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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8월의 독립운동가]
이만도 [1842.1.28 ~ 1910.10.10]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 서훈년도 : 1962
공적개요
명성황후 시해 후 거의, 의병대장으로 안동지방에서 활동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5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경술국치에 이르자 병찬에 항거하여 절명 순국
8월의 독립운동가 이만도(李晩燾)선생
(1842. 1. 28 ~ 1910. 10. 10)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안동지방에서 활동하였으며,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에 이르자 병탄에 항거하여 절명 순국한 이만도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전형적으로 계승한 곳으로 조선 후기 걸출한 인재들이 다수 배출된 곳이다. 선생은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청직(淸職)을 지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고,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같은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중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서상철이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선생은 조상의 묘역인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오자, 안동지역에서는 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하고, 의병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한해 앞서 거병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서둘러 거병한 선생은 대장을 맡아 선성의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의진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의진이 패하자 선성의진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대장에서 물러나 의진을 정비하였고, 집안 후손인 이중린, 이인화, 이중언 등이 이를 이어 3월 태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아들 이중업을 통해‘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고 이를 통해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일제의 정책을 단호하게 거절한 광무황제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선생은 상소를 올린 뒤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했다. 나라를 잃고 군왕이 치욕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선생은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10월 10일(음 9.8)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했다. 선생의 순국은 후손들에게 거대한 규범이자 지켜 갈 길이었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아들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하고, 아버지를 여읜 뒤 1910년대에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였다.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쓸어낸다는‘거의소청(擧義掃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는‘거지수구(去之守舊), 부해거수(浮海去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치명수지(致命遂志), 치명자정(致命自靖)’. 선생은 순서대로 위의 세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다음으로는 은거에 들어갔고, 끝내는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통해 국권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생의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으며, 선생은 쓰러져 가는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거룩한 순국을 택한 향산 이만도
김희곤(안동대 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1. 선비의 길
2. 장원 급제하고 나선 벼슬길
3. 예안 선성의병 대장이 되다
4. 을사5적의 목을 베소서
5. 일제 통치 부정하며 단식 끝에 순국하다
6. 항일투쟁을 이어간 후손들
7. 나라사랑, 우리 차례다
1. 선비의 길
우리 역사 5,000년에 가장 우리다운 것은 선비의 삶이다. 선비는 누구나 추구하는 인간상人間像으로 글과 도덕을 존중하고 의리와 범절을 세워 살아가는 모든 이를 말한다. 이는 조동걸 교수가 쓴 하계下溪마을독립운동기적비獨立運動紀蹟碑의 첫 구절이다. 하계마을은 바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의 고향이다. 선비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글과 도덕, 의리와 범절이다. 이러한 덕목이 겨레가 나라를 잃어가고 또 잃었을 때 어떠한 대응으로 나타났는지 따져보면 선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온 나라에 선비가 없는 곳이 어디에 있었을까. 그렇지만 모든 곳에서 모두 역사적 책무를 다하고 나선 것은 아니지 않았나. 선비라고 모두 선비는 아니라는 말이다. 글만을 사랑하고 의리와 범절을 저버리면 친일파처럼 살아간 사람이 되기 마련이고, 글을 버리고 의리와 범절만 고수하면 고루하게 될 뿐이었다.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 조동걸 교수가 글을 짓고 2004년에 세웠다.
하계마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이만도는 선비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참선비였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쓸어낸다.(거의소청擧義掃淸) 둘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거지수구去之守舊, 부해거수浮海去守) 셋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치명수지致命遂志, 치명자정致命自靖)
이만도는 순서대로 세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다음으로는 은거에 들어갔고, 끝내는 목숨을 끊었다. 결코 쉬운 일도 아니며 흔한 경우도 아니다. 그의 삶을 좇아가며 뜻을 새겨보자.
2. 장원 급제하고 나선 벼슬길
향산 이만도의 가계도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이다. 1842년(헌종 8)에 태어났다. 본래 조상의 고향은 퇴계 묘소를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이지만, 조부가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난곡으로 은거할 때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퇴계의 11세손이며, 수찬修撰을 지낸 만화공晩花公 이세사李世師의 현손이다. 증조부는 참봉 구서龜書, 조부는 응교를 지낸 가순家淳, 부친은 대사성을 지낸 휘준彙濬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 숙부 휘철彙澈의 양자가 되었다. 그가 선대 고향 하계마을로 돌아온 때는 만 14세였다. 이듬해 1856년 생부가 과거에 급제하자, 자신도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각오를 굳혔다. 그는 내가 벼슬하지 못하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여 왼쪽 엄지손가락을 10년 동안 굽혔다가 급제 후에야 비로소 폈다는 이야기를 뒷날 밝혔으니, 어느 만큼이나 과거공부에 매달렸는지 알만하다. 그 사이에 만 18세 되던 1859년 결혼하였다. 부인은 닭실마을(봉화 유곡酉谷) 권승하權承夏의 딸이다. 처숙부 권연하權璉夏는 이름난 학자요, 부친과 가까웠다. 그 인연으로 이만도는 1866년 장원급제로 관직에 나갈 때까지 처가를 드나들며 두 어른 아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만도는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다. 만 24세가 되던 1866년, 곧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그 해,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정시庭試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것이다. 1866년은 마침 부친이 대사성에 올라, 경사스러운 일이 겹친 때이기도 했다. 이만도는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ㆍ사간원 정언ㆍ홍문관 부수찬이 되자마자 경연에 들어가 진강하였다. 그는 홍문관 부교리에 이어, 사헌부 장령과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사간 등을 거쳤다. 대개 청직淸職을 지낸 셈이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그는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였다. 그 바람에 이만도는 파직당하기도 했다.
얼마 뒤 복직된 그는 사헌부 집의, 성균관 사성,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다. 이어서 그가 양산군수를 지낼 때는 세금 징수가 너그럽고 물난리를 만나 어렵던 백성을 도와 칭송이 높았다. 다시 상경한 그는 홍문관 수찬修撰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로 공조참의에 올랐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4월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달 뒤인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두 번이나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벼슬길을 아예 마음속에서 도려내 버렸다. 고향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백동서당 계첩契帖에 적힌 제자가 209명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문도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예안 선성의병 대장이 되다
이만도가 처음 의병에 관심을 둔 때는 1894년 갑오년이다. 그 해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왕권을 농락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틀 뒤에 일본군은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나라 안이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듯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7월 14일 이만도는 안동에 가까운 문중을 둔 서상철徐相轍이 제천에서 보내온 통문을 받았다. 그 요지는 7월 25일에 안동부의 향교 명륜당에 모여 적의 무리를 토벌하는 날짜를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7월 20일 서상철이 직접 예안향교로 찾아와 이만도에게 거병하자고 말하자, 그는 주저하였다. 서상철의 주장이 옳지만 왕의 공식 명령이 없이 군사를 모집하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서상철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고,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했다가 패하여 충청도 청풍으로 빠져나갔다. 태봉전투가 벌어지던 9월, 이만도 앞에 왕의 밀령이 전달되었다. 가까운 신하들을 삼남지방에 보내 의병 봉기를 촉구하던 소모관이 그를 찾은 것이다. 이용호李容鎬가 바로 그 인물이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상의 묘역인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소식이 그를 불러냈다. 1895년 을미사변이 그것이고, 게다가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왔다. 단발령이 예안에 도착한 날이 1896년 1월 11일(음 1895.11.27)이다. 단발령이 시행된 지 2주일쯤 지난 뒤였다. 단발령이 삼남지방에서 시행에 들어간 때가 대개 명령이 내린 뒤 열흘 남짓 지난 무렵이다. 따라서 단발령 소식과 시행이 거의 같은 때 시작된 것이다. 안동과 예안 일대에서 나온 통문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하루 이틀 사이이긴 하지만, 예안통문이 앞섰다. 안동문화권 전기의병 관련 통문 1. 禮安통문 : 1895년 11월 29일(양 1896.1.13) 2. 三溪통문 : 1895년 12월 1일(양 1896.1.15) 3. 靑鏡통문 : 1895년 12월 1일(양 1896.1.15) 4. 靑鏡사통 : 1895년 12월 1일(양 1896.1.15) 5. 虎溪통문 : 1895년 12월 2일(양 1896.1.16) 6. 安東의병대장격문 : 1895년 12월 7일(양 1896.1.21)
예안통문에는 모두 223명이 서명했다. 그런데 서명자 전체 명단은 알려지지 않고, 다만 주역 7명 명단만 알려진다. 예안 유생 이만응李晩鷹ㆍ금봉렬琴鳳烈(혹은 琴鳳述)ㆍ목사 이만윤李晩胤ㆍ진사 김수현金壽鉉ㆍ교리 이만효李晩孝ㆍ승지 이중두李中斗ㆍ유생 이중봉李中鳳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서 이만도의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체 명단 223명 가운데 그의 이름은 분명히 들어 있을 것이다. 인물의 구성이나 위상으로 봐서도 그렇다. 7명 가운데 금봉렬과 김수현을 제외하면 모두 진성이씨다. 이만응은 상계파로서 영남만인소 소수였던 이만손李晩孫의 생가 동생이고, 이만효도 상계출신이다. 이만윤은 의인출신, 이중두는 상계출신이다. 이중봉은 온혜마을 안쪽에 있던 용계출신으로, 1차 선성의진 부장이자 2차 선성의진의 대장이 된 이중린李中麟의 동생이다.
향산고택의 과거(도산면 하계, 위)와 현재(안동시 안막동, 아래)
이만도는 곧 의병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머뭇거릴 수도 없을 만큼 다급했다. 만 54세가 되던 때였다. 동생 이만규도, 아들 이중업도 함께 나섰다. 선성의진이 결성된 날은 1896년 1월 23일(음 1895.12.9)이라 판단된다. 이는 안동의진이 결성된 지 엿새 지난 시점으로, 주변 지역에 비하면 매우 빠른 거병이었다. 이는 그가 한 해 앞서 거병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헤아리게 만든다. 이만도가 대장을 맡고, 온혜출신 이중린과 이인화가 각각 부장과 유격장을 맡았다. 곧 선성의진은 진성이씨가 핵심을 이룬 의병부대였다. 하지만 선성의진을 구성하자마자, 안동의진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큰 충격을 주었다. 안동부에서 들려온 사연은 안동의진이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안동은 예안에 비해 큰 곳이고, 의병의 규모도 대단했다. 그런 안동의진이 패했다는 소식은 선성의진 병사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이만도는 1월 31일(음 12.17) 병사들을 점검하여 병사들의 동요를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병사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결성 9일 만인 2월 1일(음 12.18), 선성의진이 사실상 흩어지고 말았다. 이만도는 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집안 후손인 이중린ㆍ이인화ㆍ이중언ㆍ이빈호ㆍ이중엽ㆍ이찬화 등이 맡아 나갔다. 3월에 펼쳐진 태봉전투는 바로 이들의 작품이었다.
4. 을사5적의 목을 베소서
1905년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조약)가 있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상소를 올렸다. 다리에 종기가 생겨 움직이기 힘든 터라, 그는 아들 중업中業을 시켜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먼저 5적을 목 베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는 종사가 위태로운데 몸이 폐인이 되어 움직일 수 없어 피맺히는 울분을 봉서封書에 담아 올린다고 적었다. 이어서 지금의 화가 오랜 평화로 말미암아 풍속이 약해져 일본에게 개항을 받아들인 탓도 있지만, 5적이 일본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을미년 변란에 대한 복수의 계책은 제대로 세우지도 않고 5적이 5조의 계약을 맺어 임금을 협박하고 조약을 체결케 했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상소문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외교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나라가 없어질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는 외부外部를 동경東京으로 옮긴다는 한 가지 조항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천하에서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고, 토지와 인민과 재부財富가 다 저들의 곁다리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통감부 설치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이만도는 통감부가 설치됨에 따라 황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만국공법에 물어서라도 협박에서 나온 조약을 폐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할 사邪로 규정하고, 금수로 여겼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만국공법에 기대서라도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절박하던 심정도 느끼게 된다.
5. 일제 통치 부정하며 단식 끝에 순국하다
상소를 올린 뒤 이만도는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갔다. 모암某岩ㆍ명동明洞ㆍ고림高林 등을 거쳐 궁벽한 곳에 자리 잡고 바깥사람과 만나지 않았다. 남루한 옷으로 지내며 산나물로 목숨을 이어나갔다.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었다. 특히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재산에 자주 머물며 그 앞에 엎드려 죄인으로서 근신 생활을 하였다. 1907년에는 융희황제 즉위에 가선대부(종2품), 1910년 자헌대부(정2품)를 내렸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이만도에게 이 소식을 알려준 이는 가까이 지내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이다. 그 날이 9월 4일(음 8.1)이니, 국치를 당한 지 엿새 뒤였다. 고림이라는 깊은 골짜기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으니, 이 무렵에는 온 나라에 다 알려졌을 것이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비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날마다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끊는 그 순간까지 매일 곁에서 기록한 청구일기靑邱日記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청구일기의 표지와 1910년 8월 14일조. 향산의 단식 순국과정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9월 17일(음 8.14) 음식을 끊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을미년 변란에 죽지 못하고, 다시 을사년 5조약 체결에도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하게 연명한 것에는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느냐? 변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지체하고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 지금 뜻이 정해졌으니, 명동에 가서 생을 다할 참이다. 다시는 여기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그는 죄인이므로 궁벽한 산과 객지가 본디 죽을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집 주손인 이강호李綱鎬가 '이곳 또한 궁벽한 객지이니 댁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 머무르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받아들여 청구동 율리栗里 만화공晩花公 종가를 마지막 거처로 삼기로 작정하였다. 9월 18일(음 8.15) 아침 식사를 거절했다. 강호가 울며 아뢰었지만,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또 남에게 알리지 못하게 일렀다. 하지만 강호는 이만도의 아들 중업에게는 알려야 했다. 이튿날 그 소식이 중업에게 알려졌다. 20일(음 8.17) 동생 만규가 도착하여 통곡했다. 형님을 따라 죽겠다는 동생 말에, 그는 '집안 내력을 잇고 가문 일으키는 것이 자네 책임이다.'라고 꾸짖었다. 동생과 막 도착한 아들 중업, 집안사람들이 모두 굶기 시작했다. 어른의 단식을 막아보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자 이만도는 모두에게 음식 먹기를 여러 번 권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바로 자결하려고 나섰다. 이에 모두들 엎드려 사죄하고, 눈물로 음식을 먹었다.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방문자들이 늘어났다. 손자와 외손자가 도착하고, 가까이 지내던 동학들이 왔다. 큰 손자 동흠棟欽에게 장부가 뜻을 세움에 쇠기둥 같아야 한다고 일렀다. 그러면서 한 가지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 14세 되던 1856년 부친 휘준이 과거에 급제하던 날, 다짐한 이야기다.
나는 오직 입신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선조를 따를 수 없을까봐 두려워, 왼쪽 엄지손가락을 굽히고 마음으로 '나에게 대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이 손가락은 다시는 펴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그 뒤 1866년에 이르러 선조의 음덕으로 문과에 급제하고서야 비로소 손가락을 펴게 되었다.
10년 동안 엄지손가락을 펴지 않았던 그였다. 얼마나 대단한 신념이며 행동인가! 그러면서 그는 손자에게 자신이 뜻을 세웠던 일을 본받아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사랑하는 맏손자에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9월 23일(음 8.20) 며느리가 와서 뵙고 눈물로 인사드렸다. 의성김씨 내앞마을 백하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인 김락金洛이다. 그는 거듭 음식을 권하는 며느리에게 그저 물 한 잔을 가져오라 하여 마셨다. 이것은 며느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서, 뒷날 '물 한 잔도 올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다. 김순흠이 며느리 마음을 헤아려 음식 한 입 먹는 시늉을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날 그는 장례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치르라고 여러 번 일렀다. 9월 24일(음 8.21) 손자며느리 최씨에게도 물 한 잔 가져오라고 명하여 마시고, 살아갈 길을 가르쳤다. 9월 25일, 단식 9일째 되던 날, 군수 이경선李敬善, 일본인 아타 나카이치[阿多中一], 순사 권대균權大均이 와서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만도는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답했다. 순사 권대균이 나서서 단식을 그만두라고 말하자, 그는 엄하게 꾸짖어 내쳤다. 일본인이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벗은 뒤 엎드려 음식 들기를 권하자, '나라가 이미 망한데다가 몸 또한 병들어 이제 죽음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먹고 안 먹는 것이 외국인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되물어 내쳤다. 9월 26일(음 8.23) 금용하와 김도현이 인사드렸다. 이날 집안 손자인 국호에게 구학, 곧 옛 학문인 성리학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근년에 마을의 수재들이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작은 근심꺼리가 아니다. 새 학문을 배우는 중이라고 해도 옛 학문의 영향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너는 그들을 잘 이끌어 집안에 내려오는 분위기를 적막하게 하지 말거라.
이는 1907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가 들어선 뒤 팽창하는 구국계몽운동을 염두에 둔 말이다. 계몽교육과 사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장면이다. 이 날은 손님이 많아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백 명이 넘는 방문객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날 뒤로는 늘 방문객으로 넘쳐 났다. 그도 이제 기력이 떨어졌다. 사람마다 맞아 인사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9월 27일(음 8.24) 그는 새로운 사실을 주문했다. 자신이 죽은 뒤 '순국'이란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대락과 권상익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또 이틀 뒤에는 '선생'이란 말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만약 제문에 그러한 말이 들어 있으면 삭제하고 읽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자신은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나온 당부였다. 그는 또 한 가지, 초하루 보름에 올리는 삭망전朔望奠을 올리지 말라고 말했다. 종묘에서도 삭망제를 폐한 지 이미 오래인데, 자신에게 그것을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10월 3일(음 9.1) 단식한 지 17일이나 되었지만, 정신과 기색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때때로 냉수를 마셨더니, 물기가 장부를 적셔 죽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면서, 물 마시는 것마저 그만 두었다. 이튿날, 제문을 받으면 꼭 점검하여 '선생' 두 글자를 고치라고 거듭 일렀다. 요즘 부르는 호칭 가지고 싸움하는 인물들에게는 커다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0월 7일(음 9.5)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위협했다. 예안주재소 일본인 경찰 한 사람, 수비병과 순검 각각 3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니, 지금 정신이 없다면 모시는 사람들이 왜 음식을 올리지 않는가.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나섰다. 이 무렵 이만도는 며칠 전부터 기운과 호흡이 미약하고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의 협박 소리에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떤 놈이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너는 어떤 놈이냐?
10월 8일(음 9.6) 그는 이제 기력이 다했다. 말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10월 10일(음 9.8)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단식 24일째 되던 날, 장렬하게 순국한 것이다.
향산의 순국 현장에 조성해 놓은 향산공원
향산선생 순국유허비. 앞면의 제자題字는 백범 김구의 글씨이고, 뒷면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썼다.
이만도는 전통적인 의리를 무겁게 여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군왕에 대한 의리 지키기였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국가와 군왕의 위기였고, 따라서 가장 높은 덕목이 곧 군왕을 지키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의병을 일으킨 것이나, 나라가 무너짐에 자정순국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유소遺疏를 통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 세 가지를 밝혔다. 30년 전부터 벌어진 사태를 목숨 걸고 막지 못한 것. 을사년에 신하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경술국치를 막지 못한 것이 그 세 가지다. 이것은 군왕을 지키지 못한 이유들이자,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였다. 이는 의리 지키기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유학적 도리가 갖는 효용성을 절대적으로 믿은 데서 나왔다. 이를 주자학 근본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학이 절대적 진리를 갖춘 사상체제임을 확신하고, 그 절대적 진리가 자연세계에 속해 인간사회에도 유용하다고 보았다. 이를 문화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도덕적 덕목으로 바꾸어 구현하면 사회적인 안녕과 질서가 보장된다. 이를 굳게 믿은 그였다. 그런데 일제 침략 때문에 규범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 마당에 그가 택할 마지막 길이 바로 순국이었다. 단순히 자결(suicide)이 아니라 순교(martyrdom)의 뜻까지 담겨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항일투쟁을 이어간 후손들
이만도의 순국은 후손들에게 등대와 같았다. 거대한 규범이요, 지켜 갈 길이다. 그들이 걸어간 걸음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아들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전하고, 아버지를 여읜 뒤 1910년대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4년 안동과 봉화 장날에 붙였다는 당교격문唐橋檄文은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그는 파리장서를 만들어낸 첫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비롯하여 김창숙ㆍ김정호ㆍ성태영ㆍ류준근 등이 바로 그 주역이다. 그는 또 강원도를 비롯한 경북지역을 맡아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특히 1921년 중국 쑨원[孫文]과 우패이푸[吳佩孚]에게 독립청원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출발 직전이던 1921년 6월 갑자기 세상을 떠남에 따라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들 중업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항일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
이만도 후손 가계도. ※ 회색은 독립유공자
며느리 김락의 항일투쟁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어른의 순국, 남편의 항일투쟁, 게다가 두 아들과 두 사위의 독립운동을 지켜본 안주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예안 3ㆍ1독립만세에 앞장섰다. 젊은 날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온 그가, 이제 시위물결 앞을 걸어 간 것이다. 그러다가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두 눈을 모두 잃었다. 이 장면은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현 경북지방경찰청에 해당)가 고등계 형사를 위한 지침서로 제작한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서 확인된다.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김락 필자 주)는 대정 8년(1919) 소요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 받은 결과 실명하였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소화 4년(1929) 2월에 사망했다. 그래서 밤낮 적개심을 버릴 수 없다고 아들 이동흠이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정황이므로 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만도가 단식하면서 손자의 손을 잡고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나? 철주, 곧 쇠기둥 같은 신념이었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손자들이니 그 저항은 결코 꺾일 리가 없었다.
고등경찰요사, 중간에 이중업의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두 손자는 1910년대에 20대 청년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독립운동 명가 인물답게 투쟁의 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첫 무대가 1915년 결성된 광복회光復會였다.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이 피신해오자, 그를 숨겨준 사람도 이들 형제였다. 1918년 맏손자 동흠이 경찰에 붙잡히는 이유도 바로 광복회 군자금 모집 때문이었다. 둘째 손자 종흠은 제2차 유림단의거에 기여했다. 1925년 김창숙이 북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 위해 자금을 모으러 국내로 몰래 들어왔다. 여기에 맞추어 자금을 모집하는 데 둘째 손자가 나섰던 것이다. 이듬해 초까지 활약하던 김창숙이 중국으로 간 뒤, 일경에 탐지되는 바람에 그는 곤욕을 치렀다. 두 손녀사위도 그랬다. 첫째 손녀사위는 금계마을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김용환金龍煥이다. 그는 만주에 건설된 독립군 기지에 자금을 공급한 의용단의 서기였다. 비밀리에 돈을 만드는 방법이 도박을 핑계 삼아 집의 재산을 처분한 것이다. 그러는 바람에 종가 재산을 거덜냈다. 남들은 파락호라 웃었지만, 실제로는 서로군정서에 군자금을 공급한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그도 경찰에 붙들려 옥고를 치렀다.
이만도와 그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인 김락의 삶을 그려낸 뮤지컬
김락의 생가인 백하구려(안동 임하면 천전리)
둘째 손녀사위 류동저柳東著도 사회운동에 나섰다. 진사 류연박의 아들이니,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증손자요, 세산洗山 류지호柳止鎬의 손자이다. 그는 주로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사회운동을 벌였다. 세대가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있다. 이만도가 죽음을 택한 청구동 율리의 이강호 가족이다. 이강호는 이만도의 고조부인 이세사李世師의 주손이고, 이만도에게는 큰집 손자가 된다. 이만도가 증조부 묘역에서 단식을 시작하자, 강호는 눈물로 권해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그 뒤 운명하는 날까지 수발을 들며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일은 이강호의 몫이었고, 가족들에게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충격도 적지 않았다. 김대락과 이상룡이 만주로 망명하자, 이들 가족도 망명길에 올랐다. 김동삼과 동지로서 함께 망명하고 만주에서 딸 이해동을 김동삼의 맏며느리로 보낸 이원일은 바로 이강호의 아들이다.
7. 나라사랑, 우리 차례다
이만도의 죽음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라가 무너진 뒤, 그 자신도 책임을 느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앞장서서 겨레를 짓밟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인물이 즐비한 마당에, 그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마음을 다졌다. 이것은 나라의 체면이요 겨레의 자존심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오랑캐 나라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자, 한 임금의 신하임을 다짐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의로움을 택하고, 그 뜻을 하나씩 가르치면서 갔다. 그 교훈은 큰 울림으로 남기 마련이다. 우리가 다시 그를 찾는 이유는 이 시대를 열어갈 교훈을 되새기는 데 있다. 조상을 자랑하자는 것도 아니고, 지역 사람을 내세워 어깨를 으쓱거리자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한 가지 이유는 이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슬기를 배우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데 있다. 어느 시대나 과제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역사적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시대의 과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요, 다른 하나는 심각한 편 가르기다.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문중 이기주의, 계급 이기주의 등 너무나 다양하다. 이기주의는 의리와 범절이 없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염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조상 자랑하다가 마치 자기가 그 조상인양 으스댄다. 편 가르기도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 확인은 하려 들지도 않고, 누가 주장했느냐만 가지고 편이 갈린다. 이를 고치자면 통합을 이끌어낼 포용력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고 기리는 이유는 바로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다. 시대정신을 갖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다. 그래서 '나라사랑은 우리 차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