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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齊莊公) 제위기간 기원전 794 - 731 ...춘추시대 시작
연산 37권, 6년(1500 경신/명홍치(弘治) 13년) 3월 23일(정축) 1번째기사
정원에 율시를 지어 올리게 명하다
전교하기를,
“내가 《춘추(春秋)》를 보니, ‘부인 강씨(姜氏)가 거(莒)땅에 갔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장공(莊公)이 그 어머니를 막지 못하였다’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만일 순종하였다면 불의가 되고, 거역하였다면 불효가 된다고 여겼으니, 정원에서 이 뜻으로 율시(律詩) 두 수를 지어 들이라”하였다.
○丁丑/傳曰: “予覽《春秋》有 ‘夫人姜氏如莒。’ 其《傳》曰: ‘莊公不能防閑其母。’ 予意以爲, 若順之則爲不義, 逆之則爲不孝也。 政院以此意, 製律詩二首以進。”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명만력(萬曆)21년) 5월 20일(계유) 1번째기사
삼경을 회복한데 대해 올린 사은표
상은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백관은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서 객사(客舍)로 행차하여 친히 사은표(謝恩表)를 올리었는데, 바로 삼경(三京)을 회복한 일 때문이었다.
상사(上使)는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고 부사(副使)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유근(柳根)이었다.
상은 즉위한 이래로 대국(大國)을 받듦에 매우 경건히 하여 공물(貢物)을 진상할 때마다 반드시 정하게 가려서 봉상(封上)하였으며 간절한 정성이 시종여일하였다.
사은표는 다음과 같다.
“경역(疆域)을 잘못 수호하여 왜적의 침략을 당하는 비운을 만났는데 우러러 천자(天子)의 위령(威靈)을 힘입어서 특별히 나라를 되찾는 경사를 보게 되었으니, 이미 백골이 되었다가 다시 살이 붙었고 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와서 소생시켜 준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당직(當職)은 선조의 유기(遺基)를 이어 받아 외람되이 번병의 중임을 맡았습니다. 해와 달처럼 비추어 주니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같은 정성이 항상 간절하고 성교(聲敎)가 동방에 젖어오니 바다를 흔드는 고래[鯨鯢]1748)의 횡포가 오랫동안 잠잠했습니다.
따라서 저 하찮은 무리가 감히 으르렁거리며 쳐들어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애통하게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다행히도 부모가 매우 가까이 계셨습니다. 매우 위태로워 사방 어느 곳에도 돌아갈 데가 없던 차에 높고 높은 곳에서 만리 밖을 환히 꿰뚫어 보시고는 난리를 구휼하는 두터운 은택을 내려주니, 이는 삼가 복종하는 작은 정성을 살려주신 소치였습니다.
찬란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충효의 의리를 더욱 장려하시고, 수레를 연하여 군량을 수송해서 다시 경계(庚癸)의 근심1749)을 구제해 주었습니다.
문무(文武)대신을 보내시어 마음을 다하게 하시고 남북의 정예병을 거느려 용맹을 떨치게 하였습니다. 급히 구제하심은 불을 끄듯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듯 하였고, 적을 꺾음은 썩은 가지를 꺾듯이 쉽게 하였습니다.
순식간에 평양이 탕평되고 곧바로 서울이 평정되어 의관이 인개(鱗介)가 되는 것을 면하였으니 사녀(士女)들은 앞장서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천병(天兵)을 환영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이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신하이므로 한결같이 사랑하시었고, 천벌(天罰)을 삼가 행하시니 군은 출전에 만전을 기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시 옛 터전에서 살게되니 인력(人力)으로야 어찌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널리 베푸시고 수많은 사람을 구제하시어 멸망된 나라를 부흥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물에 미치는 성은을 펴시니 어찌 필부(匹夫)인들 살 곳을 얻지못함이 있겠습니까? 팔황(八荒)을 포용하는 넓은 도량을 펴시니 팔만(八蠻)이 모두 복종하고 있습니다. 신을 도탄에서 구제하시어 임석(衽席)의 위에 올려놓으니 당직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지않아서 잠시라도 제(齊)나라의 70성(城)을 수복1750)하여 다시 나라를 보존하게 되었으니 성천자(聖天子)의 무궁한 장수를 축원하고 거듭 황제 폐하를 위하여 힘껏 만세를 외칩니다. 당직은 황제 폐하를 우러르고 지극히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표문을 올려 사은합니다.”
註1748]고래[鯨鯢]:왜적을 가리킴.註1749]경계(庚癸)의 근심:군량보급의 어려움을 말함. 경계는 급수를 요청할 때에 쓰는 은어(隱語).《춘추좌전(春秋左傳)》애공(哀公)13년에 “오(吳)나라 신숙의(申叔儀)가 공손유산씨(公孫有山氏)에게 군량을 요청하니 공손유산씨가 ‘당신이 수산(首山)에 올라가 경계(庚癸)라고 소리치면 내가 허락하겠다’했다”하였음. 이는 군중에서는 양식을 빼돌릴 수가 없으므로 은어를 쓴 것이라 함. 경(庚)은 곡식의 성숙을 담당하는 서방(西方:가을)을 가리키며, 계(癸)는 물에 해당하는 북방(北方)을 가리키기 때문에 은어로 쓴 것임.註1750]제(齊)나라의 70성(城)을 수복:전국(戰國)시대인 기원전 284년, 제나라가 연(燕)나라 장군 악의(樂毅)의 공격을 받고 70개의 성읍(城邑)이 모두 함락되었으며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보존되었는데, 장군 전단(田單)의 뛰어난 전략으로 잃었던 70개의 성을 다시 수복하였음. 《사기(史記)》권82 전단열전(田單列傳).
○癸酉/上御袞龍袍, 百官皆吉服, 幸客舍, 親傳謝恩表, 卽三京恢復事也。 上使寅城府院君鄭澈, 副使漢城判尹柳根。 上自卽位以來, 事大甚謹, 凡進貢物, 必精擇以封, 眷眷之誠, 終始如一。 表曰:
失守疆場, 方罹致寇之凶, 仰仗威靈, 特紆復國之慶, 旣骨而肉, 徯來其蘇。 伏念臣承祖先之遺基, 忝藩翰之重寄。 日月下照, 恒切葵藿之傾陽, 聲敎東漸, 久息鯨鯢之掀海。 何圖蠢玆小醜, 乃敢狺然長驅。 痛廟社之爲墟, 幸父母之孔邇。 殆哉岌岌, 蹙四方而安歸, 毋曰高高, 洞萬里之明見, 垂恤災之厚澤, 察服勤之微誠。 宵漢降絲綸, 益礪忠孝之義, 飛輓給餽餉, 更寬庚癸之憂。 遣文武大臣以竱心, 統南北銳卒而賈勇。 急於救焚拯溺, 易如拉朽摧枯。 纔箕壤之蕩平, 奄京邑之底定, 衣冠得免於鱗介, 士女恐後於簞壼。 共惟帝臣仁洽一視, 恭行天罰, 師出萬全。 民生復奠厥居, 人力豈至於此? 玆蓋伏遇皇帝陞下, 博施濟衆, 興滅固存。 布及物之恩, 疇匹夫之不獲。 廓包荒之量, 與八蠻而咸賓。 拔臣於水火之中, 寘臣於袵席之上, 臣敢不思酧毫髮。 忍死須臾, 收齊七十城, 庶保再造, 祝堯崗陵壽, 倍殫三呼? 臣無任望聖激切屛營之至。 謹奉表稱謝。
광해 66권, 5년(1613 계축/명만력(萬曆)41년) 5월 22일(기묘) 18번째기사
영창대군과 모후의 일, 어몽렴의 폐단등에 대한 진사 이위경등의 상소문
진사 이위경(李偉卿)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신들이 역적을 토죄하는 일로 이달 19일 태학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다사(多士)가 공동으로 의논하여 이위경을 소두(疏頭)로 삼고 이상항(李尙恒)·이분(李衯)을 소색장(疎色掌)으로 삼았으며, 장의(掌議)는 신경(辛暻)·성하연(成夏衍)이 일찍이 이 직임을 맡았었기 때문에 그대로 소 올리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소에 대한 의논을 이미 정했을 때 생원 채겸길(蔡謙吉)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지난 무신년에 이신(李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감히 성균관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 군상을 지목하며 크게 부도(不道)한 발언을 했었는데 역적 이경준(李耕俊)의 격문 가운데 나오는 한 조목은 실로 이를 말미암아 구실로 삼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역적을 도와 준 무리는 오늘날 먼저 제거해 버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뒤에야 역적을 토죄하는 큰 의리를 그런 대로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의논도 모두 동일하였으므로 즉시 삭적(削籍)시켰는데 중론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신들이 이어 소청(疏廳)에서 치재(致齋)하고 소초(疏草)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대략에 ‘역모를 꾀하는 것은 천하의 대죄(大罪)요 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천하의 대법(大法)입니다. 이런 죄가 있는데도 그 법을 쓰지않는다면 군신의 대의가 이로부터 없어지고 천지의 떳떳한 법이 어지러워지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김제남이 이의(李㼁)를 빙자하여 역모를 꾀한 일이야말로 옛날에 있지 않았던 변고인데 다행히도 조종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덕분에 적도가 자수하여 흉역을 꾸민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대법으로 대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상형(常刑)을 거행하지 않고 있으므로 인심이 더욱 답답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흉악한 역적들의 숨이 오래도록 붙어 있게 해주고 아직도 그 요망한 육신에 주륙(誅戮)을 가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성상께서 인애(仁愛)하시는 면은 넉넉하게 가지고 계시는 반면 무위(武威)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대신과 삼사가 대궐에 엎드려 토죄하기를 청하고 있지만 그 성의에 또한 미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삿된 논의가 빌미가 되어 의리가 밝혀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역적을 토죄하는 일이 타당성을 잃고 옥사(獄事)를 엄히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역적 의가 비록 어린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흉도의 귀중한 이용물이 된 나머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적도의 공초에 낭자하게 나왔으니 이런 대역(大逆)의 이름을 몸에 지니게 된 이상 천지사이에 용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지친(至親)이라는 연고와 우애하는 정때문에 시일을 끌기만 한 채 차마 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公)에 속한 것이요 정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사(私)에 속한 것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한 개인의 사때문에 만세의 공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성인들의 예를 찾아보더라도 주공(周公)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고 우리 태종(太宗)은 방석(芳碩)을 죽였는데, 모두 천하와 종묘사직을 위해 계책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던 것은 사적인 은혜를 가볍게 보고 대의를 중히 여기면서 변고를 당해 제대로 권도(權道)를 발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의 장준(張浚)이 의거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는 황자(皇子) 부(旉)가 일찍이 묘유(苗劉)674)에게 옹립되었다는 이유로 제거하기를 건의한 결과 마침내 철탑(鐵塔)의 죽음이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철탑의 설은 바로 패사(稗史)의 무설(誣說)로서 나대경(羅大經)이 이미 밝혀놓았다. 당시 재상 윤효전(尹孝全)이 임금의 뜻에 아부할 목적으로 이 설을 끄집어내어 의를 죽일 공안(公案)으로 삼았는데 위경 등이 부화뇌동한 것이었다】
부는 당시 임금의 아들로서 뒷날 장성하면 저군(儲君)이 될 몸이었는데 나이도 겨우 3세밖에 안되었고 보면 역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급하게 제거했던 것은 그야말로 대의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고 왕법은 엄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의는 전하에게 있어 동기(同氣)라는 친함이 있다하더라도 의리를 보면 군신관계에 있으니 신하로서 적에게 추대된 이상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사직의 막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역적 의를 처단하고 김제남을 엄히 국문하라고 명하소서.
그리하여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왕법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군신의 대의를 밝히게 한다면 종묘 사직에 있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하였습니다.
그런데 20일 낮에 진사 어몽렴(魚夢濂)이 재방(齋房)에 돌입하여 장의(掌議) 성하연을 대놓고 배척하기를 ‘너야말로 서인 집안의 자제인데 어떻게 역적을 토죄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하였는데, 신들이 끝내 동요되지 않자 몽렴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진사 성신구(成信耉)도 첫날에 집강(執綱)을 헐뜯고 갔었습니다.
21일은 소장을 올리기로 예정된 날이었으므로 다사(多士) 수백인이 이야기를 듣고 모였는데 소장을 모두 쓴 다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장차 소를 받들어 나가려 할 즈음에 몽렴이 또 생원 경유후(慶有後)와 진사 정복형(鄭復亨)등을 이끌고 곧장 소장을 올려놓은 탁자 아래로 와서 마주 대하고 힐문하기를 ‘성하연이 장의를 맡다니 어찌하여 나가지않고 아직도 소 올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사 박자응(朴自凝)이 또 말하기를 ‘성하연의 아비 이름이 대유지방(大有志榜)에 들어있고 보면 이미 역적의 패거리라 할 것인데 어떻게 이런 자와 함께 소장을 올릴 수 있겠는가’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익명서(匿名書)는 아비와 자식 간에도 서로 전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더구나 다사가 모인 곳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제남을 피해 집을 팔고 이사까지 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고 있다’하였습니다. 이에 성하연이 말을 듣고 피해서 나갔는데, 어몽렴 등이 또 신경과 이분 등을 배척하여 자리에 있지못하게 하였습니다.
경유후가 또 위경을 매도하며 말하기를 ‘너 역시 조희일(趙希逸)의 사촌인데 네가 소두가 되어 역적을 토죄할 수 있느냐?’하고, 박자응도 말하기를 ‘네가 정인홍(鄭仁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니 사림의 정론을 이미 알고 있을텐데 어떻게 감히 이런 무리와 함께 소를 올리려 하는가?’하기에, 위경 역시 피해 나가려고 하다가 소를 올리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이상항과 함께 소를 올려놓은 탁자 앞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절하고 나가니, 그곳에 가득 모였던 다사가 서로 돌아보고 얼굴빛을 변하며 일시에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어몽렴이 그 패거리를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올라가서 스스로 소두(疏頭)가 된 뒤 그 소를 고쳐 들임으로써 장내를 소란스럽게 하여 일을 망친 죄를 면해 보려 하였습니다.
아, 소장을 올리는 일이야말로 한나라 다사의 의로운 행동인데 거꾸로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에게 저지되었으니 이는 옛날에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저 어몽렴이라는 자는 아비도 안중에 없는 자입니다.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법인데 나이가 10여세나 되었는데도 어미를 따라 아비를 버렸고 보면 윤기(倫紀)에 죄를 지은 자라 할 것입니다. 본디 황유첨(黃有詹)의 사촌 동생으로서 신요(申橈)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또 성준구(成俊耉)와 동서가 되었으니 그가 역적을 토죄하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감히 사람들을 향해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두가 되어 다사를 이끌 수 있단 말입니까? 신구는 바로 준구의 동생으로서 유영경(柳永慶)의 여얼(餘孽)인데 그가 어떻게 감히 사류(士類)의 틈에 끼어서 사론(士論)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박자응이나 경유후같은 자들이 거꾸로 이런 부류와 함께 역적을 토죄하는 일에 훼방을 놓았으니 그 마음속에 의도하는 바를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대개 유영경의 남은 패거리들이 이 소(疏)에서 영경을 화란의 우두머리로 할까 겁을 내고, 전은(全恩)을 주장한 집안의 자제들이 이 소에서 전은을 청했던 것을 죄목으로 삼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서로 이끌고 와서는 을러대며 앞으로 나와 한사코 혈전을 벌이며 꼭 저지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한 것인데, 이것도 알고 보면 의리가 어두워지고 공의(公議)가 없어진 탓으로 영경과 똑같은 수법을 구사하며 전은을 청했던 것을 옹호하려 한데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아, 모후(母后)가 안으로는 무고(巫蠱)하는 짓을 저지르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니 어미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고, 왕자가 적에게 추대되는 등 그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동기의 정도 자연히 끊어진 것입니다.
전하께서 모자(母子)와 형제 사이에서 변고를 당했으니 그야말로 온 나라 신민들이 의기를 떨치고 일어나 토죄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선비된 자가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목욕하고 토벌하는 일675)을 하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께서《춘추(春秋)》에서 으레 손(孫)이라고 쓰셨고676), 호씨(胡氏)는《 강목(綱目)》에서 장간지(張柬之)등을 죄주었으니677), 그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절실하다하겠습니다.
신들이 군부(君父)를 위해 역적을 토죄하려다가 거꾸로 이 자들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이미 봉해 두었던 소를 공안(空案)으로 두고 물러 나왔는데 생각이 있어도 진달드리지 못하고 무력하게 척사(斥邪)하지도 못한 채 감히 다사(多士)의 뜻을 가지고 때우고 기운 소를 다시 올리면서 형벌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하니,
【이 소에 참여한 자는 생원 이상항·최호(崔濩)·채겸길(蔡謙吉)·신게(申垍)·한희(韓暿)·이일형(李日馨)·우필순(禹弼舜)·이연(李衍)·남성신(南省身)·민심(閔?)·서국정(徐國楨)·이생인(李生寅)·성하연과 유학 황덕부(黃德符)·안응노(安應魯)·심지청(沈之淸)·한급(韓昅)·한오(韓晤)·윤신(尹莘)·우필해(禹弼該)등이었다. 상항은 이첨(爾瞻)의 사위요 창후(昌後)의 아들이며, 희·오·급은 찬남(纘男)의 아들이며, 최호는 정조(鄭造)의 사위이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이첨의 족속들인데, 이첨 자신이 소의 내용을 만들어 주었다. 전후에 걸친 유소(儒疏)는 모두 이첨이 붓으로 정해준 것인데 더러는 같은 패거리인 허균(許筠)과 김개(金闓)로 하여금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답하기를,
“소의 사연은 잘알았다. 내가 불행하여 또 이런 변을 만났는데 공의(公議)가 아무리 지엄하다하더라도 개인적인 정리상 차마 못할 점이 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였다.
【이때 영창(永昌)을 법대로 처단하라고 청하는 의논은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등이 또한 주도하였는데, 대신 이하도 같이 휩쓸려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했으며, 태학생 가운데 아는 것이 있는 자들은 이 논을 감당하고 싶지않아 많이들 피해 물러갔었다.
이위경등은 본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의 심복으로서 제자로 불리웠는데, 그들이 태학에 들어가 선비를 모은 뒤 소를 갖추어 올리려 하자 유희분과 박승종의 집안에서 이위경등이 이를 계기로 성균관 유생들의 공론을 주도하여 자기 패거리를 공격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어몽렴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쫓아내게 한 뒤 스스로 소를 만들어 영창 및 김제남을 죄주도록 청했던 것이었다. 이에 이위경이 또 자기네의 소가 몽렴이 논한 것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모후(母后)를 폐위시키자는 논을 내어 압도하려 한 것인데, 이로부터 삼창(三昌)의 당(黨)이 걸핏하면 서로들 배척하며 갈등을 빚곤 하였다.
그러나 이첨이 독자적으로 폐모론(廢母論)을 가지고 우세를 확립하면서 유희분과 박승종의 무리가 상대적으로 세력을 잃게되자 꽤나 사론(士論)에 빌붙으면서 자신을 합리화시켰는데 사류(士類) 중에서도 그들을 중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대체로 볼 때 국가가 붕당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된 화가 이 때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註674]묘유(苗劉):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임.註675]목욕하고 토벌하는 일:진(陳)나라 대부 성자(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가 목욕하고 조회에 나가 애공(哀公)에게 토벌하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함.《논어(論語)》 헌문(憲問).註676]성인께서《춘추(春秋)》에서 으레 손(孫)이라고 쓰셨고:노(魯)나라 임금의 어미 강씨(姜氏)가 죄를 지고 친정으로 쫓겨갈 때 분(奔)이라는 표현 대신에 손(孫)이라는 말을 쓴 것을 가리킴.《춘추(春秋)》장공(莊公)원년(元年)에 “부인이 제나라로 쫓겨갔다[夫人孫於齊]”라 하였음 註677]호씨(胡氏)는《강목(綱目)》에서 장간지(張柬之)등을 죄주었으니:당(唐)나라 장간지가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퇴위시키고 그 아들 중종(中宗)을 복위시켰는데 호안국(胡安國)이 장간지가 무후를 죽이지 않았다고 허물한 것을 말함.
○進士李偉卿等上疏曰:伏以臣等以討逆事, 本月十九日, 齊會于太學, 多士共議, 以臣李偉卿爲疏頭, 以臣李尙恒、李衯爲疏色掌, 掌議則臣辛暻、臣成夏衍曾爲是任, 而仍參疏事矣。 疏議旣定, 生員臣蔡謙吉大言曰: “往在戊申, 李莘稱名者, 敢於泮中衆會處, 指君上發大不道之語, 逆賊耕俊檄書中一款, 實由此而藉口也。 如此助逆之輩, 今日不可不先除, 然後討逆大義, 庶可擧矣。” 僉議純同, 卽爲削籍, 衆議皆以爲快。 臣等仍致齋於疏廳, 構一疏草, 其略曰: “謀逆, 天下之大罪; 討逆, 天下之大法也。 有是罪而不用其法, 則君臣大義, 自此滅絶, 而天地之常經亂矣。 臣等伏見悌男藉㼁謀逆, 實前古所未有之變, 而幸賴祖宗默佑, 賊徒自首, 兇逆之狀, 敗露無餘。 今當以大法治大罪, 而常刑不擧, 人心益鬱。 使逆喘兇息, 久假時月, 妖腰亂領, 尙免刀鋸, 此豈聖上仁愛有餘, 而威武或有所不足而然耶? 大臣、三司伏閤請討, 而誠意亦有所未孚而然耶? 邪論爲祟, 義理不明而然耶? 討逆失當, 獄體不嚴而然耶? 逆㼁雖曰童稚, 旣爲兇徒奇貨, 擁立之說。 狼籍賊招, 身負大逆之名, 難容覆載之間, 而殿下以至親之故, 友愛之情, 留時引日, 不忍加法。 所謂法者, 天下之公也; 情者, 一人之私也。 殿下烏得以一己之私, 廢萬世之公乎? 求乎古聖, 周公之誅管、蔡, 我太宗誅芳碩, 皆爲天下宗社計, 而行之不疑, 以其恩輕而義重, 處變而達權也。 且宋之張浚, 擧義反正, 以皇子 旉, 嘗爲苗、劉所擁立, 建議去之, 竟有鐵塔之斃。 【鐵塔之說, 乃稗史誣說, 羅大經已辨之矣。 時宰相尹孝全希主意, 考出此說, 以爲誅㼁公案, 偉卿等和之。】旉, 時君之子也, 他日長成, 則當爲儲君, 而年纔三歲, 則亦無知識矣。 然除之若是其急者, 誠以大義不可不明, 王法不可不嚴也。 況乎㼁於殿下, 親雖同氣, 義則君臣, 以臣爲賊所推戴, 其不可貸之也明矣。 伏願殿下上念宗社之重, 俯從群下之情, 亟命有司, 以斷逆㼁, 嚴鞫悌男, 以正典刑。 使一國臣民, 知王法之至嚴, 明君臣之大義, 則宗社幸甚。” 云云矣。 二十日午間, 進士魚夢濂突入齋房, 面斥掌議臣夏衍曰: “爾乃西家子弟, 豈能爲討逆之事乎?” 臣等終不搖動, 則夢濂自退。 進士成信耉, 亦於初日, 詆毁執綱而去。 二十一日則上章卜日也, 多士數百, 聞風而會, 疏已畢寫, 奉置卓上, 將欲陪出之際, 夢濂又率生員慶有後、進士鄭復亨等, 直至疏卓下, 交口致詰曰: “夏衍掌議, 胡不出去, 尙參疏事乎?” 進士朴自凝又言曰: “夏衍之父名, 在大有志榜, 旣是逆黨, 豈可與此輩同爲上章乎?” 臣等答曰: “匿名書父子間不可相傳, 況多士所會處乎? 避悌男而賣宅移居, 人服其先見矣。” 夏衍聞言避出, 夢濂等又斥辛暻、李衯等, 使不得在坐。 有後又罵臣偉卿曰: “爾亦趙希逸之四寸也, 爾可以爲疏頭而討逆乎?” 自凝亦曰: “爾師事鄭仁弘, 旣知林下正論, 豈敢與此輩同疏乎?” 臣偉卿亦將避出, 知疏事不成, 與臣尙恒就疏卓前, 北向拜出, 滿坐/堂多士, 相顧失色, 一時盡散。 夢濂率其黨, 陞明倫堂, 自爲疏頭, 將改其疏而入之, 欲免其濁亂壞事之罪。 嗚呼! 上章, 實一國多士之義擧, 而反爲儒名者所遏, 此前古所未有之變也。 夫夢濂無父人也。 雖孩提之童, 尙知其愛親, 年旣十餘, 從母棄父, 則爲倫紀之罪人也。 本黃有詹之四寸弟, 而及贅於申橈之家, 又與成俊耉爲同壻, 其不知討逆之義宜矣。 渠何敢向人類抗顔, 而況爲疏頭率多士乎? 信耉乃俊耉之弟也, 永慶之餘孽也, 渠何敢齒士類參士論乎? 如自凝、有後之輩, 反與此類, 作孽於討逆之擧, 其心所在, 尤未可知也。 大槪永慶餘黨, 懼此疏, 以永慶爲亂首, 全恩子弟, 畏此疏, 以全恩爲罪目, 相率而來, 按劍而前, 抵死血戰, 必欲沮抑而後已。 此不過義理晦蝕, 公議泯滅, 傳神於永慶, 護法於全恩也。 嗚呼! 母后內作巫蠱, 外應逆謀, 母道已自絶也, 王子爲賊所戴, 兇謀敗露, 同氣之情, 亦自絶也。 殿下遇母子兄弟之變, 此正擧國臣民奮義請討之不暇, 而爲士者, 居首善之地, 尙無沐浴之討乎? 聖人於《魯史》, 例以遜書, 胡氏於《綱目》, 罪張東之等, 其義至嚴且切矣。 臣等爲君父討逆, 反爲此輩作挐, 使已封之疏置諸空案而退, 有懷未達, 無力斥邪, 敢以多士之意, 更進補綴之疏, 敢俟鈇鉞之誅。【參疏者, 生員李尙恒·崔濩·蔡謙吉·申垍·韓暿·李日馨·禹弼舜·李衍·南省身·閔·徐國楨·李生寅·成夏衍、幼學黃德符·安應魯·沈之淸·韓昅·韓晤·尹莘·禹弼諧等。 尙恒, 爾瞻之壻、昌後之子, 暿、晤、昅, 纘男之子。 護, 鄭造之壻。 餘竝爾瞻族屬, 爾瞻自構疏與之。 前後儒疏, 爾瞻皆筆定, 或令同黨許筠、金闓製之。】答曰: “疏辭具悉。 不穀險釁, 又遭此變, 公議雖曰至嚴, 私情有所不忍。 爾等可退修學業, 勿爲更瀆。” 【是時, 請法永昌之論則柳、朴等亦主之, 大臣以下, 靡然不敢異, 太學生有識者, 不欲當此論, 多避去。 李偉卿等, 本仁弘爾瞻心腹人, 號爲弟子, 入太學聚士, 將具疏上之, 柳、朴家恐李偉卿等, 仍主泮論, 以攻己黨, 遂令魚夢濂等驅逐之, 而自爲疏請罪永昌及悌男矣。 偉卿又見己疏, 無以加於夢濂之論, 遂發廢母后之論以壓之, 自此三昌之黨, 動相排軋, 而爾瞻獨以廢論勝, 柳、朴之徒, 因此失勢, 頗附於士論以自飾, 士類亦有倚之以爲重者。 蓋國家朋黨濁亂之禍, 至是而極矣。】
인조 43권, 20년(1642 임오/명숭정(崇禎)15년)윤11월12일(무신) 1번째기사
이계를 변호한 이성구의 죄에 관한 부제학 김육 등의 차자문
부제학 김육, 부교리 김진(金振), 수찬 박장원(朴長遠), 부수찬 이이존(李以存)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적신(賊臣) 이계는 이미 국법에 복주되었고 연좌율을 순차적으로 거행해야 할 것인데 전영부사 이성구는 수의 가운데에 감히 그를 비호할 계책을 드러냈으니, 아, 성구는 누구를 속이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하늘을 속이는 것입니다. 군부의 원수를 잊고 감히 삼대에 걸쳐 나라를 저버린 흉역의 자식을 비호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적계가 봉성에서 청장의 심문에 응답할 당시 나라의 형세가 한 가닥 머리카락처럼 위급하여 대소 신민들이 이를 갈고 분개하였는데, 성구는 오히려 하는 말이 ‘구봉서가 그 살점을 씹어먹고 싶다고 한 것은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아, 이 무슨 말입니까?
남의 신하된 자로서 춘추의 의리를 모르면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조돈(趙盾)은 진(晋)의 정경(正卿)으로 있으면서 영공(靈公)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되 국경을 벗어나지못하고 돌아와서는 영공을 시해한 적을 토벌하지 못했는데, 동호(董狐)는 사실대로 역사에 기록하고 공자는 그대로 두고 고치지않아 신하된 자의 부정한 마음을 예방하였습니다.
만약 조돈이 조천(趙穿)을 비호하였더라면 그 죄가 어찌 악명을 받는 그 정도에 그쳤겠습니까?
최저(崔杼)1663)가 그 임금을 시해하자 공자는 이웃 나라의 대부로서 오히려 목욕재계하고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제 적이 본국에 있는데도 도리어 비호하려 한 것은 이 무슨 마음입니까? 앞에 비호하는 말이 나왔으니 뒤에는 반드시 신설(伸雪)하려는 일이 있을 것이고, 나라를 등지고 구차하게 살아남는 무리가 필시 남몰래 한쪽 구석에서 비웃으며 서로 본받아 일어날 것이니, 앞으로 국가의 걱정거리가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내라는 요청도 대신을 너그럽게 포용하시는 성상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했던 것인데 열흘이 넘게 논계하고서야 겨우 파직시키셨으니, 나라의 적을 비호한 자에게 어찌 대충 파직하는 정도의 벌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결단을 내려 왕법을 바르게 하심으로써 공론이 시행되게 하신다면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의 말이 반드시 다 그른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실정을 벗어난 논의를 하지 말라”하였다.
註1663]최저(崔杼):진항(陳恒)의 잘못임. 최저와 진항은 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대부로서 임금을 시해한 자들이나 최저는 제장공(齊莊公)때 사람이며, 본문의 고사는《논어(論語)》헌문(憲問)의 “진성자가 간공을 시해하였는데 공자가 목욕하고 입조하여 애공에게 고하기를 ‘진항이 자기의 임금을 죽였으니, 그를 토벌하소서’ 하였다”에서 나온 것이다.
○戊申/副提學金堉、副校理金振、修撰朴長遠、副修撰李以存等上箚曰:
賊臣李烓, 已伏刑章, 緣坐之律, 次第當擧, 而前領府事李聖求, 乃於收議之中, 敢生營護之計, 吁! 聖求尙誰欺, 欺天乎? 其忘君父之讐, 而救護三世負國之逆雛, 一至於此哉? 當賊烓之置對鳳城也, 國勢岌岌, 危如一髮, 大小臣民切齒腐心, 聖求乃曰: “鳳瑞之欲食其肉, 未知何意。” 噫! 此何言也? 人臣不知《春秋》之義, 則不可以事君。 昔者趙盾爲晋正卿, 亡不出境, 反不討賊, 董狐直筆書之, 孔子因而不革, 以閑臣子之邪心。 若使趙盾, 營救趙穿, 則其罪豈止於受惡而已哉? 崔杼弑其君, 孔子以隣國之大夫, 猶請沐浴之討, 賊在本國, 而反欲營護者, 此何心哉? 前有營護之言, 則後必有伸雪之擧, 負國偸生之輩, 必竊笑於一隅, 相效而起, 國家日後之患, 又豈可勝言哉? 遠竄之請, 亦體聖上優容大臣之意, 而浹旬論啓, 僅罷其職, 營護國賊, 豈略施罷職之罪哉? 伏願殿下, 亟揮乾斷, 以正王法, 使公論得行, 則不勝幸甚。
上答曰: “其言未必盡非。 爾等勿爲情外之論。”
정조 45권, 20년(1796 병진/청순치(順治) 1년) 9월 15일(정사) 3번째기사
고 충신 유임과 유혁연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다
고 충신 좌의정 유임(柳琳)과 영의정 유혁연(柳爀然)에게 시호를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유임은 금주(錦州)의 싸움에서 중국을 위하여 절개를 다 바쳤었고, 혁연은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의 추천으로 당시 중요한 모의에 참여했었는데 아직까지도 미처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시동이 또 아뢰기를,
“얼마 전에 유효걸(柳孝傑)의 서제(庶弟) 유지걸(柳智傑)이 순절한 일에 대하여 문헌을 상세히 조사해서 아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걸의 일은 증 영의정 김경서(金景瑞)가 성책안에서 쓴 소본(疎本)과 그의 가전(家傳)에 실려있습니다.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강홍립(姜弘立)이 군대를 다 데리고 투항하자 홍립의 휘하에 있던 자들은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지걸은 항복하기를 원하지 않고 백기(白旗)아래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정묘년에 홍립이 돌아와서 효걸을 보고 ‘나는 지걸의 죄인이다’하였으니, 그가 관례도 치르지않은 나이로 몸을 던져 의롭게 순절한 행적이 매우 상세하여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정려하고 추증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로 보면 비록 아주 어린 나이에 죽지않은 동기(童踦)라 할지라도 기량(杞梁)의 시신6168)은 여묘에 데려오지는 못하는 법이라서 성조(聖朝)의 은전을 베풀 곳이 없으니, 이것이 도리어 난처한 점입니다.
그 아비 증영의정 유형(柳珩)의 묘 아래에 문 하나를 세워 표시한다면 의를 일으키는데에 해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전례를 널리 조사한 후 다시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註6168]기량(杞梁)의 시신:기량은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대부(大夫). 제장공(齊莊公)4년에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그의 시체를 맞이하여 너무도 슬피우는 바람에 열흘만에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전사한 자를 말한다.《좌전(左傳)》양공(襄公) 23년.
○命故忠臣左議政柳琳、領議政柳爀然賜諡。 琳, 爲天朝, 能全節於錦州之役。 爀然, 以貞翼公李浣之薦, 與聞於當日密勿之謨, 而尙未施易名之典。 至是, 從右議政尹蓍東啓, 而蓍東又言: “向有柳孝傑庶弟智傑殉節事, 有詳考文蹟以奏之命矣。 智傑事, 載於贈領相金景瑞柵中疏本及其家傳。 深河之役, 弘立全師投降, 而隷弘立麾下者, 皆陷於其中。 智傑不願降, 而投白旗下就死。 丁卯弘立之還, 見孝傑曰: ‘我, 智傑之罪人也。’ 其年未勝冠, 捐身殉義, 蹟旣甚詳, 事多可據。 宜施旌贈之典, 而禮雖童踦之勿殤, 廬無杞梁之返櫬, 則聖朝恩典, 施之無所, 此却難處。 其父贈領相珩墓下, 設一門而旌之, 或不害爲義起。 請令禮堂, 博考已例, 更爲稟處。”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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