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길게 늘어뜨린 진홍빛 꽃잎이 봄바람에 나풀거린다. 꽃떨기가 사람 얼굴만하다. 키 7m 가까운 나무엔 빛나는 별같이 하얀 꽃이 소복하게 내려앉았다. 국화처럼 꽃잎이 자잘하고 빽빽한 꽃도 봄 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얀색과 자주색은 물론이고 주홍·꽃자주·연보라·분홍에 노랑 꽃까지, 세상에 이런 목련도 있나.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목련꽃이 작은 동산에 벙그러지고 있다. 4월 천리포수목원 목련원은 꽃들의 숨은 천국, 목련의 샹그릴라다.
지난 주말인 23일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에 후원회원들이 모여들었다. 이 바닷가 수목원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며 한 해 몇 만원에서 몇 백만원씩을 보태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회원의 날'은 목련꽃 만발하는 4월 중순에 맞춘다. 올해는 추위 탓에 꽃이 더뎌 날을 한 주(週)쯤 늦게 잡고도 아직 망울만 맺은 목련이 많다. 냉해를 입어 다 피지도 못한 채 누렇게 시들어버린 꽃도 있다.
그래도 꽃망울이 솜털 보송보송한 갈색 껍질에 감싸인 채 빠끔히 원색 꽃빛을 내비치는 건 그지없는 사랑스러움이다. 나비가 허물 벗듯 찬란한 꽃잎을 펼치며 세상으로 나서는 건 벅찬 경이로움이다. 수목원 생태교육원 북쪽 목련원은 일반 관람객의 발길이 뜸한 비원(秘苑)이다. 덕분에 목련 아래 풀밭에도 온통 봄 생명이다. 파란 큰개불알풀 꽃과 노란 민들레 꽃이 융단처럼 깔려 있어 발 디딜 곳이 없다. 쇠뜨기가 뱀머리처럼 생긴 홀씨 대를 일제히 밀어올리고 있다.
회원들은 이 시크릿 가든을 거닐며 한 사람을 생각한다. 9년 전 목련꽃 피는 4월에 떠나간 민병갈을 떠올린다. 그는 1945년 스물넷에 미군 장교 칼 페리스 밀러로 이 땅에 왔다가 이 땅이 좋아서 눌러앉았다. 60년대부터 천리포에 조금씩 땅을 장만해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일궜다. 나무와 꽃 2만5000종을 심고 그중 1만2000종을 키워냈다. 세계를 통틀어 500종 남짓한 목련 중에 420여종이 이곳에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370종, 동백은 380종, 단풍은 200종, 무궁화는 250종이 자란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가 각별히 사랑했던 꽃이 목련이다. 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이기도 하다. 그는 목련꽃 피는 4월이면 꽃망울 터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깥 약속을 끊었다. 망울이 맺히면 새들이 따먹지 못하도록 일일이 작은 모기장을 쳐 줬다.
민병갈은 김치 없인 밥을 못 먹고 밤참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기울였다. 수목원 안에 기와집을 짓고 온돌에서 잤다. 그는 우리 개구리도 사랑했다. 개구리들이 합창하는 시절이 오면 밤늦도록 연못가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는 "죽으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수목원 본원인 '밀러스 가든' 못가엔 그의 소원대로 개구리 석상이 놓였다.
목련원을 내려다보는 산중턱, 그가 살던 '후박나무집' 마당에 목련 한 그루가 아직 꽃 피울 생각도 않은 채 서 있다. 그가 키워 세계목련학회에 등록한 큰별목련 새 품종이다. 그는 자기가 좋아했던 나무딸기에서 이름을 따 '라스베리 펀(Raspberry Fun)'이라고 붙였다. 팻말에 "사랑하는 어머니 에드나 밀러에게 바친다"고 쓰여 있다.
후박나무집 뒷산엔 그의 무덤이 있다. '회원의 날'을 맞아 그를 사랑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소주잔을 올려놓았다. 한 장년 신사가 따스한 봄볕에 자리를 펴고 앉아 상념에 잠겨 있다. 아마도 민병갈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묘소 앞에도 자그마한 개구리상과 '라스베리 펀' 한 그루가 있다. 민병갈은 생전에 언론인
임준수와 이런 문답을 나눈 적이 있다.
―돌아가시면 한국에 묻히시겠습니까.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화장을 원하시나요.
"뼛가루도 땅에 묻으면 안 됩니다."
―천리포 앞바다에 뿌리길 원합니까.
"그것도 안 돼요. 나무 거름으로 써야지요."
하지만 양아들과 주변 사람들이 묘를 쓰면서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묘석에 새긴 글을 읽어 본다. "…세계적인 자연동산을 일궈놓고 이곳에 잠드니 푸른 눈의 영원한 한국인 민병갈이 남긴 천리포수목원은 앞으로 천 년을 더 푸르러 갈 것이다." 그가 떠난 이듬해 봄 '라스베리 펀'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임준수는 민병갈 평전에 "나무에게도 슬픔을 견뎌낼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라고 썼다.
목련꽃은 이번 주말쯤 절정에 오를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 지면서 5월 중순까지도 꽃을 보여 줄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에 가거든 목련 한 그루도 무심히 지나치지 말자. 개구리상도 찾아보자. 어떤 한국사람보다 이 땅과 이 땅의 자연을 사랑했던 민병갈, 이토록 찬란한 자연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그를 떠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