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외 7편
김왕노
네가 너의 희생으로 불새가 되는 꿈 접어도 좋다.
대신 내가 불세출의 꿈을 접고 불새 한 마리가 되는 것
빙벽이 막아선 밤을 녹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의 노래 부르는 것
네가 잠든 언 하늘을 쩡쩡 깨뜨리며 밤새 타오르며 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꽃이라면 아득한 벼랑에
꽃으로 서고 새라고 하면 무한창공을 나는 새가 되었다가
난기류의 하늘에 깃털 몇 남기고 사라져도 좋다.
숨통까지 끊어놓는 불길에 휩싸여 그것이 사랑의 길이라며
어두운 밤하늘에 훨훨 날다가 재가 되는 불새가
사랑의 뜨거운 경전이고 깊은 사랑의 뿌리가 된다.
남자가 불세출의 꿈을 접고 제 몸을 아낌없이 태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둠을 태우려 세상에 방화하는 것
그것이 불의 사랑, 불새의 사랑, 불멸의 사랑이다.
낙과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는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 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내 마음 지층에 남겨진 네 발자국은
숱한 내 고열과 생의 무게로 눈부신 화석으로 남았다.
물방울 화석보다 더 고운 네 발자국에
내 뺨을 문지르며 아직도 네가 나타나지 않는 늦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날이 시작되었다.
가로등 켜지는 나직한 소리가 네 발자국 소린가
깜짝깜짝 놀라는 사이사이로 푸른 계절이 지나가버리거나 비가 내리기도 했다.
낯선 문장이 오래 서성거리기도 했다.
초승달에 마음 베여 흐느낄 때까지 나의 낙서 속으로 졸음이 찾아들 때까지
그립다고 했다가 그렇지 안다고 했다가
그럴지 모른다고 했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가
시간은 증오마저 향기를 품게 하는데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해지는 기억의 잎맥들
난 꽃잎을 그렸다가
네 얼굴을 그렸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가 죽을 정도로 보고 싶다고 했다가
죽이고 싶도록 사랑한다고 했다가 널 만난 걸 후회한다고 했다가
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추억을 다독거렸다가
저녁 모서리에 너를 낙서하는 동안에도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가는 지금도 그 백 년 전 꽃잎인가.
물기 머금은 듯 이 향기는
그리고 밤하늘에 무수히 마중 나온 저 별들은
나는 널 사랑하다가 죽어 버리려고 한 날들이 있었다.
너와 나는 서로를 통과해 멀어져 가는 안개라 한 적이 있었다.
서로를 축축이 적시다가는 네게 젖은 나를 뽀얗게 말린다고
바람을 기다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 묻고 싶다. 내 안에 꽃잎의 발자국화석으로
남아있는 너의 흔적들 언제 넌 내 가슴을 지그시 밟고 간 백 년 전 꽃잎이었던가.
불의 잔
얼마나 더 슬퍼야 비극의 문장은 끝을 보여주나.
뼈와 살, 가난한 영혼마저 다 타버린다면
나로 인해 아픈 너를 놔두고 한 줌 재가 되면
먼별에서 불시착해온 거리 같고 세월 같은
꿈속에서나 만나는 너야,
차라리 불의 잔을 내려달라.
불의 잔으로 인해 내 긴 인중이 불길에 휩싸일 때
그것이 불의 축제고 즐거운 꿈의 제전이라 하자.
불의 잔을 내려 불온서적을 펼치고
죄에 이르게 한 달변의 내 붉은 혓바닥이여.
효지보다 더 가볍게 타오르고 때로는 핵분열처럼
순간적으로 타오르며 폭발하게 하라.
불의 독배를 들고 태양보다 더 이글거리게 하라.
불로 평정심을 찾던 재의 길로
죄의 길을 벗어나던 불의 쓰나미로
불의 잔으로
세상에 작별의 꽃다발을 미련 없이 던지더라도
불의 어금니에 숨통을 물어뜯기더라도
그리운 불의 잔이여.
불의 취기로 끝없이 방화하며 가자.
불을 거부하는 것은 순수도 진실도 아니라며
불바다가 된 서울로 한반도로 백두대간으로 세계로
거대한 불의 꼬리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나아가고 싶구나.
쭉정이 같은 허접쓰레기 같은
이름이 타며 가세하는 불길의 힘으로
오늘도 불의 잔으로 항진 또 항진
꼬리칠 때마다 별보다 더 아름다운 불똥을
끝없이 휘날리며 무자비하게 헤엄치고 싶구나.
강철의 벽, 온몸으로 팡팡 뚫고 항진하고 싶구나.
망망대해로 망망 세상으로
자동차만 한 심장을 가동하고 싶구나.
불에 잠겼다가 떠오르며 내뿜는 불기둥이
차디찬 신화의 달까지 이르게 뛰어오르자.
경종 같은 대포 소리로 탕 탕 탕 타아앙……*
끝없이 불의 나라를 질타하며
때로는 탕 탕 타아앙 타아앙 탕 축포를 울리며
오! 그리운 독배, 그리운 불의 잔이여.
*박남철 「고래의 항진」 변용.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화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
너를 그 무엇이라 부르면 그 무엇이 된다기에
너를 꽃이라 불렀으니 십장생인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중에 학이거나 사슴으로 불러야 했는데
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전엔 몰라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나 십장생을 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단명의 꽃으로 불렀기에 내 단명할 사랑을 예감해 울었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하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일이라니 십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 십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다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을 깨물며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메랄드 진주 비취 사파이어 마노
자수정, 남옥, 사금석, 혈석, 카넬리안, 공작석, 오팔, 장미석
루비도 있는데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울었다.
지는 꽃보다 더 흐느끼고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
뱀의 전설
나는 서울로 압송하는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오랏줄
일획의 참회하는 뼈저린 글이다.
한 때의 과오로 평생 슬슬 기면서
기를 펴지 못하는 길로 꿈틀거리며 왔을 뿐이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봉준아, 봉준아 하면서
산천도 울고 녹두 꽃 뚝뚝 지고 청포장수 울었다는데
나는 피가 안 통할정도로 전봉준을 꽁꽁 묶었던 끄나풀
내 긴 몸으로 내 긴 몸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싶구나.
고부나 삼례쯤에서 자학으로 짓이겨지고 싶구나.
가도 가도 끊어지지 않고 닳지도 않고 허물 벗을 때마다
다시 빛나는 몸으로 살아나는 내 죄의 문양과 죄의 독니
스스로 삼킨 독으로 대역죄인인 나를 벌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대한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삼킬 독
하나 나의 몸은 길지만 운명은 생각보다 너무 짧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나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부르며 찾던 사람은 세상 건너편에 서 있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이나 전쟁터에서라도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라도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애련리
가자, 낡은 노트와 책과 그리움아, 단벌의 그리움아, 읽다만 문장들아
재가 될 이름들아, 사막을 꿈꾸는 늙은 낙타의 지친 눈빛아, 돌아오지 않는
부메랑아, 세월아 가자, 파혼의 새들아, 상처로 아물지 않는 수면의 연못아
은마야, 가자, 헝겊으로 기운 꿈을 꾸더라도 왕관을 쓰지 않았더라도
총칼을 들지 않아 무기력해도 가자, 애련리로 신분도 명분도 없이 애련리로
솔밭으로 불어가는 바람처럼 지평선이 없더라도, 수평선이 보이지 않더라도
청미래 익어가는 애련리로, 늙은 시인이 별을 깎고 새벽으로 담금질해 시를
만드는 애련리로, 활화산이 없어도 사랑이 뜨거운 애련리로, 머위 잎이 푸른
애련리로, 빗방울에 풀 이파리가 즐거워하는 애련리로 가자, 애련리로
빛나는 모든 진리를 앞세워, 발달된 물질문명은 뒤로 두고 애련리로 가자
옷자락에 묻은 광장의 함성은 털어버리면서 데모대와 진압대가 겨루는
참혹한 풍경은 내려버리고, 우리 빛나는 이마로 애련리로 가자. 머뭇거렸던
물봉선화를 닮은 수줍은 한 시대야, 욕망에 찌든 모든 육체들아, 사랑들아
피신처를 제공했던 모든 담들아 무너뜨리고 애련리 가자, 우리 가고 나면
줄 장미 핀 세월이나 오게, 우리도 애련리로 가 애련리 물소리로 그간
더럽기만 했던 우리 입을 가슴을 씻고 먼 동 틀 때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밤이면 태몽 깊어져 고고성이 메아리 칠 애련리, 우리 사랑이 숨어 살 곳으로
김왕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1995년 6인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 새를 만드는 시인
2000년 제9회 지난계절의 우수상(다층)
2002년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2003년 제7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3년 사진 속의 바다(한국해양문학대상집)
2006년 시집 말 달리자 아버지(문광부지정도서)
2006년 제7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2006년 위독(박인한문학상전집)
2008년 제3회 지리산문학상
2010년 시집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2014년 시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우수도서 선정)
2016년 시집 게릴라(디카시집)
2016년 시집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세종우수도서 선정)
2016년 제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수상
2017년 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디카시집)
2017년 제24회 한성기문학상 수상
2017년 한성기문학상 작품집
2018년 올해의 좋은시상 <웹진 시인광장>
2004 ~ 2005년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
2004 ~ 2008년 현대시학회장
2012 ~ 2018년 시인축구 축구단(글발) 단장
2018 ~ 2019년 현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2012 ~ 2019년 현재, 계간 시와 경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