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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9편1~20절
제목 : 의로운 재판
본편도 다윗의 저작이라고 표제는 말합니다.
이 시는 다윗이 왕위에 오른 초기, 이방 나라들을 격파한 때에 지은 것입니다.
사무엘하 8장과 역대상 18장에 보면 다윗이 불레셋 사람들을 처서 항복을 받고, 모합과 아람을 쳐서 다윗의 종들이 되게하고, 그 외에도 여러 곳을 처서 승리를 거둡니다. 성경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뭇랍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들이 많고, 대개 "벤이란 사람(대상15:18절)이 죽음" 혹은 "아들의 죽음"이란 악곡 이름으로 의견이 모아지나 그것도 일치하지는 못하여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시편 9편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6절은 환희의 감사 찬송이고,
7~12절은 미래의 확실한 소망이며,
13~14절은 돌보아 달라는 기도이고,
15~17절은 악한 자의 가련한 운명이며,
18~20절은 구원의 확신과 기도입니다.
1. 환희의 감사 찬송(1~6절)
1절은 감사이고, 2절은 찬송이며, 3~6절은 찬송하는 이유입니다.
1) 감사(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전심으로”는 외식으로는 물론이고 입만으로 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을 보입니다.
마음으로 하되 반심으로 하는 것도 안 되고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는 것 그것이 참 감사이고, 이러한 감사라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사”는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말한다.
- 홍해 물을 벽 같이 가라 세우신 일(출14:21~23절)
- 요단강 물을 그치게 하여 쌓이게 한 일(수3:15~16절)
- 태양으로 중천에 머물러 서게 한 일(수10:12~13절)
- 반석에서 물이 흘러 나오게 한 일(민20:11절)
- 18만 5천명을 자는 사이에 죽이신 일(왕하 19:35절)
-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 거꾸러 뜨리게 하신 일(삼상17:48~49절)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전하리이다”는 감사하여 증거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고 또 감사한 일들을 증거 하겠다는 것입니다.
2) 찬송(2절)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기뻐하고 즐거워함”이라고 두 말을 이중으로 거듭한 것은 기쁨이 지극히 큰 것을 역설함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함”은 기쁨의 근원이 다 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는 최고 높으신 분이시므로(전5:8) 그가 가져다 주는 기쁨은 막을 자가 없어 그대로 이루어짐을 나타냅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하였는데(약5:13) 주로 인한 승리를 감사하고 찬송함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대상29:11~12절)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뿐 인간은 거부도 할 수 없습니다.
3) 찬송한 이유(3~6절)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 찬송한 이유들을 여기서부터 네 가지로 말하였는데
첫 번째 이유는, 원수들을 다 물리쳐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3절입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사람으로서는 승전케 하여 주시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며 찬송할 일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이 기쁨을 많이 경험하였고 여기서도 제일 먼저 이를 들었습니다.
병력도 군비도 자기보다 월등하게 강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굴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기뻐 찬송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의 의를 변호하여 주셨음을 들었습니다. 4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다윗이 전쟁한 것이 자기 개인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것으로 알고 싸운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쟁을 싸운 데 대하여 선대하여 주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싸움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싸운 자에게 기뻐서 감사와 찬송할 수 있는 승리를 주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감사 찬송하는 이유는, 열방을 책망하셨음을 들었습니다. 5절입니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신 원수가 한 나라가 아니고 열방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책하심은 말에서 그치지 않고 그 책한 사실이 사건으로 그대로 전개됩니다.
그것은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므로(히4:12) 능히 못하심이 없이(눅1:37) 역사하기 때문입니다(살2:13).
네 번째 감사 찬송하는 이유는, 원수가 영영히 멸망하였음을 들었습니다. 6절입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원수들이 영원히 멸망해 버리고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하여 주심을 인하여 감사하고 찬송한 것입니다.
여기서 “끊어짐”, “멸망하였다”, “무너뜨림”은 같은 뜻으로 -흔적도 없이 아주 멸망한 것을 뜻합니다. 여기 세 가지로 거듭 거듭 말한 것은 아주 강력히 강조한 뜻입니다.
2. 미래의 확실한 소망(7~12절)
7~8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9~10절은 하나님께서 의지하는 자에게 산성이 되심을,
11~12절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함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7~8절)
7절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좌정하심에 대하여,
8절은 공의로 심판하심에 대하여 말합니다.
(1) 심판의 보좌에 앉으심(7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때에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심판주 되심에 더 큰 희망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되는 대로, 제멋대로, 자기 좋을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딥니다. 애써 의롭게 살려고 애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 준비가 벌써 다 되어 있으니 성도의 위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회개를 촉구함이니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하여 심판받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 공의로 심판하심(8절)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세계 만방 모든 백성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을 다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예수를 믿고(요3:18, 5:24) 하나님의 긍휼을 힘 입는 것밖에 (약2:13)없습니다.
2) 하나님은 의지하는 자에게 산성이 되심(9~10절)
9절은 하나님께서 압제당하는 자와 환난시의 산성이 되심에 대하여,
10절은 주를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심에 대하여 말합니다.
(1) 하나님께 산성이 되심(9절)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압제를 당하는 자나 환난을 당하는자 등 모든 일을 당한 자들이 들어가 피난하고 안식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잠언18:10, 시10:18, 시118:9, 잠29:25,30:5 시62:2).
(2) 의지하는 자는 버리지 아니하심(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이름”은 섭리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은혜의 경험적 지식은 더욱 신앙을 더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시34:8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벧전 2:3절에서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를 맛보고도 타락한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히6:4~6,10:26~27) 구속의 은혜를 배반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배심함이 없으시므로 잊어버리거나 끊어 내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만나 주시고(대하15:2), 가까이하면 가까이하여 주시며(약4:8), 구하면 주시고(마7:7),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십니다(마7:7~8).
3) 하나님을 찬송하라(11~12절)
11절은 찬송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선포하라는 것이고,
12절은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생사를 선포하라(11절)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로 말한 것은 언약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지을 때는 벌써 다위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은 후라 하겠습니다.
“행사”는 계획과 결과를 다 포함하여 그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으로 창조와 섭리와 앞으로 심판하실 일까지 다 선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심(12절)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 흘린 자들을 심문하시고 그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시므로 피 흘림 당한 자들이 부르짖을 때에 보응하여 주시는 분이시니 그 하나님의 행사를 찬송하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어버리시고 그저 넘기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그 부르짖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시다가 갚아 주실 것이니 찬송하고 증거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돌보아 달라는 기도(13~14절)
13절은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이고,
14절은 찬송하며 기뻐하겠다고 함입니다.
1) 긍휼히 여기소서(13절)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찬송 다음에 기도가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피 흘림이나 성도의 억눌림 당함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자신의 곤경을 호소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함은 “은혜를 베풀어 주심”(창33:11)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로 부른 것은, 다윗이 과거에 죽을 고비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때마다 거기서 건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지금도 그 은혜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계속 은혜 베풀어서 지켜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은 능히“죽은 자를 사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심”(롬4:17절)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간구인 것입니다.
*스펄전은 기도를 가리켜 “보기에는 짧은 사닥다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땅에서 하늘에까지 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2) 찬송하며 기뻐하겠나이다(14절)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주의 찬송”은 찬송할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곧 주님의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인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은혜를 찬송하면 그것이 곧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딸 같은 시온”은 예루살렘 거민을 가리키는데 이는 교회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성문에서 찬송하고 증거함은 공중 앞에서 간증함을 가리킵니다.
받은 은혜를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은혜의 소모요,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배은 망덕하는 일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은혜를 항상 기쁨으로 교회 앞에 간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극히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은혜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여야지 은혜 받은 인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듣는 사람들이 오해할 우려가 있음을 인하여 삼층천에 갔다 온 것을 간증하지 않았습니다(고후12:5~6).
4. 악인의 종국(15~17절)
15절에서는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진다고 하였고
16절에서는 자기 손으로 한 일에 스스로 얽힌다고 하였으며,
17절에서는 음부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1)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15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기 때문에 의인들은 은혜로 돌보시고 변호하여 주시지마는, 악인에게는 그 행안 대로 보응하시는 심판 원리를 적용하십니다.(참조 7:15~16절).
2) 자기 손으로 한 일에 스스로 얽힘(16절)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사람들이 범죄 이후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역사를 보고서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므로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으니 어이하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는 것보다 회개하고 돌아와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겔18:32,33:11).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함은 글자 그대로 자승자박입니다.
남을 해하려고 일을 꾸몄는데 그 해를 자기가 당한다는 아이러니컬한 역리 같은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평한 심판 원리임을 어찌하랴(롬2:6).
3) 음부로 돌아감(17절)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은 복수로 되어 있어서 “악인들”이니 악인 전부를 말합니다.
하반절에 말하는 “열방” 곧 하나님과 메시아를 거역한 자 전부를 가리킵니다.
“음부로 돌아감”은 음부에서 왔다가 음부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고 악인들이 갈 곳이 음부이므로(마25:41, 벧후2:4, 유6절) 그리로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은 “악인들”의 설명이니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5. 구원의 확신과 기도(18~20절)
18절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말하고,
19~20절에서 기도로 본편을 마칩니다.
1) 구원의 확신(18절)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궁핍한 자”도 “가난한 자”는 (출23:6)뜻을 가진 말로서 하반절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와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이 억울함을 당하는 성도를 가리켜 부르는 명사이니, 결단코 잊어버림을 당하여 영영히 실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곤고한 일을 너무 많이 당하기 때문에 궁핍한 자 혹은 가난한 자로 부른 것입니다.
사람에게 입은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에게 입은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려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같은 그러한 일은 있지 않으십니다.
벌할 자도 상줄 자도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때 되면 낱낱이 갚아 주십니다.
2) 기도(19~20절)
19절은 “인생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하소서”함이고,
20절은 “저희로 인생 뿐임을 알게 하소서”합니다.
(1) 인생으로 승리하지 못하게 하소서(19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말은 8:4의 “사람”이란 말과 똑같은 말인데 인간의 연약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인간이 아무리 간악하고 포학하게 굴어 보았자 하나님 앞에서 벌레와 구더기 같은 존재요, 초목에 나을 것이 없는 존재이니, 질그릇이나, 하루 아침 안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자입니다. 옛 사람들도 초로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생이 어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들이 그것을 모르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하고 강포한 자라고 하여도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이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하여야 하고 항상 영원 천국을 바라보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의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저희로 인생뿐임을 알게 하소서(20절)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라고하였습니다.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가 원어에서는 “두려움을 저희에게 두시며”로 되어 있습니다.
곧 저희 안에 두려움을 넣으시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이 잠깐 지나가 버리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저희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항상 두려워하여 거역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고전1:25절 말씀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는데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 어찌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