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마다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이 손짓하는 난산마을.
제 4경에 蘭山橘林
제주마을 이름 대부분 그러하듯 난산蘭山이란 마을 이름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난미' 로 부르다가 조선 후기에 풍수지리설로 지형이 난초(蘭草)형이라 하여
난야리(蘭野里)로 불리다가 한자 표기를 위해 '난미', '난뫼'를 난산蘭山리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도 어른들 사이에선 '난미'라고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 이름 만큼이나 난산마을은 긴 역사와 함께 향학열과 부지런함, 근검 절약 하는 정신이
몸에 벤 동내다. 검소함과 부지런 함은 난산마을 전체를 통틀어 큰 부자도 없지만 크게 가난한 집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으로 인하여 제주도내 마을 중엔 초,중교장선생님 출신이 유독 많아, 아마도 마을 곳곳에
드리운 향학열 영향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난산리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을 들라면 오흥태의사(吳興泰義士)가 있다. 오의사는 유향별감 오전(吳巓)의
아들로 난산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히 공부하여 과거에 수차레 응시하였으나 낙방
하였다.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세속에 젖지않고 의리를 위해서는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의리를 관철하였다.
영조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오흥태는 출전을 결심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려고 전도에 격문(檄文)
을 돌렸는데 응모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모든 준비를 하고 출발하려고 날씨를 기다릴 때 난은 벌써 수습
되어 평란의 소식이 전하여졌다. 오흥태는 전선에 출전하여 진충의 성을 다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이 출진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의 격문은 구구절절 사람을 감동 시키는 힘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전해지고있다.
정조18년(1794년) 심낙수어사에 의해 모든 사실을 확인한 연후에 임근님에게 아뢰어, 임금으로 하여 의사
(義士)로 정표(旌表)되고 철종원년(1850년) 목사 장인식이 정의서당에 의사묘(義士廟)를 세워 배향하였다.
현재 성산읍 난산리 416번지 온평리 가는길 중간 지점에 오흥태의사비(吳興泰義士碑)가 세워져 오가는 이로
하여 마음에 새기게 하고 있다.(남제주군지)
예로 부터 난산리 마을을 양촌이라 불리웠다. 양촌이란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요즘말로 하면 젊잖다 쯤
될듯하다. 제주어로 표현하자면 '오두낫' 하다 쯤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양반들이 살아서 양촌兩村인지
아니면 양반兩班처럼 살아서 양촌인지도 모르겠다.
난산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예전엔 드넓은 임야를 이용하여 목축업도 성행 하였다. 중산간
마을인 난산리는 제주동쪽 지역 특성상 토지가 척박하여 예전엔 살기가 어려웠다. 소위 말하는 부지런
공으로 지난한 삶을 벗어나지 않았나 여긴다. 70년대 부터 불기 시작한 감귤 재배로 인하여 개개인의 삶은
한층 나아져 지금은 부자마을로 자리 메김하고 있다.
앞서 기술 했듯이 마을 사람들이 근면검소하고 향학열이 높은 까닭은 무엇일까를 눈여겨 볼때 잡혀지는
감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려면 부지런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어서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더 나은 세계에 다가서려는 생각으로 높은 향학열을 가졌다고 여긴다.
난산마을 주민들 마음 속엔 오흥태의사의 나라를 위한 의리관(義理觀) 효행관(孝行觀) 충성심(忠誠心)이
마음속 한켠에 자존감으로 남아 삶의 지표로 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오흥태의 행동, 오흥태의 가치
하나 하나가 마을사람 개개인에게 본인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스며들어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본다.
아름다운 마을이름 만큼이나 난산마을을 하나, 둘 뜯어보면 오밀조밀 알콩달콩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있다.
그렇다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기암절벽이 있다거나 오래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형의 자산이
있는것도 아닌데도 소소한 아름다움이 마을 곳곳 스며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조각보처럼 잘 짜여진 밭담안 밭들, 골목마다 돌담 너머에 다소곳하게 정좌한 감귤나무들, 계절마다 형형색색
으로 변하는 길가 나무들, 어느것 하나 아깝지 않은게 없을 정도다. 이러한 소소한 아름다움들이 모여 모여
난산마을 전체를 하나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닐런지.
예전엔 관광 하면 명승지 혹은 유명한 곳을 찾았지만 요즘의 관광은 이름없는 마을을 찾아 마을의 특성이나
속살을 보려는 관광이 대세다. 이는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허물어진 탓도 있지만 고향을 찾는 회기본능
또는 귀소본능 때문인듯 하다.이러한 영향으로 난산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제주도 적인 게 세계적인 것이듯 가장 난산마을 적인 게 세계적인 게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마을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체험하는 관광을 권하고 싶다. 될수 있으면 옛것을 살리는 쪽으로 마을을
보여주면 좋을 듯 싶다. 조금 불편하다고 있는 자원을 허물어 버리는 누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오밀 조밀한 마을안길 돌담은 보물중에 보물이므로 원형을 그대로 살려 후손에게 물려 줬으면 한다.
100년 200년 후 마을에 있는 돌담 하나로 후손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난산마을
사람들은 복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