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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
무진당 조정육
“옛날에 제가 어렸을 적에요. 형아 몰래 책상 밑에 숨어서 쵸코렛을 먹고 있었거든요? 근데 할머니가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서 막 저를 불러요. 근데 제가 대답하면 형아한테 들켜서 쵸코렛을 뺏길 것 같아서 대답을 안하고 조용히 있었는데요. 할머니가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가지고 저 줄려고 부르신 거예요. 할머니를 생각할 때면 왜 항상 그 때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둘째 아이가 느닷없이 할머니 얘기를 꺼낸다.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초등학교 때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 기억이 생생한 모양이다. 아직도 내 눈에는 어리게만 보이는 중학교 2학년짜리 아들이 어린 시절이란 단어를 써도 되는가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오래된 미래』의 다음 구절이 떠올랐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개인들은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안정감을 느낀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중에서-
『오래된 미래』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티베트 고원 위의 오래된 문화의 지방인 라다크에서 16년 동안 살면서 라다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깊이 찬미하면서 쓴 책이다.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인 저자는 처음에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라다크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혹독한 기후와 가혹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라다크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생태적 지혜와 철학을 연구하다보니 16년이 흘렀다.
그녀는 라다크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와 가족관계와 공동체의 관계의 질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주머니, 아저씨, 비구, 비구니’ 등을 포함해서 그 누구나가 ‘몹시 상호의존적인 공동체에 속해 있어서 아주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아이는 이웃집의 아이일 수 있었고, 동네 전체의 아이가 되었다. 옆집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가 되고 마을 공동의 할머니였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 그 곳이 라다크였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허무가 아니고 약한 것이 부끄럽지 않은 곳. 그 곳이 라다크였다. 그곳에서 작가는 우리가 지향해야 될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미래를 발견했다.
김홍도가 그린 <길쌈>을 보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에서 발견한 가족 간의 상호의존성과 안정감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베틀에 앉아서 북질을 하고 있는 아낙네와 뒤로 돌아앉아 솔로 풀을 먹이고 있는 아낙이 주인공이다. 북질을 하고 있는 아낙 뒤에는 아낙의 시어머니인 듯한 할머니가 손주를 업고 있고, 그 곁에는 할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듯한 큰 손주가 할머니의 허리끈을 붙잡고 있다.

김홍도, 길쌈, 종이에 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입을 굳게 다문 아낙네는 일에 몰두하느라 아이들을 돌 볼 겨를이 없다. 일하는 여성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일 것이다. 요즘 여성들이 자식 낳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아이들을 마음 놓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서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이를 맡아준다면 여성들은 안심하고 신명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쌈>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할머니의 존재이다. 손주들을 돌봐줌으로써 며느리에게는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고 손주들에게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존재가 바로 할머니다. 게다가 손주를 돌봐줌으로써 할머니는 나이 들어 쓸모없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는 대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는 만족감과 당당함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이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서구적인 생활방식으로 바뀌면서 사라져버렸다. 라다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더불어 결코 사라져서는 안되는 라다크의 아름다운 전통마저 급격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개발과 진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서구 문명은 외부세계에 대한 경제적 의존과 문화부정, 그리고 환경파괴라는 부정적인 산업사회의 폐해들을 라다크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 결과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낯선 부작용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끝없는 소비 경쟁과 소외감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외로움. 늙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등이 마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인간의 행복은 넓은 아파트와 고층빌딩과 비싼 차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낡았다고 버린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라고 일깨워주는 것이 『오래된 미래』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장조화의 <할아버지한테 신문 읽어주기>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오래된 미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한테 어린 손녀딸이 신문을 읽어드리고 있다. 글자를 깨우친 지 얼마 안 된 손녀딸이 자랑스럽게 신문을 읽고 있다. 그런 손녀딸의 얼굴 위에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묻어 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어떠한가. 할아버지는 지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신문을 읽어주는 손녀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손녀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 끝에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함께 얹혀 있다. 할아버지와 자식과 손주가 함께 사는 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그림 어디에서도 쓸쓸한 아파트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서양 노인네의 비극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둘째 아이가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아무도 몰래 자신을 위해 사탕을 숨겨서 주었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은 그렇게 할머니한테 사랑받았다는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린이집이나 학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안온함이다.
아이들은 엄격한 서구식 잣대를 적용하여 정해진 시간에만 젖을 먹이는 서구식 사고로 무장한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 엄마와 함께 자겠다는 아이를 매몰차게 딴 방에 재우는 방식에서 건강하게 자라지 않는다. 씻지 않은 손이지만 손주에게 먹이기 위해 며느리 몰래 손바닥에 꼭꼭 감추어서 주는 불량식품을 먹고 아이들은 자란다. 그 손바닥 안에 위생은 없을지 모르지만 손주를 생각하는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전통 속에는 현재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다. 허름하고 낡았다고 생각하는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 그 속에는 무한한 보물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2008년 7월 24일)

장조화, 할아버지에게 신문 읽어주기,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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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거사님~수고가 많으세요. 언제나 감사~^^*
초콜렛 하나 사주면 되요. ㅋ 나는 365일 발렌타인 데이라서 선물함 뚜껑을 항상 열어둡니다요. ㅎㅎ
숨겨 두었다가 혼자 몰래 빼 먹는 곶감같은 내음새가 나는 무진당님 글 ㅎㅎ이렇게 표현하면 나도 초코레트 줄라나
ㅎㅎㅎㅎㅎ. 아무래도 오늘은 쵸코렛 사러 나가야 되겠습니다. 곶감이 나오려면 아직 좀 더 기다려야 되거든요. ^^*
다정하게 한국의정서......티베트를 생각하면 ....언제나 순수함이그대로 우리의 옛모습......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도 언젠가 할머니가 되면 손주들에게 따듯함을 주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