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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승전(高僧傳) 제5권 / 석혜교
2) 석법화(釋法和)
법화는 영양(榮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안과 같이 공부하여 공손과 겸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논리의 벼리를 훌륭하게 표명하고, 의문 나고 막힌 점은 슬기롭게 풀이할 수 있었다.
석씨(石氏)의 난으로 인하여 문도들을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덕을 사모하는 파한(巴漢)의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양양(襄陽)이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양평사(陽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금여곡(金輿谷)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도안과 더불어 산마루에 올라가, 눈길이 닿는 끝까지 두루 바라보다가 슬퍼하였다.
“이 산은 높이 솟아, 노닐며 바라보는 사람이 많네. 세월이 흘러 한 번 변화하면, 마침내 누가 이 산임을 헤아리겠나?”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마음에 지닌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뒷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만약 지혜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후 도안과 함께 새로 나온 경전을 자세히 정리하고 글 뜻을 참작하여 바로잡았다.
이 무렵 위진(僞晋)의 왕 요서(姚緖)가 초청하여, 포판(蒲坂)에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 제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세속 안에서의 번뇌와 고루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곧 의복을 바로 하고 불상을 빙 돌아 예배하였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3) 축승랑(竺僧朗)
승랑은 경조(京兆)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떠돌면서 도를 물었다. 오랫동안 관중(關中)으로 돌아가 오로지 강설만을 맡았다.
어느 날 몇 사람과 함께 초청 받은 곳을 갔다. 도중에 문득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절 안에 옷과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라 곧 절로 돌아와 보니, 과연 도적이 있었다. 그의 전갈로 말미암아 잃은 것은 없었다.
승랑은 항상 푸성귀를 먹고 무명옷을 입었다. 뜻은 인간 세상 밖에서 즐겼다. 위진(僞秦)의 황시(皇始) 원년(384)에 태산(泰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사(隱士) 장충(張忠)과 숲 속에서 은둔하자는 기약을 맺고, 늘 함께 그곳에서 노닐었다. 후에 장충은 부견(符堅)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로 가다가 화음산(華陰山)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이에 승랑은 금여곡(金輿谷) 곤륜산에 따로 정사를 세웠다. 아직도 이곳은 태산의 서북에 있는 하나의 암곡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험준하며 수석(水石)이 굉장하다. 승랑은 처음 이곳에 승방을 축조할 때, 산의 아름다움을 다하도록 설계하여 절 안팎에 집 수십여 채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랑은 쉬지 않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힘들어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진(秦)의 임금인 부견은 그의 덕을 평소에 흠모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랑은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부름을 중지시켰다. 그러자 달마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다. 부견이 후에 대중 승려를 숙청할 때, 곧 별도로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였다.
“승랑 법사는 지계와 도덕이 얼음이나 서리 같다. 배우는 무리들은 맑고 빼어나다. 곤륜산 한 곳만은 관례대로 수색하지 말라.”
그 후 후진(後秦)의 요흥(姚興)도 찬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연(燕)나라의 임금 모용덕(慕容德)도 승랑의 명성과 행실을 흠모하였다. 임시로 동제왕(東齊王)이라 부르게 하고, 두 고을의 조세(租稅)를 공급하였다. 승랑은 왕의 지위는 사양하고, 조세만을 취하여 복업을 일으켰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 373~396)는 편지를 보냈다. 북위(北魏)의 척발규(拓跋珪, 武帝, 386~409)도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공경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 골짜기 안에는 예전부터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많아, 항상 지팡이를 짚고 무리지어 다녔다. 승랑이 이곳에 자리 잡자 맹수들이 귀의하여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도, 중도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었다. 백성들이 감탄하여 끝없이 칭송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금여곡을 낭공곡(朗公谷)이라 부른다.
무릇 승랑을 찾아올 사람이 있으면, 몇 명이건 간에 손님이 당도하기 하루 전에 미리 알아, 제자들을 시켜 음식을 준비토록 하였다. 반드시 그의 말과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의 미리 내다보는 밝은 지혜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그는 나이 85세로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승돈(支僧敦)
당시 태산에는 또 지승돈이 있었다. 본래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릴 때 연롱(汧隴) 지방을 떠돌았다. 오랫동안 형주(荊州)와 옹주(雍州)에서 지냈다. 대승에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났다.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을 지었는데, 역시 세상에 전한다.
4) 축법태(竺法汰)
법태는 동완(東莞) 사람이다. 어려서 도안과 같이 배웠다. 비록 재능과 말솜씨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태와 풍모는 도안을 넘어섰다.
도안과 함께 난을 피하여 신야(新野)로 갔다. 도안이 무리를 나누어 법태에게 서울로 내려갈 것을 명하였다. 헤어질 때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서북 지방에서 의식과 궤범으로써 펼치시오. 나는 동남쪽에서 교화를 넓히겠소. 그렇게 한다면 강호의 도술이 서로 바라보게 될 것이오. 청정한 인연으로 높은 모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곧 제자 담일(曇一)ㆍ담이(曇二) 등 40여 명과 함께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질병에 걸려 양구(陽口)에서 멈추었다.
당시 환온(桓溫)이 형주에 주둔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지나가는지를 묻고는 탕약을 공급하였다. 도안도 또한 제자인 혜원(慧遠)을 형주로 내려보내어 문병하였다.
법태는 병이 조금 치유되자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법태와 함께 오래 이야기하고자 하여, 먼저 다른 여러 손님을 상대하였다. 그래서 아직 법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법태는 병세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곧 가마를 타고서 곁방[廂]을 거쳐 돌아 나오며, 환온에게 알렸다.
“풍담(風痰)이 갑자기 발작하여 오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환온이 총총히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법태를 접대하고 돌아갔다.
법태는 키가 8척으로 풍모와 자태가 볼 만하였다. 뱉어내는 말과 쌓은 학식으로, 문장이 난초의 향기와 같았다.
당시 사문인 도항(道恒)도 자못 재주와 힘이 있었다. 항상 마음이 없다는 논리[心無義]에 집착하여 그 논리가 크게 형주 땅에 행하였다. 이에 법태가 말하였다.
“이는 삿된 주장이다. 반드시 이를 타파해야만 한다.”
곧 크게 이름난 승려들을 모으고, 제자인 담일을 시켜 이를 비판하게 하였다. 경전에 근거하여 이끌고 어지럽게 분석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도항은 그의 말솜씨에 힘입어 굴복하지 않았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모였다.
혜원이 자리에 나아가 수 차례 비판하자, 관련된 문책[關責]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항은 스스로 논리의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면서 털이개로 책상을 두드릴 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빨라야 할 때 빠르지 않은 베틀의 북[杼軸]이라니,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
좌석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에 마음이 없다는 논리가 여기에서 멎었다.
법태는 서울로 내려와 와관사(瓦官寺:在南京)에 머물렀다. 이에 진(晋)의 태종 간문제(簡文帝)가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방광반야경』을 강의하기를 청하였다. 대회를 연 날에 황제가 몸소 납시니, 왕후와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이지 않음이 없었다.
법태는 모습이나 이해력에서 보통 사람을 넘어섰기에,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개강하는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구경하고, 법문을 들으려는 선비와 아녀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도들은 차례대로 줄지어 앉았다. 삼오(三吳: 지금의 江蘇省ㆍ浙江省 일대) 지방에서 보따리를 싸매고 찾아온 사람도 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 와관사란 절은 본래 하내(河內)의 산완공(山玩公)의 묘 근처에서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사문 혜력(慧力)이 나라에 요청하여 절로 삼았다. 오직 법당과 탑만이 있었다. 법태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승방과 전우(殿宇)를 개척하였다. 뭇 일을 닦고 세웠다. 또한 중문(重門)을 세워서 땅의 형세에 어울리게 하였다.
여남왕(汝南王)의 세자인 사마종(司馬綜)의 저택이 절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침 그가 절 옆으로 굴을 뚫어서 중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법태는 개의치 않았다. 사마종이 깨달아 몸소 찾아와서 참회하고 사과하였다. 법태는 누워서 그를 맞으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였다.
영군(領軍)인 왕흡(王洽)과 동정왕(東亭王) 사마순(司馬珣), 태부(太傅) 사안(謝安)도 모두 끝없이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였다.
죽음에 이르기 며칠 전에 문득 몸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떠난다.”
진(晋)의 태원(太元) 12년(387)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는 68세이다.
열종(列宗)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조서를 내렸다.
“법태는 도를 팔방에 퍼뜨렸고, 은택(恩澤)이 후예들에게 흘러 넘쳤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픔이 가슴을 꿰뚫는다. 부의(賻儀)로 돈 십만 냥을 보낸다. 장사에 필요한 물자를 수요에 따라 갖추어 마련하라.”
손작은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들고
거문고 울음소리는 계곡에 아련하다.
시원하고 밝으신 법태여,
덕을 비교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담일(曇壹)ㆍ담이(曇二)
법태의 제자인 담일과 담이도 모두 경전의 논리를 널리 익혔다. 또 『노자(老子)』와 『주역』에도 빼어났다. 풍류를 좋아하여 혜원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담이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법태가 통곡하였다.
“하늘이 안회(顔回:孔子의 首弟子)를 데려갔구나.”
법태가 지은 의소(義疏)와 극초(郄超)에게 보낸, 본래 없음의 뜻을 논한[論本無義] 편지는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혹 세상에서는 말한다.
“법태는 도안의 제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5) 석승선(釋僧先)
승선은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상산(常山)의 승연(僧淵)의 제자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소박하며 곧은 지조가 있었다. 사미 때 도안과 여관(旅館)에서 서로 만났다. 도안도 당시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았을 때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일들을 피력하였다. 그 정신과 기개가 강개(慷慨)하였다. 헤어질 때 서로 말하였다.
“만약 서로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함께 노닌 일을 잊지 말자.”
승선은 계를 받은 이후 정성껏 수행에 힘쓰고, 배움은 경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석(石)씨의 난을 만나 비룡산(飛龍山)에 숨어살았다. 생각은 바위와 골짜기에 노닐고, 뜻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얻는 데 두었다. 도안도 그 후 다시 그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 흐뭇해하고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예전의 맹서를 비로소 따랐구나.’
이로써 함께 글을 펴놓고 생각을 모으니, 새로운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이때 도안이 말하였다.
“선인들이 예전에 불경을 번역할 때에 도가 경전을 빌린 논리[先舊格義]는 이치에 대부분 어긋나네.”
승선이 말하였다.
“다시 분석하고 소요(逍遙)해야 마땅하지. 하지만 어찌 옛 선배들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도안이 말하였다.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려면, 마땅히 진리와 올바르게 일치되도록 하여야 하네. 진리의 북을 다투어 울림에 있어서, 어찌 앞서고 뒤서고 할 게 있겠는가?”
승선은 이에 법태 등과 함께 남쪽으로 갔다. 진평(晋平) 지방을 떠돌면서 도를 강의하고, 교화를 넓혔다. 그 후 양양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호(道護)
도호도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곧은 절개가 있고 지혜와 이해력이 있었다. 역시 비룡산에 숨어살았다. 도안 등을 만나자 함께 말하였다.
“조용한 곳에 살면서 속세를 떠나 늘 불법을 바로잡고 싶기는 하네. 하지만 어찌 산문에서 홀로 걸어 다니며 법륜의 수레바퀴를 그치게 해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각자 힘에 미치는 대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세.”
대중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기 교화를 행하였다. 그 후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6) 축승보(竺僧輔)
승보는 업군(鄴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행을 지키고 집념과 의지가 곧았다. 배움은 여러 논(論)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아울러 경전과 불법에 밝았다. 도가 이락(伊洛:伊水ㆍ洛水로 지금의 洛陽 지방) 지방에 떨쳤으며, 온 서울이 종사로서 그를 섬겼다.
서진(西晋)의 기근과 난리를 만나자, 승보는 석도안 등과 함께 확택(濩澤)에 은거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윽하고 은미한 진리를 모두 훤하게 알았다.
그 후 형주의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간단한 푸성귀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높은 정성으로 예참을 수행하여,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불을 우러러 뵙기를 서원하였다.
당시 낭야왕(瑯琊王) 사마침(司馬忱)이 형주자사가 되었다. 승보의 곧고 소박한 정신에 의지하여 계사(戒師)가 되어달라고 청하여, 온 가문이 으뜸으로 받들었다.
그 후 죽기 이틀 전에 문득 말하였다.
“내일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묘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게 감돌고, 범패소리가 울리며 어우러졌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달려오니, 찾아온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
이 날 오후가 되자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절 안에서 장사지내고, 승려들이 그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7) 축승부(竺僧敷)
승부의 씨족은 아직 자세하지 않다. 배움은 뭇 경전에 뛰어나고, 특히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에 빼어났다.
서진(西晋) 말기의 난리에 강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성대하게 강석을 여니, 건업(建鄴)의 옛 승려들 치고 추대하고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같은 절에 있던 사문 도숭 역시 재능과 이해력이 버금갔다.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의 그윽함을 더듬어서 빼어나게 드러내는 능력에는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네.”
당시 외도의 학문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가 생각하였다.
‘마음과 정신에는 형상이 있으며[心神有形], 한낱 만물보다 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빼어난 말솜씨로 상대방을 꺾어 제압하였다. 이에 승부는 곧 『신무형론(神無形論)』을 지어 주장하였다.
“형상이 있으면 작용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다함이 있다. 그러나 정신은 일찍이 다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말재간에 기대는 무리들은 서로 어지럽게 논쟁하였다. 그러다가 이치가 돌아갈 곳을 찾자 흡족하게 그를 믿고 복종하였다.
그 후 다시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그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축법태가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 상인(上人)을 추억할 때마다 돌아다니던 일이 어제 같군. 그런데도 세상을 떠난 지 문득 여러 해가 되었네. 그와 맑게 이야기 나눈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그대와 함께 그의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 그렇건만 어찌 하루아침에 영원히 세상을 달리할 줄 알았겠나? 깊은 통한의 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서 터득한 것과 경서를 펴서 찾아낸 공부는 참으로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네.”
법태가 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주 승부의 논리를 진술하곤 하였다. 지금 미루어 찾건대, 그가 지은 글이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슬픈 일이라 하겠다.
8) 석담익(釋曇翼)
담익의 성은 요(姚)씨이다. 강(羌: 서쪽 오랑캐. 지금의 티베트) 지역 사람이다. 혹 기주(冀州) 사람이라고도 한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어려서는 계율 있는 행실로 칭찬을 받았다. 배움은 삼장에 뛰어나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촉군(蜀郡: 지금의 成都)을 경유(經遊)하자, 자사(刺史) 모거(毛璩)가 깊이 그를 중히 여겼다. 점심 공양을 마련하고 몸소 우러러 받들었다.
이때 담익이 밥 속에 한 톨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그것을 취하여 먹었다. 그러자 모거가 마음속으로 몰래 존경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반드시 신심으로 바치는 보시를 저버릴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 천 섬의 쌀을 선물하였다. 담익은 이를 받아 나누어 보시하였다.
담익은 일찍이 도안을 따라 단계사(檀溪寺)에 있었다. 진(晋)의 장사태수(長沙太守) 등함(騰含)이 강릉에서 자기 집을 희사하였다. 절로 만들기 위해 도안에게 강령(綱領)이 될 승려를 구하였다. 도안이 담익에게 말하였다.
“형주(荊州)와 초나라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교화를 이룩할 사람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담익은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절을 만들어 세웠다. 곧 장사사(長沙寺)가 그것이다.
그 후 도적들이 번갈아 날뛰면서 한남(漢南) 땅을 침략하였다. 강릉 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상명(上明)으로 피난하였다. 담익은 그곳에 절을 다시 세웠다. 도적 무리들이 소탕되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장사사를 수리하고, 참된 정성으로 기원하고 청하였다.
드디어 감응이 일어나서 사리가 나타났다. 금병에 담아 재(齋) 올리는 자리에 안치하였다. 담익은 곧 그 앞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며 서원하였다.
“만약 이것이 금강(金剛)이 남긴 음덕[餘蔭]이라면, 원하옵나니 광명이 빛나게 하여주십시오.”
한밤중에 이르렀다. 오색의 광채가 병 속에서 점차 밖으로 나와 온 법당을 가득히 비추었다. 모든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여, 담익의 신령한 감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시 비록 부란(富蘭) 등의 이교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서를 본다면 역시 거짓됨을 되돌려 진실함에 귀의했을 것이다.
그 후 파릉(巴陵)의 군산(君山)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었다. 이곳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이른바 동정산(洞庭山)이라 하는 곳이다. 산 위에는 구멍이 있어서 오(吳)나라의 포산(苞山)과 통한다. 산이 일찍이 영묘하고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몹시 그곳을 꺼려하였다.
담익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길에 수십 마리의 흰 뱀이 누워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담익은 물러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 멀리 산신령을 청하여 예참을 올리면서 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절을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는 것입니다. 원컨대 공덕을 함께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날 밤 곧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담익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삼보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면, 특별한 도움을 드리는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튿날 다시 산을 찾아가니, 길이 매우 깨끗하고 평탄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서 강의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 가운데 벌목하는 사람이 몰래 나무를 훔쳐가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돌아와 절 위에 이르니, 담익의 재목은 이미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몰래 훔쳐 사유물로 취한 것은 모두 관가에서 거두어갔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담익은 항상 한탄하였다.
“절을 세워 승려들은 충족되었으나 부처님의 형상이 아직도 적다.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부처님 모습의 신비한 상서로움은 여러 지방에 두루 깔려 있다. 그렇거늘 어찌 그런 감응이 없어 그 불상들을 모셔올 수 없단 말인가?”
이에 오로지 간절하고 측은하게 정성스러운 감응을 빌었다. 진(晋)의 태원(太元) 19년(393) 갑오해 2월 8일에 문득 한 불상이 성의 북쪽에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하늘에 충천하였다. 당시 백마사(白馬寺)의 승려들이 먼저 그곳에 가서 영접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담익이 그곳에 가서 공경하게 예불하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아마도 아육왕의 이 불상은 우리 장사사(長沙寺)에 내려주신 것이리라.”
곧 세 사람의 제자를 시켜 받들어 영접하였다. 그러자 가볍게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일어나서 본사로 맞아 돌아왔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와 말의 굉음이 거리를 메웠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禪師)인 승가난타(僧伽難陀)가 촉(蜀)에서 내려와, 절에 들어와서 예배하였다. 불상의 광배 위에 범어로 새겨진 글자가 있음을 보고 곧 말하였다.
“이것은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입니다. 언제 이곳에 왔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담익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날, 불상의 둥근 광배가 갑자기 신령스럽게 변화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담익과 감응이 통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승위(僧衛)
당시 장사사(長沙寺)에는 또한 승위(僧衛)란 사문이 있었다. 학업이 매우 뛰어나 은중감(殷仲堪)6)이 소중히 여겼다. 특히 『십주론(十住論)』에 뛰어나서 그 논의 주해(注解)를 달았다.
9) 석법우(釋法遇)
법우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여 뜻이 고전문헌에 두터웠다. 그러나 성품이 멋대로 자랑하고 큰 소리를 쳐서,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도안을 만나자 문득 믿고 굴복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깎고 도에 들어,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윽한 교화에 씻기어 슬기로운 이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본래의 마음을 꺾고서 겸허하게 덕을 이루었다. 의양태수(義陽太守) 완보(阮保)가 이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멀리서 좋은 벗의 의리를 맺고자 하였다. 편지로 서로의 사귐을 나누고, 보시를 보내는 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양양(襄陽)이 침략을 당하자, 법우는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니, 수업하는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당시 어떤 승려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향공양을 올리는[燒香] 소임을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법우는 다만 그에게 벌만 내리고 내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도안이 멀리서 들었다. 대나무 통에 곤장 하나를 담아 손수 봉함을 하고, 글을 써서 법우에게 보냈다. 법우가 봉한 것을 열었더니, 그 속에 곤장이 있음을 보았다. 곧 말하였다.
“이는 술을 마신 승려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나의 주의를 일깨우는 명령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먼 곳에 계시는 스승께서 근심을 담은 선물을 보내신 것이다.”
곧 유나에게 명하여 건추(犍槌)를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는, 곤장이 든 통을 향등(香橙) 위에 안치하였다. 행향(行香: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친 다음, 법우는 곧 일어났다. 대중 앞에 나가서 통(筒)을 향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땅에 엎드려 유나(維那: 절의 사물을 맡아 지휘하는 소임을 맡은 승려)에게 명하여 곤장을 세 번 내리치게 하였다. 곤장을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시 경내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일에 힘쓰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조금 지나 혜원(慧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사람됨이 미미하여 어둡고 모자라서 대중들을 잘 거느리지 못하였네. 스승님[和尙]께서 비록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계시지만, 오히려 먼 곳까지 근심과 염려를 드렸으니 나의 죄가 깊다네.”
그 후 그는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10) 석담휘(釋曇徽)
담휘는 하내(河內) 사람이다. 12세에 도안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도안이 그의 고상한 풍채를 가상히 생각하였다. 우선 책을 읽게 하니, 2ㆍ3년 안에 배움이 경전과 역사를 겸하였다. 열여섯 살에 비로소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오로지 불교의 논리에 힘썼다. 그윽이 엉킨 진리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헤아려서,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설할 수 있었다. 뜻하는 일이 높고 깨끗하였다. 또한 공손함과 양보함으로써 존중을 받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양양에 있었다. 부비(符丕)가 경내를 침범하였다. 곧 동쪽 형주로 내려가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늘 근본이 있음을 뒤돌아보았다. 마침내 도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에 강릉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印手)보살7)에게 공경을 드렸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의 도에 의한 교화를 그대 스승[和上:道安]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담휘가 말하였다.
“스승님의 내부 행실이야 그 깊고 얕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 인연에 미친 바는 대부분 모두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한 방울의 물로 어찌 강이나 바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晋)의 태원(太元) 20년(395)에 세상을 마쳤다. 죽음을 맞이한 날에도 몸에 별다른 병이 없었다. 당(堂)에 올라가 대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어 고별을 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오른편 겨드랑이를 대고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입본론(立本論)』 아홉 권과 「육식지귀(六識旨歸)」 12수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1) 석도립(釋道立)
도립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려서 출가하여 도안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방광반야경』에 뛰어났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삼현학8)이 불교의 이론과 약간 상응한다 하여, 그것의 뜻을 자못 귀속시켰다. 성품이 맑고 텅 비어 세상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복주산(覆舟山:當陽東南玉泉寺의 뒷산)에 은거하였다. 홀로 바위굴에 거처하며 공양을 받지 않았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선정에 들어가면, 곧 7일 동안을 일어서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그 후 초여름에 담휘는 문득 산에서 내려왔다. 대중 승려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강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가을까지만 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품던 생각을 거칠게나마 끝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자일(自恣日:陰 7월 16일) 뒤 며칠이 지나서, 과연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명을 아신 분이라고 일컬었다.
12) 석담계(釋曇戒)
담계는 일명 혜정(慧精)이라고도 한다. 성은 탁(卓)씨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진(晋)의 외병부(外兵部) 극양(棘陽) 수령 잠(潛)의 동생이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배움에 힘써서 마음을 고전 서적에서 노닐었다.
후에 법도(法道)가 『방광반야경』을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다. 옷을 빌려 입고 가서 한 번 들었다. 마침내 불교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속인 생활을 그만두었다. 도를 따라 도안에게 엎드려 스승으로 섬겼다. 삼장에 해박하게 뛰어나며, 5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평일에도 하루 5백 배로 예불하였다.
진(晋)의 임천왕(臨川王)이 몹시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후에 병이 위독해지자 항상 미륵불의 명호를 외웠다. 입에서 미륵불이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자인 지생(智生)이 간호하다가 물었다.
“왜 안양정토(安養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담계가 말하였다.
“나는 스승님[和尙:道安]등 여덟 사람과 다 같이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스승님과 도원(道願) 등은 이미 모두 그곳에 왕생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가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오직 염원할 뿐이다.”
말이 끝나자 광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다. 얼굴에 더욱 기쁨이 넘쳐흘렀다. 드디어 문득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그를 도안의 묘지 오른편에 장사지냈다.
13) 축법광(竺法曠)
법광의 성은 역(睪)씨이며 하비(下邳) 사람이다. 오흥(吳興)에 살았다. 일찍 부모를 잃고 양어머니를 섬겼다.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집이 가난하고 비축한 재산이 없어서 늘 몸소 밭을 갈아, 그것으로 어머니를 보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을 치를 때 예절을 다하였다. 그리고 복을 마치자 출가하였다.
축담인(竺曇印)을 스승으로 섬겼다. 담인은 밝고 슬기로우며 도의 행실이 있었다. 법광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머금은 기풍과 세운 지조가 우뚝하여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 일을 편안히 여겨, 뜻과 행실이 깊고도 깊었다.
한 번은 담인의 병이 위독하였다. 법광이 곧 7일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며 예참하였다. 그러더니 7일째 되던 날, 문득 오색의 광명이 나타나 담인이 거처하는 방문을 비추었다. 담인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로써 괴롭던 병이 마침내 나았다.
그 후 스승 곁을 떠나 먼 곳으로 떠돌면서, 널리 경전의 요점을 찾았다. 돌아와 잠청산(潛靑山)의 석실에 머물렀다. 매양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뜻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정토의 인연으로써 늘 이 두 부의 경을 읽으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암송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을 다스리자, 짐짓 그를 찾아와 공경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중이 그윽이 깊고 막혀서 수레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마를 산초(山椒) 나무 밑에 풀어놓고 봉우리를 넘어 걸어서 찾아왔다.
진(晋)의 간문황제(簡文皇帝)는 당읍태수(堂邑太守) 곡안원(曲安遠)을 파견하여 조서를 보내 일상생활을 위문하였다. 아울러 요상한 별이 나타난 일을 여쭈어, 법광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법광은 조서에 답신을 보냈다.
“예전에 송(宋:前宋)의 경제(景帝)가 복덕을 닦았더니, 요사한 기운의 별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정치와 형벌을 참으로 잘 닦으시고, 천하의 무거운 임무를 맡아 모든 일을 풍부하게 잘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털끝만큼만 잘못하여도 결과는 천 리의 차질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덕(德)으로 다스림을 닦으시어, 하늘의 견책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빈도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주상에게 보답하여야 하오나, 실로 마음은 있어도 힘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곧 제자들과 더불어 재(齋)를 올리고 예참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재난이 소멸되었다.
진(晋)의 흥녕 연간(363~365)에 동쪽 우혈(禹穴:會稽山)로 노닐며 산수를 관람하였다. 비로소 약야(若耶)의 고담(孤潭)에 머물렀다. 고개 옆 잿마루를 의지하여, 한적함에 깃들어 뜻을 기르고자 하였다. 극초(郄超)ㆍ사경서(謝慶緖) 등과 모두 세속 밖의 사귐을 맺었다.
당시 동쪽 나라 대부분에 돌림병이 휩쓸었다. 법광은 이미 어려서부터 자비를 익힌 데다, 아울러 신령한 주문[呪]에도 뛰어났다.
마침내 산촌 마을을 유행하면서 위급한 환자들을 구제하고, 곧 고을로 나와 창원사(昌原寺)에 머물렀다. 백성들 가운데 병이 있는 사람은 자주 이곳에서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다. 이때 귀신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법광이 걸어가고 머무는 곳에는 항상 수십 명의 귀신이 그의 앞뒤를 호위한다.”
당시 축도린(竺道隣)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阿彌陀佛像)을 조성하였다. 법광은 곧 그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큰 불전을 세웠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나무를 베다가 가뭄을 만났다. 법광이 주문을 외워 물이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진(晋)의 효무(孝武)황제가 바람결에 전하는 소문을 들었다. 흠모하여 서울로 나오라고 요청하였다. 스승의 예로 섬기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흥(元興) 원년(40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산기상시(散騎常侍) 고개지(顧愷之)가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고 한다.
14) 축도일(竺道壹)
도일의 성은 육(陸)씨이며 오(吳:江蘇省)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고 바르며 학업의 소양이 있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오래 거처하여야만 그가 신과 같이 빼어남을 알았다.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 형제도 깊이 공경을 더하여 섬겼다.
진(晋)의 태화(太和) 연간(366~370)에 서울로 나가서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태에게 수학하였다. 몇 년 사이에 생각이 깊고도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그러므로 강론할 때면 서울이 기울도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법태의 제자 담일(曇一)도 우아한 도풍과 지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담일을 대일(大一)이라 부르고, 도일을 소일(小壹)이라 불렀다.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서 당시에 강론의 종사가 되었다. 진의 간문(簡文)황제도 깊이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황제가 붕어할 무렵 법태도 죽었다. 그러자 도일은 곧 동쪽으로 돌아와 호구산(虎丘山:左蘇州)에 머물렀다. 학도들이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에 단양(丹陽)의 윤이(尹移)로 하여금 도일을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도일이 회답하였다.
“무릇 제가 듣기로, 크나큰 도의 행실은 은둔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그 뜻을 마음대로 펼치는 것이라 합니다. 요순의 태평성대에도 은둔자들에게서 그 본성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방편을 넓히는 일이야 바깥에 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먼 곳까지 이른 것에서는 세속을 밟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대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진(晋)나라의 광명이 밝아져서 덕의 가피는 소외된 곳이 없습니다. 불법에 높이 경례하여, 이를 넓히고 자라나게 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장삼을 걸치고 석장을 흔들면서 달려와 천자의 도읍에 가득합니다.
모두가 애욕을 자르고 욕망을 버려, 맑고 그윽하게 마음을 씻고서, 멀리 텅 빈 세상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가 깊으면 항상 숨어살면서 뜻을 자비구제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행하되 한 지방에 머물지 않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되 오직 도에만 힘쓸 따름입니다. 비록 만물이 날짜 헤아림으로 유혹하여도 식자들은 해마다의 공적을 깨닫습니다.
지금 만약 그 속한 승적(僧籍)을 옮겨서 편호(編戶: 가난한 백성의 호적)에 들어가게 한다면, 아마도 사방을 떠도는 사람들이 성인의 세상에서 절벽을 바라보듯 할 것입니다. 거동을 가볍게 하는 무리들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성대하고 밝은 기풍을 훼손하고 주상의 뜻을 잘못되게 할 것입니다.
또한 황복(荒服:邊方)의 손님은 궁궐[天臺]과 무관하며, 그윽한 풀숲 속에 사는 사람은 왕부(王府)에 글을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다행히 시절을 살피시어 날아오르게 하시면, 훗날 모일 것입니다.”
도일은 이에 그윽한 언덕에 한가하게 머물러서 궁벽한 골짜기에 그림자를 숨겼다.
∙백도유(帛道猷)
당시 약야산(若耶山)에 백도유(帛道猷)란 사람이 있었다. 본래의 성은 풍(馮)씨이며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알려졌다. 성품이 진솔하고 소박하여 은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읊고 짓는 시편(詩篇)마다 호상(濠上: 세상을 벗어난 仙人)의 풍모가 있었다. 도일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도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비로소 느긋하게 산림 아래에서 노닐면서 공자ㆍ석가의 글에 마음을 풀었습니다. 흥취에 부딪치면 시가 되고, 봉우리를 넘어가 약을 캐서 복용하면 오래된 병이 덜해집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대와 날을 함께 하지 못하여 한이 될 뿐입니다.”
이어 시를 지어 보냈다.
이어진 봉우리 수천 리
빼어난 숲은 평평하게 나루터를 휘감네.
지나가는 구름에 먼 산 그늘지고
바람이 다가오니 황량한 잡목 숲이 시끄럽구나.
초가집은 가려져 보이지 않고
닭이 울어야 사람 있음을 아네.
그 좁은 길 한가로이 걸어가면
곳곳에 버려진 땔감이 보이네.
비로소 알았노라. 백 대 뒤에도
짐짓 상황(上皇: 요순)의 백성이 있음을.
도일이 편지를 받고는 자신의 포부에 들어맞는 바가 있었다. 곧 동쪽 야계(耶溪)로 가서 도유와 서로 만났다. 숲 아래에 자리를 정하였다. 이에 티끌세상 밖으로 정신을 마음대로 하면서 경서(經書)로 스스로를 즐겼다.
이 무렵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사마회(司馬薈)가 고을 서쪽에 가상사(嘉祥寺)를 일으켰다. 도일의 기풍과 덕이 드높다 하여 초청해서 승려의 우두머리로 앉혔다. 이에 도일은 곧 6물(物:三衣와 鉢盂ㆍ坐具ㆍ甁)을 거둬 절로 보냈다. 그것을 팔아 금첩천상(金牒千像)을 조성하였다.
도일은 이미 내외의 고전에 해박하게 뛰어났다. 또한 계율의 행실이 깨끗하고 엄정하기에 사방 먼 곳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였다. 묻고 명을 받드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주도유나(九州都維那)라 불렀다.
그 후 잠시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곧 산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문장을 달리고 말씀을 설한
그 인연 헛되지 않아
유독 우리 도일만은
여유로운 남음이 있노라.
비유하면 봄날의 뜰과 같아서
향기 높고 명예로워
줄기와 잎새 아름답고 무성하며
가지의 기둥들은 빽빽하면서도 성글도다.
∙도보(道寶)
그의 제자인 도보는 성이 장(張)씨이며 역시 오나라 사람이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더욱이 강석 위에서 능란하였다. 장팽조(張彭祖)ㆍ왕수담(王秀琰) 등으로부터 모두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거슬림이 없는 사귐으로 알려졌다.
15) 석혜건(釋慧虔)
혜건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계율 있는 행실을 받들어 지켜서 지조가 확고하였다. 여산(廬山)에 십여 년 가량 머물렀다. 도인과 속인들 중에 수승한 도리에 뜻을 둔 자들은 모두 그의 풍채에 의탁하여 사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여러 경전을 새로이 번역하여 내놓았다. 혜건은 그것을 부연하고 밝히는 것에 뜻을 두어 덕 높은 가르침을 선양하였다. 혜원(慧遠)이 산자락에서 그윽한 교화의 바람을 크게 떨쳤다. 그러자 혜건은 곧 동쪽 오월(吳越) 땅으로 유행하다가 그 지역에 몸을 맡기고,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祥寺)로 들어와 자기 욕망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을 인도하고 몸으로 고행하면서 대중들을 거느렸다. 모든 새로 나오는 경전은 다 베껴 써서 강설하기를 거의 5년 가까이 하였다. 문득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얼마 후 스스로 반드시 목숨이 다할 것을 알았다. 생각을 안양정토에 두고 성심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였다.
산음의 이웃 절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다. 오래도록 쌓은 덕망과 계행이 있었다. 밤에 꿈을 꾸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서쪽 성곽의 문[西郭門]으로 들어왔다. 맑고 빛나는 묘한 형상으로 광명이 해와 달처럼 비추었다. 당기ㆍ번기와 꽃으로 만든 일산[蓋]은 모두 7보로 장엄했다. 관세음보살을 보자 곧 예배를 드리고 물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대답하셨다.
“혜건을 영접하려고 가상사로 가는 길이다.”
곧 이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병은 비록 오래도록 위독하긴 했지만, 얼굴빛은 평안하여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자들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으며, 한참 후에야 멎었다. 혜건 스스로 반드시 세상 끝날 날을 헤아리고, 또한 상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듣고 본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찬탄하고 그리워하였다.
주석
1 석륵(石勒)의 아들. 후조(後趙)의 초대 제왕.
2 5호 16국 연(燕)나라의 국주(國主).
3 탑의 꼭대기에 얹는 두터운 바퀴[輪]이다.
4 중국 우(禹)임금 때 천하(天下)를 다스리던 대법(大法).
5 천자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6 동진(東晋)의 무장(武將)으로 청렴하고 청담(淸談)을 잘 하였으며 효무제(孝武帝)가 중용함.
7 과거 도안(道安)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8 삼현학(三玄學)은 『노자』ㆍ『장자』ㆍ『주역』의 총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