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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의관 원문보기 글쓴이: 전재진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고종 18)-1921. 독립운동가. 종교가.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대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했다.
본관은 이천(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기학(夔學), 호는 백포(白圃).
[생애 및 활동사항]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 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의 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6년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이 되어 활동한 결과, 나철(羅喆)의 교통(敎統) 계승자의 물망에 올라 사교(司敎)로 초승(超陞)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
1917년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겨 만주와 노령(露領)의 동포에게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같은 해 8월 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
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또한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1921년 적군(赤軍)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들 수백 명이 야간에 내습·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하여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같은 해 8월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과 지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대종교에서는 그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철(大哲)로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 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 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 會三經≫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일장군의 반일활동 발자취를 더듬어
<한민족신문 2011. 10.11>
귀신은 울부짖고 도깨비 날뛰는데
하늘땅의 밝은 빛 가뭇없이 사라졌네.
독사가 물어뜯고 멧돼지 달려들 제
사람들 피흘리고 살점을 뜯기누나
해는 지고 앞길이 막막하거늘
인간세상 어디로 가야 할 소냐?
이 시는 1921년 음력8월27일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장군께서 순직하기 직전에 읊은 시구인데 대종교 종사 홍암 나철 유서의 한 구절이다.
서일장군의 원명은 서기학(徐夔学)이고 호는 백포 (白圃)이며 본관은 이천이다.1881년2월26일에 조선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회동에서 태어났다. 10세에 향리에서 김학규의 제자로 한학을 수여받았으며 22세에 함경북도 경성함일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0여 년 간 고향에서 계몽사업과 교육구국 운동에 투신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후 1911년 3월 서일장군은 반일조직 중광단(重光团)을 창립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중광단 창립초기에는 주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에 치중하였다 1912년에 서일장군은 중국 왕청현 덕원리에서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大韩正义团)을 조직하고 변화를 통한 발전을 시도하였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여 조직적인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서일장군은 대한정의단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또한《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라는 한글 신문을 발행하여 중국동북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비군사 인원으로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장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좌진 조성환 등 육군 무관 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집결해있는 길림군정사 (吉林军政司)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1919년가을 길림군정사는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장군의 연합제의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 (大韩军政署)로 발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10월에 군정부(军政府)로 개편하였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장군,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뉘었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하였다 .
1920년 10월에 진행한 청산리전역은 연길지구 여러 한국 반일무장부대가 연합작전하여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서일총재가 통솔한 대한군정서 부대는 기타 반일무장부대와 긴밀히 배합하여 지형의 우세와 사전의 충분한 준비로 일본 침략자들의 위풍을 꺾어버렸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자들은 자기의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고 대량의 군대를 증원하여 보복활동을 감행하여 선후로 2600여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살해한 경신년 대학살 사건을 빚어내고 반일 무장단체에 대한 경신년 대토벌을 감행했다. 이와 동시에 봉계군벌 장작림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여 동북 더나가서는 전 중국을 통제하려는 야심으로 경제와 군사 주권을 일본제국주의에게 팔아 자기의 무장역량을 강화 확장하였을 뿐 만 아니라 <만주에서 불령선인 단체를 숙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동북지구에서 활동하는 한국 반일단체와 반일무장조직들을 취체하고 탄압하였다. 일본 침략자들의 전례 없던 대토벌과 장작림 봉계군벌의 탄압 그리고 경제상 후원공급의 결핍으로 각 반일 무장단체들은 전례 없는 곤경에 빠졌다. 생사존망의 관두에 서일총재는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반일무장 유생역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전략적 이동을 주장하고 대한군정서 부대를 동북동남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켰다.
1920년 12월 중순에 대한독립군 , 대한군정서 , 간도대한 국민회,대한신민단,군무도독부,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서 등 10여개 독립군 단체 3000여명의 독립군 장병들이 밀산 평양진에 집결하였다. 서일총재는 밀산에 집결한 10여개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 (大韩独立军团)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지휘부의 주요 구성원은 총재 -서 일. 부총재 -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고 문 - 백순. 김호익. 외교부장 - 최진동. 사령관- 김구식. 참모장- 이장녕.나중소. 군사고문 - 지청천. 제1려단장 - 김규식. 참 모 - 박영희, 제2려단장 - 안 무. 참 모 - 이단승. 단기병대장 - 강필림.
비록 밀산은 일찍 1910년대에 “한흥동” “십리와”등 한국독립운동 해외의 최초 무장기지를 건설한 곳으로 한인사회의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 기반이 비교적 취약한 곳이어서 몇 천 명의 독립군이 장기간 주둔할 곳은 못되었다. 더욱이 중국 동북지구의 12월 엄동기간에 준비없이 이동한 수많은 독립군장병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큰 문제로 되였다. 전례 없던 곤경에 빠진 독립군 장병들은 시급히 출로를 구해야 했다.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는 중국 동북 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독립운동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약 20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욱이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소련 정부가 피압박 민족 해방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연해주지역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소련 연해주지역으로의 전략 이동을 결정하였다.
1921년 1월초에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밀산을 떠나 호림현 호두에서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 변경도시 이만시를 거쳐 연해주 노령소 추풍령에 집결하였다. 노령소추풍령에서 독립군 단체들은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 주요 구성원은 총장 - 서일. 부총장 - 한춘운. 군무사령관 - 홍범도. 군무부장 - 김좌진. 외교부장 - 최진동. 서 기- 박래순. 경리부장 - 홍범도., 서기 - 리홍래. 비서과장 - 채묵. 정찰과장 - 서인극. 모연부장 - 김성지.
1921년 3월말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은 소련정부의 통지를 받고 중국 흑하시 량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알렉쎄브스크시에 집결하였다.
1920년대 초기 소련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갓 승리하고 각 나라의 혁명을 지지하는 공산국제가 발전하는 때여서 한국 각 반일무장 단체들은 소련의 협조를 많이 받았다. 이때 일본은 소련정부에 한국 반일무장단체들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당시 갓 성립되어 정권이 확고하지 못한 소련정부는 소련에 와 주둔하고 있는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들을 소련홍군에 편입시키고 반일무장단체들의 그 명칭을 취소하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얼마 후 소련정부는 또 원바탕에 있던 사할린 의용대를 개칭하고 모든 한국 반일무장단체가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서일을 총장으로 하는 대한독립군총합부는 기타 한국 반일무장 단체들과 함께 알렉쎄브스크시에서 개편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론을 벌렸다. 쟁론 끝에 모순이 많았지만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를 3개 연대와 경비대로 고려혁명군을 편성한다는 결의가 공포되었다. 이 명령은 1921년 6월25일에 반포되었으며 24시간 내에 집행하여야 한다는 소련정부의 최후통첩이 내려졌다. 그러나 한국 각 반일단체의 많은 장병들은 이 결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1921년6월28일 오후 4시경에 소련홍군은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 화력의 엄호밑에 600여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개편에 복종하지 않은 한국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을 진압했는데 홍수같이 밀려드는 소련홍군의 공세 앞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의 저항이란 너무나도 미약했던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어 한시각도 못되어 한국반일무장단체의 장병들은 밀리고 쫓기여 마침내 흑룡강에 이르렀다. 그들의 뒤에서는 탄우가 빗발치듯 날아왔고 앞에는 도도히 물결치는 검푸른 흑룡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장병들은 흑룡강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총탄에 비참하게 맞아 목숨을 잃고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이 참안에서 한국반일무장단체의 전사자가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이 250명이고 포로가 917명이였다. 일본침략군과의 전례 없는 대격전인 청산리 전투에서도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반일 무장 투쟁사에서 무장역량이 일대 조락을 초래한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 참안”이다.
서일장군은“자유시 사변” 후 분산된 군정서부대의 100여명의 성원들을 조직하여 천신만고의 애로를 거쳐 밀산 백포자 당벽진에 돌아와 군정서를 재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불행하게도 1921년 8월17일 저녁에 서일장군의 부대는 마적들의 돌연습격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대부분 장병들이 피살되었다. 마적들의 크나큰 타격을 받은 서일장군은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러 통탄하면서 대종교 종사 홍암 나철 유서중의 시 한 구절을 읊었다. 그리고나서 마을 뒷산 수림 속에 들어가 돌을 베개로 잔디를 자리로 하고 귀천하였는데 그때 서일장군은 41세의 장년이었다.
서일장군의 장례식은 밀산 백포자 당벽진에서 진행하였는데 그 유해는 당벽진 뒷산에다 모셨다. 6년 후 대종교의 단애 윤세복 종사가 당벽진에 와서 서일장군의 유해를 화장하여 화룡현 청파호의 뒷산에다 면례하였는데 한 세기가 지나도록 서일장군은 지금까지 멀고먼 북쪽나라 이국땅의 쓸쓸한 산기슭에서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 제2세 교주 무원 김교헌과 동반하여 초라한 산을 쓰고 있다.
/밀산시 인민정부 맹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