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나무 숲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장성의 축령산휴양림을 내려오다 보면 한 마을에 이르게 된다. 축령산 정상에서 정 북쪽에 자리한 금곡마을. 영화촬영지로 주목받아 명소가 된 곳이다. 가구 수 50호도 안 되는 마을이지만 이 일대의 심미는 규모 따위로 풀이할 수 없다. 마을을 두른 산세, 그 속에 안긴 마을이 일광욕을 즐기는 듯 누워 있다. 자연과 마을이 하나의 공간처럼 조화를 이뤘다. 많은 영화 관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장성의 또 다른 모습, 곳곳에 그윽한 예술·문화의 체취를 이곳에서 만난다.
금곡마을 초입 풍경
편백 내음 불어오는 고요한 길따라
마을 초입에서 천천히 둘러보며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랑논이 있는 농촌에서 봉우리가 눈에 띄는 산촌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산기슭 경사면이 마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고 마을 외곽의 길가는 수림이 우거져 있다. 산길은 마을과 자연스레 이어져 마실길처럼 걷기 편하다. 축령산을 등에 업고 있는 금곡마을의 특징이기도 하다.
금곡마을 전경
영화 촬영지라는 기능적 명칭이 아닌, 그저 ‘금곡마을’이라 되뇌었을 때 입에서 나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정겹다. 예전의 길바닥은 정갈하게 포장됐고 축령산에서 내려오는 관광객이 들릴 만한 음식점과 찻집 등이 들어서면서 오지의 느낌은 예전에 비해 퇴색했으나, 번잡한 바깥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고요함, 조용함이 여전히 좋다. 거기에 축령산에서 내려온 시원한 편백향 내음은 심신을 맑게 한다.
골목길을 두루 걸으며 이곳에서 촬영된 작품을 상기하노라면 옛 분위기가 마을에 덧칠되면서 향수를 자극한다. 이 마을이 촬영지로 이름날 수 있었던 작품은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이다. 장성은 임권택 감독의 고향이기도 하다.
[태백산맥]과 영화의 흔적을 찾아
영화 [태백산맥] 촬영장소 | 영화 [만남의 광장] 촬영장소 |
임권택 감독의 시선으로 탄생한 영화 속 세상을 보며 얼마나 많은 감동을 느꼈던가. 이곳에서 그의 예술혼이 불붙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은 더 신중해진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물려 손가락 사각틀을 만들고 여기저기 구도를 잡아보는 재미도 오랜만에 느껴본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에서 인걸이 뛰어나다 했던가. 암행어사 박문수가 아름다운 강산으로 첫손에 꼽았던 장성은 예부터 대문장가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철종을 찾아온 중국 사신이 한 글귀를 내놓으며 답을 요구했다. 궁내에서는 답을 내놓는 이가 없자 장성의 학자인 노사 기정진 선생을 불렀고, 명쾌한 답이 나왔다. 그 후 “장안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또 흥선대원군은 “장성에서는 글 자랑 말라(文不如長城)”고 평하며 장성이 문장가의 고장임을 드러낸 바 있다.
그 명맥이 현재는 장성의 큰 자랑 임권택 감독으로 이어진다. 이를 기념하며 임권택 감독 조형물도 설립됐다. 직접 보기 위해 장성호 관광지로 이동했다. 호남정맥이 사파리 누떼의 대이동처럼 장성호 옆으로 일제히 내달린다. 수면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풍경에 합세하면서 마치 고요한 호수에 한 마리 용이 기상할 준비를 하는 듯하다.
장성호 관광지 주차장에서 임권택 감독 동상이 쉽게 눈에 띈다. 그의 경력이 간단하게 정리돼 있다. 조각상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오르막길과 공원 안내도가 보인다. 짧은 오르막길을 오르면 야트막한 산 둔치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장성문화예술공원이다.
장성에서는 글 자랑 말라
장성문화예술공원에는 국내외 선현이 남긴 시·서·화·어록 등이 조각품과 함께 각각의 작품으로 만들어져 총 103점이 공원 곳곳에 배치돼 있다. 안내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좋다. 일단 유형별로 구분된 공간을 눈에 익혀 두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놓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자.
처음으로 반겨주는 작품은 다산 정약용의 ‘장성에 이르러’라는 시다. 다산 정약용이 18세 때 화순 현감으로 있던 아버지를 뵈려고 가던 길에 장성에 도착하여 지은 시다. 전북 정읍에서 갈재를 넘어 장성에 이르기까지의 따뜻한 풍광을 읊은 내용이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어릴 적 한 번쯤은 읊어봤을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윤동주 등의 시와 이중섭, 신윤복, 허련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춘수의 ‘꽃’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여행하면서 남들은 그냥 지나쳐버린 사물이 자신에게는 특별해 보일 때, 아마도 그런 순간이 김춘수가 말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공원에서 만나는 작품들 또한 마찬가지. 불러주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와 이육사의 '광야'가 새겨진 비석도 세워져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문구에서 쉬이 마음을 떼기 어렵다. 밤하늘 홀로 밝히며 유유히 움직이는 달이 박목월 시인에겐 나그네처럼 보였나 보다.
이육사의 '광야'는 시인이 죽은 뒤 아우가 수습한 절명시(絶命詩)이다. 하늘이 처음 열린 때부터 초인이 오는 천고의 뒷날까지 언급하며 이육사가 노래한 광야가 영상처럼 스친다. 그 광야에 이육사가 뿌린 노래의 씨는 무엇이었을까.
당대에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명작도 인상적이고 조각가들의 아름다운 작품 또한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덕분에 일반인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문화계통에서 종사하는 전문인도 즐겨 찾는다고 한다. 그냥 산책하듯 걷는다면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동선이지만, 한 걸음이 멀다고 멈춰 서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소요 시간은 무한대로 늘어나는 공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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