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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權)…가(假) 또는 임시, 방편을 의미함. 진실에 이끌기 위해 근기(根機)에 응해 일시적으로 설하는 법. 실(實)에 대칭이 되는 말이다.
※실(實)…진실을 의미함. 마지막 궁극의 변하지 않는 참되고 완전한 법을 지칭한다.
*권교(權敎)--여기서 ‘권(權)’은 가(假) 또는 방편(方便)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권교란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방편으로써 가르침을 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즉, 진실한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와 욕망에 따라 그에 응해 설하신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깊은 진리는 보통 상식으로는 대번에 알아듣기 어려우므로, 처음엔 일시적인 방편으로 얕은 이치인 권교를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참된 실상(實相)을 가르쳤다. 따라서 권교란 진정한 가르침인 실교(實敎=圓敎)에 대칭되는 말이다.
<법화경>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전권후실(前權後實), 곧 권교(방편교)에서 실교로 들어가는 순서를 밟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권교를 설하실 때는 아무렇게나 설하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권교를 설하시는 것은 상대의 근기가 낮으니까 수타의교(隨他意敎), 곧 상대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그에 맞게 설하신 것뿐이다. 부처님께서 권교를 설하실 때는 곧 수타의교를, 수타의교를 설하실 때는 수자의교(隨自意敎), 곧 진실의 가르치심 <법화경>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시고 설하셨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권교(權敎)라는 것은 실교(實敎), 곧 일불승 <법화경>을 설하시기 위한 길잡이인 셈이다.---→실교(實敎), 권실(權實) 참조.
*권교방편(權巧方便)---권방편(權方便)이라고도 한다. 방편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진리 그 자체를 진리로 직접 표현하기 힘들 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간접적 수단을 말한다. 권교방편이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부처님이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베풀듯이 정교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 혹은 부처님이 중생을 지도하기 위해 일을 꾸미는 지혜를 말한다.
*권대승(權大乘)---실대승(實大乘)에 대칭되는 말로서, 일시적인 방편으로 설한 대승의 가르침을 말한다. 실대승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 수단이란 말이다. 특히 종파적 입장에서,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에서는 서로 자기들의 종파를 진실이라 하고, 그것에 대립하는 입장을 권대승이라고 한다. 예컨대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의 입장에서 자기네의 일승교를 실대승이라 하고, 이에 비해 법상종(法相宗)과 삼론종(三論宗)의 삼승교를 가리켜 권대승이라 한다. 반대로 삼승교에서는 일승교를 권대승이라 한다.---→삼승교(三乘敎), 실대승(實大乘) 참조.
•권불(權佛)---여기서 ‘권(權)’은 임시방편을 의미한다. 진실로 이끌기 위해 근기에 맞게 일시적으로 설하는 법으로, 실(實)에 대칭이 되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석가모니불인데도 실불(實佛)로서의 석가모니불과 권불로서의 석가모니불로 구분한다.
천태종에서는, 정반왕의 태자로 태어나서 29세 때 출가, 6년간 고행 끝에 35세에 성도(成道)해, 이후 45년간 설법하고, 80세에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바세계 중생을 위해 방편으로 나투신 권불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 약사유리광불, 대일여래, 정광불, 미륵불… 등도 모두 권불이라 한다.
권불(權佛)은 구원실성의 본불의 그림자로서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부처를 말한다. 사바세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잠시 일대사인연으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부처를 적불(迹佛)이라 하는데, 권불과 적불은 같은 개념이다.
이에 비해 실불(實佛)은 <법화경> 제16 여래수량품에서 비로소 유일하게 부처님의 본래 경지를 열어서 본체를 밝히신 것을 말한다. 먼 옛날인 한량없는 과거세 백천 만억 나유타 겁에 이미 부처님을 이루셨으며, 그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의 비밀한 신통의 힘으로써 가지가지 법을 설하셨고,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셨으며, 중생제도를 위해 방편으로 열반에 드시기도 했고, 항상 모든 곳에 머무르시어 멸하지 않고 법을 설하고 계시는 구원실성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같은 석가모니불이라도 실불의 입장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이고, 권불의 입장에서는 시성정각(始成正覺)의 부처님이다.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에서의 자기 합리화를 위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적불(迹佛) 참조.
*권속반야(眷屬般若)---→‘반야(般若)의 종류’ 참조.
*권승(權乘)---권(權)과 실(實) 두 글자는 대칭되는 말로서, 근기에 맞도록 가설한 방편을 권(權)이라 하고, 수단이 아닌 불변의 진실을 실(實)이라 한다. 그러므로 권승은 진승(眞乘ㆍ實乘)에 대칭되는 말로서 일불승(一佛乘最上乘)에 이르게 하는 단계적 교설을 말한다. 즉, 일승에 이르는 과정의 이승(二乘)과 삼승(三乘)의 교설이 모두 권승이다.
*권실(權實)--권교(權敎)와 실교(實敎)의 약칭이다. 때에 따라 근기에 맞도록 가설(假說)한 방편을 권(權)이라 하고, 수단이나 가설이 아닌 구경불변(究竟不變)하는 진실을 실(實)이라고 한다. 즉 수단적인 가르침과 진실된 가르침을 뜻한다. 이 권실관계는 체(體)ㆍ용(用)ㆍ이(理)ㆍ사(事)의 관계와 같아, 사물의 차별상을 인식하는 것을 권지, 실상의 이치에 통달한 것을 실지라고 한다.
권과 실의 판단은 종파에 따라 달라 천태종과 화엄종에서는 <법화경>을 근거로 해서,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三乘)은 사람의 이해능력에 따른 방편적 가르침이므로 권교이고, 불타의 일승(一乘)이 진실한 대승(大乘)은 실교라 하고 있다. 한편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일승을 권교, 삼승을 실교라 하며,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이승을 권교, 일승은 실교라고 한다. 이러한 종파에 따른 차이는 중국불교의 특색인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초래한 종파 사이의 아전인수격의 논술이라 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불교교리의 사적 발전과정을 담고 있다. 이 권실이교(權實二敎)는 권교가 곧 실교라고 하는 권실불이(權實不二)의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권교(權敎), 실교(實敎) 참조.
*권지(權智)---부처와 보살이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
*권청(勸請)---일반적으로 신불(神佛)의 내림(來臨)을 비는 것을 권청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에게 설법을 해 주기를 원하거나 열반에 들려는 부처님에게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원하는 것을 일컫는다.
즉, 권청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을 때, 범천왕(梵天王)이 그 깨달음의 경지를 널리 대중에게 설해 주시기를 권했던 것이 권청의 시초이다.
<증일아함경> 권청품(勸請品)의 제1경에 전하는 말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도(道)를 얻은 지 오래지 않았는데, 이렇게 생각하셨다. ‘내가 얻은 깊은 이 법은 밝히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며, 깨달아 알기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설령 내가 남을 위해 이 묘한 법을 연설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받아주지 않거나 또 받들어 실천하지 않으면 부질없이 수고롭고 손해만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 어찌 꼭 설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세존의 고민을 알고, 그때 범천이 세존께 아뢰었다. ‘이 세상 중생들도…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에 시달리고 있지만 근기는 이미 성숙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법을 듣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만다면, 그 또한 애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부디 원컨대 세존께서는 저들을 위해 설법해주소서.’」
*권학십법(勸學十法)---<화엄경>에 나오는 말이다.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 소위송습다문(所謂誦習多聞)---법문 많이 듣고 경을 많이 읽고 계속 읊조리고 외워야 한다. 송습다문이다. 외우고 익히고 많이 들어라.
• 허한적정(虛閑寂靜)---편안하게 텅 비우고 고요하게 있는 자세를 배워라.
• 근선지식(近善知識)---선지식을 가까이 하라.
• 발언화열(發言和悅)---말이 온화하고 기쁨이 넘치는 말을 해야 된다. 가능하면 우리 스님들은 표준말을 쓰고 촌스러운 말투를 그만해야 한다.
• 어필지시(語必知時)---말할 때는 반드시 때를 알아야 된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쑥쑥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때와 자리와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 심무겁포(心無怯怖)---마음에 겁이 없어야 된다. 당당해야 된다.
• 요달어의(了達於義)---뜻을 요달하는 것, 도리와 이치를 아는 것이다.
• 여법수행(如法修行)---여법하게 수행하는 것.
• 원리우미(遠離愚迷)---어리석고 미혹함을 멀리 떠나는 것.
• 안주부동(安住不動)---편안히 머물러서 동하지 않는 것이다. 자주 자리를 옮기거나 가볍게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은 수행자의 모양새가 아니다.
*권현(權現, 산스크리트어 avatara)---화신(化身), 권화(權化)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 ‧ 보살 등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즉 불ㆍ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부러 신(神)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권현보살(權現菩薩)---부처님처럼 진리를 완성한 보살로 부처의 경지에 있으면서 일부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살에 머물며 이 세상에 몸을 보인 보살, 예컨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권현보살이다.
*귀경(歸敬)---불법에 귀의(歸依)해 경례(敬禮)한다. 또는 귀의해 공경한다는 말로서, 귀명(歸命)ㆍ귀경(歸敬)ㆍ귀의(歸依)ㆍ경례(敬禮)ㆍ구아(救我)ㆍ도아(度我) 등이 다 같은 말이며, 나무아미타불을 의미한다.
*귀경게(歸敬偈, 산스크리트어 magalaloka)---주로 논서나 주석서의 첫머리에 실리는 게송으로서 불ㆍ보살이나 스승을 찬탄하는 게송이다. 보통 해당 논서의 주제가 이 귀경게(歸敬偈)에 잘 나타난다.
세친(世親, 바수반두, 320~400)는 그가 지은 〈구사론〉 첫머리에 귀경게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논서(論書)를 쓰려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지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먼저 스승의 수승한 능력을 찬탄하면서 스승에게 경배를 올린다.”
용수(龍樹, Nagarjuna)의 <중론(中論)>을 중송(中頌) 또는 중관론(中觀論)이라고도 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중도를 선양하기 위해 여덟 가지 부정의 논법인 팔부중도(八不中道)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중론> 서두의 귀경게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귀경게 중에서도 용수가 <중론> 첫머리에 읊은 귀경게가 특히 유명하다. 그래서 ‘귀경게’라 하면, 보통 <중론>의 귀경게를 지칭한다. 용수는 귀경게의 팔부중도(八不中道)를 통해, 부처님이 중생들이 생각하는 생멸거래일이단상(生滅去來一異斷常)의 여덟 가지 어리석은 견해 대신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따라서 팔부중도는 연기를 바탕으로 한 공(空)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이런 인연을 능히 설하시어 여러 희론(戱論)을 소멸시키시니,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분에게 나는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면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제시했다.
이 귀경게의 팔불 게송이 중론의 핵심을 요약한 것으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의 이법(理法)이 생(生) ․ 멸(滅) ․ 상(常) ․ 단(斷) ․ 일(一) ․ 이(異) ․ 내(來) ․ 거(去)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팔사(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게 된다고 했다.
이리하여 팔부중도(八不中道)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인연법으로 허망하고 사악한 이론들을 모조리 때려잡은 것, ― 파사현정(破邪顯正)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중론>의 첫 구절 귀경게(歸敬偈)는 용수가 부처님의 진리 중 으뜸인 연기법을 가지고 당시에 횡행하던 잘못된 이론들을 모조리 타파한 후에 부처님께 자랑스럽게 절하는 용수의 자부심을 나타낸 문장이다.---→팔부정관(八不正觀), 팔부중도(八不中道) 참조.
*귀명(歸命, 산스크리트어 namas)---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는 것, 즉 귀의(歸依)를 의미한다. 부처님을 깊이 믿는다는 뜻임. 부처님을 진심으로 공경해 몸과 목숨을 바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등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믿음을 의미하며, 산스크리트어 나무[南無]로 음역된다. 귀명정례(歸命頂禮,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것)와 같은 신체의 동작과 지심귀명(至心歸命, 마음속으로 귀의하는 것)의 양면을 포함하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예불은 물론 경전과 논서의 처음도 이 귀명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귀명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분이 원효(元曉) 대사이다. 원효 대사는 귀(歸)의 모습을 공손히 따르는 것이며,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귀(歸)의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명(命)은 목숨의 뿌리이며, 모든 근(根)을 통제함으로 하나뿐인 몸에서 가장 중요하므로 주인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 가운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 하나뿐인 목숨으로 위없는 존귀한 이를 받드는 것이다. 믿음의 지극함을 나타내어 목숨을 바쳐 귀의한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귀모토각(龜毛兎角)---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란 말인데,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인도 논리학, 나아가서는 불교 논리학인 인명론(因明論)에서 사용됐던 것으로 인식대상의 부재를 나타내며 형이상학적 실체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비유에 공화(空華)가 있다. 그것은 안질에 걸린 사람이 환영(幻影)으로 인해 공중에 꽃이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을 그릇된 관념에 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 속에 자아(自我:atman)가 상주한다고 생각하며 존재자 중에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며, 이는 번뇌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비유이다.---→공화(空華), 환(幻) 참조.
*귀의(歸依, 산스크리트어 namas)---귀명(歸命)과 같은 말이다. 부처님이나 스님에게 귀순해 의지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인 종교적 관념에서는 귀의나 구원은 절대자를 전제하고, 신앙으로서 ‘귀의’는 외적 절대자에 대한 귀의이고, 구원 또한 절대자에 의해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적 관념을 말한다. 따라서 귀의라는 말은 다분히 타력신앙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육조단경>에서 혜능(慧能, 638~713) 선사는 외적인 절대자로서의 부처님을 배제하고, 자기 몸 안에 있는 부처에게 귀의를 강조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개념으로서의 귀의와 혜능 계통의 선불교에서 귀의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
산스크리트어 namas(돌아가 의지함)을 소리 번역하면 남무(南無)이다. 그런데 ‘남’보다 ‘나’가 원음에 가까우므로 ‘나무’라 읽는 것이 더 정확하다.
불ㆍ법ㆍ승에 귀의하는 귀의삼보(歸依三寶)는 불교신앙의 전부를 나타낸다. 부처님의 유계(遺誡)인 자귀의 자등명(自歸依 自證明)과 법귀의 법등명(法歸依 法證明)은 자기와 진리에 의지해 노력하는 것이 곧 진리에 맞는 옳은 삶임을 뜻한다.3보에 귀의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귀의불무상존(歸依佛無上尊) ― 부처는 최상무상(最上無上)의 인격 완성자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 불법은 탐욕을 떠나게 하는 존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 귀의승화합존(歸依僧和合尊) ― 불교 교단은 평등화합의 이상사회이기 때문에 귀의한다.---→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참조.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불법은 탐욕을 떠나게 하는 존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 일체의 욕심을 떠나 청정무구한 불법(佛法)에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의미이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삼귀의의 하나.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며 복혜양족(福慧兩足-복과 혜를 고루 갖추는 것) 한 분이므로, 그러한 부처님에게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말이다.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삼귀의의 하나. 승은 일체의 대중 가운데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이므로 승에게 귀의한다는 뜻. 귀의불양족존ㆍ귀의법이욕존ㆍ귀의승중중존을 삼귀의(三歸依) 또는 귀의삼보(歸依三寶)라 한다.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요익케 하라”고 했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미로 원효(元曉) 대사가 한 말이다.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을 말하며, 대승불교의 궁극적 이상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과 거의 같은 뜻이다. 원효 대사는 평생 ‘귀일심원 요익중생’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귀자모(鬼子母)---어린아이를 수호하는 신. 본래 아이들을 잡아먹는 나찰(羅刹)귀신이었으나 부처님이 그녀의 막내아들을 감추고 교화한 결과 부처님께 귀의해서 아이들을 보호하게 됐다.
*규기(窺基, 632~682)---당나라시대 법상종(法相宗) 개조. 자은 대사(慈恩大師) 혹은 대승기(大乘基)라고도 한다. 17세에 출가, 현장(玄奘)의 수제자가 됐으며, 28세 때 스승을 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했고, 반야심경 주석서인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과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등을 저술했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당나라시대 선사. 어려서부터 유교와 불교를 배우고 28세에 출가했으며, 징관(淸凉 澄觀, 738~839)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읽고 크게 감동 받아 징관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규봉은 중국불교사에서 가장 저명한 선종사가이며, 초조 두순(杜順, 557~640), 제2조 지엄(至嚴, 602~668), 제3조 법장(賢首法藏, 643~712), 제4조 징관(澄觀, 737~838), 제5조 종밀(宗密, 780~841)로 이어지는 화엄종 계보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 5조이기도 하다. 두순(杜順), 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완성된 화엄사상은 징관(澄觀), 종밀(宗密)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종밀은 선과 화엄사상을 깊이 탐구를 하고, 821년부터 종남산(終南山) 규봉(圭峰) 초당사(草堂寺)에서 저술에 전념하면서 그 당시 사분오열돼 서로 반목하고 있는 종파불교 현실을 크게 개탄해 이를 종식시키고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제창했다. 그리하여 종밀은 중국 화엄종의 제5대 종사이기도 하면서 중국 선종의 하나인 하택종의 선사(禪師)이기도 했다. 시호는 정혜선사(定慧禪師). 저서에 <원각경과문(圓覺經科文)>ㆍ<원각경대소(圓覺經大疏)>ㆍ<원각경약소(圓覺經略疏)>ㆍ<행원품수소의기(行願品隨疏義記)>ㆍ<원인론(原人論)> 등이 있으며, 특히 교와 선을 회통하고자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저술했다.
*균여(均如, 923~973)---고려 초기의 고승. 15세 때 사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출가, 영통사(靈通寺)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화엄종이 남악(南岳)과 북악(北岳) 양종으로 대립해 있음을 개탄, 북악의 법통을 계승해 남악까지 종합해 독자적인 입의정종(立義定宗)을 확립했다. 964년(광종 15), 광종이 그를 위해 발원해 송악산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제사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펴다가 973년 입적했다.
그가 지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노래로 풀이한 것이다. 균여는 한문경전을 읽을 수 없는 백성들이 <화엄경>의 요점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내용을 사뇌가(향가)로 지었다. 화엄사상을 민중 속에 퍼뜨리기 위해 향가로 노래한 <보현십원가>는 고려시대의 향가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향가의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그리이스계 혼합불교라은 의미이다. 내용면에서는 대승불교를 뜻한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것으로 순수 불교에 그리스, 페르시아의 사상, 힌두교 사상 등이 습합돼 나온 불교이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미륵불 등이 그리스-페르시아계이고, 관세음보살은 힌두교 계통이다. 특히 ‘그레코(Greco)’가 ‘그리스의’ 하는 뜻하므로 그리이스계 혼합불교란 말이다.
그리스가 소아시아, 페르시아와 인도에 등지에 그리스계 식민왕국을 세우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박트리아를 비롯해서 그리스-인도 왕국이 세워진 서북부인도의 간다라 지방인 탁실라를 중심으로 해서 융합된 문화이다. 특히 쿠샨왕조에 의해 박트리아왕국은 멸망했으나 간다라미술은 쿠샨왕조에 이르러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계 식민국인 인도-그리스왕국(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 1세(Menander, 재위 BC 165-130) 왕은 그레코-불교도 왕이었고, 불교철학에 대한 나가세나 비구와의 문답을 내용으로 한 <밀린다팡하(Milinda Pañha>를 생산한 주인공이다. 그리하여 박트리아에서는 그레코 불교를 국교로 했었다.---→박트리아(Bactria) 왕국 참조.
*극락(極樂, 산스크리트어 sukhavati/수카바티=수하마제/須訶摩提)---극락(極樂)은 보통 극락정토(極樂淨土)라 일컬어지는데, 극락은 지극히 즐겁다는 뜻이요, 정토는 깨끗한 땅이란 뜻이다. 극락정토는 자연환경이 좋고 물질이 풍부할 뿐 아니라 모든 대중이 자유와 평등 속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불교 최상의 이상향을 말한다.
극락세계ㆍ극락정토ㆍ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ㆍ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ㆍ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ㆍ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ㆍ서방정토(西方淨土)ㆍ안락국(安樂國)ㆍ안락정토(安樂淨土)ㆍ안양정토(安養淨土)ㆍ안양세계(安養世界)ㆍ미타정토(彌陀淨土)ㆍ금색세계(金色世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세속에서도 흔히 행복하고 안락한 곳이라 할 때 극락 혹은 극락세계라는 표현을 잘 쓴다.
극락의 내용은 <아미타경>에 설해져 있다. 극락은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간 곳에 있다고 한다. 이곳은 아미타불 정토로서 아미타불 전신인 법장(法藏) 비구의 이상을 실현한 국토이다.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어 불과(佛果)를 얻은 사람만이 죽어서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항상 아미타불이 계셔서 설법하고 있으며, 모든 일이 원만 구족해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이다. 이곳에 태어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즐거움을 받는다고 한다. 예컨대, 부처님의 몸과 같이 32상(相)과 신통을 얻고, 마음대로 법을 듣고, 부처님에게 공양하면 깨달음이 열린다고 한다. 단, 극락에도 변지(邊地), 의성(疑城), 태궁(胎宮) 등으로 불리는 변두리가 있어서,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혹을 품는 사람은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초기경에는 극락세계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없었다. 다만 부파불교시대를 지나면서 시설된 것으로 대승불교에 와서 구체화 됐다.
그리고 극락이 삼계에 속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한 논란은 대체로 극락이 삼계(三界) 밖의 불국토(佛國土)라는 설과 삼계에 포함된다는 두 가지 설로 요약된다.
① 극락은 삼계 밖이라는 설---극락왕생을 중시하는 정토종(淨土宗) 계열에서는 극락을 삼계(三界)와는 별개의 세계로 보는 타방정토설을 따른다.
정토종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성립된 불교종파로서, 중국적 특징이라 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내세운 종파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해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을 받아들여, 정토에 왕생하는 것도, 정토에서 보살행을 닦는 것도, 모두 아미타불 본원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으며, 부처님 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했다. 초기불교의 자력신앙(自力信仰) 입장과는 많이 다르고, 전형적인 타력신앙(他力信仰)을 추구한다.
이러한 정토사상은 석존(釋尊)이 설하신 적도 없고, 오히려 석존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사상이다. 불교는 석존의 교설을 토대로 성립한 종교이다. 그 교설이란 다름 아닌 석존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한 성불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석존 교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고, 또한 그 목적이 만인성불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신력이 약한 중생들이 쉽게 구원받을 길을 찾다가 신에 의지하고 싶어 찾아낸 것이 정토신앙 타력본원설이다. 자연인인 석존을 신격화하려니, 이미 설해 놓고 남긴 흔적이 너무 장황하고 방대해서 도저히 이를 숨기고 신격화하기가 어려워 새로 신격을 만들어낸 것이 아미타불이요, 비로자나불이고, 관세음보살이다.
그리고 석존의 생생한 사실적인 가르침은 중생들 생각과 논리에 의해 조금씩 변질돼 갔다. 그리하여 석존께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전개되고 있다. 아마도 영민하고 약삭빠른 자들이 쉽게 편하게 지내려고 만들어내어, 그리고 우매한 중생을 끌어들이려고 창작한 타력신앙사상이고, 이들에 의해 설정된 극락세계가 삼계 밖의 서방정토이다.
② 극락이 삼계 안에 포함된다는 설---색계 천상 가운데 절정인 정거천(淨居天)이 극락이라는 주장이다. 정거(淨居)는 정(淨, 산스크리트어 śuddha-청정)과 거(居, 산스크리트어 vāsa-처소)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청정한 거처(pure abode)이며, 청정한 업[淨業]을 이룬 성인이 태어나 거주하는 처소를 말하는데, 상상의 세계이다. 삼계 중 색계(色界) 제4선천(第四禪天)에 속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정거천에 5정거천이 있다고 해서, ➀무번천(無煩天), ➁무열천(無熱天), ➂선현천(善現天), ➃선견천(善見天), ➄색구경천(色究境天) 등 다섯 가지 하늘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북방불교에서는 여기에 무운천(無雲天), 복생천(福生天)을 더해 일곱 하늘이 있다고 하기도 한다.
초기불교 이래의 교학에 따르면, 성문4과(聲聞四果) 가운데 제3과(제3단계)에 이른, 즉 번뇌를 다 여읜 불환과(不還果-아나함과/阿那含果)를 증득한 성인들만이 태어나서 거처하는 처소[處] 또는 하늘[天]이다. 즉, 정거천은 불환과를 얻은 성자(아나함)들만 태어날 수 있는 아주 수승한 천상이다. 아나함들은 다시는 이보다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여기에 태어나서 머물다가 아라한(阿羅漢)이 되고, 열반에 든다고 한다.
정거천은 수승하고 행복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삼계에 속하는 한 그것은 한계가 있다. 불환과라는 수승한 경지를 얻은 성자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그것은 무상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극락도 삼계에 속하는 한 역시 무상한 곳이다.---→아나함(阿那含) 참조.
• 극락(極樂)과 천상(天上)은 전혀 다르다.
천상(천국, 천당)은 삼계(三界) 속에 있다. 욕계 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이 있으며, 이들 천상은 우리의 마음이 만든 곳이며, 우리가 지은 업대로 가는 곳이다. 즉, 천상계는 중생의 업에 의해 지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극락과는 비교가 못 된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은 불국토 중에서 가장 수승한 극락이라는 곳을 만드셨고, 극락에는 윤회나 일체 고통이 없다.
극락은 우리보다 뛰어난 다른 차원의 세상이고, 극락에 일단 태어나면 그곳에서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천상에는 윤회가 있다.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수행자(즉 보살)로서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일생보처(一生補處, 다음 생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약속된 경지)의 위치라서 최상인 것이다.
그리고 극락은 선업을 쌓은 결과 태어나는 곳이지만 천상세계에는 삼매 수행을 통해서 태어나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상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수명의 한계가 있다. 그 수명이 다하면 다른 곳에 태어나야한다. 이렇게 볼 때, 천상이란 별도의 세계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매 수행에 얻어지는 정신세계라 하겠다.
• 기독교 천국(천당)은 극락에 더 가깝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 속의 천상(육욕천)보다는 극락이 기독교 천국(천당)과 비슷하다 하겠지만, 한 가지 큰 차이점은, 불교의 극락은 기독교 천국과 달리 그 자체가 끝인 게 아니다. 다만 최종단계인 성불이 약속된 단계이다. 물론 죽음과 윤회는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성불하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 기독교의 천국처럼 죄인이라도 갈 수 있다는 점도 비슷하나, 구품왕생이라 해서 천국과는 달리 죄를 지은 정도에 따라 9가지 등급으로 나누는 차별대우가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下品下生)부터 가장 수승한 상품상생(上品上生)까지 9등급이 있다.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국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구품왕생일 것이다. 극락에 올 때 생전에 자신이 해 온 행동에 따라 극락에서의 대우가 달라지는데, 이 대우는 총 9단계로 나뉘어져 있어 이것을 구품왕생이라 한다. 정토삼부경 중 <무량수경>에 기술돼 있다.---→‘구품왕생(九品往生)’ 참조.
• 극락과 천상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삼계나 천상, 극락과 같은 환상의 세계나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가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초월적인 현상이나 윤회,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같은 의견을 가진 저명한 일본인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다.
“불교의 통속설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설명으로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야기가 있다. 삼계는 선악업에 의한 생사윤회의 세계이고, 출세간은 윤회를 초탈한 열반계라고 돼 있다.…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불교의 세계관이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잘못 알거나,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관념적으로, 기껏해야 비유적 ․ 신화적으로 선정이나 선정에 의해 도달되는 세계를 설명한 것을 부파불교가 사실적 ․ 구체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불합리하기 그지없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비록 과학적 근거는 없으나 불교 우주관이라는 넓은 얼개를 형성함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 창작된 것이고, 불교 교의 전체를 우주의 모습에 비대해 얼개를 구성할 때 하나의 완성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부분적으로 창작신화는 불가피한 것이므로 과학성 여부에 너무 비중을 둬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존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각자의 가치관의 문제이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크게 불교라는 큰 틀에서 시설된 가상의 정신세계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겠다.--→천상(天上)과 극락(極樂) 참조.
*극락전(極樂殿)---불교에서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사찰의 당우(전각)을 말한다. 극락보전(極樂寶殿), 혹은 무량수전(無量壽殿), 보광명전(普光明殿),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극락정토신앙이 강해 내부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한국불교에서는 대웅전(大雄殿), 대적광전(大寂光殿)과 함께 3대 불전으로 꼽힐 만큼 중요한 전각이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 천 억 불국토를 비추고([無量光], 수명 또한 한량없어 백 천 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無量壽]. 그래서 이 부처를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이라 하고 보광명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전은 이 부처의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로는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둔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국보 18)을 들 수 있다. 전각은 남향이고 아미타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불상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는 서쪽을 향하게 돼 있다.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無量寺極樂殿:보물 356)이나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無爲寺極樂殿:국보 13) 등도 같은 경우이다. 김천 직지사(直指寺)처럼 극락전을 아예 서쪽에 동향으로 세운 곳도 있다.
*극미(極微, 산스크리트어 paramāṇu)---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시각 대상의 최소 단위. 극미를 미진(微塵)이라고도 한다.
〈아함경(阿含經)〉등의 초기불교 경전은 물론이고 여러 선어록에서도 진술된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색(물질)이 4대종(四大種)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사대종이란 지ㆍ수ㆍ화ㆍ풍으로 모든 존재가 이 네 가지 원소에 의해 구성됐다고 한다. 부파불교 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 등은 4대종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색(물질)의 양적인 최소단위를 극미(極微)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4대종에 의해 최소 인식 단위로서의 미세 물질입자인 미취(微聚:극미의 한 유형)라는 극미가 형성되고, 다시 미취가 모여서 점차 커다란 물질을 형성하고, 마침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4대종은 물질의 질적(質的) 구극(究極)으로 이해되게 됐고, 극미는 물질의 양적 구극으로 이해되게 됐다. 그리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설에 의하면, 이 극미는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만약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작용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극미진(極微塵)---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따르면 하나의 극미진(極微塵)만이 존재할 수없고, 적어도 7개 이상의 극미진이 집합해 하나의 미취(微聚)를 이룬다고 한다. 그 집합 성색(成色)하는 과정은 중심의 일주미진이 상하와 사방의 극미진과 합해 일미취(一微聚)가 된다. 이 극소의 미진으로부터 형상을 볼 수 없는 극유진(隙遊塵)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7극미진이 일미취(一微聚)
7미취진이 일금진(一金塵: 쇠 속을 통과하는 먼지)
7금진이 일수진(一水塵: 물속을 지나도 물이 묻지 않는 먼지)
7수진이 일토모진(一兎毛塵: 토끼의 털끝만 함)
7토모진이 일양모진(一羊毛塵: 양의 털끝만 함)
7양모진이 일유극진(一遊隙塵)이라 한다.
극유진(隙遊塵)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문틈 사이의 일광에 의해서 보이는 먼지이며, 극미진이란 물질인 색으로서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를 지나면 곧 공의 세계가 나타나므로 허공도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해서 인허진(隣虛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집합된 먼지가 진대(塵大)한 지구의 덩어리로 형성하는 과정은,
7극유진이 일기진(一蟣塵: 서캐만한 먼지)
7기진이 일슬진(一蝨塵: 이만한 먼지)
7슬진이 일광맥진(보리알만한 먼지)
7광맥진이 일지절(一指節: 손가락만한 먼지)
3지절이 일지진(一指塵: 손가락 한 개만한 먼지)이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점점 집합해 마침내 대지(大地)와 하(河)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므로 인허진의계를 지나면 곧 공이기 때문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지관 스님
*근(根, 산스크리트어 indriya)---한역함에 있어서 근(根)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에는 indriya와 mūla가 있다. 일반적으로 ‘근·경·식(根境識)’이라 할 때의 근은 전자를 가리킨 것이며, ‘선근(善根)·불선근(不善根)’이라 할 때는 근본(根本)을 의미하는 후자를 가리킨 것이다.
근(根) 어원의 하나인 인드리야(indriya)는 ‘기능’에 초점 맞춰진 술어로서 힘이 있어 강한 작용 혹은 ‘근기(根機)’라는 의미도 있다. 어원적으로 인드라 신의 권능이라는 뜻이고, 이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를 6근(六根)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드라 신이 그 어떤 외적인 힘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힘으로 스스로 운영해 나가듯이 육근으로써 인간도 그 어떤 외적 요인(예를 들면, 어떤 절대 신이나 우주로부터의 힘과 같은 것)에도 결정됨이 없이(영향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 자유의지적 존재로서 운영해 나가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6근은 6경과 짝을 이루는 가르침으로서 육경(六境)이란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라는 여섯 가지 인식대상을 뜻한다. 이처럼 6경이 대응해야 6근의 작용 역시 그 존재가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근(根)이라 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등 오근(五根)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작용을 해서, 즉 눈이라는 근을 통해서 사물을 보면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나고. 귀라는 근을 통해서 소리가 나타나고, 코라는 근을 통해서는 냄새, 혀라는 근을 통해서 맛, 몸이라는 근을 통해서 촉각이 나타난다. 그래서 근에 의해서 모양과 색깔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識-마음)을 일으키는 - 증상(增上)하는 근거라고 해서 근(根)이라 이름 하고, 유식에서는 종자(種子)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라 하면 대부분 상식선에서 외형적 기관만 생각한다. 그래서 영어 eyes는 눈(眼)만 가리킬 뿐인데, 안근(眼根)은 의미가 더 포괄적이다. 눈에는 눈알 외에 시신경이 있다. 안근이란 눈알과 시신경에다가 눈의 역할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그래서 근(根)에는 외형적 모양 외에 무언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증상하는 힘이 있다는 말인데, 지배적인 힘 혹은 성장시키는 힘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구사론>에서는 “최고의 지배력과 빛을 냄을 근이라고 이름하며,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근은 증상(增上)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했다. 안근은 단순한 눈알만이 아니라 보는 작용까지 포함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근(根)이란 기관보다 기능에 초점이 맞추어진 개념이다.
그리고 아비달마논사들은 5근 뿐만 아니라 전체 근을 22가지로 정리했다. 이 ‘22근’이란 ‘사물에 대해 증상의 의미를 특별히 갖고 있는 22가지 법’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엔 5근 외에 여근(女根)ㆍ남근(男根)ㆍ명근(命根)이라든지, 촉(觸)에 따른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 등 5수근(五受根)이 있고, 번뇌를 제거하고 성도(聖道)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수승한 작용인 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의 5무루근(五無漏根) 등도 있다. 이와 같이 여러 근이 있어, 도합 22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많은 근을 크게 두 종류, 부진근(扶塵根, 依處)과 승의근(勝義根, 淨色)으로 나누는데, 자세한 것은 각기 부진근(扶塵根)과 승의근(勝義根) 항목을 참조할 일이다.
※증상(增上, 산스크리트어 aupacayika, adhipati)---‘증상(增上)’이란 어떤 일에 영향을 주는 힘을 뜻한다. 뿌리는 나무를 증상시킨다. 그래서 근(根)은 증상(增上)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부진근(扶塵根), 승의근(勝義根) 참조.
*근ㆍ경ㆍ식(根境識)---감각기관과 의식기능을 근(根)이라 하고, 그 기관과 기능의 대상을 경(境)이라 하며, 그 기관과 기능으로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작용을 식(識)이라 한다. 따라서 근(根)과 경(境), 그리고 식(識)을 합친 말이 근ㆍ경ㆍ식(根境識)이다.
그리고 6근(根)과 6경(境)을 합쳐 12처라 한다. 육근(六根)은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관, 즉 5근(根)에 의근(意根)을 넣어서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근(根)이라 함은 초목의 뿌리라는 그러한 근으로, 근원 혹은 근본이라는 뜻이다. 즉, 육근(六根)이 육식(六識)이란 외경(外境)을 인식하는 경우에 그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근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근을 부진근(扶塵根), 승의근(勝義根)의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부진근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등 신체의 기관인 오근(五根)을 말하고, 승의근은 마음을 지칭한다. 즉, 승의근은 마음을 일으켜 바깥 대경(對境)을 감각하며 내계(內界)에 식(識)을 일으키는 의근(意根)을 말한다.
가령 눈을 뜨고 볼 때, 안구는 부진근이고, 시신경은 승의근이다. 만약에 안구는 있어도 시신경이 마비돼 있으면 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시신경은 아무리 건전해도 안구가 없으면, 장님처럼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런고로 승의근과 부진근, 시신경과 안구의 둘이 완전히 갖추어야 비로소 우리들의 눈은 눈의 작용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역시 다른 오근(五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육경(六境)이란, 육근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육근에 대한 여섯 가지의 경계라는 뜻으로, 육경(六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육경을 또한 육진(六塵)이라고 하기도 한다. 진(塵)이라 함은, 무엇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우리들의 맑은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는 것은, 이 마음 밖에서 오는 색과 성과 향과 미와 촉과 법이니, 육경을 또한 육진이라고도 하니, “육진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육진 중에서 법진(法塵)은 의근(意根)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기쁘다든가, 슬프다든가, 밉다든가, 예쁘다든가 하는 정신상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소위 12처(處)라고 말하며, 이것을 또한 12입(入)'라고도 한다. ‘처(處)’라고 함은 장소로 생장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받아 넣어서 의식을 잘 생장시킴으로 해서 이것을 십이처라 한 것이다. 그래서 근(根)과 경(境)은 서로 얽혀 들어간다는 뜻에서 십이처를 또한 십이입이라고 한다.
그리고 계(界)라는 것은, 18계라고 하는 것으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 육식(六識)을 합쳐서 십팔계(十八界)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들의 인식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근(根)과 경(境)과 식(識)의 세 가지가 서로 응해서 일치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근(根)과 경(境)만 있고 식(識)이 없으면, 즉 마음이 없으면, 봐도 본 것 같지 않다. 무슨 일이고 열심히 하고 있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간다. 한 시간 두 시간이 5분이나 10분밖에 안된 것 같다. 그러나 한 시간이 10분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시간을 초월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이 되는 것이다. 식(識)이 시간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계(界)라고 하는 글자는, 철학의 세계라든가, 신록의 세계라든가 하는 그런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차별이라든가, 구별 혹은 영역이라든가 하는 뜻이다. 따라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 것은, 18종의 세계로서, 즉 근과 경과 식이 상대관계에 의해서 생긴 18의 세계다.
그리고 안근(眼根)과 색경(色境)과 안식(眼識)이 화합하면, 여기에 눈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즉 안계(眼界), 눈의 세계이다. 눈의 세계는 우리들 눈에 비쳐 오는 곱게 물든 단풍이 보인다. 우리들의 눈은, 안구를 통해서 단풍이라고 하는 색의 세계를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한번 단풍놀이를 갈까하게 되면, 벌써 눈의 영역이 아니다.
<증일아함경>에는 “눈은 색으로써 식을 삼고”, “귀는 성(聲)으로써 식을 삼는다”고 했다. 눈의 음식은 색이다. 귀의 음식은 소리다. 그래서 좋은 구경 보고 싶다, 좋은 음악 소리 듣고 싶다고 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향불을 피운다. 이것은 중유(지옥에는 안가고 극락에도 못 가는 영혼)라는 중생은 향을 가지고 식(음식)을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식물은 다만 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눈에도, 귀에도, 코에도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귀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좋은 명곡을 감상한다는 것은 귀를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귀먹은 사람은 귀의 형용만은 있으나, 긴요한 청각신경이 마비돼 있으므로, 음악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다음은 혀의 세계이다. 즉, 미각의 세계다. 병이 들어서 열이 나든지 하면 맛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돼 있어, 혀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즉, 미각이 없기 때문에 맛을 느끼지 못한다. 즉, ‘입맛 없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오관(五官)의 중심이 돼 있는 안, 이, 비, 설, 신의 오근과 그 대상이 되는 색, 성, 향, 미, 촉의 오경, 이러한 것을 통일하는 인식의 주체가 제6의식(意識)이다. 이 의식이 의근(意根)을 의지해서, 일체의 모든 것을 인식하게 된다. 제6의식은 일체의 만물을 널리 인식한다는 뜻에서 ‘광연식’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만이 아니고, 과거의 일, 장래의 일까지라도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이 제6의식의 작용이다. 이 제6의식은 말하자면 오식(前5識)의 주인공이다. 이 주인공이 든든해 있을 때에 안, 이, 비, 설, 신의 오식(일명 전오식)은 명령대로 잘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그 생각의 주체가 제6의식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들의 인식작용이라는 것은, 결국 근과 경과 식의 화합으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며, 식(識)이란 인식의 주체로서,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근은 그 식이 의지하는 곳, 경은 마음(식)에 의해서 인식되는 바의 대상을 말한다.
우리들의 인식을 떠나서는 일체 만물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야심경>에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가 없으면,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 법도 없고, 안계(眼界)도 없고, 의식계(意識界)도 없다고 한 것은, 결국 일체는 모두가 공이라고 한 것을 자세히 분석해서 설명한 것이다. 두뇌가 명석한 사람은 처음부터 일체가 공이라고 하면 곧 알아채지만, 아직 공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오온이 공인 것을 설명하고, 그래도 모르는 이에게는 육근과 육경이 공인 것을 설명하고, 그래도 또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좀 더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관계를 설명해서, 즉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우리들의 세계와 존재는 모두가 공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인식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나는데, 육근이 육경을 대할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이 육식(六識)이다. 이렇게 육근, 육경, 육식을 합쳐 ‘근경식(根境識)’이라 하고, 이들이 모여 인식이 성립하는 것을 ‘근경식 삼사화합’이라 한다.
내 눈이 있어야 색을 알게 되고 내 귀가 있어야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색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어디에 써먹는 것 인줄 알 수가 없으며 소리가 없다면 귀가 있어도 어디에 써먹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이것은 나의 감각과 세상이라는 물질이 둘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이 두 가지가 마주쳐야지만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보인다거나 들린다는 식(識)이라고 한다. 이 식이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느끼는 놈[根]과 느낄 수 있는 대상[境]이 함께해야 된다.
우리가 공상(空想)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기억속의 어떤 영상을 바탕으로 공상을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기억과 견정(見精-상상속의 대상)이 마주함인 것이다. 그리고 보인다는 것과 들린다는 식이 없을 때는 눈이 있다는 생각과 귀가 있단 생각 그리고 세상이 있다고 알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식 안에 근과 진이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관계는 세상이 없을 때는 눈도 보인다는 식도 있을 수 없게 되고 눈이 없을 때는 세상이라는 것도 세상이라는 생각도 없으므로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삼사화합(三事和合) 참조.
*근기(根機, 산스크리트어 indriya)---인간의 소질과 능력을 말한다. 세상에 성장하는 모든 것은 뿌리가 있기 마련인데, 뿌리는 줄기의 굵기와 크기 그리고 세월의 흐름만큼 땅에 의지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줄기는 크기만큼 햇살을 머금고 뿌리는 깊이만큼 수분을 모아 각기 종자의 특성을 드러내며, 해를 거듭할수록 좋은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작용의 힘을 근기(根機)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그 능력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교법의 수준을 달리한다. 이것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한 것이 근기다.
‘근기(根機)’에서 근(根)은 물건의 근본 되는 힘, 지배적인 힘, 혹은 성장시키는 힘이란 뜻이다. 기(機)는 발동한다는 뜻으로 교법을 듣고 닦아 증(證)해 얻는 능력 혹은 교법을 받는 중생의 성능을 말한다. 따라서 근기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 및 교화할 수 있거나 교화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개인의 타고난 그릇, 역량, 천성, 성품 등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불법(佛法)을 만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혼신을 다해 배우려는 자가 있고, 혹여 만나더라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자가 있으며, 아예 만나지도 못하고 한 삶을 마감하는 자가 있는 것도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예리한 근기[利根]과 중간정도의 근기[中根]과 둔탁한 근기[鈍根]의 구별이 있고, 또한 8만4천 방편이 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는 설법할 때 항상 그 말을 들을 대상의 근기를 먼저 살피고 그에 알맞게 설법했는데,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 또는 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 한다. 이 때 스승의 근기와 배우는 자의 근기가 서로 계합하는 것을 두기(逗機)라 하며, 이를 선가(禪家)에서는 투기(投機)라 하기도 한다.
흔히 수행을 하려면 ‘근기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근기는 무엇인가를 담을 만한 크기와 모양인 근성과 그것을 자기화할 수 있는 기질들을 가리킨다.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유전적 능력, 그리고 자란 환경과 배경에 따라 생긴 특징이나 경험,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사론> 에서는 “최고의 지배력과 빛을 냄을 근이라고 이름하며,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근은 증상(增上)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상대하게 되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문을 설하셨는데, 근기가 하열한 사람에게는 <아함경(阿含經)>을 설하시고, 근기가 수승한 사람에게는 <방등경(方等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설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은 <아함경> 뿐이니 이건 대승불교에서 지어낸 말일 것이다.
*근본경전(根本經典)---<아함경(阿含經)>이라고 부르는 한 무리 경전군(經典群)을 일컫는 말이다. 붓다 원음이 살아 있는 경전이기에 근본경전이라고 한다. <아함경>에 수용돼 있는 경전군을 남방불교에서는 빤짜-니까야(Panca-nikaya)라고 통틀어서 부르는데, 대개 <팔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말한다.---→‘니까야((Nikaya)와 북방 아함경(阿含經)의 관계’ 참조.
*근본무명(根本無明)---무명(無明)이란 우리의 청정한 본성인 본래마음을 흐리게 하는 미혹인 어두움을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자성청정(自性淸淨)해 본래 밝고 밝아 일체를 비춰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인 것이다. 다만 그 청정본연의 자성(自性)이 스스로의 망념과 업인으로 인해 밝고 맑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것이 가려져 반야의 지혜가 발현되지 못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 본래 갖춘 밝은 반야지혜가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 근본원인이 돼 마음이 어두워 중생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근본이라 해서 본래부터 있었던 근본인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순서상 처음에 두어 이름을 근본무명이라 하지만 그 시작은 계란과 닭의 관계처럼 아상(我相)으로 인한 집착이 먼저이기에 근본의 시작은 무명에 있다.
*근본번뇌(根本煩惱, 산스크리트어 mūla-kleśa)---번뇌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거나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등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을 말하는데, 혹(惑)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業)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이것을 혹(惑)ㆍ업(業)ㆍ고(苦)의 삼도(三道)라고 한다.
유식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지말번뇌(枝末煩惱)로 구분한다. 근본번뇌란 번뇌의 체(體)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며, 본혹ㆍ근본혹이라 하거나 수면(隨眠)이라 한다. 지말번뇌란 근본번뇌에 수반해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서 수혹ㆍ지말혹ㆍ수번뇌라 한다. 다만 수번뇌는 ‘심왕에 붙어 다니는 번뇌’란 의미로 이해하고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근본번뇌란 다른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근본번뇌에는 탐(貪, 욕심), 진(瞋, 성냄), 치(癡, 어리석음), 만(慢, 거만), 의(疑, 의심), 견(見, 삿된 소견)의 6번뇌가 있다. 이들 6가지를 6근본번뇌(六根本煩惱) 또는 6수면(六隨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중에서 ‘견(見)’은 모든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견(惡見) 즉 부정견(不正見)인 삿된 5견(五見)을 말한다. 5견은 신경(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인데, 5리사(五利使)라고도 한다. 이 5리사와 위의 5번뇌를 합친 10가지 번뇌를 10번뇌 또는 10사(十使)라 하며, 이 중 탐(貪). 진(瞋). 치(痴) 3가지는 모든 악업을 낳는 근본이므로 삼독심(三毒心)이라 한다.---→지말번뇌(枝末煩惱), 수면(隨眠) 참조.
*근본분열(根本分裂)---부처님 입멸 후 처음엔 인도 서쪽 지방과 서남방으로 전도가 진행되고 불교교단은 서서히 이 두 방면으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점차 불교교단이 인도 각지로 진출, 정착해 갔다. 이와 같이 교세가 널리 퍼져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 환경도 점차 변해서 교단의 율법적용에 대해 이견이 발생하게 됐다. 근본분열을 기록하는 대표적인 자료로는 <도사(島史, Dīpavaṃsa/디빠왕사)>와 <대사(大史, Mahāvaṃsa/마하왕사)> 등의 초기 빠알리어 스리랑카 역사자료와,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이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등 설일체유부 계통의 문헌이 있다. 그런데 이 양자가 전하는 근본분열의 배경이나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
인도 동북방 갠지스강 건너편에 있는 도시 베살리(Vēsalῑ, 웨살리, 毗舍離, 산스크리트어 Vaisali)는 상업도시로 유명했다. 거기에 왓지족(Vajji, 밧지족)들이 살고 있었다.
불멸 후 100년경(BC 4세경), 스리랑카의 편년체 역사서이자 남방불교의 자료인 <도사(島史, Dipavamsa)>와 <대사(大史, Mahavamsa)>에 따르면, 동북부 비구 승단에 속한 왓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새로운 열 가지 안[십사(十事)]을 승인해 줄 것과 이에 따라 계율을 수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인도 서부 마유라(摩偷羅)국의 비구였던 야사(耶舍)는 인도 동부와 서부의 700명의 장로(長老:상좌/上座)를 초청해 베살리에서 제2회 불전결집을 열어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을 기울였다.
제2회 불전결집은 칠백결집 또는 베살리 결집이라고도 한다. 제2회 결집에서 동북부 비구 승단이 주장하는, 계율에 대한 열 가지 새로운 견해[십사(十事)]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을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 부른다. 제2회 결집 당시에는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남방불교에 대한 자료인 <도사(島史, Dipavamsa)> 등에 따르면, 그 후에 제2회 결집의 결정에 불복한 진보적인 동부 승단의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했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로부터 이탈해 대중부(大衆部)를 결성했다.
이렇게 해서 불교 교단은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산스크리트어 Sthaviravāda/스타비라바다, Theravāda/테라바다)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ṃghika/마하상기카)의 둘로 분열됐다. 이를 근본분열(根本分裂) 또는 근본이부 분열(根本二部分裂)이라 하며, 상좌부와 대중부를 근본이부(根本二部)라 했다. 근본분열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됐다.
한편, 근본분열의 발생 계기에 대해서, 북방불교의 자료에서는 위에 기술된 남방불교의 내용과는 다르다. 즉,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을 포함한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따르면, 불멸 후 100여년 경에, 대천(大天, Mahādeva)이라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다섯 가지의 새로운 안을 주장하며 그것을 승인해 줄 것을 교단에 요구했는데, 이 다섯 가지 안을 대천 오사(大天五事)라 한다. 이로 인해 대천 오사에 찬성하는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왓지족(Vajji, 밧지족), 십사(十事) 혹은 오사(五事), 불전결집(佛典結集) 참조.
*근본불교(根本佛敎)---붓다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고 붓다 원음이 그대로 전해오던 불멸 후 100여년까지의 초창기 불교를 원시불교 혹은 초기불교, 또는 근본불교라 한다.
시대적으로 봐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 ― 부파불교(部派佛敎) ―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눈다. 그리고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자제들이 있었던 불멸후 30년까지를 근본불교라 세분하고, 그 후부터 불멸 후 백 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로 나누기도 한다. 아무튼 부처님 원음이 교단을 확실히 지배하던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한다.
그런데 명칭에 있어서 근본불교는 다소 교조적인 의미가 있고, 원시불교는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이어서, 지금은 ‘초기불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다만 부처님 당시와 직계자제들이 있었던 불멸후 30년까지를 근본불교라 세분하는 경향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초기’라는 말을 쓰는 것에는 가치중립적이면서도 연대기적인 의미가 있다. ‘원시경전’이나 ‘근본경전’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이유 때문에 이 두 용어를 일부러 쓰지 않으려 한다.
첫째, ‘원시경전’이라는 용어를 쓰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원시시대에 쓰인 경전이라고 오해를 한다. 초기경전 중에서도 특히 <육방예경> 같은 경전을 읽어보면, 먼 옛날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지금 21세기에도 너무나 딱 들어맞는 말씀이 많다. 이런 이유로 저는 ‘원시경전’이라는 말을 안 쓰고 ‘초기경전’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둘째, 근본경전이라는 용어도 저는 배제하고 있다. 초기경전 계통의 자료를 찾다 보면 ‘근본경전’이라는 말이 가끔 나오기도 한다. ‘근본’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근본주의자’들이 일으키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불교에도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오직 초기 불교만이 옳고,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의 가르침은 전부 가짜요, 이른바 ‘짝퉁’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행여 그런 근본주의와 연결될까봐그 단어를 쓰는 것이 꺼려진다. 근본이라는 말에는 ‘이때의 가르침만이 근본이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매우 편협한 입장과 생각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근본이란 말은 원래 좋은 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근본불교니 근본경전이니 하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는다.
그러면 중립적인 표현은 무엇일까? 그냥 ‘초기경전’이다.」- 미산 스님
그리고 부파불교는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백 년경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까지 4~500년 사이를 말하고, 대승불교는 BC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원시불교(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원시불교(초기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해 모든 교설이 설해져 있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장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희박했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부처님 사상을 훼손한 변질된 불교이며 정통 불교가 아니라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원시불교, 초기불교, 그리고 근본불교라는 말은 그 당시엔 없던 말인데, 2천 년이 훨씬 지난 근래에 들어와 생긴 이름이다.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란 이름은 마치 '근본주의'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근본불교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불교의 근본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로 불멸 후 30년까지, 부처님 직제자가 살아 있었을 당시를 말한다.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란 이름은 일본인 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그때까지는 부파불교를 시발로 보던 관점을 그 이전으로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었는데, 말의 어감이 다소 비하하는듯하면서 석가세존 중심의 불교라는 점을 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초기불교(early buddhism)란 이름은 시대적인 이름으로 부처님시대 불교라는 의미가 충분히 살려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를 지칭하는지 불분명한 단점이 있지만 지금은 대체로 이 말을 쓰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빠알리어 니까야>와 <청정도론>은 근본불교가 아닌 아비달마 불교이며, 아비달마 불교이면서도 부처님의 정수를 놓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아비달마 불교는 크게 20여개의 부파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나뉘는 가운데 어느 부파는 교학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수행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불제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우선하는 부파 등으로 나뉘었다면, 남방 상좌부는 이해하기 쉬운 불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대승불자들이 당시 상좌부 불교에 대해 법실유(法實有)라 해서 비판했을 때, 그것에서 상좌부 불교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해서 인도 문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던 상좌부는 반성과 변화가 나타나는데, 스리랑카라는 변방에 있던 남방 상좌부는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비판을 벗어난 채 ‘법실유’ 전통을 이어오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지금 초기불교 운운하면서 한국에 남방불교를 전하는 이들은 ‘실유법’을 주장하는 상좌부 불교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유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남방 상좌부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는 ‘실유법’을 주장하는 불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쌍윳다니까야>에는 실유법에 거슬리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hyojin ---→초기불교, 원시불교 참조.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을 다음의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① 개인(個人)과 대중(大衆)의 문제이다.
오래된 불교적 술어로 표현하면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문제이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동시에 또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인은 과연 어느 쪽 삶에 중점을 두고 불교적 생활을 생각할 것인지, 그 선택에 있어 소승불교 쪽에 선 사람과, 대승불교 쪽에 선 사람들은 서로 갈리어 길을 달리해 왔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역사가 말해 주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인의 도’와 ‘대중의 도’를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물론 대승불교는 ‘대중의 도’를 지향하고 있다.
② 분석(分析)과 직관(直觀)의 문제이다.
오래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분별(分別)과 무분별(無分別)의 문제이다. 이들은 모두 불교에 있어서의 방법론이다. 분석적 방법과 직관적 파악 중 어느 것이 불교인의 방법으로서 훌륭한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타마 붓다는 존재를 논하고, 세계를 논하고, 인간을 논함에 있어 빈번히 분석적 방법을 구사했다. 또한 그 제자 중에도 사리불(Sāriputta, 舍利弗)이나 가전연(Kaccāyana, 迦旃延)와 같은 분석의 명인이 있었다. 따라서 초기경전에서 번거롭기 그지없는 분석의 결과를 자주 보게 된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 쪽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분석적 방법보다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해 ‘분별지(分別智)’를 낮게 보고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높게 보았다. 이것은 분석과 직관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 중에서도 우리나라 불교가 지향하는 선불교는 무분별지를 높게 보고 있다.
③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의 문제이다.
옛 불교 술어로 표현하면 현행(現行)과 종자(種子)의 문제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심리학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오히려 불교의 실천문제였다. 현행이란 현실적인 신(身)ㆍ구(口)ㆍ의(意)의 행위를 뜻한다. 종자란 대승불교 학자들이 지어낸 말로서, 그것(현행)이 존재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자신의 내부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가 제자들을 지도함에 있어 사용한 방법은, 먼저 뜻(意)으로 잘 정리한 생각에 따라 신(身)ㆍ구(口)의 실천도 정리해 간다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천에 있어서 왕도(王道)일 것이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 현실은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덧 그 반대로 하고 마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부터 문제를 추구해가자 무의식의 세계, 심층심리의 문제가 크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실천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이런 흐름은 불교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추구해 온 가장 흥미 있는 경위(經緯)의 하나이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④ 나한(羅漢)과 보살(菩薩)의 문제이다.
이것은 차라리 새로운 인간상으로서의 보살의 등장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할지도 모른다. 나한이란 ‘아라한트(Arahant)’를 음역해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쓰고, 그것을 다시 약해서 ‘나한’이라고 한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는 불교적 성자의 이상상(理想像)을 가리키며, 주로 대승불교 쪽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대승에서, 자기완성에 전념하는 정통파의 방법을 비판하고 대중의 구제야말로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시 그것을 구체적인 인간상 위에 구상화시켜, 나한이라는 정통파가 지어낸 성자의 이상에 맞서서, 보살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내세운 것이다. 보살이란 ‘보디삿따(Bodhisatta)’ 또는 ‘보디사뜨바(Bodhisatva)’를 음역해 ‘보리살타(菩提薩埵)’라 쓰고, 그것을 다시 약해서 ‘보살’이라고 한 말이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 있어서는 단순히 불교수행자로서 이 길을 가는 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으나 바야흐로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새로운 불교인의 이상상(理想像)으로서 내세운 것이다. 이것은 나한과 보살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⑤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의 문제이다.
고타마 붓다가 그 제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서 인간의 이성과 감정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두었을까? 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은 극력 이를 배격했다. 특히 이 점에 있어 인상 깊은 것은 이 스승은 그러한 교화의 방법으로 음악과 예술을 이용한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불교가 훌륭한 불ㆍ보살이나 제천(諸天)의 상(像; 조각)을 자랑으로 삼지만, 놀라운 것은 초기불교에는 그러한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훌륭한 조각 등은 대체 어느 시대에 제작된 것일까? 아마도 대승불교가 번성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 불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가 초기의 불교에 비해 훨씬 인간의 감정에 중점을 둔 경향이 강해진 것은 여러 면에서 분명하다. 이것은 이성과 감정을 대조적으로 다룬 것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모두 40권으로 돼 있으며, 당나라의 학승 의정(義淨)이 한역했다. 의정은 어려서 출가해 법현과 현장 스님처럼 직접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7세에 해로로 인도에 가서 30여국을 돌아다녔고, 나란타사에서 대ㆍ소승을 연구하다 20여년 만에 귀국했다. 그 후 줄곧 역경사업에 종사해 <화엄경> 등 56부, 230권을 번역했는데, 주로 율부에 속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의정의 주요저서로는 <남해기귀내법전>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는 다른 율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극히 말단적인 계율조목들을 열거하고, 그 제정 동기와 그것을 잘 지킨 불제자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특히 이 율의 제35권 후반부터 제40권까지는 부처님의 내력과 불멸 후 비구들이 모여 경ㆍ율ㆍ론 삼장을 정리한 두 차례의 결집과 정을 소개하고 있다.
제18권에서는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현대의 불교도들도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율을 보면, 화장이 원칙이나 나무가 없어서 화장하기 어려우면 강에다 던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수장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매장을 해도 된다고 말했다. 단 여름철에는 땅을 잘못 파다가 그 속에 있는 벌레들을 죽일 수도 있으므로 깊은 산 속에 시신을 안치하고 풀잎으로 가려도 된다고 했다. 이것은 도교식의 풍장(風葬)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시신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부처님이 모든 것이 덧없다고 설법한 내용이 들어 있는 <삼계무상경>을 외워야 한다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제39권에는 불전 제1결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1결집에는 500명의 비구들이 참석했다고 해서 흔히 오백결집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제1결집에 모인 불제자들 중에서 아난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든 비구들이었다. 이에 제1결집을 주관했던 가섭은 아난이 아직 아라한이 아닌 점과 부처님 재세시 시중을 들며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불허했다. 가섭이 지적한 아난의 잘못이란 부처님에게 졸라서 여자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도록 해서 불법이 오래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부처님이 열반 예언을 하기 전에 1겁의 세월 동안 세상에 머무시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는 것 등이었다. 아난은 할 수 없이 더 수도해서 아라한의 경지에 든 다음에야 제1결집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집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먼저 항상 부처님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왔던 아난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들을 상대로 부처님이 설법하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 그때 들은 부처님 말을 암송했다. 그러면 나머지 비구들이 그 내용이 부처님이 말한 것과 맞는지 안 맞는지 일일이 따져보고 나서 경으로 확정했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것이 바로 경장이다.
다음으로 부처님 재세 시 계율을 가장 잘 지키기로 유명했던 우파리 존자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제정한 계율을 암송했고, 경을 취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율을 확정지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율장이다.
끝으로 가섭은 후세로 갈수록 사람들이 경과 율의 글귀에만 매달려 그 깊은 이치를 모를 수도 있다고 하면서 직접 경과 율을 설명한 논의 내용을 암송하고 정확성 여부를 결정했는데, 이것은 논장이다. 이렇게 해서 경ㆍ율ㆍ론 삼장이 집성된 것이다.
*근본식(根本識)---근식(根識)이라고도 하며, 제8식 아뢰야식의 별칭이다. 안식(眼識)ㆍ이식(耳識)… 등 6식과 제7 말나식 등 모든 식이 의지하는 곳이 근본심식(心識)인 아뢰야식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즉, 아뢰야식은 의식의 깊은 뿌리이므로 근본식이라 한다.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근본주의(根本主義) 또는 원리주의(原理主義)는 종교의 교리에 충실하려는 운동이다. 경전의 내용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절대적 준수를 지향한다. 종교의 근본주의는 정치권력과 불화를 일으키는데, 근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세계화로 지리적 이동이 잦아져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을 만나기가 쉬워졌으나 근본주의자들의 충돌은 염려스러울 정도로 가속되고 있다.
종교는 인간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의 성전(聖典)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음에서 비롯된다.
현재 이 지구상에는 성전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현재의 학문적 연구 성과나 과학기술까지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을 ‘문자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자주의자들은 합리적 사고의 능력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자신이 만든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은 상당히 심각하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불편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동에서의 갈등도 그 밑바닥엔 바로 종교근본주의가 깔려있다.
불교는 비교적 근본주의와 거리가 있다. 개방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우리나라에서의 초기불교 지지자들에겐 근본주의적 색채가 드러나 우려를 낳고 있다.
*근본중송(根本中頌, 산스크리트어 Mūla-madhyamaka-kārikā)---아무런 수식 없이 줄여서 <중송(中頌, Madhyamaka-karika)>이라고도 한다. <근본중송(根本中頌)>은 ‘근본이 되는 중도(中道)의 의미를 나타내는 게송(偈頌)’이란 뜻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전체 27장 450여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의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자 후대 불교 역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중론(中論)>을 비롯한 다양한 주석서가 저술된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근본중송>의 근본 목적은 <귀경게>에서 나타나듯 불교사상의 근본으로서 붓다가 깨달은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를 논증하고 있다. 연기란 연(緣)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으로, 무엇인가 생겨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연, 즉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귀경게>에서 나타나듯 나가르주나는 연기를 여덟 가지의 부정, 즉 팔불(八不)로 서술하고 있다. 이 여덟 가지 부정으로서 연기는 <근본중송> 제1장 제5게의 ’이것들을 연으로 하여 [그것이] 생긴다‘는 연기의 원칙에서 보듯 연기의 상호 관계, 즉 이것(X)과 그것(Y)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곧 연기의 관계에 있는 X와 Y를 살펴보면, 이것들은 서로 밀접히 관련돼 Y가 생겨난 것도 X와 상관없이 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생(不生)이며, X도 그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Y가 생기는데 어떤 작용을 한다는 의미에서 불멸(不滅)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X와 Y는 상주(常住)하는 것도 아니고(不常), 완전히 단멸하는 것도 아니며(不斷), 또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며(不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不異).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X가 Y로 오는 것도 아니며(不來), Y에서 X로 가는 것도 아니다(不去). 이와 같이 나가르주나는 여덟 가지 부정의 형태로서 연기의 도리를 드러내고, 이 연기의 도리가 진리이며, 타 학파의 견해와 구별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연기가 불교교리의 근본임을 밝힌 뒤, 나가르주나는 이러한 연기의 도리로써 불교 이외의 타 학파의 견해를 논파한다. 여기에서 논파의 대상이 되는 주된 대상은 연기의 개념과 대립되는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실체(實體)’의 개념이다. 실체란 변화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는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에서 아(我), 즉 아트만에 해당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나가르주나는 <근본중송> 전체에 걸쳐 실체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비판해 가고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자성(自性)의 개념을 대표적인 실체로 간주해 비판하고 있다.
유명한 ‘귀경게(歸敬偈)’란 바로 <근본중송>의 첫머리 서문 격인데, 내용이 ‘팔불(八不)’이며, 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중관(八不中觀), 팔부정관(八不正觀)이라 하기도 한다. 팔부중도의 ‘팔불(八不)’은 아래와 같다.
•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 불상역부단(不常亦不㫁) -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 -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중론(中論), 팔부중도(八不中道), 중송(中頌, Madhyamaka-kārikā) 참조.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無分別智) 혹은 실지(實智), 반야지(般若智)라고도 한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떠나, 판단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을 밝게 파악하는 지혜이다. 일체현상은 본질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서 모든 분별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지혜이다.
좀 어려운 말로는, 곧바로 진리에 계합해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없는 절대 참 지혜. 즉, 선정에 들어 일체존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지혜를 근본지라고 한다.
그리고 근본지는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깨달은 자만이 갖고 있는 지혜이다. 붓다는 일체중생은 모두 근본지(根本智)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일체중생의 근본지는 가려져 있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에 숨겨져 있는 근본지를 발현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 궁극이 깨달음이다. 근본지에 반대되는 말은 후득지(後得智) 또는 차별지(差別智)이다. 다양한 사건과 시련에서 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가 후득지이다.
참고로, 불교에서는 사물을 아는 것, 즉 인식하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도 하고, 반연된 인식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하며,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能緣)이라 한다. ---→후득지(後得智) 참조.
*근사경험(近死經驗-近死體驗, 臨死體驗, Near Death Experience)---지금까지 인류가 죽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종교는 그 종교 나름대로의 도그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죽음관은 그 도그마에 의해 윤색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런 종교들이 제시하는 죽음관은 그리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불교 신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죽음 뒤의 세계라는 것은 절의 명부전에 그려져 있는 지옥도와 같이 매우 우화적인 것에 그쳤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근사경험, 임사체험 또는 근사체험에 대한 관심과 학술적인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2004년도에 제작된 BBC방송의 다큐멘터리 <사후 체험, 난 죽음을 보았다(원제: The Day I Died)>는 바로 최근까지의 근사체험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와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또한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 사람이 살았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근사(近死)란 영혼의 육체이탈 현상을 말한다.
영어로는 Near Death Experience(NDE)라고 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근사연구(近死硏究)라고 한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Out of Body Experience), 줄여서 ‘OBE’라고 한다. 일종의 죽음 경험인데, 근사경험을 연구한 미국의 레이몬드 무디(Raymond Moody)가 수집한 근사경험의 전형은 다음과 같다.
“처음 죽었을 때는 캄캄한 어떤 터널 같은 곳을 빠져나간다. 그곳을 빠져 나오면 자신의 신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누워 있을까? 내가 죽었는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주 밝은 광명이 나타난다.
그 광명 속에서 자기가 지나간 한평생에 걸쳐 겪은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 그 뒤에 자기가 아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서로 위로도 하고 소식도 묻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든지 가족들이 장사 지낼 의논을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그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 연구된 바에 의하면, 이러한 근사(近死)경험을 영혼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뇌 기능의 변화로 현대의학은 설명한다. 정신과 의사 칼 얀센(Karl L.R. Jansen)은 자신이 직접 근사경험을 경험했던 사람이며, 또한 케타민(ketamine, 인격을 해리시키는 마취약)을 주사 맞아 케타민에 의한 의식의 변화가 근사경험과 같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서 오타고(Otago)대학에서 내과 수련을 받은 칼 얀센은 그 후 오클랜드(Auckland)대학에서 뇌 연구를 하고, 영국으로 가서 옥스퍼드(Oxford)대학에서 임상약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의 런던정신과병원에서 정신과 수련을 받았다. 지금은 영국 왕립 정신과의사회 회원이며, 근사경험의 케타민 모델과 환각제인 엑스타시(Ecstasy, NMDA)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고 있다.
케타민을 사용해 생기는 근사경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사경험은 인격을 해리(解離)시키는 약인 케타민을 사용해서 유도해 낼 수 있다. 신경과학 발전은 뇌-마음 중간 영역에 관여하는 기제에 관해 최근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뇌쪽에서 볼 때, 근사경험이란 뇌 수용체에 의한 신경 전달물질 글루타메이트(glutamate) 차단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임사체험은 그것을 경험한 인간의 그 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정도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임사체험 연구의 제일인자인 정신과의사 러셀 노이에스(R. Noyes)의 연구에 의하면,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자주 다음과 같은 태도 변화가 보인다고 한다.
①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감소,
②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감각,
③ 삶의 중요성이나 숙명이라는 것에 대한 특별한 감각,
④ 신 혹은 운명에 의해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확신,
⑤ 사후에도 존재가 계속된다는 강한 신념 등이다.
또 이 연구에서는 임사체험자에게는, 삶의 소중함, 중요한 것이나 긴급한 것에 관한 우선순위의 재검토, 컨트롤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수용성 등이라는 감각이 높아지는 일도 보고되고, 이러한 변화는 그 체험을 한 개인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을 향상시키는 일에도 공헌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보통사람의 경우, 죽음 이후에 삶이 지속됨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의 삶의 의미의 생각할 때 중요하다. 불교는 생사의 반복적인 연속성(윤회)의 틀 속에서 죽음을 이해하며,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케타민(Ketamine)---폐시실린(Phencyclidine)계 약품으로 주사 시에 통증이 없으며 조직의 자극도 없다. 일반적인 정맥마취제와는 달리 중추신경계의 특정부위에 작용해 탁월한 진통작용을 타내며 환자는 눈을 뜬 채로 있기도 해서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억이나 의식이 전혀 없는 해리성(解離性) 마취(dissociative anesthesia)상태를 보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환각과도 관계가있다.---→차시환생(借屍還生), ‘영혼(靈魂), 윤회(輪廻)의 문제’, 바르도(Bardo) 참조.
*근성신(近成身)---근성신이란, 싯달타 태자로서 출가해 육 년간 고행을 하시고 보리수 아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심을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하는데, 이때의 부처님을 근성신이라 한다.
성불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며, 화엄에서부터 반야시(般若時)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근성신의 위치에서 중생을 교화 제도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구원신(久遠身)이란 <법화경> 본문(本門)의 도리이며, “내가 진실로 성불한지가 이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겁이니라.”고 하신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이 멀고 먼 옛날에 성불했다는 말이다. 석가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멀고 먼 아주 오랜 옛날, ― 즉 삼천진점겁(三千塵點劫) 전에 이미 성불했었음을 말했다. 영원불 개념을 천명한 것이다. 물론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을 미화하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구원실성(久遠實成) 참조.
*근접삼매(近接三昧, 빠알리어 upacara-samadhi)---삼매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찰나삼매(刹那三昧), 근접삼매(近接三昧), 본삼매(本三昧)가 그것이다. 찰나삼매, 근접삼매, 본삼매, 이렇게 점차로 깊은 단계로 나누어진다. 이 세 가지 삼매의 구분은 초기불교에서는 없었으며, 부파불교시대에 선정에 대한 해석이다.
찰나삼매는 선정 수행을 전제로 닦지 않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 도중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삼매이다. 그리고 지관(止觀)수행을 위해서 수행자는 어느 수준까지의 근접삼매와 본삼매에 이르는 Samatha수행을 먼저 닦아야 한다. 그리고 바른 마음집중은 근접삼매와 본삼매(安止三昧)의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근접삼매는 초선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초선에 접근해가는 마음집중을 말하며, 본삼매(안지삼매)는 초선에서 제4선에 이르는 네 가지 선정으로 대표되는 마음집중을 말한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삼매는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삼매의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5가지 덮개(五蓋)를 일시적으로 멈추게 한다. 즉 마음이 집중되면,
①감각적 욕망에의 희구(欲愛), ②나쁜 의도(惡意),
③혼침과 졸음(昏沈 睡眠), ④들뜸과 회한(掉擧 惡作),
⑤회의적인 의심(疑)이라는 다섯 가지 부정적인 심리현상이 일시적으로 가라앉는다. 오개가 가라앉는 것으로 마음이 집중되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삼매(三昧)는 사마디(samadhi)라고 한다. 즉, 고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물론 고요해진 상태도 위에서처럼 여러 가지 등급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 차이가 나겠지만 일을 할 때에도 삼매에 들어 갈 수 있으며, 글을 쓸 때에도 공부할 때에도 나름대로의 삼매가 있다. 그러나 명상에서는 특별히 아주 수승한 상태의 깊은 고요의 상태를 구별, 특별한 사마디 상태를 선정(禪定)이라 한다. 그래서 선정인 선나(禪那 jhana)를 본삼매(本三昧)라고 한다. 이보다 낮은 상태를 근접삼매, 아주 짧은 삼매를찰라삼매(刹那三昧), 그 외에 간단한 삼매를 잠정삼매(暫定三昧)라고 구분 짓는다.---→본삼매(本三昧) 참조.
*근(根, indriya), 처(處, āyatana), 계(界, dhatu)---6근(根), 12처(處), 18계(界) 하듯이 안ㆍ의ㆍ비ㆍ설ㆍ신ㆍ의의 여섯 가지는 어떤 문맥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인드리야(indriya-근, 기능)라는 술어로 나타나고, 어떤 문맥에서는 아야따나(āyatana-처, 장소)라는 술어로도 나타나고, 어떤 문맥에서는 다뚜(dhatu-계, 요소)라는 술어로도 나타난다.
인드리야와 아야따나와 다뚜, 이 셋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노)의 여섯 가지에만 국한하면 이 셋이 지칭하는 것은 꼭 같다. 즉, 안근은 안처이고 동시에 안계가 된다. 의근은 의처이고 의계이다.
이 같이 같은 것을 두고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작용이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철수를 상황이나 역할, 작용에 따라서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이과장이라 부르기도 하고,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처한 상황과 역할 등에 의해서 그 명칭일 달라질 뿐이지 이런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그 당체는 동일하다.
그와 같이 눈의 역할이나 작용 등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눈의 기능(안근)이라 부르기도 하고, 눈의 장소(감각장소, 眼處ㆍ眼入)라고도 부르고, 눈의 요소(眼界)라고도 부르고, 눈의 문(眼門)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눈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눈의 감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인드리야(indriya)를 중국에서는 근(根)으로 옮겼다. 눈에는 형상을 보는 눈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기능과 능력이 있다. 이런 보는 기능은 귀ㆍ코 등 다른 기관에는 없는 눈만의 고유한 기능이고 형상은 반드시 이러한 눈을 통해서만 인지가 된다. 그래서 눈은 형상이라는 대상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지배자(인드라)라 하겠다. 지배자라는 의미를 살려서 인드리야(지배하는 것, 고유한 능력, 고유한 기능)라 한다. 동일하게, 귀는 소리를 듣는 고유의 기능이 있다. 귀 말고는 다른 기관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코ㆍ혀ㆍ몸도 마찬가지로 각각 냄새ㆍ맛ㆍ촉감을 감지하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인드리야(기능)라 한다.
그리고 눈이 보는 작용을 할 때 보는 작용과 관계된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눈을 장소로 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눈은 장소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눈은 마음(알음알이, 식)과 마음부수들이 대상, 즉 형상을 만나는 장소이다. 따라서 눈을 안처(眼處)라고도 한다.
그리고 눈은 형상을 본다는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할 때는 눈의 요소(짝쿠 다뚜-cakku dhatu-眼界)라고 한다. 그리고 눈은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대상을 만나는 문이기도 하다. 이런 역할을 하는 눈을 눈의 문(짝쿠 드와라-cakkhu dvara-眼門)이라고 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역할과 작용을 하는 눈은 형상에 민감한(sensitive) 특징을 가진 물질로 돼 있다고 해서 눈의 감성(짝쿠 빠사다-cakku pasādā)이라는 하기도 한다. 이처럼 같은 것을 그 역할이나 작용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즉, 안근(인드리야)은 안처(아야따나)이고 동시에 안계(다뚜)가 되고, 의근은 의처이고 의계이지 눈의 기능이 따로 있고, 눈의 장소가 따로 있고, 눈의 요소가 따로 있고, 눈의 문이 따로 있고, 눈의 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온(蘊, 빠알리어 khandha)ㆍ처(處, āyatana)ㆍ계(界, dhatu)’ 참조.
*근행정(近行定, upācāra-samādhi)---<청정도론>을 비롯한 남방상좌부불교의 논서들에서 주로 논의되는 용어로서, 삼매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의 하나이다. 즉, 순간적인 마음집중을 찰나정(刹那定, khanika-samadhi)이라 하고, 깊은 삼매에 도달하려고 접근해가는 근행정, 그리고 깊은 삼매로 초선에서 4선에 이르는 색계정(色界定)과 무색계정(無色界定)에 완전히 도달해 있는 상태를 말하는 안지정(安止定, appana-jhyana-samadhi), 이렇게 삼매를 셋으로 나눈다.
여기서 근행정은 근접삼매의 일종으로서, 완전히 집중에 몰입돼 있는 상태인 안지정(安止定, appanā-samādhi)에 가까이 접근한 상태이다. 근행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섯 가지 장애[(오개(五蓋)]를 먼저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근행정(近行定)의 경우는 아직 불안정해 명상을 중단하면 그 상태도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근행정이 비록 안지정보다 불안정한 상태지만, 마음을 고르게 유지시키는 선정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다. 근접삼매인 근행정(近行定)에서 안지정(安止定)에 도달하면 본격적인 사마디이다. 근행정과 안지정의 차이는 집중상태의 강약에 있다. 신(信)ㆍ정진(精進)ㆍ념(念)ㆍ정(定)ㆍ혜(慧)의 오근(五根)이 충분하게 배육 됐을 때 정력(定力)은 근행정을 초월해 안지정에 도달한다. 안지정에 들게 되는 것을 선나(禪那) 혹은 약해서 선(禪)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나에 도달할 때 마음은 간단없이 사상(似相, patibhaga nimitta)을 알아차린다. 이것이 몇 시간 혹은 밤이 세도록 혹은 하루 종일 지속된다. 선정에 도달한 때의 명상대상을 사상(似相)이라 한다.
*금강(金剛, 산스크리트어 바즈라/Vajra)---금강(다이아몬드)은 금속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불교경전 속의 진리가 예리하고 단단한 것에 대한 비유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즉, 금강의 단단한 것은 본각(本覺)의 진성(眞性)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구마라습은 “금강(金剛)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 빛이 수십 리를 비추인다. 반야(般若)의 지혜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체 범정(凡情)의 망상을 비취 보아서 무명을 깨뜨려 버린다.“고 했다.
헌데 산스크리트어 바즈라(Vajra)에는 벼락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바즈라는 인드라 신이 갖고 다니는 무기이기도 한데, 이것은 다름 아닌 벼락을 의미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 혹은 신을 집금강(執金剛) 지금강(持金剛)이라 한다. 그러므로 금강저를 가지고 부처님을 옹호하는 시종력사(侍從力士)와 화엄신중(華嚴神衆)을 금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마니보주는 제석천왕이 금강(金剛)을 사용해 아수라와 싸울 때 사용한 무기인데, 그 파편이 염부제에 떨어진 것이다.“라고 했다.
‘금강’이 불법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을 정리해보면,
① 견고성 ― 불법 역시 자신의 견고성을 유지하면서 사법(邪法)을 깨뜨린다.
② 희귀성 ― 금강석과 불법은 흔히 만날 수 없는 귀한 것이다.
③ 순수성과 청정성 ― 금강석과 불법에는 불순물이 없고, 청정성을 추구한다.
④ 광명성 ― 금강석과 불법은 모두 찬란한 빛을 발한다.
*금강경(金剛經, 산스크리트어 Vajracchedika-prajna paramita sutra)---<반야심경>과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대승불교경전들 가운데 하나로, 반야부의 기본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원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인데, 줄여서 <금강경(金剛經)>이라 한다.
대승 경전이다 보니, 제목부터가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개념인 ‘반야바라밀’을 포함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Prajñāpāramitā를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를 가리킨다.
앞에 붙은 한자 금강(金剛)은 산스크리트어 Vajracchedikā를 뜻으로 풀어 해석한 것인데, 와즈라(Vajra)는 벼락ㆍ번개ㆍ금강석과 같이 강한 힘을 말한다. 그리고 cchedikā는 자르는 것, 부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제목의 뜻은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려 깨달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지혜의 경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와즈라(Vajra)의 뜻이 다이아몬드인지, 번개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것은 와즈라의 뜻이 아니라, 그것을 번역한 한자어 금강(金剛)의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와즈라 자체는 인드라의 벼락(번개)이라고 해석하는 게 옳다.
이 <금강경>은 산스크리트어 본으로도 남아 있으며, 중국 번역본으로는 구마라습(402~413) 번역 외에 북위의 보리유지(菩提流支), 진(陳)의 진제(眞諦), 수나라의 달마굽타, 당나라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의 번역본 등 5가지가 있다. 이 중 구마라습의 번역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된 원본에 비해 생략된 구절이 많다. 하지만 한문 특유의 운율을 살린 유려한 번역 덕에 오히려 402년에 구마라습이 번역본이 널리 퍼져있다.
<금강경>은 <반야경(般若經)> 중 가장 간결하고 중심된 부분인데, 성립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AD 1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분량은 한자로 5,249자 약 300송쯤 되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금강경>은 막상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緣起)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승불교 공(空)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공’이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살행(菩薩行)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면서도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대승경전 특유의 여러 불ㆍ보살들이 잔뜩 나타나지도 않고,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 1250명만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초기불교 경전들과 유사하기까지 하다. 이런 특이한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대승불교 경전 중에서도 상당히 초기에 성립된 경전으로 보인다.
모든 불경에는 저자가 기록돼 있지 않다.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직설을 암송해 기록한 아함경전군들과 달리 대승경전들은 찬불승(讚佛僧)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 경전들 역시 불설(佛說)의 핵심인 중도(中道)ㆍ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한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정되며, 저자는 모두 붓다로 귀결된다. 이처럼 불경에서의 저자의 부재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기를 역설하는 불교의 보편적인 어법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중국불교에 있어서는 삼론(三論), 법상(法相), 화엄(華嚴), 천태(天台) 등 제종(諸宗)은 물론 선종(禪宗)에서 특히 근본경전으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것은 이 경의 철학이 그 만큼 깊고 밝기 때문이다. 더욱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경은 종헌(宗憲)에도 뚜렷이 소의경전으로 나타낼 정도의 기본경전으로서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고 연구되고 있다. 헌데 <금강경>은 지식이나 논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 직관과 인생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예지력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내용이고 구성이다.
후세 사람들, 특히 중국에서 불교교의를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종파별로 교상판석을 행했는데, 그 중 화엄종 교판에서 말하는 오교(五敎) 분류, 즉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돈교(頓敎), 일승원교(一乘圓敎)에서 <금강경>은 이 가운데 대승시교(大乘始敎)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승시교(大乘始敎)는 공사상(空思想)을 중심으로 대승에 처음 들어가는 가르침을 말하기 때문이다.
경의 주요내용은 부처님이 사위국(舍衛國)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10대제자 중 공(空)사상에 가장 밝았다는 수보리(須菩提)로부터 물음을 받고,
①반야바라밀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문답식 대화를 전개하면서,
②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③ 그리고 대승불교 보살사상과 초기 공(空)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내용이 압축돼 있다.
④헌데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사상(空思想)을 설하고 있지만 공(空)이란 글자를 전혀 사용치 않으면서도 공의 이치를 유감없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 경이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아직 공이라는 술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금강경>은 그 뜻이 오묘해서 누군가 설명을 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매번 법문을 들을 때마다 새롭고, 때로 법문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해석 또한 다양한 경우가 허다하다. 불교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출가자에게든 재가자에게든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처럼 돼 있다.
<금강경>의 주제는 보시바라밀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금강경>의 핵심은 ‘상(相-산냐)의 척파를 부르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일체법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불법이 아닌 것이 없다, 즉 이 세상 모든 법은 다 불법 안에 있다고 했다.
*금강경 논리학---<금강경>에서 전개하는 논리는 초월의 논리학이다.---→불법 비불법(佛法 非佛法) 참조.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조선 성종 13년(1482)에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가운데 ‘야보송(冶父頌)과 종경 제강((宗鏡提綱)’을 채택하고, 거기에 조선 초기 함허당 득통의 저술인 <함허설의(函虛說義)>를 합쳐 3가에 구결을 달고 언해해 간행한 책이다.
한계희·강희맹의 발문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문종과 수양대군(세조)에게 언해하게 했으나, 일부밖에 번역되지 않아 성종 때 자성대비가 학조에게 교정시켜 성종 13년(1482)에 간행했다. 활자본 5권 5책이다.
*금강경 야보송(金剛經 冶父頌)---12세기 중국 송나라 시대에 도겸(道謙) 선사의 제자인 야보 도천(冶父道川) 선사가 <금강경>을 읽고 착어(着語)와 송(頌)을 한 것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실려 있는데, 그것을 말한다. 특히 선시(禪詩)의 대가였던 야보 스님의 야보송(冶父頌)이 유명하다. 다음은 야보 선사의 선시이다.
「물은 부처에 비유함이요 파도는 중생에 비유함이라
본질에서 보면 부처니 중생이니 부질없는 사량이라
물이 파도요, 파도가 물일진대 군더더기 없는 그곳 천지가 온통 부처님 세계이리라, 그러나 나는 천진불이 아니므로 번뇌에 떼를 쓸고 또 쓸어야 하리라.」---→야보 선사(冶父禪師) 참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한 <금강경(金剛經)>에 대해 다섯 분의 선지식(善知識), 즉 육조(六祖) 혜능(慧能)과 야보(冶父), 종경(宗鏡), 규봉(圭峰) 스님, 그리고 부대사(傅大士)께서 각각 견해(주석)를 밝힌 글을 모은 책이다.
① 당(唐) 규봉 종밀(圭峰宗密)의 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疏論纂要),
② 당(唐)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금강반야바라밀다경해의(金剛般若波羅蜜多經解義),
③ 양(梁) 부대사(傅大士)의 금강경제강송(金剛經提綱頌),
④ 송(宋) 야보 도천(冶父道川)의 착어(着語)와 송(頌)인 금강경주(金剛經註),
⑤ 송(宋) 예장 종경(豫章宗鏡)의 금강경제강(金剛經提綱).
이상 다섯 권이 본래 별본(別本)으로 유포되고 있었던 것을 하나로 묶은 책인데, 누가 합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에서는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이 중국에서 이미 편집돼 전해오는 <금강경오가해>를 다시 대조 교정해서 서문을 붙이고 추가 해설을 해, <금강경오가해 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출간 대중화했는데, 함허의 불교관을 유감없이 발휘한 아름다운 문체라고 한다.
*금강계(金剛界, vajra-dhtu)---밀교의 2대 교의에는 태장계(胎藏界, garbha-dhtu)와 금강계(金剛界)가 있다. 이 중 금강계는 마하비로자나(대일여래) 지덕(智德)을 나타내 보이는 부문을 말한다. 곧 대일여래의 지혜는 완벽하고 견고해서 모든 번뇌를 쳐부술 힘을 지니고 있다 하여 금강(金剛)이라고 했다. 밀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대일여래의 나타남이라고 했으며, 그 지덕을 나타내는 쪽을 금강계라 하고, 이성(理性)을 나타내는 쪽을 태장계(胎藏界)라 했다. 우리 마음에는 본래 불성인 ‘이(理)’와 번뇌를 깨뜨리는 ‘지(智)’의 양면이 있듯이 그것 그대로 대일여래에게도 ‘이’와 ‘지’ 양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자를 ‘이법신(理法身) 대일여래’ 또는 태장계, 후자를 ‘지법신(智法身) 대일여래’ 또는 금강계라고 한다.---→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 참조.
*금강계단(金剛戒壇)---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불교는 전통적으로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三學)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계를 가장 강조하면서 부처의 현존(現存)을 상징하는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데, 그 의식장소로 조성한 것이 금강계단이다. 이 계단은 인도에서 유래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장(慈藏) 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얻어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금강계단을 만든 것이 최초이다.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단이라는 뜻이다. 형태는 네모난 2층 석단(石壇)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바탕이 되는 비교적 넓은 단 위에 상대적으로 좁은 또 하나의 단을 조성하고, 그 중심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石鍾形) 부도를 안치해 놓은 구조로 돼 있다. 계단 형태는 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 사찰 여러 곳에 계단이 있으나 특히 신라 선덕왕 15년에 설치된 통도사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이고, 그 외에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금강계단은 보물 제539호, 덕유산 백련사 금강계단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이며, 그 외에도 여럿이 있다.---→ 계단(戒壇) 참조.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금강계는 밀교의 본질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지덕(知德)이라는 측면에서 설한 것이다. 금강은 견고함을 의미하는데 대일여래의 지덕은 견고해 그 어떤 번뇌라도 모두 멸해버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와 상대 되는 말인 태장계(胎藏界)는 대일여래를 자비(慈悲)의 측면에서 설한 것이다. 그러니 남성적(금강계), 여성적(태장계) 원리에 근거해 받아들였다.
금강계는 <금강정경(金剛頂經)>, 태장계는 <대일경(大日經)> 설에 의존하고 있다. <금강정경> 말씀에 기초해 금강계의 묘미를 그린 그림이 금강계만다라이다. 금강계만다라는 구회만다라(九會曼茶羅)라고도 부른다. 그 내용에 따라 불과(佛果) 실상을 9회(會)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구(金剛鉤)---밀교 법구(密敎法具)의 하나. 끌어당기는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마치 갈고리와 같은 법구를 사용해서 중생을 이끌고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밧줄과 자물쇠로 잡아두며 마음을 경각시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금강권이란 다이아몬드로 만든 감옥을 말한다. 매우 단단해서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도 없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즉, 금강권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 사량 분별은커녕 아예 머리를 굴리지 못하도록 꽉 틀어막은 상황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과 비슷한 말인데, 화두(話頭) 수행에 있어서 이러함이 의단(疑團)이고, 수행자가 선(禪)의 체험이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잘못된 길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율극봉(栗棘蓬) 역시 비슷한 말이다. 율극봉이란 밤송이인데, 이것이 목에 걸리면 삼키려 해도 아프고 뱉으려 해도 아프고 그냥 있어도 아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몰린 상황을 말한다. 역시 의단으로 인해 꽉 막힌 상황을 말한다.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은 깨달음에 가까운, 깨달음 직전의 상황으로서, 이런 상황을 타파하는 순간 깨달음이 온다.
수불(修弗) 스님은 수행자가 계속해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함에 따라 의심의 느낌이 몸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진다. 수행자는 목이 막히고 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마치 몸이 감옥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 수불스님은 선(禪) 문헌인 <선요(禪要)>에 나오는 표현에 근거해 이러한 현상은 “은산철벽(銀山鐵壁)과 조우하는 것, 혹은 율극봉(栗棘蓬)을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단계는 의정(疑情)의 단계에서 의단(疑團), 즉 의심의 덩어리로 전환된 단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활구를 참(參-탐구)하면 율극봉을 삼키거나 금강권에 갇히게 되는 때가 온다. 그래서 조사들은 한결같이 활구를 참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나 사구를 참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활구(活句)와 사구(死句)’, 율극봉(栗棘蓬), 의정(疑情) 참조.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밀교 금강계만다라에 등장하는 16대보살의 한분이다. 밀호(密號)는 원만금강(圓滿金剛), 만원금강(滿願金剛), 종종금강(種種金剛)이라 한다. 또는 허공기보살(虛空旗菩薩), 선리중생(善利衆生), 금강보장(金剛寶藏) 등으로도 불린다.
<60화엄경>에서 52계위를 설하는 설주(說主)와 설처(說處)를 밝히고 있는데, 거기에서 제6 타화천궁회(他化天宮會)의 설주가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이다.
그리고 10회향(廻向)이란 <화엄경>에서 설하는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位) 가운데서, 제31위에서 제40위까지의 단계인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덕을 다시 중생에게 되돌려주는 경지이다. 여기서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이 지광(智光)삼매에 들어서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를 얻었고, 그 삼매에서 일어나 열 가지 회향을 말했다.---→십회향(十廻向) 참조.
*금강령(金剛鈴; Vajra-ghanta)---밀교법구(密敎法具)의 하나. 승려들이 지녔던 요령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회나 의식 등을 행할 때 마음속에 감추어진 불성을 깨우기 위해 사용한다. 방울 바깥에 보살·사천왕·명왕상 등이 조각되며, 손잡이 부분은 금강저의 모양과 유사하다. 송광사 금동요령은 보물 제176호로 지정돼 있다.
*금강명경(金光明經, 산스크리트어 수바르나 프라바사/Suvarnaprabhāsa)---금광명경은 예로부터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는 경전이라 해 <법화경>, <인왕경>과 더불어 호국3부경(護國三部經)의 하나였다. <금강명경>은 여러 번역본이 있으나 5세기 초 북량(北凉)시대 담무참(曇無讖)이 한역한 4권 본이 대표적이다. 밀교경전의 하나로 사천왕에 의한 국가보호나 현세이익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경전인데, 그 찬란한 내용이 마치 금강과 같이 빛난다고 해 이름을 <금광명경>이라 했단다.
*금강문(金剛門)---사찰에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금강역사는 사찰에 범접하는 삿된 무리를 다스리는 호법신장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새로운 단단하고 굳은 불경 속 진리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해 금강문이라 한다. 사찰에 따라 금강문을 생략하고, 일주문 다음에 바로 천왕문(사천왕문)이 있는 경우가 있다. 금강문이 없는 경우에는 사천왕문 문짝에 금강역사를 그림으로 그려 모신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Vajracchedika-prajna paramitasutra)---줄여서 <금강경(金剛經)>이라 한다.---→금강경(金剛經) 참조.
*금강살타(金剛薩陀, 산스크리트어 vajrasattva)---밀교에서 중요시하는 보살임. 지금강(持金剛)ㆍ집금강(執金剛) ․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 명칭이 뜻하는 것은 금강과 같은 불변의 진리를 성취한 살타(薩埵), 즉 ‘유정’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 ‘바주라사트바(vajrasattva)’에서 ‘vajra’가 금강이라 의역, ‘sattva’가 살타란 말로 음역돼, 이것이 합쳐져서 ‘금강살타’가 됐다. 금강살타는 보살과 달리 열반을 성취했으면서도 중생의 세계를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구호하기 때문에 성불을 미루고 중생을 구호하는 입장으로서 현교의 보살과 다르고, 보살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한다.
금강살타(금강수보살)는 진리 그 자체인 대일여래와 중생을 포함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대일여래와 중생을 연결하는 접점에 있는 초인적 존재이다. 탱화의 경우 한 손에 방편을 뜻하는 도르제(Dorje,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고, 다른 손엔 지혜를 뜻하는 딜부(drilbu, 요령/搖鈴)을 들고 있다.
*금강삼매(金剛三昧)---금강정(金剛定)ㆍ金剛喩定(금강유정)ㆍ금강심(金剛心)이라고도 한다. ‘금강’이란 견고하다는 말인데, 그것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는 선정을 말한다. 이 금강삼매는 성문ㆍ보살들이 수행을 마치고 맨 마지막 번뇌를 끊을 때에 드는 것이다. 소승은 아라한과를 얻기 전에 유정지(有頂地)의 제9품 혹(惑)을 끊는 선정을 말하고, 대승은 제10지 보살이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구생소지장(俱生所知障)과 저절로 일어나는 번뇌장 종자를 한꺼번에 끊고 불지(佛地)에 들어가기 위해 드는 선정을 말한다. 천태종에서는 등각(等覺) 보살이 원품무명(元品無明)을 끊고 묘각(妙覺)을 증득(證)하기 위해 드는 선정을 말한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금강삼매경>은 <대승기신론>의 논리를 기본적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경은 7세기 전후 당나라에서 조성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있다. 그것은 중국 남북조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나타났던 여러 문제된 설과 교리를 총 말라 해서 엮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에서 680년 경 원효(元曉, 617년-686) 대사가 지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원효 대사는 왕과 고승들 앞에서 <금강삼매경>을 강론해 존경을 받았다는 말이 전한다. 마음의 고요는 어떤 지식적인 매개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매(三昧)에 들 때에만 누릴 수 있다. 이 삼매를 중심으로 설해진 경전이 <금강삼매경>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마음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해 놓은 경전이다. 즉, 본래의 자기를 보기 위해 마음 찾아 삼매에 드는 길을 제시했으며, 압축된 문장이 특징이다.
<금강삼매경>은 “<법화경>을 모델로 하고 있어 그 구조가 <법화경>과 거의 비슷하다. 부처님이 깊은 삼매에 드신 것으로 시작하고, 삼매에서 나오신 후 이 경전에 대해 설법이 시작된다. <법화경>에서 직접 구조를 따 온 것이다.
설법은 인도에서 이루어졌고, 관중은 인도의 보살과 이라한, 가루다, 마후라가 등과 같은 인도의 신들이며, 인도풍의 용어를 쓰는 등 진경으로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 한 것 같다.
이 경은 ‘여래장’계열 경전이라 하지만 새로운 선불교 전통의 초기내용이 담겨 있다. 중국문헌에 <금강삼매경>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용왕’에게 직접 받은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나라로 가던 신라 사절이 황해를 건너던 중 용궁으로 불려가 허벅지에 이 경전을 꿰매 넣고 다시 신라로 돌아가 대안(大安) 성자에게 흩어진 순서를 바로 잡게 해서 이를 원효에게 전해 여기에 주석을 달게 하라는 용왕의 명을 듣는다. 전부 용왕이 직접 명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 경전이 원효를 위해 씌어졌을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중국에는 이와 유사한 문헌이 전혀 없다. 실제로 이 경이 중국에 처음 알려졌을 때, 원효가 쓴 경론과 관련해서 알려졌다. 원효는 생의 말기에 이 경에 대한 논소를 썼고, 당시 원효는 아시아 전역에 잘 알려진 저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글은 즉시 중국으로 전파됐다." - 진흙속의 연꽃
대안(大安, 571~644) 성자의 본래 이름을 알 수 없다. 대안은 항상 특이한 모습으로 장터거리에 살았다. 괴이한 옷차림을 하고 항상 저잣거리에서 구리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다닌 데서 그의 이름이 불리어졌다. 서민을 교화했으므로 대안 성자라 불리었다. 대안과 원효는 스승과 제자처럼 지낸 사이였다고도 한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왕이, 마구 뒤섞인 채로 신라에 들어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정리해달라고 대안을 초청하자, 그는 궁에 들어가지 않고, 그 경을 자신에게 가지고 오게 해 경전의 순서를 맞춰 8품으로 정리했으며, 또한 이 경전은 원효(元曉)만이 강의할 수 있다고 추천해, 원효로 하여금 이 경의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을 짓게 했다고 한다.
이 때 원효 대사는 상주(尙州)에 있었다. 사자가 경전을 받들고 갔더니 원효는 그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소를 타고 마중 나왔다. 사자가 경을 올렸더니 원효는 슬쩍 보고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어 주석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가 소를 타고 서라벌에 이르기 전에 소(疏) 5권을 지었다. 그래서 이것을 각승(角乘)이라고도 부르니 곧 소를 타고 소 뿔 사이에 필연(筆硯)을 놓고 대승경전의 <금강삼매경소(疏)>를 지었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왕은 곧 황룡사(皇龍寺)에 법석(法席)을 베풀고 이것을 강설케 했는데, 원효 대사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밤사이에 이 주석 5권을 훔쳐 갔다. 대사가 강경을 하려 하니 책이 없었다. 그래서 대사는 왕에게 연유를 아뢰어 3일간을 연기하고 다시 3권의 소를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3권의 소(疏)인데, 이것을 약소(略疏)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원효의 글이 아니고, 보살이 쓴 글이라 해서 논(論)이라고 붙여 후대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 부른다. 이러한 일화들 역시 금강삼매경의 저자가 원효 대사임을 시사하고 있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에 대한 해석서로 원효(元曉) 대사의 저술이다. <금강삼매경론>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더불어 원효 대사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불교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금강삼매경>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원효 대사는 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서를 쓴 것이다. 찬술 시기는 신라시대인 대략 7세기 중후반으로 보고 있다.
<금강삼매경>이 위경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방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한 통찰력으로 경전의 오의를 명확히 천명한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 저술의 공덕에 힘입은 바 크다. 원효 대사는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자신의 핵심사상인 일심(一心)법과 중도(中道)와 화쟁(和諍) 논리를 토대로 대승교학과 그 실천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저자는 <금강삼매경>의 해설서인 <금강삼매경론>은 원래 소(疎)였었는데, 중국에 이 소(疎)가 들어왔을 때 경전을 번역하는 학자들이 그 내용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소를 론(論)이라 고쳤다고 전하고 있다.
보통 인도의 대학승 용수(龍樹), 무착(無着) 세친(世親) 정도의 논사들이 쓴 것을 논전이라 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은 대학자들이라도 논사(論師)라 하지 않고, 그 주석서도 ‘논’이라 하지 않고, ‘소’라고 하는데, ‘논’이라고 한 것은 <금강삼매경론> 말고는 없다. 그만큼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이 용수나 무착의 저작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금강삼매경론>을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네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1) 경의 대의(大意)를 서술하고 있다[述大意].
2) 경의 종지(宗旨)에 대하여 설명 하고 있다[辨經宗].
3) 경의 제명(題名)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釋題名].
4) 경문을 하나하나 의심을 풀어가며 뜻을 새기었다[消文義].
위의 1). 2). 3)은 경문 해석에 앞서서 원효 대사께서 <금강삼매경>의 대의와 종지 그리고 제명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으로서 경 전체의 사상을 간결하게 그러나 남김없이 두루 담고 있다. 아름다운 운율의 수려한 문체와 독창적이고 해박한 사상은 불교의 핵심과 원효의 불교관 전체를 알 수 있는 주옥같은 글이다. 4) 소문의(消文義)에서 경문 하나하나의 주석을 하는데, 원효 대사의 주석 또한 이 글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경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논전인 것이다.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 산스크리트어 바즈라파니/Vajra-pani, Vajra-dhara)---'금강저를 들고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한자 이름으로 금강역사(金剛力士) 또는 금강수(金剛手)라고 부른다.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는 강력한 결심을 상징한다.
오른손에는 금강저(Vajr)를 쥐고 왼손에는 그물을 들고, 머리에는 해골 왕관을 쓰고 있다. 분노에 찬 표정에 세 번째 눈을 갖고 있으며, 목에는 뱀 목걸이가 걸려있고, 허리띠는 호랑이 가죽이다.
금강역사가 인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앙아시아에 불교가 전파됨에 따라 헬레니즘 영향이 불교에 스며들어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로 변모한 것이라고 한다.---→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 참조.
*금강승(金剛乘 = 密教, Vajra-yana)---대승과 소승에 비해서 밀교를 금강승(金剛乘)이라 하며, 금강승불교, 탄트라불교라고도 한다. 금강승은 피안의 저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데 금강 수레라서 반듯이 넘어간다는 뜻이다.
금강(金剛)이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절대적으로 진실하며 파괴되지 않는 그 무엇(힌두교에서는 이를 ‘아트만’이라 함)으로서 인간이 신과 동일하게 될 수 있는 인자(因子)이며, 승(乘)이란 불(佛)과의 합일을 위해 노력할 때에 도움을 받는 결정적 수단으로서 탈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금강승이란 ‘탄트라’라는 용어처럼 티베트불교를 일컫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수행자들이 가장 빠르고 가장 쉽게 부처가 되는 방법이라는 속뜻을 암시하고 있는 용어이다.
대승불교는 6세기 이후 중관학(中觀學)과 유식학(唯識學)의 상호대립 속에 부파불교시대의 아미달마처럼 이론이 너무 번쇄해져서 그 기능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금강승불교는 이런 사변적인 대승불교사상으로부터 개인 삶에서의 불교사상 실현으로 전환함을 의미했다.
소승의 목표가 자기 자신을 위한 아라한의 해탈이며, 대승의 목표가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 활동하는 높은 보살이라면, 금강승은 빨리 완벽한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을 자유자재로 구원해 줄 전지전능한 성불을 이루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3아승기겁에 걸친 보살도를 행한 후 성불을 하지만, 밀교인 금강승에서는 현생에서의 성불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수행의 목표로 봐서는 소승보다 높고, 성불하는 수행기간에서 대승보다 빠르다. 즉, 대승 보살이 3아승기겁이 걸려야 성불하지만 금강승은 현생에 당장 성불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금강승은 불교의 완성이라고 보고 있다.
금강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현교(顯敎)인 소승과 대승불교는 금강승을 수행할 예비기초과정에 해당되며, 소승과 대승불교를 철저히 수행한 뒤에야 금강승 수행에의 접근과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대승을 바라밀승(波羅密乘)이라 낮추어 부른다.
그러면서도 밀교는 많은 오래를 받는다. 예건대, 티베르 사원에 가면 남존(男尊)과 여존(女尊)이 부둥켜안고서 성교하는 모습의 불상인 합체존(合體尊)이 모셔져 있다. 합체존을 티베트어로 ‘얍윰(Yab Yum)’이라고 부른다. 티베트어 ‘얍’은 아버지, ‘윰’은 어머니를 의미하기에 부모존이라고도 번역한다. 이러한 합체존은 힌두교에서 들여왔다.
힌두교에서는 남존을 절대자인 시바신(Śiva神), 여존을 성력(性力)인 샥티(Śakti)로 간주한 후 이들의 성교를 ‘세계창조’와 결부시키는데, 금강승에서는 동일한 외형의 합체존을 빌려와 남존을 ‘자비 방편’, 여존을 ‘반야 지혜’를 상징한다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성교의 오르가즘을 ‘깨달음의 대락(大樂)’에 대비시킨다. 이와 같이 금강승에서는 불교 밖에서 유래한 종교의식이나 존상을 들여와 불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수많은 수행법과 의례를 개발해 내었다.
또 이 외에도 밀교 경전에는 성(Sex)과 관련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밀교’ 수행법에는 성행위가 포함돼 있을 것이라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다. 밀교는 엄격하고도 청정한 계율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밀교는 문자 그대로 ‘비밀스러운 가르침’인데,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남부끄러워서 비밀스럽게 수행한다.”는 의미의 비밀이 아니라, 스승이 그 가르침을 제자에게 ‘비밀스럽게’ 전한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공개된 가르침인 소승과 대승의 현교(顯敎)에 대비되는 이름이다. 밀교에서는 그만큼 스승과 제자 사이에 1대1의 교섭이 잦다.
밀교를 불교 탄트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힌두교의 탄트리즘과 구별하기 위해서 불교라는 말을 덧붙여 부르는 것이다. 탄트라(Tantra)는 원래 옷감을 짜는 ‘베틀’, 또는 ‘베틀에 세로로 걸어 놓은 날실’을 의미하는데, 의미가 전용돼 ‘토대, 체계, 교리’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탄트라에는 ‘의례나 명상의 지침’이 실려 있기에, ‘추상적인 가르침’이 담긴 소승이나 대승의 수트라(Sūtra, 經)와 대조된다.
그 외에 금강승의 교학적 토대나 수행목표는 모두 대승과 마찬가지다. 금강승의 교학적 토대는 대승불교사상인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에 있으며, 그 수행목표 역시 대승과 마찬가지로 성불이다. 금강승이 대승과 차별되는 점은 그 수행방법에 있다. 대승과는 비교되지 않는 다종다양한 수행방법을 갖는다는 점에서 금강승을 ‘방편승(方便乘)’이라고 부른다.
밀교에서는 이와 같은 여려 수행방식으로 부처의 지혜인 법신과 마음인 보신과 몸인 화신을 모두 성취하는 것이 금강승 수행의 최종 목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강승의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교학에 근거해 ‘보리심’을 익혀서 이기심이 전혀 없고, 공성(空性)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파악한 수행자에 한해 금강승 수행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된다고 말한다. 칼을 어린아이에게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금강승 수행은 가치중립적인 심신의학으로 관상 수행을 통해 염력(念力)을 키우고 몸을 변화시키기에 강력한 방편의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금강심(金剛心)---금강처럼 견고한 신앙심을 말하며, 금강처럼 단단해 어떠한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굳은 믿음을 말한다.
*금강심론(金剛心論)---금타(金陀, 1898-1948) 스님 저서. 벽산당(碧山堂) 금타 스님은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후의 혼돈 속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히 감추고 살다가 가신 분이다. 모든 경전을 섭렵했기에 박학다식하고, 금타 스님 저서 <금강심론(金剛心論)>만 읽으면 모든 경전을 다 읽은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다. 청화(淸華, 1924~2003) 스님의 스승이기도 하다.
<금강심론>은 보살 수행위차(修行位次)에 있어서 성문십지(聲聞十地), 보살십지(菩薩十地) 또는 52위, 55위나 56위 등 그런 여러 가지 위차를 대비하고 회통해 해탈십육위(解脫十六位) 하나의 체계를 세운 것이다.
<금강심론>은 어떻게 수행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성불하는가를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서 서술했다. 따라서 경전의 인용 폭은 소승 ․ 대승 ․ 밀교를 총망라했다. 또 보편타당해서 어느 수행법도 부정하지를 않았다. 간경(看經), 진언(眞言), 참선(參禪), 관법(觀法), 이 모두 다 경계는 같다고 했다. 그러기에 간경 수행하는 사람이이나 진언하는 사람이나 화두 하는 사람이나 다 <금강심론>을 읽는다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금강심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이 제2장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다. 보리방편문은 중생에서 부처의 길까지 간결하게 일러준 법문이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신 분이 올라가는 길을 지도를 보고 손으로 짚어가면서 일러주듯이 범부에서부터 부처가 되는 길을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 말씀하셨고, 경전의 폭은 소승 경전부터 대승, 밀교까지 총 망라했다.---→금타(金陀) 스님 참조.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ani)---원래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코끼리 60만 마리 힘을 가진 역사(力士)로서, 어떤 거짓도 허용할 수 없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눈을 금강안(金剛眼)이라 한다. 한편 금강역사는 금강문을 지키는 야차(夜叉)이기도 한데, 불교의 대표적 호법신장(護法神將)이다. 이를 인왕(仁王)이라고도 해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받아들였다.---→금강문(金剛門) 참조.
*금강야차(金剛夜叉)---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을 말한다. 밀교 오대명왕(五大明王)의 하나이다. 명왕(明王)은 불교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오대명왕은 부동명왕(不動明王), 항삼세명왕(降三世明王),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이다.---오대명왕(五大明王) 참조.
*금강유정(金剛喩定)---금강삼매(金剛三昧)와 같은 말. 금강심(金剛心) ․ 금강정(金剛定)이라고도 한다. 금강의 견고하고 예리한 성질에 비유해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선정(禪定). 온갖 분별과 번뇌를 깨뜨려버리는 선정을 말한다.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범어로 바즈라가르바(Vajra-garbha)이며, 현겁(賢劫-현세) 16존(尊)의 한 보살이며, 그 이름이 모든 대승경전 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특히 <화엄경> 제6회 ‘십지품’에 특별히 열거해 상수보살로 삼고 있다. 금강장보살은 아주 작은 번뇌와 무명마저도 잘라내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보살로서, 분노신(忿怒身)을 드러내고 또는 금강저(金剛杵)를 가지고 마군을 항복시킨다. 그러므로 형상에 있어서는 청백색의 몸을 드러내 놓고 왼손은 주먹 혹은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청련화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조성된다.
*금강저(金剛杵, vajra)---‘저(杵)’는 고대 인도의 무기 중 하나로 제석천(인드라)이 코끼리를 타고 아수라와 싸울 때 사용하는 것이란다. 무기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리하고 뾰족했으나 차츰 불교의식구로 전용되면서 불꽃[寶杵]이나 탑 모양[塔杵]으로 변모했다.
산스크리트어 ‘바즈라(Vajra)’에는 ‘벼락’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제석천(Indra-인드라 신)이 갖고 다니는 벼락같은 힘을 가진 무기인 금강저(金剛杵)가 이러한 힘을 상징한다. 손잡이 양끝에 예리한 칼날이 달려있는 방망이로, 둘레에 연꽃과 금강역사가 새겨져 있어 천둥의 모양을 따랐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금강저는 힘을 나타내는 무기로 삿된 것들을 모두 쳐부수는 강력한 무기로서, 불교에서는 항상 몸에 지녀 금강과 같은 지혜로 미혹을 깨뜨려 부수는 지혜의 무기를 상징하며, 번뇌를 없애는 보리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금강지저(金剛智杵)ㆍ견혜저(堅慧杵)라고도 한다.
밀교에서는 의식을 거행할 때 엄격한 법식에 따라 여러 가지 물건을 사용하는데, 총칭해서 밀교법구라고 한다. 그 중에서 금강저는 특히 중시한 의식용 불구(佛具)의 하나인데, 지금도 호신부로 팔고 있다. 하지만 밀교가 성행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강령, 금강저, 화사형 향로(火舍形 香爐) 등이 일부 전해지는데, 대부분 중국 원나라에서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으로 13~14세기에 주로 사용됐다.
*금강정경(金剛頂經)---밀교경전으로서, 금강계의 여러 경전 중 특히 다음 세 가지를 통틀어 이르는 총명(總名)이다. 그러나 줄여서 불공 번역본만을 <금강정경>이라 이르기도 한다,
① 불공(不空) 번역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 3권. 현존하고 있는 금강정경계 경전 중 가장 많은 내용이 담겨 있으며, 흔히 <초회금강정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줄여서 보통 이를 <금강정경>이라고 한다. 명칭의 의미는 여러 경전 중 최고이며, 모든 여래의 진실을 수록한 실천규범 왕경(王經)이라는 뜻이다. 이 경은 <대일경(大日經)>보다 약간 늦게 AD 670~690년(7세기 말엽)경 동남부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일경>과 함께 밀교의 근본사상을 설하는 근본경전인데, <금강정경>이 대일경보다 밀교교의에 대해 더 정교하다고 한다.
② 시호(諡號) 번역 <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삼매교왕경(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三昧敎王經)> 30권.
③ 금강지(金剛智) 번역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 4권.
위의 번역자로 등장하는 금강지(金剛智)는 인도 승으로서 당대(唐代) 중국에서 활약했으며, 불공(不空)은 그의 제자이다. 그리고 시호(施護)는 송대(宋代)에 활약한 밀교승이다.
<금강정경>은 밀교의 독자적인 비밀의궤(秘密儀軌)를 상술한 것으로 관정(灌頂:여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물을 스승이 제자의 머리에 붓는 의식을 행해 부처의 지위를 계승케 하는 것)의 규칙이나 진언(眞言) 그리고 여러 인계(印契) 등이 설명돼 있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금강정경>이 티베트밀교의 기초가 돼 있다.
*금강지(金剛智)---극히 견고한 지혜. 곧 여래(如來)의 지혜를 의미한다.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바쥬라보디, 671~741)---남인도출신 승려로 720년 중국 당나라 뤄양(洛陽)에 들어가 밀교를 크게 펼쳐 중국밀교의 개조가 됐다. 그와 같은 시대 밀교승려인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大日經)> 등을 번역한 데 반해, 금강지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중국에 전하고 번역했으며, 그 외에 다수 밀교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삼장(金剛智三藏)이라고도 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금광명(金光明)의 세 글자에서 ‘금(金)’은 존귀한 것이며, ‘빛(光)’이란 온갖 것을 비추어 어둠을 없애고, ‘밝음(明)’은 만물에 응해 모두 이익 되게 한다는 뜻이다.
<금강명경>은 참회하는 법, 업장(業障)의 소멸, 사천왕(四天王)에 의한 국가 보호,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국왕의 공덕과 이 경전을 설하고 독송하는 이의 공덕에 대해 설한 경전이다. 5세기 중엽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 번역. <법화경>ㆍ<인왕경>과 더불어 호국삼부경에 속한다. 이 경의 설법을 믿고 자기의 죄를 참회하면 자신은 물론 나라와 왕도 귀신들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설법하고 있다. <금광명경>은 신라와 고려에서 매우 존숭됐으며, 이에 근거해서 인왕백고좌회를 열기도 했다.
*금구(金口)---부처님 입을 말한다. 부처님 몸이 황금빛이므로 그 입을 금구라고 하며 또 금강과 같이 견고하므로 이렇게 말한다. 또 부처님의 말씀을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 말씀은 만세에 없어지지 않는 진리이고 금강과 같으므로 금구라 하고 또 금빛 입으로 하는 말이므로 금구라 한다.
*금당(金堂)---가람(伽藍)의 중심 건물로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당을 말한다. 금색의 불상을 내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금당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금란가사(金襴袈裟)---금란가사란 원래 부처님이 입으신 가사를 말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키운 부처님의 이모(계모)인 ‘마하파자파티’가 부처님께 금색 옷 한 벌을 지어 올린 것에서 유래됐다 한다. 후에 많은 국가들에서 당대 최고의 승려들에게 금란가사라 하는 법의(法衣)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금란가사는 깨달음과 존경의 상징이자,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한다.
*금륜(金輪)---4륜 중의 제일 윗층임.---→사륜(四輪) 참조.
*금불부도로 목불부도화 니불부도수 진불내이좌(金佛不度鑪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真佛內裏坐)---<벽암록> 제96칙, 조주(趙州從諗, 778~897) 화상의 삼전어(三轉語)법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은 조주 선사의 시중(示衆)이다.
※전어(轉語)란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말이다. 전미개오(轉迷開悟)라는 말과 같이 중생의 몸과 마음을 부처의 몸과 마음으로 전향시키는 전신(轉身)의 의미인데,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한 마디 법문으로 깨달음을 체득해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심기일전(心機一轉)하도록 하는 선승의 법문을 일구(一句)라고 한다. 선에서 말하는 일구는 일전어(一轉語)이며, 삼구(三句)는 삼전어(三轉語)이다.
※시중(示衆)---대중에게 법문을 내려 가르치는 것을 ‘시중(示衆)’이라고 한다.
어느 날 조주 화상은 수행자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심기(心機)를 일전시킬 만한 세 마디 획기적인 법문을 하셨다.
「쇠 부처(金佛)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金佛不度鑪),
나무부처(木佛)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木佛不度火),
진흙 부처(泥佛)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泥佛不度水).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속에 있다(真佛內裏坐).」
쇠로 만든 부처님은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고 만다.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에 들어가면 타버려 불을 건너지 못한다. 진흙으로 만든 토불은 물에 들어가면 풀어져버린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부처는 안에 가만히 앉아계시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화로ㆍ불ㆍ물에 들어가도 이 부처님은 끄떡하지 않는다. 어떤 희ㆍ로ㆍ애ㆍ락 감정 상태나, 손ㆍ해ㆍ득ㆍ실에도 이 부처님(心佛)은 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나고 죽는 일에도 상관없다. 그러니 형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오로지 심불(心佛)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참다운 부처는 형상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상이 곧 부처는 아니다. 허나 형상을 떠나서 부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이와 관련해 파조타(破竈墮) 화상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화상이 주장자로 절에 모셔진 조왕신(竈神-부엌신)을 때려 부셨다. 조왕신은 박살이 났는데, 그 속에서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동자가 나타나서 사례를 하는 것이다. 고맙다면서,
“지난날에 나 자신을 저버리고 산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신이 되려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야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신들도 번뇌가 끊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까닭에 자기 맘에 따라 취사선택을 할 때도 있다. 다시 말해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마 그 동자는 조왕신이 좋아보였던가 보다. 그래서 그 속(조왕신 속)으로 들어가서 공양을 받고 하니까 대단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파조타 스님이 주장자로 그것을 알고 조왕신을 부셔버리니까 동자가 그때야 그런 생활이 부질없음을 알고 풀려난 것에 대해 사례를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모두 금불이나 목불이 용광로나 불을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밝힌 이야기이다.
보리나 열반, 진여, 불성, 이런 말들이 모두 몸에 걸친 의복과 같고, 역시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궁극적인 실제 이치라도 어디에 둘 수가 있으랴!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다. 단지 불법의 이치를 구명하기 위해 참선하라는 가르침이다. 다른 것은 다 방편이다. 오로지 마음속에 부처를 담도록 하라는 말이다.
*금사자장(金獅子章)---본명은 화엄금사자장(華嚴金獅子章)인 방대한 글이다.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뜰 앞에 놓인 금사자를 가지고 비유해 10문(門)으로써 화엄의 교관(敎觀)을 나타낸 글이다.
법장은 여기서 ‘이(理)’는 이치요 ‘사(事)’는 현상이다. 법신의 바탕이 이치요, 그로 인해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이 현상이다. 이치가 작용해 현상이 일어나니 이치를 떠나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에서 그 이치가 드러나니 현상에서 이치를 분리할 수 없어, 본디 서로 ‘상즉’ 한다. 금으로 만든 금사자(金獅子)에 있어서,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佛性을 금으로 표현]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여러 가지 수행방편이란 뜻]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해 표상(불성에 의지해서 수행결과)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고 했다.
*금시조(金翅鳥)---가루다(Garuda)와 같은 말.---→가루다(Garuda) 참조.
*금어(金魚)---불화나 불상을 조성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 불화를 제작하는 이들을 불모(佛母), 화사(畵師), 화승(畵僧)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데, 이 중 으뜸이 금어이다.
*금타(金陀, 1898-1948) 스님----전북 고창(高敞) 출신으로 속명은 김영대(金寧大)이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919년 고창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왜경의 마수를 피해 산사로 피신했다가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친견하고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섰으며, 주로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했다. 벽산당(碧山堂) 금타(金陀) 스님은 일제식민통치와 해방 후의 혼돈 속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히 감추고 살다가 가신 분이다. 스님의 깨달음의 세계는 범인이 헤아리기 힘들다. 스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메모지에 남긴 것을 그의 제자 청화(淸華, 1924~2003) 스님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이란 표제(表題)를 붙여 편찬했다. 그가 지은 <금강심론(金剛心論)>만 읽으면 모든 경전을 다 읽은 것과 같다고 했다.
<금강심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이 제2장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다. 보리방편문은 중생에서 부처의 길까지 간결하게 일러준 법문이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실 분을 위해, 올라가는 길을 지도를 보고 손으로 짚어가면서 일러주듯이 범부에서부터 부처가 되는 길을 철저히 경전에 근거해 말씀하셨고, 경전의 폭은 소승 경전부터 대승, 밀교까지 총 망라했다.---→금강심론(金剛心論) 참조.
*급고독(給孤獨, 빠알리어 anāthapiṇḍika(아나타핀디카)---중인도 사위국(舍衛國, 코살라국) 장자이자 재상,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舍)을 지어드린 수달타(須達多, Sudatta/수닷타)의 별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나타핀다다(anāthapiṇḍada)라 한다.
수달타는 원래 배화교 신자였다가 부처님 제자가 됐는데, 그의 집은 큰 부자로서 재보가 한량없었고, 어려운 이에게 항상 옷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자’라는 의미의 급고독(給孤獨), 즉 아나타핀디카(아나다 핀다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수보리가 바로 급고독 장자의 조카이다. 정사를 지어 바친 후에도 자주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집으로 청해 공양을 올렸으며, 재산이 다한 후에는 죽이라도 보시하려고 애썼던 인물이다.---→기원정사(祇園精舍), 아나타핀디카(빠알리어 Anāthapindika)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