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민족의 기개,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 비키기는 어렵다”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 비키기는 어렵다.”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문구이니, 아마 우리 고장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하다. 바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결사항전한 동래부사 송상현이 왜군에게 던진 격문,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에 대한 해석이다. 김영사 출판 초등 검인증 역사교과서 편찬자는 그를 기백과 충절의 인물로 평가하고, 그때의 그 격문을 그렇게 해석했다.
전날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동래성까지 들이닥친 왜군이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며 엄포를 놓았고,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즉,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며 대응했다는 것이다. 초등교과서 기술의 근거가 되었을 부산향토역사대전, 부산광역시교육청 자료의 해석도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로 역시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라는 이 해석에서 과연 조선의 장수로서 그의 기백이 엿보이는가? 혹시 나약하기 짝이 없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가? 어찌 한 나라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가 전쟁에서 싸워보기도 전에 적에게 먼저 자신과 병사들의 죽음을 말하는가? 자신의 병사들에게는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말로 독려할 수 있겠으나, 싸우기도 전에 먼저 적에게 아군의 죽음을 말하는 대응에 ‘기백 있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이치에 어긋나는 문제가 발견되었으니 그 원인을 찾아보자. 문제는 간단명료하게 발견된다, 문장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아니 단순한 해석의 잘못이 아니라 의도적 왜곡임을 간파해야 한다. 왜정에 빌붙은 누군가가, 주어가 생략된 짧은 문장에서 의도적으로 주어를 뒤바꾸어 악의적으로 왜곡 해석한 것이다.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은 긴박한 전시에 사용된 격문이며, 그 특성상 문장 속에서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격문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이다. 그러니 이 문장에 사용된 모든 동사의 주체는 아군이 아니라 적군 즉, 왜군이다. 싸우다 쉽게 ‘죽을(死)’ 놈은 왜군이요, 길을 ‘빌리고자(假)’하는 놈도 왜군이다.
비록 허세일지라도 상대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자 하는 화법은 인류 전쟁역사상 만고불변의 정석화법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격투기 경기에서 경기 전 공개되는 선수 상호간의 신경전과 말싸움은 격렬하다 못해 살벌하다. 2003년에 개봉된 역사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 이런 말싸움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삼국지, 수호지에도 이런 장면은 비일비재하게 발견된다.
그러면 이제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후손들에게, 왜곡된 조상의 기개를 올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교육자료를 위해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을 정확하게 다시 해석해 보자. 격문의 원래 기능과 논리에 맞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주어는 ‘왜군’으로 설정해야 한다. 비록 전날 들은 왜군 조총의 위력에 살짝 겁을 먹긴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격문의 기능이 꾸짖는 데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모름지기 격문이란 저 유명한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처럼 적군이 듣기만 해도 벌벌 떨 정도의 위엄과 기개가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을 왜곡 해석한 왜정에 빌붙은 작자들의 망령과, 되살아난 그들 망령에 빙의된 뉴라이트 인사들이 벌벌 떨도록, 그리고 꾸짖음과 함께 오히려 조롱의 뜻으로 영화 ‘황산벌’식 화법도 적절히 섞어서 말이다. 괄호 속의 것은 실제 송상현 부사가 직접 말로써 꾸짖었으되 격문에서 생략되었을 내용을 의미상 복원해 본 것이다.
“(배은망덕한 왜놈들아!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로구나!)
싸우다가 죽기는 쉬울 것이나, 길 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죽기 전에 썩 물러가거라, 이놈들아!)”
/ 정승욱 (대동민속문화연구소장 ·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