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四溟大師) - 임응규(任應奎)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僧將)으로 본관(本貫)은 풍천(豐川)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풍천임씨(豐川任氏) 11世孫이며 仲派 자순(子順)의 현손(玄孫)이다.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수성(守成)의 아들이며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종원(宗元)의 손자(孫子)이다. 14世孫 거창현감을 지낸 숙계(淑溪) 임윤성(任尹聖) 보다 3살이 많았고 동 시대에 나라를 위한 큰일을 했다. 임진왜란 시 사명대사는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임윤성(任尹聖)은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였다.
1558년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여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해인사에서 머물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1권 등이 있다.
사명대사 친필 - 1605년 3월에 많은 도움을 받은 일본승 현소에게 써준 것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는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음각했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豊川任氏28世孫/晉州任氏19世孫和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