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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박 성 원
여자는 적당히 식은 스펀지 빵을 반으로 잘랐다. 식었다고 생각했지만 빵 속엔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자는 딸기쨈을 빵 단면에 골고루 발랐다. 시럽을 넣은 딸기쨈은 부드러웠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데커레이션 튜브에 우유가 듬뿍 들어간 생크림을 넣어 꽃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여자는 그 위에 코코아가루를 넣은 버터크림으로 ‘축’ 자를 쓰려다 말았다. 남편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새콤한 블루베리를 가득히 얹고 분홍색 초도 빼곡하게 꽂았다. 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오래오래 감상하고 싶을 정도였다. 깜짝 놀랄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자 여자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여자는 두 번씩이나 초를 헤아려보았다. 정확히 마흔다섯 개였다. 케이크와 초를 보자 여자는 깜짝파티가 생각났다. 한껏 부푼 풍선이 천장을 채우고 색색의 리본 장식과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자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요란한 풍선장식은커녕 어느 때보다도 적막한 기운이 가득했다. 괴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자는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얼룩이 보였을 뿐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눈앞에 얼룩이 보일 때면 여자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 자신의 틈을 노리고 달려들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직후였다. 여자는 새벽녘에 잠들어서 다음 날 정오가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더 잔 셈이었다. 그것도 누군가 악을 쓰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 것이었다. 어렴풋이 방문 앞에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손가락 끝조차 움직이질 않았다. 여자는 온몸의 수분이 증발되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숨을 헐떡이며 마비된 몸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가느다란 철사로 온몸이 꽁꽁 묶여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여자의 이름을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팔뚝에 좁쌀만 한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어째 잠을 잔 것이 아니라 마치 딱딱한 관 속에 갇혔다가 거칠고 사나운 흙을 헤치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진짜 땅속에 매장되었던 기분이 들어 여자는 가느다란 어깨를 떨었다. 악몽에서 깬 여자는 중얼거렸다. 오늘이 대체 무슨 요일이지? 여자는 달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아이가 죽은 다음부터 여자는 날짜를 잘 잊어버렸다.
아기가 죽은 뒤로 여자는 극심한 피로감을 자주 느꼈고 그럴 때면 지나칠 정도로 잠을 많이 자는 편이었다. 언젠가 이틀 낮과 밤을 꼬박 잔 적이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깨어나지 않자 구급차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때 응급실의 당직의사는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면 검사를 받으라고 말했다. 그 때문인지 여자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사라졌다. 자다가 깨면 저녁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었고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 변하지 않는 벽지를 보는 것처럼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늘 똑같은데,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을 잊어먹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여자는 이제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몇 월인지조차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루, 하루 지나간 날을 달력에 표시해두지 않으면 봄인지 가을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마치 무인도에 표류하는 사람처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날 여자는 여러 가지 꿈을 꾼 것 같은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맨얼굴을 부비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가 퍼뜩 놀라며 오른쪽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 남편이 없었다. 대낮인 걸 보니 당연히 회사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마치 남편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밑바닥이 푹 꺼진 듯했다. 지난주 백화점에서 사온 꽃무늬 베개만이 새것처럼 놓여 있었다. 꽃무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던 순간이었다. 눈앞에 꿈틀대는 얼룩이 보였다. 얼룩은 마치 다세포생물처럼 꼬물대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거꾸로 움직였다. 여자는 얼룩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혹시 시신경이나 각막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안과에 가서 검사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얼룩이 보이면 우울한 기분을 좀체 털어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얼룩을 본 날은 여자의 아이가 죽은 지 일 년여가 지난 날이었다. 그날은 햇살이 바삭바삭 소리를 낼 정도로 건조한 토요일 한낮이었다. 마주 오던 사람이 난데없이 혀를 쑥 내밀듯 갑자기 얼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란빛의 얼룩이었고 왠지 침울하게 보였다. 다른 차원의 세계 같기도 했고, 홀로그램 같기도 했다. 여자는 흰색의 민무늬 벽지에서 마치 잉크가 번진 것 같은 얼룩을 발견했다. 여보, 벽에 왜 얼룩이 졌지? 여자는 걸레를 가지고 와서 벽지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벽지에 묻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만해. 얼룩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이야.”
신문을 보던 남편이 말했지만 여자는 오히려 남편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이처럼 선명하게 얼룩이 있는데, 어떻게 지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여자는 걸레로 벽지를 닦고, 또 닦았다. 세제를 써보기도 했고 베이킹파우더에 물을 묻혀 닦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룩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오후부터 닦기 시작한 걸레질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남편이 와서 걸레를 빼앗지 않았으면 여자는 걸레질을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걸레를 빼앗긴 여자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보, 애도 없는데, 우리 강아지라도 한 마리 키울까?”
여자는 난데없이 나타난 얼룩 때문에 남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남편은 돌처럼 굳어갔고, 경직되는 몸과는 달리 온몸에 털이 오소소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참 당신은 강아지 싫어하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벽지를 보았다. 어느새 얼룩은 사라져 있었다. 그 후로도 얼룩은 자주 나타났다. 눈을 한참 감았다 떠도 얼룩은 사라지지 않았고, 눈물을 흘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죽은 다음부터 여자는 남편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어떤 점이 변했는지 아무리 생각을 떠올려보아도 알 수 없었다.
케이크 장식을 마친 여자는 남편이 즐겨 먹는 해물철판구이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꽃새우와 주꾸미는 내장을 깨끗하게 빼내고, 연골을 떼어낸 갑오징어는 칼집을 넣어 저며 썰었다. 숙주를 씻어 건져놓고 배추속대와 깻잎 양파 청홍피망 표고버섯을 차례대로 썰었다.
여자는 잠시 남편의 휴대폰 번호를 떠올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계좌번호, 현관 비밀번호, 집 전화번호, 메일 비밀번호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절망을 느꼈다. 가구의 위치와 벽지의 무늬는 늘 똑같았고, 무인도에 갇힌 사람처럼 변함없는 풍경에 가슴이 답답했다. 여자 나이 이제 마흔이 넘었다. 그것은 몸을 지탱하던 굵은 뼈 하나가 사라진 것을 뜻했다. 여자는 욕실 선반대에서 약병을 집어 들었다. 얼룩이 나타난 다음부터 여자는 아무 약이나 먹었다. 처방전도 필요 없었고, 약국에서 마치 쇼핑을 하듯이 약을 샀다. 여자에게 약의 효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알약의 색깔이 마음에 들거나 포장지가 예쁘면 아무 약이나 샀다. 그리고 울적해지면 닥치는 대로 약을 삼켰다. 언젠가는 연고의 색깔이 너무 좋아 핸드크림처럼 수시로 손과 팔에 바르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약을 먹였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의사들은 엉터리야. 약을 털어 넣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남편은 도무지 이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잠을 깨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언제나 똑같은 시간이었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아프더라도 결근할 줄 몰랐고, 토요일엔 늘 재활용쓰레기를 버렸다. 일요일 아침마다 한 시간씩 조깅을 했고, 조간신문이나 경제신문도 이십 년째 같은 것을 보았다. 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는 절대로 매지 않았고, 정사를 나눌 때의 체위방법이나 사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 변함이 없었다.
“사람이 옷에 얼룩도 좀 묻히고 해야지.”
언젠가 여자는 남편의 세탁할 옷을 챙기다가 문득 생각했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남편은 옷에 얼룩 한 번 묻혀 온 적이 없었다. 남편을 보면 여자는 언제나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계가 연상되었다. 결코 멈추지 않는 시계. 여자는 옷 갈아입는 시계를 보면서 하루, 한 달 그리고 일 년을 가늠하며 살 수 있었다. 남편이 보다 두꺼운 옷을 찾으면, 겨울이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여자는 남편 몰래 새로 다림질한 와이셔츠 등에 루주를 묻혔다. 자시의 입술에 진한 루주를 바른 다음 곳곳에 찍었다. 퇴근한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셔츠를 벗어 던졌다. 남편이 화를 내며 뭐라고 말했지만 여자의 귀엔 마치 시계의 알람이 우는 것 같았다.
“째깍, 째깍.”
여자는 남편을 보며 시계 소리를 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돌처럼 서 있었다. 여자는 남편이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편의 귀에 대고 다시 말했다. 째깍, 째깍. 여자는 남편이 배를 잡고 웃을 거라 상상했지만 여자가 시계 소리를 낼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째깍, 째깍. 여자는 그 소리를 낼 때마다 운율을 느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너풀거리는 나비가 떠올랐다. 여자는 나비처럼 팔을 움직이며 날갯짓을 했다. 그리곤 남편의 주위를 돌며 째깍, 째깍 소리를 냈다. 남편이 밀치기 전까지 여자는 정말 시계 소리를 내는 나비가 된 것 같았다.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내가 붙잡고 흔들면 시간을 깰 수 있을까? 여자는 빈 집에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자가 아무리 흔들고, 붙잡고 늘어져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깰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옷에 얼룩도 좀 묻히고 해야지 말이야. 시계도 아니고. 여자는 빈집에서 중얼거렸다.
해물철판구이를 준비한 여자는 부엌에서 나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정리된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 어딘가 횅한 기운이 감돌았다. 남의 집처럼 낯설기도 했고, 천장은 더 높아 보이는 데다 바닥은 평소보다 넓게 보였다. 비어 있는 소파는 유난히 횅댕그렁했다. 여자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얼룩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낮인데도 햇빛은 비치지 않았다. 커튼을 젖혀봤지만 하늘은 온기없이 온통 뿌연 잿빛이었다. 썰렁한 기분을 없애기 위해 오디오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CD플레이어뿐만 아니라 라디오도 켜지지 않았다. 여자는 깜짝 놀랐다. 몇 년 전에 남편이 큰맘 먹고 장만한 값비싼 오디오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던 거였다. 언짢아할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여자는 오디오에서 망가진 동요 테이프를 발견했다. 여자가 힘주어 테이프를 꺼내려 했지만 테이프는 탯줄처럼 오디오 내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여자는 꿱 비명을 지르며 오디오를 주먹으로 쳤다. 그리곤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요리를 즐겼다. 아니, 오직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요리밖에 없었다. 잔치라도 앞두고 있을 때면 여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어떤 요리를 할까 고심하고, 심지어 머릿속으로 요리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벌떡 일어나서 메모하다가는 부엌에 나가 그릇의 개수를 세기도 했다. 때론 녹말가루나 향신료 따위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두세 번 확인하기도 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때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없었다. 손님들의 입으로 자신이 만든 음식이 들어가면 여자는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쾌감을 느꼈고, 온몸이 녹초가 되어야만 그나마 똑같은 하루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여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집으로 아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초대를 하지 않으면 병이 날 정도였다. 다른 일에서는 즐거움이나 보람을 찾을 수 없었고, 아무런 기대감도 갖질 못했다. 마치 삶을 이어주는 생명줄이라도 된 양 여자는 사람들을 초대했고,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차를 대접했다. 어떨 때는 누구를 초대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때도 더러 있었다. 다만 여러 가지 음식들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는 잔영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떤 요리를 더 만들까 생각하던 여자는 문득 남편의 직장동료들을 떠올렸다. 남편에게 있어 생일은 그저 달력에 박힌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남편은 자신의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음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찌개군. 그게 다였다. 며칠 전에는 신혼 때 선물했던 생일선물을 발견했다. 가지만 한 코끼리 코가 붙어 있는 속옷이었다. 포장만 뜯은 그대로였다. 진짜 선물을 주기 전에 준비했던 장난스런 선물이었지만 남편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재미는 있겠지만 입기엔 매우 불편해 보이는걸.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조용히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분명 직장동료 그 누구에게도 생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여자는 깜짝파티를 떠올렸다. 남편 직장동료를 초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자는 수첩을 꺼냈다. 여자의 수첩엔 각종 번호들과 기념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여자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린 이후 남편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나에게 전화라도 하지.”
현관 앞에서 쭈그린 채 앉아 있는 여자를 일으키며 남편이 말했다.
“휴대폰 번호나 회사 전화번호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나요.”
여자는 현관에서 한참을 울었다. 나이 탓인지, 얼룩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여자는 남편이 만들어준 수첩에 의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여자는 수첩에서 남편 직장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해 남편의 직장상사를 찾았다.
“너무 급작스럽죠. 하지만 깜짝파티니까요.”
가족동반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남편의 직장상사는 저녁에 시간이 되는 직원들과 함께 가겠다고 했다.
“남편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놀라게 해주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통화를 마친 여자는 서둘렀다. 여자는 마치 사활이 걸린 일에 당면한 것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점점 욕심이 생겼다. 요리책을 열어볼 때마다 만들고 싶은 요리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요리방법을 꼼꼼히 적어놓은 노트를 보고 집에 있는 재료를 비교해보았다. 장을 볼 시간이 없는 게 아쉬웠다. 여자는 비슷한 재료를 응용해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여자는 스무 가지가 넘는 온갖 요리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요리도 꽤 있었다. 생각보다 음식의 모양이나 빛깔이 근사했고 무엇보다 맛이 좋았다.
여자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퇴근길에 여의도에 들러 만두 좀 사다줘요. 그 집 만두가 너무너무 먹고 싶어요. 남편이 여의도에 들러 만두를 사온다면 삼십 분 이상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여자는 앞치마를 벗고 가장 근사한 드레스를 꺼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이 만든 음식 냄새를 맡으며 여자는 행복했다.
여자의 계획대로 남편의 직장동료들이 먼저 왔다. 여자는 고깔모자와 풍선과 폭죽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여자는 인사를 받고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직원들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음식을 본 그들은 탄성을 쏟아냈다. 여자는 그들에게 음식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올리브유로 데칠 땐 약한 불로 잠깐 익히는 게 중요하죠. 칠리소스에 마요네즈를 섞었는데, 어때요? 색깔이 너무 예쁘지 않나요? 여자의 질문과 설명에 그들은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알아듣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요리방법과 재료의 배합에 대해 자신이 설명하는 게 중요했다. 여자가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신발을 벗으려던 남편은 깜짝 놀랐다. 놀란 남편에게 동료들이 동시에 생일 축하한다고 박수를 치며 인사를 했다. 남편은 만두도 떨어뜨린 채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혀졌다. 여자는 술을 꺼냈다. 모두들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남편도 그들을 따라 건배도 하고 가끔 웃기도 했지만 남편의 웃음은 마치 물기 빠진 두부처럼 푸석했다. 여자도 남편 옆에 앉아 남편과 건배를 나누었다. 남편은 마치 머리가 아픈 사람마냥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커다란 접시에 담겨진 음식들을 따분하게 바라보았다. 남편의 동료들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호텔의 식당보다 맛이 좋다며 칭찬했다. 여자는 기뻤다. 모처럼 마신 술기운이 목을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였다.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마냥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느닷없이 남편이 소리쳤다.
“만족해? 이젠 만족하냔 말이야?”
여자는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인지 알기나 해?”
남편은 잠시 여자를 노려보다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먹다가 남긴 음식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남은 음식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일어나 찬장으로 가서 닥치는 대로 약을 꺼내 먹었다.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냐니. 여자는 남편의 말을 떠올리곤 수첩을 찾았다. 그리곤 수첩에 적혀 있는 남편 생일과 달력에 있는 날짜를 비교해보았다. 그러자 오 개월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데 왜 오늘이 아주 중요한 누군가의 생일인 것처럼 느껴졌을까?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긴 아는 거야?”
화를 참지 못한 남편이 방에서 나와 다시 소리쳤다. 남편은 여자에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보, 당신이 만들어준 수첩에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무런 표시가 없어요. 하지만 난 왜 오늘이 생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아무리 떠올려도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남편은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함께한 남편은 오전이 지날 때까지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보았다. 여자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전날 있었던 일 때문일까. 여자는 묻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날짜와 요일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점심 무렵, 남편은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여자에게 함께 외출하자고 말했다. 외출이란 말을 듣는 순간 여자는 기뻤다. 붙잡고 흔들면 시간도 깨지는 법이야. 여자는 화장대 앞에서 중얼거렸다. 여자가 고르고 고른 옷은 새하얀 원피스였다. 춥지 않을까, 라고 여자가 물었지만 남편은 시계를 보며 괜찮다고 했다. 여름이 떠난 자리는 깊고 넓은 하늘이 차지하고 있었다. 드러난 어깨가 추웠지만 손으로 감싸는 걸로 충분했다. 여보, 어디로 갈 거야? 여자는 오랜만에 동물원에 가보고 싶었다. 동물원? 음.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남편이 여자를 데리고 간 곳은 정신과 의원이었다. 여자는 정신과라는 간판을 보자 어지럽고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소리가 명치를 꽉 눌렀고 여자의 몸은 부표처럼 흔들렸다. 여보, 잘못했어. 여자는 남편에게 말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여자는 남편의 손을 잡고 늘어졌다. 남편이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늘이 핑 도는듯 어지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갑자기 몸이 경직되었고, 손발이 저려왔다.
“별일 아니야. 그냥 상담만 할 거야.”
남편이 말했지만 여자는 갑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상으로 돌아가야지.”
여자는 무서웠다. 남편이 무서웠고, 정상이란 말이 무서웠다. 정상이라니. 남편이 말한 정상이란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여자는 구역질을 했다. 침과 섞인 신물이 남편의 구두 앞으로 주룩 떨어졌다. 여자가 화장실에 가려 하자 그제야 남편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여자는 벽에 부딪혀가며 겨우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토했지만 비린 물만 조금 나왔다. 그런데도 헛구역질은 멈출 수 없었다. 여자는 약을 먹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아무 약이나 먹고 싶었지만 가방 안 어디에도 약은 없었다. 약을 찾아야 돼. 여자는 화장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남편이 잡을 틈도 없이 여자는 계단을 마구 뛰었다. 남편이 곧바로 여자를 쫓았지만 여자는 계단을 서너 개씩 건너뛰었다.
건물을 빠져나온 여자는 가장 가까운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에 진열된 약들을 보자 여자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숨을 돌린 여자는 약국 밖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방향을 정했는지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갔다. 남편이 지하철역 방향으로 간 것을 확인한 여자는 약을 고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진열된 약들 중에서 골고루 하나씩 집었다. 투명한 캡슐 안에 빨간색과 흰색의 알갱이들이 들어 있는 약 이름을 떠올렸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여자는 소염제와 거담제 그리고 구충제와 두통약을 따로 주문했다.
“어디에 약국 차리세요?”
여자가 내려놓은 약들을 보며 약사가 말했다. 약사가 농담을 건넸지만 여자는 전혀 웃지 않았다. 약국을 나온 여자는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생수를 샀다. 생수의 뚜껑을 따려는 순간 여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생수의 뒷면 라벨에 적혀 있는 문구였다. ‘구입 후 가급적이면빨리 드시기 바랍니다.’ 그래, 그래. 당연하지. 여자는 손에 잡히는 알약들부터 하나, 하나씩 집어삼켰다.
불을 밝히기 시작한 도심의 불빛들은 마치 얼룩 같았다. 여자는 손을 뻗어 진짜인지 아닌지 잡아보려 했지만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여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얼룩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정상인이 되어야지. 남편의 말이 여자의 가슴을 잡고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아주 어릴 때 아빠의 손을 잡고 갔던 동물원은 도심 외곽으로 이전한 지 오래였다. 맹렬하게 살았다곤 할 수 없지만 남들이 하는 만큼은 살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작 시계에 밥을 주기 위해 살아온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째깍. 째깍. 고장 나면 안 돼. 시간이 틀리면 안 돼. 함부로 알람을 울리면 안 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치인 여자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도시는 꼭 동물원 같았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안을 돌아다니는 동물들 같았다. 드러난 어깨로 다시금 추위가 밀려왔다. 공중전화를 찾아 남편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동과 호수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날짜와 요일을 묻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시계와 시간을 위한 것뿐이었다. 여자는 시계와 시간으로부터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서 시외버스터미널을 찾았다. 환승역 이름과 노선을 잊어버릴지도 몰라 수첩에 몇 번이고 적었다. 그러나 여자의 걱정과는 달리 시계처럼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지하철 노선은 여자를 어렵지 않게 여자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자는 터미널로 가면서 지갑 안에 있는 돈을 꺼내보았다. 지폐만 이만칠천 원이 있었다. 창구에 가서 여자는 이만칠천 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고 이만칠천 원으로 갈 수 있는 곳 표를 달라고 말했다. 칸막이 건너편에 있던 매표소 여직원이 칸막이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는 여자를 잠깐 보았다. 이혼이라도 당했나? 그렇게 생각한 여직원은 얼굴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여직원은 요금표와 지명을 확인했다. 이만칠 천 원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막차가 떠나고 없었다. 지금 출발하는 가장 근사치는 일만칠천 원이었다. 여직원은 여자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여직원이 말한 지명은 여자로서는 처음 듣는 곳이었다. 그러나 여자로서는 어차피 상관없었다. 여직원은 여자에게 잔돈과 함께 표를 내밀었다.
여자가 표와 잔돈을 받고 가자 여직원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직원의 친구는 영화를 찍고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만난 약사였다. 어머, 어머, 세상에. 나 오늘 별 희한한 여자를 만났어, 글쎄 그 여자가……. 여직원이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사인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얘, 나도 오늘 약국에서 말이야, 이상한 여자를 만났는데, 글쎄 그 여자가……. 여직원과 약사는 다시 한 번씩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사이에 여자는 생수 한 병을 사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그래서 여자는 마음에 들었다. 빈자리가 많아 여자는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았다. 버스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창문에 이슬이 맺힌 것인지, 비가 내리는 건지, 혹은 얼룩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창문에 유령처럼 흐릿하게 비치는 모습이 자신인지 아니면 얼룩인지도 알 수 없었다. 버스가 목적지를 가지 못하고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거나 아니면 기사가 버스를 납치해 어디론가 데려간다 해도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여자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드러난 어깨를 만졌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옆자리에는 언제 왔는지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성기를 드러낸 채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기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만지고 있었다. 여자는 처음엔 놀랐지만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여자가 깨자 당황하던 사내는 여자가 미소를 띠며 웃자 더욱 당황했다. 여자는 당황하는 사내의 성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사내는 얼마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보다 못한 버스 손잡이도 잡는데’, 여자는 생각했다.
사정한 사내는 바지를 올리고는 얼굴이 빨개진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겁을 먹었는지 여자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 앞에서 다리를 벌린 게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신혼 때의 자신이 생각났고, 시간이 맞지 않을까봐 꼬박꼬박 시계에 밥을 주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퇴근을 기다리고, 얼룩 하나 묻어오지 않는 셔츠와 양복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던 모습이 생각나자 여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이가 죽은 다음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던 웃음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붙잡았던 걸 생각해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잖아. 그런 것들도 붙잡고 늘어지며 살아온 마당에 지푸라기보다 못한 성기 좀 잡았다고 뭐가 나빠지겠어? 버스 손잡이나 지푸라기보다 못한 게 남자들의 성기라고 생각해. 사랑 때문에 다리를 벌렸다니,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하자 여자는 더욱 웃고 싶어졌다.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자 여자의 웃음소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사내가 자리를 다시 옮겼다. 사내가 새로 옮긴 자리는 여자와 가장 떨어져 있는 버스기사 바로 뒷자리였다. 자리에 파묻히듯 앉은 사내는 윗도리로 귀를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시계를 깨부순 느낌을 받았다. 시간에서 탈출해 비로소 시간과는 상관없이 혼자 살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버스는 부드럽게 흔들렸고, 비가 멈춘 것인지 아니면 얼룩이 사라졌는지 선명한 자신의 얼굴이 창문에 비쳤다. 사내의 목적지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내는 첫 번째 경유지에서 황급히 내렸다. 여자가 창밖으로 쳐다보자 사내는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 사내들이란, 여자는 뛰어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자가 버스에서 내린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여자가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여관 한두 곳만이 아무도 보지 않는 네온을 밝히고 있었고, 하품하는 택시기사 한 명만 터미널 앞에 있었다. 여자는 어디로 갈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추위가 밀려왔지만 가게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단층짜리 건물들이 네거리를 중심으로 잠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도시처럼 편의점 하나가 길 건너편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여자는 편의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여관방에 들어가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편의점과 여관 외에는 불을 밝히고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어디 찾으시는 데 있습니까?”
하품만 연신 해대던 기사가 물었다. 여자는 구천 원 정도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구천 원이라.”
기사는 목덜미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갈 수 있는 데야 많이 있지만, 이 시간에……. 어디 보자.”
기사는 여자에게 타라고 말했다. 여자가 뒷좌석에 앉자 기사는 시동을 걸었다. 이 시간이 넘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간단한 요기도 할 수 있을 테고, 아주 싼값에 잠을 잘 수도 있는 곳이라고 했다.
“여동생인지, 딸인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를 데리고 카펜지, 민박집인지 뭐 그런 걸 강가에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구천 원이 넘게 나오는 거리지만 아주머니 불쌍해서 내가 데려다주는 거요.”
택시는 강가를 따라 달렸다. 여자가 창문을 조금 열자 강에서부터 약간 비린 냄새가 풍겨왔다. 기사는 오디오를 켰다. 옛날 가요였다.
“난 이게 좋더만.”
가로수들 사이로 강물이 보였다. 밤에 보는 강물은 처량해 보였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강물인지 흙바닥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젠장. 구천 원 벌려고 두 시간 고생했네. 도시는 그렇지 않죠?”
기사가 투덜거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사십 년을 살면서 한 푼도 벌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게 뭐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비정상이지.”
여자는 웃음이 새 나왔다. 여자가 창문을 올리자 강물이 흐르는 소리 대신에 가요만이 택시 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 도시는 좀 어때요?”
“도시오? 도시는……동물원 같아요.”
여자가 말하자 기사는 피식 웃었다. 기사는 여자와 나누던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노래만 따라 불렀다.
택시는 ‘울란바토르’라는 간판 앞에서 멈추었다. 기사의 말처럼 통유리로 된 가게 안은 불이 훤했다. 여자는 구천 원을 주고 잔돈을 찾아 더 주려고 했지만 기사는 관두라며 택시를 돌려 나갔다. 여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책을 읽고 있던 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여자에게 편안한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묵고 가실 건가요?”
남자가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기가 여러 가지로 난처했다. 더 이상 돈도 없을뿐더러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일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십 년이 되도록 지켜왔던 시간과 시계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이 남자가 알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같은 무늬의 벽지를 보며, 아무것도 이룬 게 없으며, 아이가 죽은 다음부터 날짜와 요일을 기억하지 못하며, 시계에 밥을 주고, 얼룩 하나 없는 옷을 또다시 세탁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자……필요하나요?”
여자가 묻자 남자는 하하 소리 내 웃었다.
“그럼 혹시 요리사는 필요하나요?”
여자가 다시 묻자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글쎄요, 그건 생각해보죠, 라며 말했다. 여자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카페 한 벽을 가득 메운 책들을 보았다.
“저 책들은 다 읽으신 거예요?”
남자는 뒤를 돌아 책장을 보았다.
“아닙니다. 저도 일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요.”
“맥주 한 잔 외상으로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여자를 조용히 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통유리 밖을 내다보았다. 온통 어둠만이 깔려 있어 멀리 산이 보이는지, 강물이 흐르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긴 사막인지도 몰라, 여자는 생각했다. 그러자 여자는 갑자기 잠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가라앉으며 몸이 차츰 무거워졌고, 목에 힘이 서서히 풀렸다. 남자가 맥주를 가지고 걸어오고 있었지만 여자는 그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 얼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