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 대구 마루금 산악회 펌)
백옥회원 및 게스트 포함 21명
어디를 : 금남정맥 5구간 (덕목재 ~ 함박봉 ~ 황령재 ~ 천호산 ~ 천마산 ~ 엄사초교 ~ 국사봉 갈림길 ~ 향한리 무상사 주차장)
실거리 19.6km
날씨 : 대체로 맑음. 바람 가득.
하이패스 달린 차량만 이용할 수 있는 양촌 i.c를 빠져 나온 것이 8시 10분경.
서대구를 출발한 지 2시간을 넘어서였다.
오늘의 들머리는 덕목재 친환경붙박이장 공장 정문 부근에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시그널이 붙어있다.
호남정맥을 넘어오지 못한 정맥길은 연이어 한번 더 68번 국도에 한번 더 막혀버린다.
짤려진 산허리를 오르니 커다란 송전탑이 마루금을 지키고 있다.
아슬아슬한 정맥길의 목숨은 마루금을 파헤쳐 만들어 놓은 모 복지재단의 노인복지전문병원 건물에 이르러서는 더욱 처참한 몰골이 되어 버린다.
짓다가 만 3층 짜리 폐건물은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지하에 만들다가 만 저수고 같은 용도의 건물은 빠지면 혼자 힘으로는 나오기 힘든 구조였다.
정맥 상의 길에는 음택이나 양택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는 풍수학자 들의 이야기가 있음에도
이곳에다 건물을 지어야 했을까?
일제시대 정기 어린 산에다 쇠말뚝을 박은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하는 사람들이
정작 정맥 길 훼손에는 무덤덤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어야할까?
이러한 정맥길 훼손은 계룡시에 이르면 아예 길이 없어지고
정맥길에다 아파트, 학교 등의 집단시설이 들어서게된다.
정부, 지자체 할 것없이 나서서 무분별한 개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게 어디 금남정맥 한 곳의 문제이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그런 개발을 하자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주제여서 괜시리 흥분했다.
출발 20여분을 지나 덕목재에서 1km 정도 떨어진 깃대봉에 도착을 했다.
약 200m 정도의 고도를 쳐올린 셈이니 어지간히 땀도나고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깃대봉 정상에는 별 다른 표지기는 없었다.
서래야님이 만든 코팅 된 안내문 한장만이 여기가 깃대봉임을 알려주었다.
주위는 잡목이 우거지고 정상에도 잡목과 풀이 많아 별 다른 경관은 보이지않았다.
깃대봉 우측으로 이어진 내리막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면 임도가 나온다.
임도 가운데 사유지임을 알리는 경고문이 부착된 바리게이터가 서 있고
좌측 편 산으로 시그널이 붙어있다.
함박봉.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암리와 벌곡면 한삼천리에 걸쳐 있는 곳이다.
높이 404.4m
산의 모양이 함지박처럼 생겼다고해서 부쳐진 이름이 함박봉.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너른 활공장이다.
이곳에서 활공을 하다가 사고도 종종 나는 모양이었다.
한구석에 추모비가 놓여있었다.
논산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함박봉에서 한참을 쉬었다.
황령재라고도 불리는 황룡고개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 어디엔가
함박산성 또는 황령산성이라 불리는 토성이 있다.
백제 때 구축한 산성으로 주위가 약 300m에 이른다고한다.
백제군의 중요한 산성이었으며, 삼국시대 말기 신라와 백제 간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황령재로 내려서는 길은 두갈래이다.
우측은 선화감리교회 삼천리교육원, 좌측은 황령재로 내려서는 길인데,
황령재마루에는 황산벌전적지 안내문이 있다.
황룡재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연산면 연산리 및 신암리로부터 벌곡면 한삼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남쪽으로 함박봉이 있고 북쪽으로 대목재가 자리잡고 있는 고갯마루이다.
현재 이차선 20번 국도가 통과한다.
황산벌 전적지 안내문이 거창하게 걸려있다.
제법 너른 공터라 대형차를 몇대 정도는 주차하고도 남을 만한 곳이다.
간이 화장실도 있다.
황룡재에는 전설이 있다.
아마도 논산, 계룡 근처에 광산 김씨 집성촌이 있는 모양이다.
광산 김씨 집안에 얽힌 이야기이다.
"옛날 광산김씨 한 사람이 연산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승 한 분이 찾아와서 '당신의 어머니는 모 월 모 시에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하고는 어디로인가 가 버렸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모 월 모 시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날따라 그 스님이 나타나서 대문 밖에서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은 묘 자리를 잡아줄 것을 청하자 스님은 '범바위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단 내가 황룡재를 넘어 가거든 땅을 파시오'하고는 바삐 떠나갔다.
그러나 인부들은 장례를 서둘러야 한다고 땅을 파기 시작하니 왕벌이 나와 스님이 간곳으로 날아가 그를 쏘았고,
스님은 황룡재를 넘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 후 문중에서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미륵불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송불암 미륵불이다."
황령재에서 우측으로 잠시 따르다가 산으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진행을 한다.
여기서부터는 상당히 진행하기 편한 곳이다.
길은 넓고 안내표지기도 많이 있어 별 무리없이 진행을 할 수 있다.
천호산까지 무난하게 진행을 한다.
천호산의 옛이름이 황산이다.
황산벌 전투가 있었던 황산의 이름이 이곳에서 유래를 한다.
황산이 천호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고려 태조인 왕건과 관련이 있다.
후백제의 신검을 이곳에서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하자 하늘이 보호했다는 의미로 천호산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된다.
충청남도 논산시의 연산면 동쪽에 위치하는 산이다(고도:366m). 서쪽산록에 개태사가 소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연산)에 "황산(黃山)은 일명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 거리에 있다.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지』(연산)에 "원래 황산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태조가 천호산으로 개칭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연산)에 '천호산'이라는 지명으로 나타나며,
"산 안에 개태사(開泰寺)가 있다.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 있었다. 절은 지금 허물어져 없어지고 다만 옛터만 남아 있다.
고려 태조가 백제에 승리하고 친히 원문(願文)을 짓고 썼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지켜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께서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담당 관리에 명령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 합니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 "천호산에 고운사(孤雲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되어 있고,
또한, "천호산 안에 있던 고운사가 대둔산으로 옮겨 신고운사(新孤雲寺)가 되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하며 넉넉하고 성대한 모습은 충청도에서 으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호산 [天護山, Cheonhosan]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2, 국토지리정보원)
편안한 길이 이어져 천마정에 도착을 했다.
어라! 천마정이 해체되었네.
보수작업중인가?
사연을 알아보니 이러하다.
2013년 7월 금암동 천마산 정상의 팔각정자(천마정) 보수공사를 진행하던 중
내부 목재의 부패가 심각하고 기존 자재의 재사용이 불가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긴급 철거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철거이후 사유지 문제 등이 개입을 하면서 아직 복원을 하고있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옆의 금바위는 긴긴세월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시대 연산현 두마면에 속한 이곳은 금바위의 이름을 따서 동네이름도 금암이었다.
1998년 계룡시 신도시 사업에 따라 행정 업무 지구, 상업 지구, 주거 지구 등을 위한 약 30만평의 시가지 조성사업이 완료되었고,
현재까지 시의 행정, 상업, 주거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새롭게 조성된 부지에 계룡출장소 신청사를 건립하였고
2000년 두계리 두마면사무소로부터 금암리 신청사로 시청청사를 이전하였다.
체육 시설을지나 하산길을 이어지고
지구대를 지나 도로 맞은 편애 양정슈퍼 간판이 달린 골목 사이 농협 앞으로 지나간다.
양정고개 전설따라 삼천리~
엄사면 엄사리에 「양정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옛날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는데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서로 모함을 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니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이 때 경상도에 사는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읽어 크게 출세할 것을 결심하고 노력하였는데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보고 책을 팽개친 채 출세할 것을 포기하고 유람길에 나섰다.
그는 여기 저기 발길 닿는대로 다니면서 세상을 살폈다.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저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아직도 조정에서는 싸움질 뿐이니 걱정이로구나." 한탄하면서
"이거 나라에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나야 백성들이 살지, 큰일이구나."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와서 보니 딴 세상 같았다. 차
라리 이곳에서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었다.
그는 한 절간에 머무르면서 며칠간을 쉬다가 하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한 장수가 나타나더니
"그래 쓸만한 놈들은 세상을 피하여 산속에 쳐박혀 있고 몹쓸 놈들은 임금님 옆에서 서로 제가 잘났다고 야단들이니, 허참. 세상 잘 돌아가는 구나."하고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수 앞에 나가 앉으며 "대체 당신은 누구요? 누구시온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하고 물었다.
그 장수는 "나는 충청도 사는 장수인데 당신을 계속 따라다니고 있소. 당신은 여기 있을 사람이 못되니 어서 빨리 충청도에 있는 계룡산으로 가시오. 그때 내가 말하리다."하고 사라졌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꿈속에 나타났던 그 장수는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여장을 차리고 충청도 계룡산으로 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서 지금의 두계고을에 다다르자 밤이 어두워졌다.
피곤한 여독을 풀기 위하여 그 근처에 있는 주막집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는데 꿈속에 먼저 나타났던 그 장수가 또 나타났다.
"잘 왔소. 그런데 이것 참 큰일이오. 이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꼭 정씨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질 않고 있고. 그것도 정씨 한 사람이 아니라 정씨 여덟 사람이 나와서 이 세상을 평정해 놓고 그 여덟 사람 중 두 사람이 싸우다가 한사람이 죽어야만 이 나라가 평온해 지는데 여덟사람의 정씨도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큰 일이요." 근심스러워 하면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 여덟 사람의 정씨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오?"하고 그 선비가 묻자
"그걸 알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겠소, 누구인지 한 사람도 모르오."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여기로 오라고 했소?"하며 선비는 장수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야 당신은 정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단 한가지 알려 드리리다.
정씨 두사람이 나타날 때에는 금강 물줄기가 변하여 논산 강경으로 흐르게 될 것이요. 웅진땅 계룡산 밑을 흘러서 말이요."
"하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하고는 그 장수는 또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꿈을 깨고난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한번도 아닌 두번씩이나 나타난 그 장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하며 생각해 보아도 알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온다는 정씨는 과연 언제 나타난다는 것이냐?"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그 선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도안에 정씨가 도읍한다면 틀림없이 이 고개야말로 정씨가 나타날 고개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곳에서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정씨는 나타나지 않고 이제는 노잣돈까지 떨어져서 아주 이고개 아래에 뗏집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생황은 어려움이 더해갔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여덟 정씨의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줄 몰랐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다. 꿈에 나타났던 그 장수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이제 늙어서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느날 그 선비는 자기가 며칠 안가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들리는 초동들에게 기다림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고 "내가 죽은 후라도 정씨가 나타나면 내가 기다리다 늙어 죽었다고 꼭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비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양정고개에서 정씨 두 사람이 나타나서 왕관을 놓고 싸워야 할 고개라고 전하며 기다리다 지친 어느 선비의 한이 맺힌 고개라고도 한다.
지구대에서 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면 양정슈퍼가 보이고, 다시 농협 앞을 지나 굴다리를 지나고,
철도위의 육교를 건너, 암사초등학교 좌측 담장을 끼고 가다가,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우측으로 턴을 하여, 그때그집 이라는 식당 앞을 지나 보이는 산으로 진행을 한다.
산밑에 도착을 하면 옹벽 좌우측으로 진행하여 산으로 오른다.
우측은 로프가 달려있는 가파른 길이고, 좌측이 많이 다니는 정상 등로이다.
등로는 편안한 동네 뒷산길이다. 진행중 우측으로 펜타곤 건물을 닮은 계룡대 모습도 보인다.
체육시설 놀이시설을 만나면 긴계단이 시작되는데 이곳에서 좌측 항한리 무상사주차장으로 하산을 하였다.
무상사 주차장까지는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승용차는 체육 놀이시설 바로 앞에까지 진입을 할 수 있다.
외국인스님들이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닦는 수행도량이 바로 무상사다.
무상사에서는 외국인 비구스님뿐 아니라 비구니 스님들이 한국불교의 전통대로 일년에 두 번씩 동안거와 하안거 3개월씩 참선 결제에 들어간다.
또한 승려가 아닌 외국인들도 일주일 단위로 결제에 참여할 수 있다.
결제중에는 방문객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무상사는 외국인스님들에게 한국선불교를 전수하고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의 선수행을 가르쳐주고 체험할 수 있기 위하여
2000년 3월 숭산스님의 원력으로 개원한 외국인 전용 사찰이며 국제선원이다.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관계로 요사채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으며, 각 방마다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무상사 주변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량이다.
현재까지 30여개국 600여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방문하여 참선 수행을 하였다.
무상사에서는 한국어을 사용할 수 없다.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이 입방하는 관계로 영어 이외에 러시아어, 폴란드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가 통용된다.
참선법회도 매주 봉행하고 있으며, 무심스님이 주관하는 참선법회는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법회는 영어로 진행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상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하산을 완료하고 오늘 산행 중간에 들린 신도반점으로 이동을 한다.
미리 주인장에게 먹을 음식과 씻을 곳을 부탁드리고 이동을 하니
울 일행이 편히 쉴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내어주신다.
서비스로 짬뽕국물, 군만두 등을 주시고, 음식값까지 25,000원 깎았다.
넉넉하고 맛있는 음식에 감사드리면서
신도반점 네비정보를 올린다.
신도반점
042-841-8466 중화요리
충남 계룡시 엄사면 양정향한길 16-5
대구로 돌아와서 내당 홈플 앞 어느 식당.
다음주 축하산행 가지 못하시는 안가님이 한잔 사겠다고하여 들린 어느 곳에서
한잔 더.
마눌님까지 호출하고나서야 2차를 마쳤다.
자리를 파하고나서 거리에 나서자 습기 묻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풍의 간접 영향에 들었다고 한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또 다시 가을이었다.
|
첫댓글 해박한 설명에 재미가 넘쳐납니다. 오랫만에 본 감포님의 산행기 즐감하였습니다. 감사요~~~
오랜만에 함께해주신 산행 반가웠습니다.
다음에도 또 놀러오세요. ^^;;
산행기를 산행대신해서...
잘 보고 갑니다. 늘.....
구간이 짧아서 땜빵하시기는 좋겠더군요,
계룡시에 먹거리도 넘쳐나고 큰 부담없이 땜빵하셔도 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