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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춘문예공모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copyzigi
[2011 518문학상 소설 당선작] 임수랑
끝나지 않는, 녹슨
이미리는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인 1980년에 태어나 천안함 사고가 났던 2010년까지 살았다.
그런데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남자를 쫓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모래밭에 난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고양이 세 마리가 모래 언덕 위에 앉아있었다. 언덕 아래쪽에 흙색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가로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자칫하면 너는 고양이의 꼬리를 밟을 뻔했다. 고양이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너를 바로 피하지 않았다. 아, 저 여유만만. 얍삽하게 생긴 이 실장의 까만 고양이와 달리 흙색 고양이의 덩치는 엄청 컸다. 흙색 고양이는 네가 발을 허둥대다가 정확히 꼬리를 건너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어슬렁거리며 일어났다. 공사현장 어디선가 뜯겨져 나온 것인지 못이 여러 개 박힌 널빤지가 바다와 가까운 모래사장에 나뒹굴었다. 밀물에 잠겼다가 썰물에 거기까지 밀려나간 것이었다. 검은 색 고무밧줄이 또 다른 널빤지 위에 감긴 채 길게 늘어져 한쪽 끝이 모래사장 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고, 바위엔 깨진 조개껍질과 수초가 휘감았다가 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서쪽 대륙에서 밀려온 것인지, 아니면 동남쪽 섬나라에서 밀려올라왔는지 빈패트병들, 스티로폼 박스, 찢어진 그물, 타이어 조각들, 끈 떨어진 플라스틱 양동이와 망가진 우산이 해변 끝에 널려있었다.
남자는 J군도에 나타난 다음 날부터 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섬을 구석구석 다니는 남자의 의도를 모른 채, 너는 남자를 따라다녔다. 펼치면 오색 부채처럼 찬란한 공작의 길고 아름다운 꽁지라도 되는 양 남자의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쫓아갈 때도 있었고 남자와 나란히 옆에 서서 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너는 비밀스런 일을 함께 수행하는 남자의 동료라도 된 듯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네가 숲 속의 거친 길을 헉헉거리며 따라갈 때도 깊은 도랑을 건너다 동글동글한 돌에 미끄러져 넘어질 때도 모른 척했다. 옆에 네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처음 J군도에 나타났을 때 남자의 모습은 청자처럼 곧고 단아하게 빛났다. 마포는 남자를 너의 방으로 안내하고 너는 남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낮인데도 커튼을 쳐서 어둑한 가운데 붉은색 전구를 켰다. 하지만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붉은색 알전구를 꺼버렸다. 그리고 알몸으로 누워있는 너에게 옷을 입으라고 했다. 남자는 불편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 대 꺼내 불을 붙였다. 너는 엉거주춤하며 몸을 웅크린 채 팬티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브라를 입을 사이도 없이 원피스를 서둘러 껴입었다. 그냥 머물겠다고, 한 달 동안 머물겠다고, 아니 언제까지 머물지 모르겠다고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원피스 지퍼를 올리고 있는 너의 귀에 가깝게 울리다 멀어졌다 했다. 그래서 너는 남자의 말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소총 한 자루를 벽 구석에 기대어놓았다. 남자는 군복을 벗지 않은 채 곧바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가 이내 몸을 반쯤 일으켜 2층 창가의 커튼 사이로 밖을 살폈다. 남자는 무엇을 쫓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남자는 오 일 동안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남자에게 밥을 날라다 주고 빈 밥그릇을 치워주고 옆에서 함께 자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남자가 벗어 놓은 거라곤 군화와 군모뿐이었다. 남자의 짐이라곤 한쪽 어깨에 멜빵을 메고 온 낡은 군용가방과 소총 밖에 없었다.
마포는 남자에게서 미리 사연을 들었는지, 남자가 숨겨가지고 온 소총을 방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소총의 존재에 대해서 캐묻지 않았다. 손님 잘 모셔, 라는 마포의 목소리가 너의 귓가로 울렸다. 마포는 군인 아저씨에게 화대까지 미리 받았다고 했다. 군인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을까. 너는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어느 상점에라도 들어가 돈을 강제로 탈취라도 해 온 것일까. 알 수없는 일이었다. 마포에게 돈을 주면 살인만 빼고는 모든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마포는 마포집의 주인 이름이었다. 원래 이름이 “마포”라서 색시집 이름을 “마포집”이라고 지은 건지, “마포집”의 포주라서 “마포”라고 불리는 건지 너는 잘 몰랐다. 수갑과 채찍만 안 들었을 뿐이지 J군도에 사는 원주민들이 모두 마포를 무서워한다는 것밖에는. 네가 C시 터미널에서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J군도에 온 날 너는 그것을 진작 알아버렸다. 쥐색 봉고차를 타고 오면서 그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서 도망 나올 생각을 애저녁에 버리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걸.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이년아! 그러게 왜 빚을 지고 그래. 너는 그때 이미 마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도 마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잠깐 그런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항구에서 30분이나 걸리는 마포집을 오는 도중에라도 남자가 마포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을 수 있었을 거라는 짐작만 했다.
남자는 항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던 과거와 달리 쾌속선이 다니고부터 선착장은 평일인데도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남자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리가 없다고 너는 생각했다. 학교 친구들이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모른 척이라도, 무슨 척을 잘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너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거렸다. 저렇게 남들의 시선을 못 받다니, 군복을 입고 철모를 쓴 남자의 모습이 평범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특이한 차림이다. 군복을 입고 군화와 군모를 썼다. 다만 총 한 자루는 2층 방에 세워둔 채로 놔뒀다. 소총까지 메고 다녀야 사람들이 알아볼까. 남자가 총을 들고 다닌다면 사람들 눈에 금방 띌지도 몰랐다. 소총의 용도가 궁금해서라도 사람들이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라고 너는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서 유괴를 당하거나 강도짓을 당해도, 자기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전쟁 중인 지구 건너편 일이나, 총 따위에도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너는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사람들은 길바닥에 쓰러져 누가 죽어 있어도 모르다가, 자기 발밑에 폭탄이나 터지고 나서야 피난 갈 시늉을 할지도 몰랐다.
*
쾌속선이 막 도착했다.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J군도까지는 쾌속선으로 약 두 시간의 거리였다. 배를 타고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남자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처럼 그 자리에 한참 서서 사내와 아낙들이 떠들썩하게 배에서 내리고 타는 것을 살펴봤다. 과자와 과일을 담은 대형 마트 상표가 새겨진 커다란 봉투를 든 여자와 커다란 박스를 머리에 얹고 힘들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도 있었다. 남자가 그러고 있을 동안 너는 남자와 좀 떨어져 앉아 배 위로 한가로이 나는 갈매기들을 갈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너는 갈매기들이 만끽하는 자유가 부러웠다. 배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거나, 혹은 대학생인 듯한 10대 후반의 여자가 내렸다. 너는 여자가 너 또래 쯤 된다고 생각했다. 서애. 서애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 여자는 한쪽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조심스레 다뤘다. 여자는 청바지에 유명 상표가 앞에 프린트 된 까만색 티셔츠를 입었는데, 너는 단박에 여자가 입은 옷이 짝퉁인 줄 알아봤다.
이 실장은 돈을 함부로 뒀다. 너는 의붓아비의 새 여자이며, 어미 밑에서 일하다 어미가 죽고 어미의 공방을 도맡아 하는 이 실장에게서 훔친 돈으로 게스 시계나 디젤 운동화나 지갑 등 새로운 물건을 사서 학교에 가져가곤 했다. 너는 반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왕따를 당할까봐 두려웠던 너는 그렇게라도 해서 반 친구들의 관심을 잠시라도 돌리고 싶었다. 그러다 이 실장에게 들켰다. 이 실장은 너를 야단치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너는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너는 습관처럼 된 새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교실청소를 하다가 담임의 지갑까지 건들었다. 의붓아비는 너를 데리고 살다가 이 실장과 재혼을 했다. 재혼 후에 알코올중독으로 의붓아비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그 집에서 너의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의붓아비가 십층에서 뛰어 내려 생을 마감하는 날 너는 집을 나왔다.
너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결혼도 하기 전이었으니 유복자이며 사생아였다. 그 전부터 의붓아비는 어미의 곁을 맴돌며 모녀를 살폈다. 정식적으로 의붓아비가 된 것은 네가 여덟 살 때 일이었다. 의붓아비가 들어오자 너의 아비는 두 명이 되었다. 아비가 세 명이 될 수도 있을까. 세포가 번식을 하듯 아비가 네 명이 되고 다섯 명이 될 수 있을까. 아기 때부터 의붓아비를 봐 왔기 때문에 갑자기 함께 살게 된 순간이 너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비록 사진으로만 보던 아비였지만 머리 스타일이 다른 점이 너의 진짜 아비와 의붓아비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될 뿐이었다.
너의 아비는 군대에서 탈영을 했다. 아비의 행방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비는 소총을 한 자루 갖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동남아 어느 산호가 많은 섬에서 이동 중이었는데 아비는 너무나 여유만만하게 무리에서 빠져나와 휘파람을 불면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본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 전사의 모습 같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해 2월에 너의 의붓아비가 되었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어미는 그게 무슨 산호섬이냐고, 아비가 사라진 곳은 80년 광주가 아니었느냐며 의붓아비를 나무랐다. 하지만 의붓아비는 그 이후에도 아비얘기를 해달라고 네가 조르면 언제나 아비가 탈영한 곳은 온통 산호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침탈자들이 저지른 전쟁의 소용돌이가 섬 전체를 휩쓸고 가는 바람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면 어미는 그것도 기억 못하냐며 의붓아비를 또 타박했다. 의붓아비는 어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만 빙긋이 지었다. 너는 의붓아비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의붓아비가 아비와 마지막까지 있던 사람이고 아비의 절친한 친구였고 한 여자를 함께 사랑했던 둘이 한 몸인 것처럼 동질의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너는 의붓아비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비를 느꼈고 아비를 상상할 수 있었다.
*
남자는 부둣가에 있는 3층짜리 녹림여관에 들어갔다. 얼마나 빠른지 청솔모가 숲길에서 사라지듯 금방 사라졌다. 녹림여관은 시멘트벽을 녹색 페인트로 칠했다. 여관에 불려 다닌 적도 있었는데 그 동안 너는 건물을 자세히 본 적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녹색에 흰색 페인트를 탁하게 섞은 듯 파스타치오 그린이 더 맞았다. 처음엔 녹색으로 페인트를 칠했다가 시간이 흐른 후, 그 위에 흰색을 덧칠하고 그 위에 다시 파란색을 겹쳐 칠한 탓에 파스타치오 아이스크림색이 된 것 같았다. 아니면 바다의 소금기가 오랜 시간 스며들어 변색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너는 밖에서 기다려야 할지 안으로 들어가도 될지 망설였다. 남자는 녹림여관에서 정사를 벌이고 싶은 것인가. 남자는 한 달 동안 너를 산 손님이니까 사실 장소가 어디든 네가 뭐라 그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여관인데, 정사를 나누는데 마포집보다 불편할 건 없었다. 거기다가 마포집의 2층 방이 남자의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너의 머릿속으로 순간 스쳐지나갔다. 마포집 2층엔 네 방뿐만 아니라 좁은 십자 복도를 따라 4개의 방이 함께 몰려 있었다. 남자는 1층 홀에서 색시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먹고 충동적으로 욕정에 들떠서 2차를 나온 손님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 같으면 벌써 너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 너는 생각했다. 남자는 분위기에 많이 좌우되는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일 수도 있었다. 여기 온 목적이 여느 다른 사람과 똑같을지라도 2층 방의 주위환경이 남자의 정욕을 일깨우는데 한계가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문득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떠올랐다. 국어선생님은 감수성이 예민해 슬픈 시를 읽을 때는 여지없이 눈가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세상의 일을 얘기할 때도 종종 눈시울을 적셨다. 세상의 일이란 게 좋은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이 더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윤동주의 다른 시도 아니고, 특히 “별 헤는 밤”을 낭독할 때 그랬다. 윤동주의 슬픈 죽음을 얘기할 땐 얼굴에 분노마저 어렸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모습이 언뜻 사진으로 본 윤동주의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너는 생각했다. 머리가 스포츠형인 것도 그렇고 어깨넓이며 우수에 잠긴 듯 단아한 표정의 얼굴이 그랬다.
할 수없이 너는 남자를 찾으러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2층으로 연결되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여관은 복도가 길었다. 남자는 복도 중간에 있는 방 앞에서 어떤 여자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계단 끝에서 너는 거기서 남자를 기다려야 하나, 숨어야 하나, 곁으로 가봐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더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남자는 여자가 손바닥으로 내리칠 때 충격으로 약간 비스듬히 비뚤어진 군모를 다시 썼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저 여자는 누구인가. 남자가 찾고 있는 여자가 아닌데 남자가 착각을 해 저 여자에게 얻어맞은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아는 사인데 여자가 남자를 증오하는 상태인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했다. 2층 복도 끝에는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있었다. 창문 밖의 하늘은 곧 비가 올 것처럼 회색빛이다. 곧 비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너는 1층으로 뛰어내려왔다. 역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우산이 없었고 녹림여관 안에서 벌어진 상황이 당황스러워 그냥 서 있었다. 남자는 곧 내려올 것이다.
*
여관 2층에 머물던 여자는 남자가 찾아간 다음 날 사라졌다. 장마가 처음 시작된 날이면서 비가 무지 많이 내리던 날이다. 배들은 거의 출항하지 못했다. J군도는 15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뤄졌다. 네가 있는 섬은 J군도의 주된 섬 중에 하나였다. 이 섬의 이름 또한 J도이다 보니 다른 섬들과 달리 보통 J군도라고 불렸다. J군도도 이제 옆의 섬들처럼 본격적인 장마가 몰려왔다. 태풍이 시시때때로 몰아쳤고 태풍이 심하게 부는 날은 배들이 바다에 뜰 수 없었다. 고기잡이배도 연락선도 모두 J군도의 항구에 매여 있었다. 선창에 그물과 밧줄만 쌓여있는 낡고 녹슨 배들과 일거리를 잃은 뱃사람들이 술에 취해 다니는 통에 J군도는 더욱 더 음산하고 온통 질척거렸다.
여관 2층에 머물던 여자가 떠난 이후에도 장마 내내 남자는 J군도를 헤매고 다녔다. 남자는 누군가를 찾으러 J군도에 들어온 게 확실했다. 이제껏 그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너는 남자가 하려는 일이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소총을 가지고 나타난 거 보면 복수를 하려온 것이 분명했다. 마포가 소총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바로 그 복수의 정서가 서로 통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포 또한 서울의 제일가는 요정에 있다가 여기 J군도까지 흘러 들어와 포주 노릇을 하는 것이 사는 이유의 전부가 아닐 테니까. 어쨌든 너는 너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의 음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포의 눈빛에선 언제나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복수는 C시에서 네가 처음 차 배달을 할 때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하지만 너는 여기 J군도까지 오게 됐다. 함께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해 C시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 서애 소식도 너는 모르는 상태였다. 네가 서애와 함께 학교를 그만 둔 공통의 이유가 있었다. 너는 담임의 지갑을 슬쩍한 일이 발각되어 상담실에 불려갔다. 최서애가 상담실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네가 상담실 문을 박차고 나가자 서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 챘다는 표정으로 너의 뒤를 계속 쫓아오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리! 이미리! 흰 교복을 입은 너의 어깨를 스칠 정도로 바짝 붙어 따라왔다.
너는 서애를 돌아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문을 향해서 걷는 동안 서애는 너에게 계속 확인했다. 너도 당했어? 시팔! 좆같은 세상이야. 저 짐승, 나도 더 이상 못 참아. 너는 서애의 말을 듣는 순간 담임이 너의 옆에 앉아 도둑질한 너를 꾸짖으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던 것이 생각났다. 서애는 담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폭력이나 무단 조퇴와 결석 같은 말썽을 자주 펴서 상담실을 제집처럼 불려 다녔다. 도둑질이라는 엄청난 일을 했기에 너는 학생과장인 담임 앞에서 다른 생각을 못했고 담임의 행동이 성추행이라는 걸 미처 감지 못했다. 하지만 서애는 담임이 상담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서애와 함께 컴컴한 놀이터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며 처음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너는 서애가 다가와 네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며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애는 너를 가장 괴롭히던 애 중의 하나였다. 다른 친구들이 네가 지닌 명품에 관심을 가질 때도 서애만은 너를 무시하고 항상 쌀쌀맞게 굴었다. 서애가 일진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서애의 지난 얘길 듣고 거친 행동과 강한 척을 해야 했던 그녀를 너는 이해하게 됐다.
서애는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는 결혼 하지 않고 평생 홀로 살다가 서애를 데려와 키웠다. 잔소리를 밥 먹듯이 하는 할머니가 싫어서 언제나 가출을 꿈꾸었다. 단순히 타고난 반항기가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할머니의 지난 과거는 친할머니는 아니지만 할머니의 손녀로서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오도 갈 데 없는 자신을 데려와 키워준 거는 고맙지만 자기는 할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너에게 말했다. 서애는 학교 밖에선 항상 붉은 스카프를 목에 매고 다녔는데 그 이유를 네가 물어보니 스카프를 목에 감지 않으면 목이 시리다고 말했다.
서애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붓아비가 죽은 날, 모두 병원 영안실에 가 있을 때 너는 이 실장의 검은 고양이를 안고서 바람에 이끌리 듯 집을 나왔다. 저녁 아홉 시, 사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너는 서애에게 연락했다. 서애가 인도하는 대로 안산의 주유소에서 숙식을 하며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실장의 검은 고양이는 주유소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주유하러 온 차에 치어 죽었다. 차 주인에게 보상이나 사과를 받기는커녕 그 일로 너는 주유소 실장에게 혼나기만 했다. 서애는 한 달도 안 되어 남자 알바와 돈을 훔쳐 너를 놔두고 달아났다. 너는 서애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주유소에서 366일을 일했다. C시도 서애의 소개로 오게 됐다. 서애는 주유소로 오토바이를 보냈다. 그때 마침 주유소를 떠날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너는 일 년 전에 서애를 믿었던 것처럼 무작정 짐도 없이 오토바이 뒤에 타고 왔다. 하지만 C시에 와서 얼마 있다가 서애는 다시 너만 놔두고 어디론가 떠났다. 누군가 너를 찾아가기를 바랐지만, 너는 처음에 그 누군가가 서애이기를 원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너는 밤중에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쥐색 봉고차를 타고 목포까지 달려왔다. C시 변두리에 있는 동네 찻집에서 몰래 도망 나온 너는 C시 터미널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사람들이 너의 짐이 든 가방을 낚아챘다. 너는 그 사람들이 마담언니가 보낸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순순히 보내줄 여자가 아니었다. 너는 찻집에서 일한 지, 딱 이 년이 되는 날, 마담언니에게 간다는 소리 없이 숙소를 나왔다. 너는 그 전부터 빚을 다 갚는 순간 여기를 떠난다고 공언했다. 마담언니는 언제나 빚이나 다 갚고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마담언니는 너를 속였다. 온갖 핑계로 빚이 늘어 갔다. 너는 그런 일쯤이야 이를 악 물고 이겨내려고 했다. 몸살이 나도, 여름에 식중독이 걸려 몸이 납처럼 변한 날도 일을 했다. 하루 빠지면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빚이 왕창 느는 일을 몇 번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빚은 더 늘어나 있었다. 백만 원이었던 빚은 이백 만원이 되고 이백 만원이었던 빚은 어느새 이천 만원이 되었다.
네가 고개를 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소리 지르는 일뿐이었다. 이거 놔! 놔주란 말이야! 너는 그들의 완력에 이끌려 따라가며 소리쳤다. 그 사람들은 너를 터미널 앞에 대기해둔 봉고차에 억지로 태웠다. 왜 이렇게 속을 섞여. 쉿, 가만있어. 빡빡머리를 한 사람이 너를 태우자마자 한쪽 손으로 너의 머리칼을 주먹으로 쥐고 흔들며 한쪽 손으론 양쪽 뺨을 번갈아 가며 때리면서 욕을 했다. 입술은 터졌고 피가 났다. 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담언니를 찾았다. 왜 그 사람들 앞에서 마담언니를 애절하게 찾았는지, 너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어쨌든 새벽에 감행하려던 너의 시간이 처참하게 무너진 상황에서 마담언니가 너의 어미라도 되는 양, 너의 입속에서 계속 마담언니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운전석 옆에 앉은 이가 뒤돌아보며 이미 거래가 다 끝난 일이라고 너에게 말했다. 덩치가 있으면서 복잡한 무늬가 섞인 검은 남방을 입은 그 자는 입가에 옅은 웃음마저 띠었는데, 하지만 그 웃음은, 상대에게 고통스러운, 그 상황을 즐기는 사디스트 같이, 너에게 전혀 우호적인 웃음이 아니라는 걸 너는 진작 눈치 챘다. 한참을 지쳐서 말도 잊은 채 가다가 너는 옆의 남자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너에게 돌아온 대답은 알 거 없다는 거였다.
쥐색 봉고차는 밤새 달렸다. 가뜩이나 계산이 느린 너는 몇 개의 톨게이트와 몇 개의 고속도로를 지났는지 깜깜한 밤에 차의 불빛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몇 개의 다리를 지났는지 해변도로를 지났는지 모른 채 몇 시간을 달려 끝없이 펼쳐진 평야 옆을 지날 때서야 너는 목적지가 어딘지 알기를 포기했다. 6시가 되어가자 날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해 희미하게 옆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땅을 너는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녀 딱딱하게 굳은 땅이 아니었다. 흙을 골라서 그 안에 뭘 심어놨겠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천연그대로의 흙이라고 할까, 냉동고에서 꽁꽁 얼린 통에서 먹기 좋게 스푼으로 수북이 아이스크림을 퍼내놓은 것처럼 착시를 일으켰다. 너무나 부드러워 거기에 맨손을 대면 물컹하고 땅속으로 손이 쑥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는 차라리 그 땅속으로 너의 몸을 집어넣고 싶었다. 마치 어미의 유방을 만지는 것처럼, 어미의 따뜻한 자궁 속에 들어간 느낌일 것 같았다. 너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려고 했지만 창문의 고리가 꽉 잠가 있어 열 수 없었고, 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한다고 해도 열어줄리 만무했다. 너는 그것이 밖으로 통하는 길인 양, 너의 핏기 가신 뺨을 차창에 바짝 더 밀착시켰다. 너는 그 길로 상상의 나래로 들어갔다.
너는 흙속에 들어갔다. 흙속에 들어가는 순간 너는 머릿속 상념이 싹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흙길은 길게 이어졌다. 너는 어미의 자궁 속에 들어간 상상의 시간을 좀 더 늘릴 수 있었다. 흙속에 들어간다면 너의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흙으로 메어질 것이었다. 차라리 다 메어지는 게 나았다. 너는 이제 지쳤고 저 사람들이 데려가는 곳은 뻔했다. 이제 너는 그런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동네 어린 양아치부터 조합 사람들, 특히 이 주사, 늙은이까지 싼 커피값으로 너의 몸을 유린하는 꼴이라니. 안산 주유소에서 숙식을 하던 중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자게 된 날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벽에 몰래 문을 따고 들어온 주유소 실장이 네 몸의 구멍을 찾아 쑥 들어온 순간부터 너는 쉬지를 못했다. 하지만 너는 이 실장이 알게 될까봐 경찰에 고발하지도 못했다. 네가 이 실장의 고양이를 죽게 만든 것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너는 생각했다. C시에서 다섯 번이나 소파수술을 받을 때도 쇳덩어리가 너의 몸에 들어와 자궁 안을 긁어댔고 한 번은 며칠 피똥을 싸는 바람에 마담언니가 큰 맘 먹고 C시에 단 하나 있는 매직 외과에 너를 데려가서 검사를 받게 할 때도 너의 몸에 쇳덩어리가 들어왔다. 앞으로 뒤로 입 속으로 귓속으로 콧구멍으로 무수히 많은 쇳덩어리와 성기가 너의 몸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차창에 뺨을 기대고 검은 풍경을 따라오다 보니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목포였다. 어시장입구에서 식당밥을 먹었다. 날이 밝았지만 날씨가 그리 좋진 않았다. 부둣가에 나와 앉아서 너는 그 사람들에게 담배를 한 대 얻어 피우며 바다를 바라보며 J군도로 가는 아침 배를 기다렸다. 그러고 있는 열여덟 살 너의 모습이 마치 서른 살을 훌쩍 넘겨버린 여인 같았다. 부두는 어디선가 도착한 배들이 짐을 싣고 부리느라 복잡했다. 한 시간여쯤 있다가 J군도로 가는 배를 타고 왔다. 배가 굉장히 컸다. 서서히 배가 육지를 벗어나 바다로 나아갔다. 여객실 밖으로 나가서 바닷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강풍이 몰아치고 빗줄기가 굵어졌다. 멀리 수평선이 흐리게 보였다. 강풍이 심해선지 아까 항구에서 날던 갈매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전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너는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
남자는 점점 처음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청자처럼 반들반들 빛났던 피부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축축한 푸른곰팡이가 낀 청동처럼 푸르죽죽해 보였다. 남자가 방안에 있을 때 하는 일이라곤 2층 창문을 살피는 일이었다. 창문을 열면 눈앞에 바로 바다가 펼쳐졌다. 남자는 군복 윗도리를 벗고 팔이 없는 런닝구만 하나 달랑 입은 상태로 소총만은 이리저리 소중하게 살피며 얼굴 닦는 수건으로 닦거나 윤을 내기도 했다.
J군도로 오기 전까지 전쟁에 참전했다고 남자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전쟁 중이라는 건지, 전쟁이 끝나고 J군도에 왔다는 말인지 너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다시 말했다. 세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너는 사는 일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자의 말에 일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탄으로만 싸우는 게 전쟁은 아니므로, 아니면 실제로 바다건너 육지나 다른 나라 땅에서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리 없는 전쟁일 수도 있었다. J군도에서도 어부들끼리 술이 취해 일어나는 다툼은 언제나 일어났다. 하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욕심의 소산일지 모르지만. 대부분 고기잡이배를 탔다. 각자 주어진 일들을 착실히 하는 손 안의 손금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너는 J군도가 네가 머무를 땅이 아니라고, 너에겐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마포나 다른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다녔다. 그런데다 마포집은 대문이 없고 앞쪽 돌담이 무너진 상태인데다 뒤쪽과 양 옆은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했다. 마포는 남자가 하루에 한 번씩 밖으로 나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주방에서 물병을 꺼내올 때 너와 마주치면 너를 붙잡고 낮에 어딜 다녀왔는지 몇 번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면 너는 언제나 부둣가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너는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다른 마포를 보고, 혹시 마포는 남자의 어미가 아닐까, 그래서 남자는 어미의 흔적을 쫓아서 여기 J군도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너는 이제 이 남자에게 익숙해졌다. 2층에서 바라보이는 바다도 항구도 들고나가는 배도 하늘 위를 나는 갈매기도 그대로였다. 너의 방안 풍경은 달라졌다. 언제나 소총 한 자루가 방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산책을 하고 온 남자는 군복 윗도리를 벗고 군복바지는 그대로 입은 채 런닝구 차림으로 소총을 매만졌다. 수건으로 소총을 닦거나 소총에 실탄을 장정하고 바로 옆에 세워둔 채 2층 창가에서 바깥을 살폈다. 너는 처음에 남자의 소총을 쳐다보기도 두려웠는데 차츰 소총이 볼수록 애착이 갔다. 마치 너를 지켜주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너는 때가 되면 남자에게 밥상을 올려다주고 빈 밥상을 내려다 놓았다. 밥상은 매끼 별 특별한 음식이 없었다. 늘 누런 알루미늄 냄비가 함께 올라왔는데 냄비 속엔 계란을 푼 북어국이나 바지락과 깍둑썰기한 호박이 든 된장찌개, 콩나물국이 반쯤 담겨있었다. 거기에다 밑반찬으로 어리굴젓 같은 젓갈 종류나 김치, 생선구이 같은 거였다. 마포집엔 주방 일을 보는 경상도할머니가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잔반 하나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었다. 너는 남자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는데 게걸스럽게 먹지도 깨작거리며 먹지도 않았다.
남자가 창가를 살필 동안에도 너는 벽에 기대 남자의 몸을 바라봤다. 그렇게 남자만 바라보다 보면 너는 남자와 한 몸인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다 꾸벅꾸벅 졸다가 옆으로 스르르 넘어져 잠들곤 했다. 너는 꿈속에서도 남자를 다시 만나곤 했다. 남자는 군복을 입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너에게 자신이 너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라고 말했다. 너는 원래 계산이 느린 편이라 손가락으로 세워보아도 금방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너는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깨고 나서 꿈속의 일을 기억해보려고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 한 가지는 그가 꿈속에서 아비의, 아비의 아비라고 한 말이었다. 너는 아비의, 아비의 아비이므로 마음속으로 그냥 아비라고 여기기로 했다. 진짜 아비일 수도 있었다. 세상에는 아비가 많았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의붓아비도 어미의 남편이었으므로 아비였고,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 했던 담임도 자신을 아비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의논할 게 있으면 하라고 했다. 아비로 여기고 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아비를 얻을 수 있었다.
*
장마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남자를 쫓아다니며 맞은 비로 인해 너는 고열이 며칠 지속되었다. 헛소리까지 질렀다. 너는 어미를 찾았다. 그런 걸 보니 헛소리가 분명했다. 어미, 라고 했다. 어미. 오죽하면 마포가 아스피린을 구해다 주고 찬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고 갔다. 너는 어미를 다시 불렀다. 너는 왜 있지도 않은 어미를 부르고 있는가. 아비의 꿈을 또 꾸었다. 그런 날이 며칠 지속되고 나서 병이 났다. 그래서인가. 삼투압의 작용처럼 양쪽의 균형이 필요한 것인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어미였다. 어미는 죽었다. 오래 전에 잊었던 아비였다. 의붓아비도 죽었다. 가출 이후에 의붓아비의 이 실장에 관한 소식을 들은바 없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미가 죽고 어미 없는 집은 집이 아니었다. 네가 가출한 이후로 어미의 영혼이 집으로 찾아와 울고 갔는지는 몰랐다. 너는 생각했다. 영혼이 울 수가 있을까.
수명이 다 된 형광등은 때탄 이불과 꽃무늬 낡은 벽지의 존재를 더욱 흐릿하게 했다. 너는 어미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너는 어미가 올 줄 알았다. 어미는 너의 이마를 짚었다. 너는 어미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어미는 말이 없었다. 너는 어미를 안고 싶었다. 너는 어미의 목덜미에 매달려 어미의 내음을 맡고 어미의 젖가슴을 만지고 어미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미의 형체는 보이지 않으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미는 진땀에 젖은 너의 몸을 보송보송한 흰 가제수건으로 닦아줬다. 얼굴에 흘러내려 달라붙은 붉은 염색머리도 뒤로 넘겨 가지런히 쓸어주었다.
어미가 아니었다. 남자가 너의 진땀이 베인 이마를 휴지로 닦아내고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너를 지키고 있었다. 악몽을 꾸다 잠을 자주 깨곤 하는 너는 남자가 온 뒤론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너는 꿈속에서 남자가 나타나 너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남자는 마포의 아들도 아니고, 진짜 너를 지키러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몸을 일으켰다. 네가 일어나 앉자 남자는 미음 그릇을 너의 앞에다 밀어 주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창가 원래 있던 자리로 갔다. 너는 미음을 한 숟가락 겨우 넘기며 오롯이 다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너는 아직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있었다. 꿈속에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한 명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남자와 비슷한 군복을 입고 비슷한 소총을 맨 군인들이 녹림여관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남자가 줄기차게 J군도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던 이유는 저 군인들에게서 녹림여관 2층에 머물던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였을까. 군인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너는 파스타치오 그린 색으로 칠해진 녹림여관이 괴물 같아 보였다. 너는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녹림여관이 있는 언덕을 내려왔다.
할머니! 누군가 너의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뒤돌아보았다. 서해?, 아니 서애 아닌가?, 라는 말이 너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는 학교 친구들이, 심지어 선생님들까지 서애를 농담처럼 “서해”라고 부르며 놀린 기억이 났다. 그러다 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 다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 안개가 온통 뿌옇게 끼여 똑똑히 보이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몸매에 유난히 숱이 많고 까만 머리카락, 분홍색 입술과 하얀 얼굴,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 서애, 서애가 맞았다. 할머니! 분명히 서애가 저기 서서 너를 보고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너는 순간 당황했다. 서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하지만 너는 곧 정신을 차리고 서애의 목소리를 따라 부둣길을 달려갔다.
서애는 할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다. 남에게 당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상대를 짓밟아버리겠다고 했다. 서애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친구인 너까지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네게 온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너는 서애를 쫓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서애는 언제나처럼 너에게서 또 멀어졌다. 바다의 공기를 너는 흡흡 숨통 속으로 삼키며 모래 언덕을 몇 개나 넘었지만 서애는 너를 앞질러 내리막길을 향해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할머니라니! 너는 얼굴에 두 손을 대고 눈과 코, 이마와 볼떼기를 만져보았다. 굴곡이 진 주름이 만져졌다. 너는 그 자리에 서서 손등을 봤다. 불뚝 튀어나와 탄력 없어 보이는 핏줄과 희미한 갈색 검버섯이 손등 여기저기에 피었다. 그새 억겁(億劫)의 시간이라도 흘러간 것인가. 서애야! 서애야! 너는 서애를 부르다 잠을 깼다. 눈을 떠보니 철모를 쓴 남자가 너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는 낡은 군용가방을 어깨에 메고 소총을 들고 있었다.
가세요? 너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는 몸을 일으켰다. 대답대신 남자는 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앞쪽 무너진 돌담 옆으로 까만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마포의 지프차다. 남자는 너를 차에 태웠다. 어깨에 메고 있던 군용가방은 뒷자리에 던지고 들고 있던 소총을 너의 무릎 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마포집”이 있는 언덕을 타고 내려와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는 협소한 도로 쪽으로 차를 돌렸다. 도로의 양편으로는 밭이 펼쳐져 있었다. 부둣가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하지만 차를 다시 뒤로 돌리기엔 길이 좁았다.
거의 미로 같은 섬의 도로를 30분 정도 돌다가 검은 돌이 박힌 돌길로 들어섰다. 중앙으로 바로 바다가 나타났다. 지프차는 멈출 사이도 없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길을 질러서 배가 있는 부둣가로 가려는 것인가. 바다 위를 도로처럼 달리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 쯤 다가가던 차는 물속에 점점 빠져 들었다.
*
차창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들어와 차안을 채웠다. 지프차는 점점 바다 밑으로 잠겨갔다. 그런데 바다가 더 깊어질수록 바다 속에 은세계가 펼쳐졌다. 더 닦일 것도 없이 반짝거리는 굵은 모래가 깔려있고 예쁜 무늬의 물고기들이 꽃잎들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바닷물은 차가웠다. 입과 코로 스며든 물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그래 난 괜찮아, 죽어야 한다면 내 몸은 이대로 저 물고기들처럼, 저 꽃잎들처럼 춤을 출 거야. 내 온몸으로 받아들일 거야. 이 차가운 바닷길을 통해서 엄마가 있는 저 멀리 하늘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어. 그게 곧 다시 사는 게 될 테니까. 너는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있는 남자를 어떻게 조치해야 되었다. 고개가 앞으로 재껴져 정신을 잃은 남자는 온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너는 남자에게 손을 뻗어 고개를 바로 세워 의자 등에 기대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는 스무 살 앳된 얼굴이었다. 꿈에서 너의 아비의, 아비의 아비라고 했던 남자가 현실에서는 아들 같았다. 모성을 느끼는 순간 너는 처음 목포에 도착해서 느꼈던 것과 똑같이 서른 살을 훌쩍 넘긴 여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너는 옆으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를 귀로 넘겼다. 너는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너의 무릎 위에 올리고 여전히 흔들림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과 반듯한 이마를 쓰다듬었다. 너는 너의 자궁 속에 머물다 간 아기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아기, 내 아기, 내 아들,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줄게. 너는 숨을 멈춘 남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소총으로 지프차의 앞유리를 힘껏 쳤다. 몇 번이나 내리친 끝에 겨우 유리를 깰 수 있었는데 가운데 몸 하나 나갈 정도의 동그란 틈이 생겼다. 소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C시에서 타고 온 쥐색 봉고차에선 소총이 없어서 네 스스로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유리가 삐죽삐죽 깨져 동그랗게 생긴 구멍으로 바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지만 차 안엔 바닷물이 거의 차 있었으므로 그리 큰 충격은 되지 않았다. 너는 깨진 유리 사이를 비집고 나오다 유리에 긁혀 팔과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나오자마자 너의 몸은 물속에 붕 뜨면서 엎어진 채 낙하산이 펴지듯 가로로 길게 펴졌다. 그대로 둥둥 바다 속을 떠다녔다.
너는 몸을 인어처럼 헤엄쳐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려 했다. 그러다 지프차가 바닥에 비스듬히 가라앉은 채 검은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그 앞에 가 동그란 구멍 사이로 남자의 모습을 찾았다. 남자의 청자 같았던 몸은 사라지고 하얀 백골만 남아 있었다. 너는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너의 머리칼을 보았다. 그것은 붉게 염색한 웨이브 진 머리가 아니었다. 머리는 그새 더 자라 생머리로 길게 늘어졌다. 백발이었다. 울긋불긋 산호가 지프차가 있는 왼쪽 바다 속에서 빛났다. 너는 그쪽으로 몸을 움직여 갔다. 검은 물풀 사이로 하얀 빛이 여기 저기 났다. 너는 가까이 가 보았다. 물풀 사이, 사이로 백골이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녹슨 철모와 수통, 밑창만 남아 군화의 흔적만 남은, 모두 다 남자와 같은 아들들이었다. 너의 아비들이기도 했다. 아비의, 아비의 아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얀 스카프가 그 위를 팔랑거리며 떠 있었다. 너는 그 스카프가 서애의 스카프라는 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서애” 라고, 어미의 공방에서 본 것 같이 예쁜 오색실로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서애의 붉은 스카프는 너의 머리칼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출구 없는 깊고 검은 바다 속에서, 네가 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오직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