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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장 허기와 갈증
전봉준의 기록은 그가 남긴 글은 없고 그의 심문 기록과 몇 몇 증언만이 있다(180)
1855년 고창 당촌에서 출생.
아버지 천안 전씨 창혁. 어머니 여산 송씨(여섯 살 연상). 철종때.
아버지 전창혁
젊었을 적 과거 시험 공부. 서당 훈장. 감결사상에 심취, 십승지, 명당몰색
이사를 다님: 고창 당촌-> 전주 구미리 ->태인 황새 마을-> 태인 동곡리
할아버지 묘를 투장하면서 전 창혁이 아들 봉준에게 건네는 말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니 잊지 말고 기억해 두거라.”
자녀: 2남(전처 언양 감씨) 2년(후처 남평이씨 )
큰 딸: 동곡리로 시집(김개남 중신). 해수병을 앓다가 30년대 사망.
둘째 딸: 전옥례. 1894년 당시 15세.마이산쪽으로 피신 후 강씨와 결혼. 90세에 졸.
큰 아들: 산외면에 남의 집 머슴살이 함. 폣병으로 죽음
둘째 아들: 둘째 누님네 기숙. 누이네 황소를 훔쳐 달아 남. 소식 모연.
전봉준 외손녀 강 금례: 정읍 산외면에 살았음.
유년시절: 고창 당촌
별명: 철로, 씨화로
5살부터 아버지 서당에서 글을 익힘.
키는 오척은 넘으나 비교적 작은 편. 몸은 단단하여 골목 싸움에 밀리지 않음
숱이 많은 까만 머리,짙은 눈썹,깊고 쏘는 눈빛.
담대함, 빠른 형세판단, 집요함, 신중하되 결정하면 신속하게 집행하는 능력
원기 왕성, 활동적, 다혈질적(수행원 김흥섭의 말)
사춘기: 황새 마을. 11살 나던 해 이주
팽나무.(이순신 장군이 심었다)
유기공장 객사 거주 처 언양김씨, 어머니 인동장씨. 유기 장수-아버지 가능성
종정마을 사당으로 공부 원평천 둑방으로 10리 길 걸어 다님
거야마을 김덕명(1845년생)과의 만남. 식객으로 전봉준이 있었다.
제 2장 바람 불고 파고 치고
동학의 바람
1863년 12월 10일 최제우 체포. 41세로 사망.
1865년 10월 28일 일월산 용화동 숨어 들어감 최시형.
1870년 10월 이필제. 최시형에게 최제우 신원운동을 하자고 제의 함.
1871년 2월 최제우 영해에서 이필제를 만나다
1871년 3월 10일 이필제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영해변란 일으킴.=>
이 것이 동학농민전쟁의 중요한 참고가 된다.
: 직경향성, 사전 계획, 연속적 변란의 기도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는 못 하고 일시적으로 동학 조직이 궤멸 됨.
일개 접주가 농민군이 수장이 된 근거
1. 동학조직의 우연함 2. 전봉준의 탁월한 능력 3. 본인의 조직에 잘 융화되는 노력(99쪽)
전봉준 청년 시절
18세에 황새 마을을 떠나다.
~삼십대 초반까지 태인 관내에서 삶.
고부군 궁동면 양간다리
20세 전후 결혼
태인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김개남과 위 아랫집으로 거주.
혹은 동곡마을에서 서당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1876년 할머니 인동 장씨 태인 산내면 소금곡 매장,
1877년 부인 여산 송씨 소금동에 매장 기록. 당시 전봉준 23살, 부인 나이 27살. 슬하 두 딸
20대 중반 봉기의 핵심들을 알아 나가다.
최 경선, 송희옥,김시풍, 김개남, 김덕명(원평),손화중,송희옥,송헌옥,손여옥,
20대 중반에 봉기의 핵심들을 알아 나가다.
전 봉준 30대 전후는 1880년대 초반은 개화가 화두인 시절. 그러나 개혁을 백성과 같이 못 했고 관료의 부패는 여전했다. 아마 이 시대에 여러 지우들과 시대를 읽는 때였을 것이다.
제 3장 저 너머한 점 불빛
전봉준 삼십대 초반에 고부 조소리에 정착. 서당을 열다.
1885년 남평 이씨(아들 오정기, 과부)와 사실혼 상태.
1886년 큰 아들 동일이 태어 남.
1891년 말목장터(두지리) 약방 경영하고 사당을 개설(155)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목장터는 부안,태인,정읍의 길목.
최 경선부자가 태인현 주산마을 거주. 전봉준도 동구내 마을에 기거. 두 마을은 지척거리에 있었다. 최경선은 전봉준의 고굉이 된다.
진안 백운면 오정리에서 훈장 생활(친족 전병화가 사는 곳): 무주-금산연결,정읍,임실-진안,무주의 길목.
차치구, 그의 아들 15살인 차경석,입암산성의 이종록, 피노리 사람 김경천들과 회홥
전주 구미리에서 김개남,송희옥과 회합.-> 동학의 포덕 활동 보다는 반상 구분없이 영향력 있고 기백이 있는 사람을 포섭하는 조직 방식을 따름(162)
1892년 동학 입도(174) 1892년 접주 임명
동학 접촉은 1888,1890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이전 시기도 가능하다고 본다.
옹택규: 고부 동학의 접주 1880년대부터 포교 활동.
1880년대 중반 동학을 체감하고 1888년쯤 동경대전,용담유사를 봤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동학교도의 대중운동:교조 신원 운동: 1892.10~1893.03
1892년 7월 서장옥,서병학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을 위해 복합 상소를 올리자고 촉구. 10월 20일 공주 집결. 충청 감사 조병식에게 의송단자를 전달. 천여명 집결
1892년 11월 삼례 집결. 수천 좌도 유태홍, 우도 전봉준 대표로 나옴
김덕명,김개남,손화중,전봉준 무장으로 행군. 빼앗긴 돈 천냥 받아 냄.
이 때부터 호남 중심의 독자 세력 형성 시작
보은에 도소를 차리고 신원운동 전개
전봉준- 창의문 작성. 호남 일대에 뛰움. 대중운동으로 전개(190)
1893년 2월 11일 광화문 복합 상소.척양왜의 괴서가 한성에 붙음. 동학지도부에 대한 체포령
1893년 3월 13일 보은 집회. 만명. 4월 3일 해산. 동시에 원평에서 만명정도 모여 취회 유지
전봉준과 교류했던 장령들과 동학 조직
전봉준- 원평, 손화중-무장, 김개남-남원, 김낙철-부안, 태인-최경선,이벙언-장흥, 서장옥-금산. 김덕명포-금구,원평,김제,태인,고부(전봉준의 고굉 최경선의 소속 포)
제 4장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1893년 6월 22일 67세로 아버지 전창혁 사망. 조병갑과 관련설이 있다.
전봉준, 아버지 장지를 고르며 한 말
“ 만약 크게 일어날 자리가 아니면 폭삭 망해서 자손이 없을 자리를 원한다.”
“오래도록 남의 밑에 살면서 구차히 목숨을 이어가기보다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흔쾌하지
않겠는가”(211)
고부의 특징:
재지사족의 약세, 정여립사건으로 인한 중앙 관제 진출의 약화. 이로 인한 이서들과 수령의 수탈을 견제하는 힘이 약했다. 민간신앙이 득세하여 서학이 맥을 못 춤. 하여 전봉준은 민간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888년 대흉이 들고 조병갑군수 부임 3개월만에 모친상으로 이임하다. . 이임. 김성천 조병갑의 무능과 출신에 비아냥. 조병갑 다시 군수로 돌아오다. 89년 서당 페쇄
조병갑의 패악질(211쪽)
세금 부담의 실태(215쪽): 1893년 태인현 사례
태인현 호당 평균 경작 면적 0.8결. 전답 1결당 생산량은 쌀 340두. 농가 호당 272두 생산. 소작농(농민의 30~40%)은 절반을 소작료로 낸다. 호당 인원을 6명으로 하면, 일년에 먹고 살 식량은 최소 쌀 230두.
국고 수입으로 호당 쌀 15.6두를 토지세로 부담, 군포 호당 11.5두. 환곡부담 3.6두.기타등등 포함해서 연중 51.7두 납부. 이렇게 되면 소작농 수중에 84.3두, 자소작 겸농 109.8두. 종자를 빼면 소작농의 경우 57.1두만이 남는다.
=>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남아 있겠는가?”
고부민요 발생
1893년 11월 15일 고부 관아에 소장제출
동학 조직 동원할 생각- 기포 발의. 최경선과 손여옥만 발의.사발통문, 각 마을 집강들에게 보냄.
1894년 새해 기포: 조병갑이 잉임된 그 날 아침. 만 명 참여
일장두 전봉준 이정두 정종혁, 삼장두 김도삼,참모 송대화,중군 황홍모,화포장 김응칠
1월17일 본진 말목장터. 밀정 처단
백산 이진 포진
2월 15일 조정의 조치: 전라감사 월봉 삼등, 조병갑 나문정죄(나중에 죄를 묻겠다는 것)
전봉준 호남전역에 격문 전운영의 문제를 거론 고을 단위로 넘어 서는 항쟁을 선동
2월 19일 남접 최고 지도부 회의 개최
3월1 일 줄포 세고의 습격.
3월3일 군수 박원명 음식으로 회유, 난민의 해산.
전봉준 가족을 태인 동곡리로 옮기고 병기를 민간에 분산 시킴.
3.20: 무장 기포
안핵사 이용태 역졸 팔백명 끌고 와 백성들에게 패악질을 함
3월 26일: 백산대회. 격문과 4대 명의 발표.
4월 6일: 황토재 전투. 경군 3백 향군 4백
4월 7일: 홍계훈 전주성 입성, 일본 육군 포병 소좌 이지치 고스케 부산 파견.
농민군 남진: 정읍 연지원과 모천-> 정읍공격-> 고부 삼거리->고창 4.9: 무장관아 접수
4,12 영광 입성
약속사항,십이조 계군호령 발표(251) 만2천~ 만4천 집결
완영유진소앞으로 통문 보냄(254): 대원국 감국 요구.
4.16 함평 관아 공격 6천명 군사 퍼레이드
홍계훈에게 원정서, 정문 보냄(259)
4.18 홍계훈 선봉대 출정. 장성월평정터,삼봉,황룡천 전투
4.26: 원평 도착. 관료 이효응,배은환,이주호 참수.
4.27: 전주 입성. 2~3만 명
4.28: 민영준 원세개 만나 청병함.
4.29: 대신회의에서 고종이 요청. 그날 일본 내각회의에서 무장간섭 방침 결의(267)
5.2: 청국 9백명 이후 5.9까지 삼천명 아산만에 상륙.
텐진조약으로 일본에 통보 후 5월 6일 일본 인천에 4,300명 상륙. 오백명 육전대,대포 4
문 서울 입성. 이북쪽 경군 1,400명 남진 중.
5.3 소년 장수 이 복용 경군과의 전투에서 사실상 실패
27개조의 폐정 개혁안, 제중생등의소 명의의 소지 전달-> 홍계훈 효유문 보냄(271)
5.5 전봉준 폐정개혁안 제출.(274). 신임 감사 김학진이 홍계훈 설득. 중앙에 보고토록 함
5.8 농민군 전주성에서 10일 만에 해산
(#논의점: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의 전봉준과 대원군의 만남(164)
삼월 기포전 대원군과 전봉준이 만났을까? (166) : 1893년 대화가 있었을 듯(206)
대원군에게서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본다(168))
제 5장 폭풍우는 하늘을 찢고
농민군 전주성 퇴각 후 송희옥,서장옥은 호남의 북부와 호서, 김덕명과 손화중은 호남의 서부, 김개남과 김인배는 전라 좌도를 장악 함.
5.11 양호초토사 홍계훈, 양호순변사 이원회에게 폐정개혁을 단행하고 농민의 안전 보장을
촉구하는 동시에 나주 목사 민종렬의 공격에 농민군의 맞대응을 만류(283쪽).
5.18 재차 이원회에게 요구사항 전달.
(전봉준은 측근 20명과 농민군 500명 같이 다님)
5. 9 금구 -> 10일 태인 동곡리 귀가 -> 20일 경 장성에 출현.
집강소 설치에 대한 김학진과 전봉준의 협조 시작.
군관 이용인에게 군현단위 집강소를 제안하는 한편, 농민군의 설분 행위를 자제토록 함.
담양에서 청군 예지초의 비장 류영칭과 총제영 대관 이웅천 만남. 무기 반납을 약속 함.
->순창으로 이동,
6.7 김학진 농민군에 의한 집강의 임명을 인정
:이후 집강소 활동은 다양하게 나타남. 전주화약 이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고 그 다양함
속에 농민군이 나서서 하려 한 일(293쪽)
양반들은 강상의 도를 무너뜨린 것으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6.7 일본 낭인들과의 만남. 청을 물리치고 민씨를 제거하자고 제안. 전봉준은 폐정개혁이 우선. 청일과 싸울 용의가 없음을 밝힘.
-> 옥과로 이동 7월 2일 남원에 나타날 때까지 종적 묘연. 아버지 전창혁에 대한 소상 치
루지 않았을까 추측.
6월 말 나주를 제압하기 위해 최경선, 운봉 쪽으로 김봉득, 순천쪽으로 김인배 이동 시킴.
-> 집강소 활동을 하면서,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을 확보하기 위해 무력 시위 전개
7월 2일 남원에 간 이유
김학진의 편지(315쪽): 일본의 궁궐 침입을 언급 하며 “도인을 인솔하여 전주를 지킴으로
써 국난을 극복하자”고 함 -> 반봉건 관점이 확고한 김개남을 설득하여 전주로 출발하려
함. 김개남은 초반에 동의하다가 도중에 샛길을 통해 대오에서 이탈.
7월 6일 전주 입성. 김학진과 대담:
관민상화의 실험 시작(316): 도집강 임명권 요구, 김학진의 병조판서 부임을 막음.
7월 8일 구미리에 가서 송희옥을 만나다. 송희옥 도집강이 되다.
7월 17일 송회옥 도집강 통문(320쪽): 외적의 대궐 침입. 때를 기다려 이에 대응하자고 함.
장재두의 편지(320): 서울 진격을 요청. 전봉준 일단 관망 자세 취함
7월 말경 김학진 7개 조항의 국가 사업안을 건의. 8월 1일 중앙 정부의 회답(323)
:관민상화의 첫 폐정 개혁 사례.
농민군 요구: 나주목사,금구현감 파직,
김학진의 요구: 전라좌수사 김철규 호위, 전주의 신부 호위
-> 남원의 농민대회에 참여. 김개남 칩거 ->순천에 가 김인배를 만남 -> 운봉. 민보군의
박 보양을 만나다.
-> 순행을 마치고 전주로 돌아옴: 정부의 선무사 파견 소문에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냄.
일본 낭인들 만남. 조선정부 타도를 위한 궐기 요구-> 전봉준의 심정(328쪽)
8월 11일 순행 시작: 나주- 농민군 수성군에 패하다.
음봉과 나주에 집강소 설치 못 함.이로 인해 최경선부대와 손화중 부대가 발이 묶임.
8월들어 항일 의병 활동이 전국에서 전개. 개화파와 일반 백성의 시각 차(334).
개화파와 농민군의 같은 말 다른 인식(333)
군국기무처 8월 4일 농민 무력 진압을 정책 제안. 그간 대원군이 반대 함.-> 20일 후 선 무력 진압 정책 제안. 조선 군부가 해체된 상태에서 결국 일본군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
일본군 대응:
1. 처음부터 일본은 청과 한 판을 뜰 생각을 함
1886년 병제 개혁. 1894년 청군 대응 군제 완성
2. 일본의 출병: 297쪽, 인천과 수도 서울에 바로 입성. 제물포조약과 텐진조약이 근거
(298)
3. 전주화약후 조선은 청일의 철군을 요구하고 러시아가 반발함. 이에 일본 대사가 5월 12
일 청일 공동 철병에 동의 함 ->이에 일본 정부는 청의 우선 철병으로 입장을 바꿈 ->
청군의 무대응으로 난감해 짐.
4. 이에 조선 정부의 무능을 이유로 내정개혁을 요구-> 5일만에 청은 이를 거부 함 -> 일
은 청과 절교하고 단독 내정개혁 요구-> 인천의 혼성여단 남산과 북악에 배치. 만 여명
이름-> 5월 25일 조선에 청과의 절교와 내정개혁요구-> 대원군 지지를 얻어 내기 위해
설득 시작하고 친일파 협조하기 시작-> 러시아가 반발하지만 영국이 일본을 지원. 6월
13일 영일신조약 체결-> 6.21일 경복궁 점령. 고종 제압, 기영병 제압. 군수물과 문화재
약탈-> 대원군 등청. -> 6.22 고종 신정부 수립과 내정 개혁 추진 허락-> 대원군 비협
조, 친일파 중심 평의회 수립, 이후 군국기무처가 됨-> 외무독판 조병직 청군 구축의뢰서
작성. 이와 별도로 6월 23일 일 아산만에서 청 해군 공격, 27일 아산에서 청 육군 공격.
군국기무처 활동: 초기 대원군 세력+ 원로 개화파+ 신진개화파(308쪽)로 구성.
입헌군주제 지향, 각 종 신분제도 철폐- 농민군의 주장과 비슷한 것이 많음.
대원군:
6월 22일 고종이 국가기무에 대한 선결권과 군무에 관한 재결권을 위임. 섭정 시
작. 중앙 관료의 경질. 그러나 곧바로 일본과 개화파와 갈등 시작.
일본과의 갈등
- 1) 민왕후의 폐서 손자 이준용으로 왕위 계승 시도.
2) 청일전쟁 반대
=> 청과 밀통하려 함. 일에 발각 됨
개화파와의 갈등
- 군국기무처 의원에서 대원군 계를 파직 시킴. 개화 정책의 속도에 대한 이견.
- 항일 의지에서의 차이.
=> 살생부 작성. 김학우만 암살
하여, 삼남지방 의병과의 합세를 기도 함
장재두 편지도 그 일환.
그러나 8월 17일 평야에서 청이 패하면서 일이 틀어지고, 정부의 농민군 토벌 의지가 강화되기 시
작.
=> 결국 대원군과 전봉준, 모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전봉준의 결심
나주에서 돌아 온 전봉준 요양 차 태인에 머무름.
8월 25일 김개남 남원에 입성. 칠만여 농민군 형성.-> 즉각 남원으로 전봉준 내려 감. 김개남과의 논쟁(342)
대원군의 본심이 담긴 밀지(346)
제 6장 새야 새야 파랑새야
9.8 전봉준 원평으로 이동.
9.9 금구의 농민군 고산 군기고 탈취.
9.14 전봉준 전주에서 군기고 접수
김학진 운량 책임관으로 삼음. 관민상화의 마지막 사업(352)
북접이 참여하고, 김개남은 미적거림(355)
10월 중순 강경 도달. 군수품 조달 4천여명 -> 논산에서 만 명에 이름.
북접 보은에서 집결 갑대는 공주 동쪽 대교에 세거. 을대는 논산에서 전봉준 본진과 합
류
논산에 집결된 부대를 두 갈래로 이동.
- 경천 위쪽 삽짝골 위치하여 널티재,효포 곰티재를 뚫고 금영 점령 예정.
- 손병희 부대 일 만명. 이인 점령. 우금티 공략하여 금영 장악 계획.
북쪽 김복용 지휘 삼천 농민군. 목천 세성산 세거: 남하하는 관군 저지.
박덕칠 박인호의 칠천 농민군 홍주 예산 차지: 서쪽 방어
최한규 삼천 군사, 유구 방면 세거: 공주를 북에서 압박.
김인배 남해안에서 순천,광야,여수근거로 해안 침투 방어
손화중, 최경선은 광주 나주 인근 주둔.
장흥,강진,해남 이방언 부대,
영광 함평 무안의 배규인부대.
10월 14일 김개남 남원 출발,금산쪽으로 올라 옴.
그 외 지역: 강원도 강릉 점령, 해주 김구가 점령,
평안도 상원, 함경도 원산도 농민군 봉기.
관료와 유생들도 참여(359): 공주 집결에 두 달이 걸림.
전투 돌입
10월 14일 세성산 전투와 홍성 전투에서 패배(362):
10월 22일 손병희부대 이인 점령. 23일 접전. 손병희 승리
10월 24일 효포의 홍운섭, 구상조-> 북쪽 대교로 진출. 농민군 패퇴. 전봉준의 혐공 전략 무
산. 그러나 이를 틈타 전봉준 효포 점령. 관군 접전
=> 곰티재 접전(1차) 계속.-> 논산 후퇴 전열정비
11월 8일: 널띠 구상조 공격-> 효포로 퇴각. 그 사이 이인의 성하영 공격
우금치 공격(2차)
11.11 노성으로 후퇴 고시문 발표
관군 노성공격-> 황화대에서 진을 치고 방어. 화력에서 밀림
-> 강경-> 여산->삼례-> 전주 후퇴.
11.23 원평으로 이동 11.25 원평 전투.
11월 27일 태인 전투. 군대 해산.
그 이후
손병희 부대.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과 헤어짐. 장성까지 내려간 후 임실 새목터에 있는 최시형과 합류 -> 장수 -> 무주로 이동. 유생 이응백의 민보단을 물리침. 12월8일 황간 점령. 영동 용산에서 승리, 보은진출. 종곡에서 수백명 몰사 된 후 해산.
손화중 최경선 부대: 나주 점령 못 하고 공주전투 패전 소식 듣고 북진 중 해산.
장흥과 강진은 12월 들어도 투쟁 지속.
이후 민보군 활약으로 동학군 수색 및 살육 자행.
해남 250명,강진 320명,장흥 300명,나주 230명등등...
오지영 <동학사> 40만명, <천도교창건사> 전사자,피학살자 포함 20만명,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30만. 김정헌 <이야기그림.그림이야기>책에서 우금치 전투 10만명.
11.26: 조일연합군 전주 입성. 청야작전 돌입.
김개남 부대 10.14 남원 출발-> 11월 13일 청주성 전투, 신탄진,진잠전투.연산으로 후퇴.
-> 김개남 태인 너되마을 매부 서영기 집에 잠거.-> 송종리의 친우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집으로 청함->관찰사 이도재에게 고발. 12월1일 종송리에서 붙잡힘. 전주에서 12월3일 효수.
손화중은 고창 안현리 이씨 제실에 숨어 있다. 이봉우 고발로 12월 11일 잡힘.
김덕명은 마을 사람 밀고로 1895년 정월 초하루 태인 수성군에서 피체.
전봉준의 피체
입암 대흥리 차치구집에 하룻밤 머무름-> 이종록의 입암산성에 머물다-> 백양사 암자-> 담양방면 이동,12월1일->12월 2일 순창 피노리 양해일,윤정오,최경선대동.고주 접주 시절 집사 업무를 본 김경천이 살고 있었다-> 담양에서 나주로 이체
1월 24일 일본 영사관에 수감
2월3일 법무아문으로 신병 인도. 2월9일~3월 10일 권설재판소에서 재판 함.
3월 29일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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