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묘족의 3000년 투쟁(귀주의 묘족)
호락호락하지 않고 단결력이 높은 묘족은 대중매체를 통해 곧잘 희화화된다...
가장 희한하게 나오는 게 묘족 여자다. 그녀는 은 장신구를 치렁치렁 단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서 결혼하면 결혼하면 무조건 데릴사위로 자기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묘족이 왜 오지에 사는가?
살기좋은 땅을 한족에 빼앗기고 숨어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왜 은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다는가?
한족이 침략할 때 쉽게 피난가기 위해서다. 묘족은 한족에게 밀려 계속 피난을 가야했다. 피난때마다 짐을 챙기기 쉽게, 전 재산을 은장신구로 만들어 항상 걸치고 다녔다. 언제 피난가더라도 극단적으로 아무 짐도 못 챙기더라도 제 한 몸만 건사하면 중요 재산을 보전하는 셈이니, 피난이 잦은 묘족으로서는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묘족과 한족간의 투쟁의 역사는 장장 3천년에 달한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중원의 황제는 동쪽의 치우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다. 이는 중원의 한족이 동이세력을 몰아냈음을 의미한다.
치우가 죽으며 피를 단풍나무에 쏟아 매년 가을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게 된 후, 묘족은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작한다. 동북쪽에서 정반대인 서남쪽까지의 긴 여정, 황하와 장강을 건너고 숱한 산을 넘었다.
정착해서 살 만하면 한족들이 와서 다시 밀려나고, 또 이주해서 살 만하면 다시 또 밀려나는 삶이 반복되었다.
밀려나고 밀려난 끝에 정착한 곳이 귀주성이고, 그 중에서도 산골짜기에 묘족 최대의 마을인 서강천호묘제가 있다.
길조차 없던 옛날에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을 것이다. 더 이상 외부에 시달리지않고 피난가지 않기 위해 이들은 이토록 깊은 산속에서 살아던 것일까?...93 - 94쪽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란 만만찮다. 귀주 소수민족들의 문화에서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묘족은 커다란 은관이나 나무 소뿔을 머리에 쓴다. 묘족의 조상이며 전쟁의 신인 치우의 머리에 소뿔이 있었음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95쪽
한글자 중국, 김용한, 2018, 청하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