되어 들려오는 이야기 역시 ‘도쿄는 나의 장소/고향’이라는 고백으로 요약된다. 나라(奈良)를 영영 떠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감독이 그곳의 ‘숲’을 떠나 ‘도시-숲’으로 그 귀소본능을 굴절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관객은 문득 궁금해진다. 완고한 토착주의에 관한 레이 초우의 어휘1)를 빌려보자면, 가와세 나오미의 ‘나라(奈良)주의’가 토착주의로 고착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그이의 귀소 정향의 변화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일 것이다. 감독에게는, 나라(奈良)와 그 지역문화를 뛰어넘어서 자기를 규정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으리라. 이런 점에서, ‘태국’으로 위태로운 불시착을 했던 <나나요마치>(七夜待, 2006)와는 달리, 이 작품의 배경이 ‘나라’라는 지역적 한계를 성공적으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독의 작품세계가 고착화의 위기에서 한걸음 벗어났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에 덧붙여, 도쿄의 1300만 시민이 3.11 대지진의 공포와 피해에 노출된 이후로도 일상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볼 필요도 있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사건 이후’ 도쿄의 저녁을 거닐며, 도쿄를 향한 애정과 신뢰를 아들에게 담담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위압적인 에너지로서 들이닥친 (성적․물리적) 파도 앞에서 작아져버린 카이토에게 전해지는 위로의 시선과 목소리는 순식간에 더 넓은 상흔들을 향해 뻗어나가 결국 스크린 밖으로까지 이미지-사후적으로 그 위로를 전해준다. 도쿄의 몇몇 풍경들과 그에 공명하는 카이토 아버지의 내러티브가 이토록 강렬한 위로의 힘을 얻게 되는 데에는, 그의 직업이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타투이스트’라는 영화적 설정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3. 사제직(司祭織)의 세 가지 형식: 유타(ユタ), 타투이스트, 그리고 감독
<그림자>(きゃからばあ, 2001)를 통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문신을 몸에 새기며 자신만의 애도를 수행한 바 있는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문신을 통한 애도’의 가능성을 살며시 드러낸다. 상처와 상실의 흔적을 몸에 새기며 타자를 애도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몸짓이 시학적 미학으로 구현된바 있는 바흐만 고바디의 <코뿔소의 계절>(Rhino Season, 2012)을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문신의 의미와 역할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뉜다. (1) ‘잊지 않겠다’는, 사회적·개인적 트라우마를 애도하려는 의지의 표현 (2)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문신의 발생론적 기원으로 소급되는 고전적 ‘문신성’의 발현.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의 문신/타투이스트의 출현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타투이스트인 카이토의 아버지는 ‘잊지 않겠다’는 완고한 애도의 의지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공동체적 소속감을 도시인들의 몸에 새겨주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아마미의 전통 무녀(巫女) ‘유타(ユタ)’인 쿄코의 어머니와 도쿄의 타투이스트인 사이토의 아버지는 이런 의미에서 서로의 짝패나 다름없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갖은 사고와 상실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섬-무녀' 유타가 삶의 한편에 있다면, 도시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갖은 사건과 상처를 애도하고 위로하는 '도시-사제' 타투이스트가 삶의 다른 한편에 있는 것이다.
섬-무녀로서의 유타와 도시-사제로서의 타투이스트가 영화 속 대칭적 상징물로서 작동하고 있음에 대한 증거는, 이 작품에서 두 차례 나타나는 내레이션의 내용과 그 발화시점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 내레이션은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 둔 쿄코가 어머니의 신당을 찾아가 큰 무녀님을 만나기 직전에 흘러나온다. 카메라가 아마미의 낮 풍경을 두루 살피는 동안, 큰 무녀님의 목소리는 ‘서원誓願 기도’를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저는 사람들 마음 깊은 곳을 살피기 위해 들어갈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몸들이,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신의 자녀인 저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구석들을, 모든 부분들을 살피게 하시고, 놓치는 일이 없도록 허락하소서. 신들께서는 신들이시고, 인생들은 인생들이오니, 그 무엇이 되었든, 저는 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내레이션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도쿄 상봉장면’에 보이스 오버된 카이토 아버지의 목소리로서, 도쿄의 저녁풍경에 얹힌 ‘도시에 대한 서원’을 카이토와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내가 세상 모든 곳을 다 여행해본 건 아지만, 여기 도쿄는 말이지.... 내가 말하려는 건 뭔가 물리적인 건 아니야. 그런데 도쿄에서 나는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어. 나는 아직도 그걸 느껴. 항상 바쁘고, 지치고,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 그런데도, 이 도쿄는 나 자신을 표현하려는 내 욕망을 북돋아줘.
신의 자녀로서 “이 세상의 모든 구석들을, 모든 부분들을 살피”고 “놓치는 일이 없도록”하는 섬-무녀(유타)의 존재와, “나 자신을 표현하려는 내 욕망을 북돋아”주는 도시의 위로를 몸에 기입해주는 도시-사제(타투이스트)의 존재는, 앞서 언급한 ‘공동체적 죽음’과 ‘개인적 죽음’을 향한 영화적 애도의 방식임과 동시에, 시공간 속에 사라져가는 애잔한 것들을 포착하여 기억의 흔적을 남기는 ‘카메라를 든 사제’로서 스스로를 위치지우고자 하는 감독의 희망이 투사된 대상들이기도 하다.
미지의 에너지로 가득 찬 바다에 아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카이토는, 문신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죽음’이 일으킨 파장과 어머니와 쿄코가 빚어내는 리비도의 풍랑 사이에서 떨고만 있다. 아마미의 파도를 뚫어낼 수 있는 담력과 실력을 갖춘 쿄코에게도, 어머니(가 모시는 신들)의 죽음이라는 ‘공동체적 죽음’의 너울과 '더불어-있음'을 향한 욕망이 일으키는 파도만큼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이 소년과 소녀를 위한 위로는 각기 다른 곳으로부터 다가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운 속내를 큰 무녀님이나 카메 할아버지와의 만남에서 드러내는 쿄코의 모습과, 자신의 혼란함을 도쿄에 있는 아버지나 쿄코의 아버지에게 드러내는 카이토의 모습은, 서로를 참조해 읽어야할 상호텍스트나 다름없다. 아픔이 생겨난 지점과 그 아픔이 놓인 자리가 몹시 달랐던 탓에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위로하지 못한 채 평행선을 그리며 난반사를 거듭했던 소년과 소녀의 감정선은, 각자의 아픔과 상처에게 전해지는 위로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4. 두 번째 창문(2つ目の窓)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는 길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한계를 오가는 특유의 작풍을 알리바이 삼아2), 전작들을 통해 감독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는 몸짓에 기대어 타자성을 환유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었고, 타자성에 오롯이 천착하는 실천에 기대어 자신의 상처에게로 직유적으로 회귀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감독은 여전히 보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보고 말하려 하지만, 그이가 (부러)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대상이 ‘역사적 사건(3.11 대지진)’으로 비교적 선명하게 응축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의미의 괄호 안에서 침묵시켰던 이미지들을 이제는 괄호 밖에서 다루려하는 감독의 시선과 태도가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만져진다. “오후부터는 가을바람이 불어 올 게다”라는 영화 속 카메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전작들에서 보인 ‘여름(이라는 자기 완결적 태도)’에 대한 강박적 집착3)에 불어올 변화의 바람에 대한 복선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감독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삼아 자신의 영화적 ’여름(소년소녀)‘를 보내고 ’가을(성인)‘을 맞이하려는 것은 아닐까.
가와세 나오미의 ‘(치유의) 장소’로서 굳어지다시피 한 ‘숲’이,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는 ‘바다’로 단순히 전치된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나’라는 개인을, 살아있음을, 평온한 일상을, 언제 어디서 온전히 집어삼킬지 모르는 초월적 에너지를 담지한 타자성의 지평으로서 바다는 영화 속에서 넘실거린다. 타자성이 물질에너지가 되어 삶과 충격적으로 맞닥뜨릴 때, 인간은 모두 갑작스레 소년소녀가 되어 겁에 질리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야 만다는 사실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3.11 대지진으로 인해 (심리적) 소년소녀의 상태로 퇴행 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상황과 4.16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의 (심리적) 상황이 크게 다를 리 없다. 갑작스레 소년소녀가 되어 떨고 있는 우리에게, 아니, 어쩌면 단 한 번도 어른이 될 수 없어 여전히 큰 에너지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 내면의 어떤 소년소녀에게, 이 작품은 위로의 손길과 눈길을 건네주고자 분명한 개입을 시도한다. ‘가르치려 들었다’는 식의 혹평4)들은 이 작품이 ‘어머니의 세계’인 상상계 밖으로 나아간 감독의 최초의 시도임에 대한, 다시 말해, ‘아버지의 세계’인 상징계 안에서 출현한 그이의 ‘첫 영화’임에 대한 방증으로 읽혀도 좋겠다5). 소년과 소녀라는 생의 첫 번째 창문이 열린 뒤에야 어른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창문이 열리 듯, 죽음의 창문 밖에 탄생의 창문이 있듯, 감독은 드디어 자신이라는 창문을 넘어 그이가 아닌 무언가로 향하는 창문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아시다시피, 영화의 일본어 제목은 ‘두 번째 창문(2つ目の窓)’이다.) 나는 이 영화야말로, 가와세 나오미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대타자’로서의 영화적 문법․정치학 혹은 ‘소타자’로서의 역사적 기억․상처들)에게 닿으려 했던 최초의 흔적이라 여겼기에, ‘탄생성(한나 아렌트) 6)’을 축으로 이 작품을 훑어보고 싶었다. 가와세 나오미가 선사했던 잊지 못할 몇 번의 ‘여름’을 뜨겁게 만났던 관객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그이의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과의 만남 또한 흔쾌히 기다리며, 두 번째 창문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그 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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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이초우, 『원시적 열정』, (서울: 이산, 2010), 84쪽.
2) Rie Karatsu, "Questions for a Women's Cinema: Fact, Fiction and Memory in the Films of Naomi Kawase", Visual Anthropology 22(2009):170-171
3) “그러나 가와세의 영화에서 계절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마치 여름이 끝나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영화를 끝내야 한다고 결심을 한 것처럼, 재빨리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하소연의 쇼트는 어떻게 불현듯 출현하는가: 가와세 나오미의 자기 고백」, (서울: 바다, 2011), 468쪽.
4) 예를 들어, 「Variety」 2014년 칸영화제 특별호에 실린 Maggie Lee의 다음과 같은 표현. “Kawase embraces nature worship and pompous philosophizing in her indulgently mannerist style, which, over the course of two hours, overwhelms a small yet potentially moving story of two teenagers dealing with separation within their families.”
5) 여기에서의 ‘아는 체’란, 거울단계의 근원적 동일시를 증상적으로 드러내는 상상계 속에 자폐된 에고의 발현을 향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뒤늦게 상징계로 들어선 ‘늦깎이 주체(subject)’에 대한 편치 않은 시선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영화적 세계의 첫발을 주체로서 내딛게 마련인 대부분의 작가-감독들과는 달리, 가와세 나오미(라는 영화)는 이제야 비로소 그 영화적 주체됨의 존재와 가치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6) “인간사의 영역인 세계를 그것의 정상적이고 ‘자연적’ 황폐화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다름 아닌 탄생성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이 탄생성에 인간의 행위능력이 뿌리박고 있다. 달리 말하면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써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이 능력의 완전한 경험만이 인간사에 희망과 믿음을 부여할 수 있다. ....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은, 복음서가 그들의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서울: 한길사, 2002), 312쪽.
7) 무비판적인 찬사와 ‘응원’은 다르다. 지면의 제약 탓에 ‘좋은 응원’으로 글을 마무리하지만, 한 가지 만은 짚고 넘어갈까 한다. 이 작품에서는 소년과 소녀가 등가물로 비춰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두 인물이 점하고 있는 형식과 내용을 자세히 살피자면, 소녀(아마미)는 소년(도쿄)의 성숙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위로·애도적 ‘전경(前景)’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바다수영 장려물’이라는 스포츠 영화(?)로서 따져본다면, 영화를 통해 바다수영의 능력을 얻게 된 주체는 소년일 뿐, 소녀에게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수영하던’, 달리 말해 ‘물과 뭍’ 혹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던 소녀가 (소년과의 첫 섹스 이후) 드디어 ‘교복을 벗고’ 수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소녀의 ‘수영능력’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여기서 ‘수영능력’이 ‘주체적인 방식으로 삶을 뚫어나갈 능력’의 상징이라면, 소년은 어른이 되었지만, 소녀는 소년의 어른되기를 보조해 줄 뿐, 그녀 자신의 성숙은 (성적인 차원의 성숙을 제외한다면) 얻질 못한 셈이다. 도쿄와 아마미를 오가며 외부성을 자발적으로 찾아나서는 소년의 행보와, 섬에 붙박인 채 더 성숙/현명해질 방도를 모색해내야만 하는 소녀의 모습은, 결국 소년을 위한 성장의 모태(matrix)로서 이미지와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소녀를 페티쉬화하여 소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소년’을 위한, ‘소년’의, 그리고 ‘소년’에 의한 성장영화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소년과 소녀’의 영화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