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분단의 너울, 연좌제
(2000년 9월 17일 방송 제24회)
1. 프롤로그
연좌제 連(緣)坐制 ;
개인의 행위로 본인 이외의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에게 형사처벌은 물론이고 그밖에 불이익처분을 하는 제도. (다음 백과사전 검색)
이문열(소설가) “나는 아버지가 월북할 때 겨우 세 살이었고, 얼굴도 기억 못하고 아버지에게 무슨 감화를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좌제로 인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인생의 모든 길이 다 막혔었다.”
박동운(81년 진도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 “니그 애비가 공산당이니까 너도 그렇고 손자 대대로 그렇다. 니 집안은 모두 공산당이다... 이런 식이었죠.”
이계준(함평 양민학살 피해자) “5공 때 연좌제 폐지란 말이 나왔지만 이는 하나의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88년 임용과정에서 내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지연(방송인) “직장에서 신원조회를 할 때마다 늘 위축되었던.... 검은 그림자가 늘 어느 순간에 와서 힘들게 하고...”
이광달(조각가) “이건 애들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픔을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묻어 놓고...”
역사적으로 연좌제는 갑오개혁 때 폐지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적의 3대를 멸하던 이 무지막지한 연좌제는 1894년 6월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하지 마라(罪人自己外緣坐之律一切勿施事)”고 한 일종의 사책임개별화원칙이 칙령으로 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년 인습이 칙령 하나로 쉽사리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일제시대에 일제가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척결하려는 과정에서 더욱 악화되었을 것임에 틀림없고,. 해방 후 이데올로기 격돌의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가장 나쁜 방식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지난 반세기 한반도를 미만(彌滿)한 유령이 된 연좌제. 많은 다른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이를 분단과 냉전의 업보로 보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6.15 남북 공동선언의 잉크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24회 ‘분단의 너울, 연좌제’를 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반세기 업보, 양민학살 유족들의 연좌제
분단, 그리고 전쟁.
반세기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6.25 전쟁은 우리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숱한 민간인 학살의 대부분은 아직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보도연맹이니, 통비분자니 혹은 예비검속이니 하는 갖가지 명목으로 이 땅의 곳곳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들 중의 일부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4.19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대구에서 만난 조각가 이광달씨는 피끓는 심정으로 말했다. “6.25 때 예비검속이 있었는데 군경이 아버님을 잡으러 왔다가 아버님이 숨어서 찾지를 못하니까, 그들은 대신 우리 어머님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갔습니다. 어머님은 그 후로 다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울음) 내가 참 한이 맺힌 겁니다. (어머니 사진 등을 보이며) 이걸 내가 40년 넘게 갖고 있었습니다. 4.19 나고 유족회 차를 타고 방방곡곡 다녔습니다. 아버님과 저하고 유족회원분들하고 문경이니 가창리니 현장조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원식씨는 6.25 이후 10년이 지나 4.19 직후에야 비로소 아내의 유해를 수습하러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유족회 활동에 나선 것이다. 그는 자기 대신 끌려가 죽은 아내의 유해라도 수습하고자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는 아내의 유골과 비슷한 형상을 볼 때마다 자책감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규모 학살 현장에서 유해가 발견될 때 유가족들은 오열했고, 이것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당시 유족회는 학살자 처벌과 위령제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규탄 대회를 가졌다.
이와 관련 서중석 교수는 “4.19로 상당한 자유가 주어진 가운데 6.25 공간에서 생당한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는 곧 이어 발발한 5.16으로 좌절되었다. 극우반공세력은 4.19 직후의 그런 유족회 활동을 상당히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가 불안정했다. 용공세력이 득세했다’라며 오히려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5.16 후 반공체제의 강화를 내세운 군사정권은 피살자 유가족들의 활동을 반국가 행위로 규정하고 이들을 혁명재판소에 회부한다. 대구지역에서 유족회 활동을 주도했던 이원식씨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다행히 무기로 감형된 이원식씨는 오랜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혼자의 몸으로 엄혹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이광달씨를 엄습한 것은 연좌제의 고통이었다. 유족들은 신원(伸寃)은커녕 새로운 제도적 폭압 앞에 놓인 것이다.
“오랫동안 아버지 옥바라지하면서 연좌제에 해당하는 쇠사슬 없는 세상을... 내 혼자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고...그야말로 절대 고독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살았다. 흐느낌) 제가 밤이 되면 새벽에 형사들이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공포증을 느끼고, 낮에는 이 악마 같은 빛들이 싫어서 저는 골방에 틀어박혀 내 어떤 세계를 생각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오열)..”
3. 제주 4.3과 연좌제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 4.3사건은 48년 5.10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대와 이들을 소탕하려는 토벌대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이때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민의 70%가 희생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대량 살륙의 와중에 심지어 가족 대신 죽은 경우도 있었다. 이를 ‘대살(代殺)’이라고 한다. 토벌대가 집안의 장정을 찾았는데 그가 없으면 아버지나 어머니, 형 등 직계가족이 대신 희생되었다는 얘기다. 그때의 악몽은 아직도 이들을 괴롭힌다.
4.3때 이른바 대살로 아내를 잃은 이형욱씨는 50년 동안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혼자 살고 있었다. “내가 산에 갔다고 그러니까 아내를 대살시켜버린 거 아닙니까? 심정이야말로 못하죠.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대살은 연좌제의 극단적인 형태다. 말하자면 본인이 산속으로 도망갔거나 본인이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당사자를 찾을 수 없다고 그 부인이나 자식 심지어 부모조차도 죽이거나 처벌하는 경우다.
6.25는 제주에 또 한 번의 학살을 몰고 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제주도민 800여명을 이른바 예비검속으로 처형했는데. 이도영박사(<죽음의 예비검속> 저자)의 아버지도 희생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는 4.3의 와중에서는 용케 살아 남았다. 하지만 1950년 8월 경찰의 대대적인 예비검속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그리고 250여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찰에 의해 모두 총살되었고 서귀포 부근 섯알오름에 버려졌다. 피학살자들의 유가족에게는 사상불순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바로 이도영씨의 경우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받기 위해서 신원조회를 내니까 발령이 안 났어요. 나중에 몇 달 후에야 발령을 내면서 장학관이 얘기하더라구요,. 당신 아버지 사건을 아냐고. 그때부터 내가 연좌제 해당자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죠. 그런데 군대를 가니까 완전히 나를 짓밟더라구요.” 그는 성장하면서 아버지로 인한 갖가지 불이익으로 여러 번의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마침내 그는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왜곡되고 묻혀버린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에 나섰다. 미국 국가기록청(NARA)까지 가서 자료를 찾고 비밀문서를 뒤졌다. 아버지 사망의 진상을 알기 위하여 김종필 전 총리(6.25 당시 국방부 정보과 근무)를 단독직입적으로 찾아가 맞대거리를 한 집념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런 작업의 결과로 <죽음의 예비검속>이라는 책을 내기도 하였다. 그의 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만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였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사상을 전수받을 수 있는가? 근데 왜 내가 성장한 후에까지도 나의 취직이라든지 군생활이라든지 해외유학이라든지 이런 것에서 나까지 연좌제로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가.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한 것이다...”
학살이 있은 지 6년 뒤, 유족들이 방치돼 있던 유골을 수습해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묘’라는 묘비명을 세웠다(유골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조상은 백인데 후손은 하나라는 뜻으로). 하지만 유족회를 만들고 위령비를 세우면서 그들은 당국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5.16후에 비석을 없애라는 상부 지시때문에 유족들한테 상당한 압력이 가해졌다. 비석은 여러차례 수난을 당했고 나중에야 겨우 복원되었다. 서슬 시퍼런 총칼 앞에서, 깨진 비석처럼 무참히 조각났던 유족들의 삶.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예비검속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4.19이후 관계당국에 탄원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유족회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철저히 통제됐다. 이들은 경찰의 내사 대상(백조일손회 동향 내사지시 문서 확인)이었으며 연좌제는 유족의 활동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최근에 공개된 한 자료(당시 刑殺者 명부 등)는 4.3 당시 경찰에 의해 피학살자의 명단이 작성됐으며 여기에는 사망자는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인적사항까지 실려 있음을 보여준다.
유족들은 이렇게 한번 만들어진 명부들이 이후 두고두고 연좌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경찰서 예검자 수사부’를 보면 경찰에서 주민들에 대해 자의적으로 등급 판정을 내리고 이에 따라 집행했음을 알 수 있다. (사상에 따라 A, B, C, D 4등급으로 분류. A는 사상이 애매모호한 자, D는 극히 위험한 인물...C,D는 암매장 또는 수장 처리...이상은 1950년 8월 4일 당시 제주도 내 각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840명에 대한 분류기준.)
문제는 이런 것들이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유족들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이도영씨는 말하기를 “그게 경찰 문서니까 지금도 반드시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70년대에 외국유학을 가려고 할 때 신원조회 때문에 알아보니까 당시 치안본부 경찰 제 2인자가 직접 전화로 제주도 경찰국을 부르더라구요. ‘그때 기록에 뭐라고 되어 있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사상불온으로 시국에 처형되었음’ 이렇게 되어있다.”고, 거기서 불러줘요. 이런 식입니다. 지금 그게 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땅속에 파묻었습니까? 공중으로 날려보냈습니까? 분명히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피해의식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근거있는 불신과 울분이다.
한편 ‘제주 4.3도민 연대’가 최근 실시한 연좌제 관련 설문조사에서 유족들의 피해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 4.3 유족회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설문조사 결과 이들은 연좌제로 인해 유형무형의 고통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4.3유족들의 약 86%가 연좌제의 피해를 보았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신원조회(로 인한 신원특이자 분류)가 60%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고, 그 다음으로 일상생활에서의 감시와 각종 임용 및 입학시험에서의 불이익...의 순으로 나타났다. 유족들은 “4.3 때 부모형제 잃고 재산 잃고 교육도 못 받은 것도 서러운데, 연좌제로 자기 자식까지 이렇게 피해를 본다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는가. 50년 동안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나라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민족적인 측면에서도 차별을 하는 것 아닌가....”라고 탄식한다는 것이 ‘제주 4.3 도민연대’ 관계자의 말이었다.
4. 월북자 가족들의 연좌제
2000년 8월 15일. 6.15 선언 이후의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북한 국적의 민항기가 사상 처음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그리고 서울을 찾은 북측 방문단이 박수 속에 상봉장에 입장했다. 50년만의 만남이었다. 당시 북측 방문단의 대부분은 6.25 당시 월북했거나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남쪽에 남은 가족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소리내 불러보지 못했다. 바로 월북자 가족이란 낙인 때문이다. 연좌제의 또 다른 사례가 바로 이들이다.
2000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언론에 가장 화제가 되었던 이 중의 한 사람이 북한 계관시인 오영재씨다. 계관시인이라는 그의 이력도 이력이지만 동생이 남한에서 육사를 나와 대학교수를 하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형이 월북을 했지만 자신이 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할 때 형의 생사는 몰랐다는 동생 오형재씨. “(입학원서를 낼 때) 형을 써버리면 사관학교는 물론 못 들어가요. 그래서 가족란에서 그냥 형의 이름을 뺏죠, 안 그러면 사관학교 지망하나마나인데. 근데 그게 어떻게 안 걸려서 사관학교 입학이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1966년 12월에 형이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 정보기관에서 알아냈죠. 그때부터 제 군대 경력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이후 반공국가 남한에 사는 동생에게 형은 무거운 심적 부담이었다. 결국 그는 당국의 종용으로 예편했다.
2000년 당시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처음 알려진 방송인 이지연씨의 오빠 이래성씨. 83년 이산가족 상봉 때 진행을 맡았던 이지연씨도 그때에 비로소 오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숨기고 싶었어요. 이 얘기를. 50% 정도는 오빠가 돌아가셨겠거니 믿고 싶었어요. 저희가 그런 가족이라는 거 지금은 연좌제 폐지되어서 잠잠한데 긁어 부스럼으로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6.25 중에 행방불명되었던 오빠의 존재로 인해 이지연씨는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주 어릴 적에 그 당시는 특무대라고 기억나는데 그런 사람들이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그리고 부모님이 자주 불러 다니셨구요. 그런 기간 동안에는 집에 오는 전화 가운데 혼선이 된다거나 전화가 끊기거나 해서 우리가 늘 감시를 당하고 있구나 하는 강박관념에 어디 가서 내놓고 이야기도 하지 못했어요.”
물론 연좌제는 남한만의 것이 아니다. 북한 역시 6.25 이후 월남자나 납북자, 국군포로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 날 처절한 남북 대결시대를 극명히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 구도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현했어야 하며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제는 상투적인 말이 되었지만 진정한 안보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연좌제의 극복 여부가 두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지도 모른다.
5. 연좌제는 왜 만들어졌는가
지난 시절 가족 중에 월북자가 있거나 전쟁 중에 사상불온 등으로 처형된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은 가족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친 남북한의 대립은 반세기 동안 갈수록 격화되었다. 남북 대립 속에 연좌제에 연루된 대상자들은 체제의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됐다. 국가는 이들을 법적 근거도 없이 보안사찰과 신원조회를 통해 감시했다. 이들은 분단체제의 속죄양이었던 것이다. 남북이 적대하며 국민을 동원하는 상황에서 사상과 성분이 의심스런 이들은 군사적 유사시엔 예방적으로 미리 처분해야 하는 ‘부역’ 혐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국가독점 전시병영 체제의 비극이다.
사실상의 전쟁인 냉전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체제에게 연좌제의 효용은 무엇이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연좌의 형벌을 통해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제압하거나 제거를 함으로써 후환을 없애는 것이었다. “앞으로 있을 반대 세력을 사전에 봉쇄하고 제거해버린다는 점에서 체제의 안전성을 기할 수 있는 굉장히 유효한 방책이 되었을 것이다.” 김영범 교수의 진단이다. “까불면 알지. 나는 네가, 네 가족이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봤지?” 국가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참혹한 왕따라고나 할까. 게다가 억압과 폭력으로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에게 위하(威嚇)를 가하는 소득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용공 연루자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하는 반정부 인사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이광달(조각가) “나는 거의 정보요원하고 같이 밥을 같이 먹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내가 당시에 돈이 있어도 형편이 괜찮아도 이거 뭐.. 어디서 좀 연결되어서 돈이라도 왔는가 싶어 의심스럽게 보고, 국내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정보부에 들어가서 협박을 당한다든가, 어디간 적 있느냐 지금까지 생활해오면서 지나온 것을 다 생각나는 대로 기록을 해봐라. 이런 식의...”
이문열(소설가) “가정교사를 하고 있는데 학교간 사이에 주인한테 가서 내가 이상한 짓 하지 않던가 하고 물어버리면 어떤 집주인이건 간에 내가 경계스럽죠. 경찰이 와서 동태를 파악하는 종류의 인간이니까. 그러면 이제 한번 형사가 왔다 가면 그 집에 더 이상 있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직장을 가졌을 때에도 상사나 사주한테 가서 이상한 점이 없느냐고 묻는단 말이지. 차라리 정확하게 자기들 목적을 밝히고 하면 덜 할텐데 막연하게 그러면 주변 의 경계를 사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한홍구(교수) “한국전쟁 전후의 부역자들만이 아니었다. 1970∼80년대 학생운동 세대들 역시 연좌제에서 자유롭지 못햇다. 우리는 연좌제의 부당함을 잘 알면서도 연좌제에 너무나 길들어져 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단체기합을 받을 때 우리는 당장의 고통 때문에 연대책임의 부당함에 저항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를 이 고통에 몰아넣은 원인제공자를 단체기합을 주는 교사나 교관, 고참이 아니라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그를 미워하게 된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대한민국사> 중에서)
공안당국에 의한 사찰과 감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를 담당하는 조직은 주요 인물에 대해 요시찰 카드를 작성하고 사찰 대상자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요시찰 인물에 대해 일일이 빼곡히 기록한 당시 동향 보고서를 보면 감시와 사찰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감시는 경중에 따라서 급수가 있었는데, A급은 철저한 사찰 대상, 다음은 B급, 그 다음은 C급...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의 사찰 요람, 요시찰 카드 등). 그리고 수시, 정기, 공개, 비공개 사찰을 했다고 하는데 아주 심각한 대상은 직접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당신 뭐했느냐 여행가서 뭐했느냐...’ 말하자면 신문(訊問)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영범 교수는 “연좌제는 법적 근거가 일절 없다. 일종의 경찰, 보안기구 같은데서 계속해서 내려오는 내규의 하나인 지침에 의해서 운영이 되었고 관련문서들은 철저하게 은폐가 되었다. 전혀 공개가 되지 않고 그냥 그 계통 안에서 비밀문서로 전수가 되었다. 본적지로 신원조회가 오면 그걸 가지고 ‘신원특이자’라고 하는 것을 가려낸다. 그렇게 되면 회보가 가서 그 다음부터 공직 취업 등이 철저하게 가려져서 여러 가지 불이익이 가해졌다.”고 진단한다. 급기야 당국에서도 “본의 아니게 자기도 모르게 휩쓸리고 불이익을 당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5공화국에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신원기록을 일제 정리함으로서 연좌제를 폐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허화평씨의 증언)
6. 연좌제 폐지 , 과연 이루어졌는가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연좌제에 대해 비난이 거세지자 5공 정부는 연좌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1980년 8월 1일) 이를 헌법에 명문화시켰다(5공화국 헌법 12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
이문열(소설가) “연좌제 폐지가 되고 나서 그해 8월 하순에 정부에서 문인 해외연수라 해서 문인들을 외국여행을 보내줬습니다. 제가 거기 들어가 해외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물 건너 나가보는 거죠. 그때 출국하기 전에 우리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여서 참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우리도 외국에 나갈 수 있구나 하고 참으로 감격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연좌제의 족쇄는 일시적으로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쌓였던 기록과 관행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기는 어려웠다. 신원조회와 개인사찰과 관련된 기록들은 여전히 연좌제 근거로 사용되고 있었다. 일선 행정관서에서는 개인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신원조회가 계속되고 있었고 이 와중에 연좌제 대상자들의 불이익은 알게 모르게 계속되었다. 이렇듯 신원조회는 신원 특이자를 만들고, 이는 사찰과 감시로 이어져 연좌제의 뼈대를 이룬다.
이에 대해 공무원 임용고시에서 연좌제의 질곡을 넘지 못한 한 피해자는 “연좌제 폐지는 하나의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도에 정말 폐지했다면 88년 공무원 임용고시에서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가. 그 기록을 전부 소각을 시켜하고 없애버리기 전에는 연좌제는 말로만 폐지된 것이지 실제로 폐지가 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5공 실세 허화평씨는 “법을 만들었다 해서 바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수 백 년 해오던 건데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분단은 계속되고 간첩은 계속 잡히고 이런 상태에서는 여전히 걱정하는 편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런 부분을 하루 아침에 탈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공의 연좌제 폐지 선언이 사실상 한건주의에다 구두선에 불과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이도영박사에 따르면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박정희 정권 때에도 연좌제를 폐지한다는 담화문이 나왔다고 한다. 1965년 경으로 기억한다는 그의 말에 국회도서관에서 온종일 당시 신문철을 뒤졌지만 아쉽게도 찾아내 촬영하지 못한 채 방송이 나가고 말았다(나중에 알아보니 좌익 전력을 가진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좌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또 1966년 5월 엄민영 내무장관은 연좌제는 이미 폐지되었다고 언명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7년 1월 중앙정보부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상관계 연좌제 관련자 24만명 중 5만명을 1차로 해제하며 앞으로 연차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 한홍구).
흥미롭게도 권위주의 정권이 잊을 만하면(?) 연좌제 폐지를 들먹였다니 어떻든 그들도 연좌제의 폐해를 알고 있었고 폐지를 거론하는 것이 정권의 인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았음직하다. 그럼에도 연좌제는 모질고도 모질게 살아남았다. 이와 관련 이장희 교수는 “정권에 대한 소위 정통성에 대한 국민들의 시비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그런 부분을 만회하고 좀 더 과시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무엇이냐 그런 용도로 내세웠지 실질적으로 뒤로는 이것을 통해서 국민을 감시하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계속 사실상 적용해온 게 아닌가.”하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1984년 5공 정권의 이진희 문공부 장관은 다시 한 번 이른바 신원조회 기록을 전부 삭제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여전히 연좌제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7년 노태우 정권에서도 연좌제 폐지는 또나왔다. 87년 6공 헌법에서도 역시 13조 3항에서 연좌제 폐지를 명문화해서 선포했는데 이는 역시 이전 5공 정부에서 계속해서 연좌제가 실제로는 적용되어 왔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연좌제의 마력이라고 할까 계속해서 정치 권력자들에게 달콤한 효력을 가지고 활용되어 왔다.(김영범)
7. 연좌제는 살아 있다
1990년 보안사 윤석양 이병에 의해 폭로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이는 개인에 대한 감시와 사찰이 여러 경로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색인표, 카드 파일 등)였다. 당시 공개된 사찰카드에는 개인의 신원정보는 물론 가족 관계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에는 그렇다 치고 그 이후에는 어떤가. 지난 98년 참여연대에 의해 폭로된 경찰의 민간인 사찰을 보면, 인물카드나 사찰의 불법성도 문제지만 여전히 가족이나 주변인물에 대한 감시와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연좌제는 얼마 전까지도 사찰과 감시를 통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98년 교사임용에서 제외되었던 차정원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복역중인 남편으로 인해 연좌제가 여전히 살아 있는 망령임을 겪어야만 했다. “나만 발령이 안 났어요. 다른 순번들은 다 되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하고 교육청에 가봤죠, 교육청 안에 보안심사위원회가 있더군요. 여기서 교사가 될 사람에 대해선 신원조회를 다 하는 거죠, 경찰에서. 그래서 제가 신원특이자로 나왔다고....”
당시 경기도 교육청은 차정원씨에 대한 신원조사에서 남편의 국가보안법 관련 복역사실이 드러나 임용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남편은 92년 남로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2년을 선고받았다. “이게 나한테 주어진 인생인가보다 받아들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때까지는 참아보려고 노력했어요. 근데 임용이 안 되니까 정말 분하고 원통하고 그게 막 분노로 바뀌더라구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나. 남편까지 감옥에 가고 없는 사람인데 내가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데. 내가 같이 간첩일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짓밟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경찰에서 보내온 신원조회보서에는 다른 특이한 사항은 발견치 못했고 오로지 남편의 전과기록만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교육청에서는 이에 대해 “부부는 일심동체고 감옥에 들어간 남편과 끊임없이 연락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국가관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임용을 했을 때 지역주민으로부터 항의도 있을 수 있고 국가관도 의심이 되고 학생을 맡길 수 없다.’ 그게 이유였어요. 본인에게 사유서가 오는데 거기에 ‘이혼하지 않았다’ 이렇게 써 있어서 그렇게 되면 이혼을 해야 하는 건가 한심한 생각도 들고 그랬어요.”
차정원씨는 이후 교육청에 탄원서를 내고 서울고법에 위헌심판 제청신청을 내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신청이 받아들여져 차씨는 이후 소망하던 초등학교 교사의 꿈을 이루었다. 이 가족에 덧씌워졌던 연좌제의 망령이 또 다시 우리 사회에 엄습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인가. 87년 직선제 개헌 쟁취와 93년 문민정부를 지나 98년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인 지금에 이르러 이제 연좌제의 폐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9. 에필로그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한은 서로에 대해 두터운 벽을 쌓았다. ‘빨갱이’ 아니면 ‘반동’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형되거나 학살되었다. 적화통일과 북진통일, 통일전선과 흡수통일이 대립하는 동안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반공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 그늘 아래서 월북자를 포함한 부역자, 양민학살 피해자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가야만 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 내면의식 깊숙이 뿌리내린 냉전의식. 연좌제는 이 땅의 사람들을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자학을 강요하면서 권력에 대한 순치와 굴종, 열외자(列外者)들에 대한 배제와 압박을 안겨주었다. 연좌제의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디 가서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다. 반세기동안 연좌제는 그들을 자포자기와 울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좌제에 대한 처절한 피해의식을 가져다주었다.
이도영(<죽음의 예비검속> 저자) “지금도 남북한이 악화되어서 전쟁 상황에 이르면 나 같은 사람은 예비검속 제 1호일 겁니다. 저는 도망가야 해요.”
이광달(조각가) “나는 내 평생을 연좌제에 묶여서 생활해 나갔으니까 지금 아무 감각 없어요. (감시가 없으면) 오히려 더 불안한 감도 느낄 때가 있어요.”
이문열(소설가) “남한은 북한을 핑계로 대고 자기 합리적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연좌제를 오히려 강화하고 악용해왔고, 또 북한은 남한을 핑계를 대고 그랬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였는데...”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회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삐딱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호적에 빨간줄이 간다는 공포가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거죠. 그게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복종, 그 다음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하는, 말하자면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압박이죠, 그래서 연좌제 문제는 소수의 피해자들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에요.”
분단의 너울, 연좌제. 200년 당시 나는 이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분단의 멍에’, 혹은 ‘분단의 너울’을 두고 다소 고민하였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멍에’는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거나 억누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너울’은‘지난날 여자가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에서 길게 내려쓰던 가리개’로 정의된다. 연좌제가 우리의 멍에인지 혹은 너울인지는 표현상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멍에라고 하면 영영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나는 제목을 ‘분단의 너울, 연좌제’로 정했다. 연좌제는 마치 우리 눈앞에 그저 씌어진, 마음만 먹으면 벗어제낄 수 있는 우상이자 허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너울의 또 다른 뜻은 ‘바다의 크고 사나운 물결’이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성숙함으로써 연좌제의 업보를 극복하지 못할 때 이 괴물은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되휘몰아치는 크고 사나운 물결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10. 사족
이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은 2000년의 일이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기는 2006년이다. 이제 이 땅에서 연좌제는 사라진 것인가. 과연 우리는 연좌제를 필요로 하는 시대를 마감했는가. 그리고 역사가 정녕 거꾸로 돌아갈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매우 의미 있는 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2006년 한명숙 총리의 청문회에서도 어김없이 남편의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거론되며 소위 사상검증 시비가 이는 걸 보니 우리 뇌리에서 연좌제의 너울은 아직 벗겨지지 않은 모양이다. 끝으로 이에 대한 두 가지 대조되는 의견을 들고 마무리를 하겠다.
“정보는 우리 사회 권력의 원천이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정보를 가졌다는 것은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런 논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정보의 통제는) 계속 유지되어 왔다. 이는 국가권력의 성역의 문제다.”
“그건 말이죠. 필요합니다. 그러면 범죄기록을 왜 갖고 있습니까. 재범, 삼범, 자꾸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범죄기록을 전부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런 공기관이 앞으로 그런 범죄자를 어떻게 색출하고 어떻게 예방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