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후 1시 5분에 임청각에 도착했다. 현재 안동은 인구 16만에 독립유공자가 350여명에 달하고 있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임청각이 있다. 임청각 집안 사람중에 독립유공자로 국가로 부터 포상을 받은 사람이 14명이 된다. 그 중에 중심 인물이 석주 이상룡이다. 임청각을 이야기 하기 전에 석주 이상룡선생을 먼저 이야기 하자.
선생은 1858년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있고 거창 가야산에서 의병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육계몽 활동을 했다. 신식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남녀노소,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 들여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국내에서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답을 처분하여 1911년 50여명의 가솔을 포함 200여명의 사람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이회영등과 함께 경학사라는 자치기관을 만들고 군사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 가뭄과 홍수, 흉년과 마적단의 출몰, 풍토병이 돌아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결국 경학사는 해체되고 선생은 이듬해 봄 동지들과 뜻을 모아 부민단을 조직했다. 벼농사는 추운 날씨에도 잘 자라는 연해주나 북해도 볍씨를 들여와 잘 되었고, 식량이 안정적으로 확보되기 시작했다. 당시 만주에는 조선본토에서 이주한 사람이 100만 명에 달했다. 당시 길림성주가 일본의 매수로 조선인들을 탄압했는데, 선생인 그와 독대하여 필답을 나누어 다음과 같은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1. 조선인을 중국 국적으로 해 줄 것 2. 홍무지를 개간하게 해 줄 것 3. 교육을 받게 할 것 4. 조선인의 자치조직을 인정할 것 5. 군사 훈련을 허용할 것,
이로서 만주의 독립운동은 부민단과 뒤를 잇는 여러 단체들을 통해 행정조직을 확보하게 되었고 군사조직인 신흥강습소는 1911년 12월 강습생 1기인 40명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후 1913년 신흥중학교, 1919년 3.1운동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전 졸업자는 300명, 이후 10년동안 이 학교 졸업자는 3500명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19.04월에 서로군정서가 조직되고 석주선생이 이범석, 지청천장군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북로군정서 대장 김좌진장군은 석주선생에게 도움을 청하여 물적, 인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바탕하여 독립군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0월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석주 선생은 군사 훈련 뿐 아니라 투철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도 중요하게 여겨, 국어,국사,지리에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해서 석주 선생이 이끄는 조직에서는 배신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1925년 9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뒷선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1932년 5월 10일 최측근들이 일본군에 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돌아가셨다. 유언으로는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조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향년 75세. 1990년 선생의 유해는 환국되었다. 2009년 국적이 회복되었다.
석주선생의 일대기는 우당 이회영선생과 같이 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고, 당시 우국지사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우당선생은 석주선생보다 9살 어렸다. 청년시절 을사오적 척결을 위한 상소나 헤이그 밀사사건 조직, 의병 활동과 애국계몽교육사업, 그리고 노비문서 소각이나 일가를 이끌고 단행한 망명, 경학사활동과 군사조직 후원...임시정부 참여와 실망과 후회등등. 그리고 우당선생은 66세로, 석주선생은 75세로 같은 해 1932년에 돌아가셨다. 한 분은 일본놈에 의한 체포와 살해로, 한 분은 동지들의 피체에 따른 상실과 건강악화로.
좌측은 안주인들이 기거하는 곳이고, 우측은 바깥양반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가운데 우물은 지금도 물이 맑게 나온다.
우리는 안주인이 기거하는 안채 마루에 걸터 앉아 김호태해설사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임청각 후손들은 16대를 내려 오면서 손이 끊기질 않았다고 한다. 우측 여성분들이 앉은 곳 방이 혼인한 딸이 살았단다. 옛날에는 식을 올리고 몇 년은 신랑이 처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안방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기거했을 터. 건너방의 신부를 애지중지 챙겼을 것이다. 합궁을 하는 날은 예의있고 정갈한 날을 칮아 정해졌겠다 싶다. 해설사님은 석주선생님의 일대기와 일제시대 임청각이 겪은 수난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독립운동에 있어 석주선생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바깥에는 군자정과 사랑채가 붙어 있다. 정자 옆으로 ㅁ 자 모양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으로 사당이 놓여 있다. 이 고을 무대로 2021년 07월에 연극 <서간도 바람소리>가 공연되었다.
우리는 해설사님을 따라 안채의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비오는 날, 혹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반달이 떠 있는 어느 초저녁 하늘을 이 곳 마루에서 쳐다보는 상상을 해 본다.
처마를 잘 보면 각 면이 어긋나게 경사지게 건축되었다. 빗물의 원할한 낙수와 배수, 바람과 빛의 적절한 배분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해설사님의 설명은 임청각의 풍수지리적 명담임을, 일제가 놓은 철로로 인해 기왓장에 철녹 가루가 끼였다는, 임청각의 후손 가계도, 석주선생이 독립운동을 기리며 앉아 있을 법한 방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묻은 유서 한 장이였다. 일제가 철로를 자기 안 마당에 내는 걸 보고 선조들을 보기 부끄럽다고 자결한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의 유서다.
아버지가 머나먼 만주에서 민족의 해방을 염원하며 1932년에 죽었다. 1942년 철로가 이렇게 놓이니 아들은 아버지를 차마 볼 수 가 없었을 것이다. 5월 10일 아버지 생신날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니 가슴이 미어져 남몰래 눈시울이 붉혀진다. 해설사님이 독립운동사를 조명할 때, 일제에 의해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것만 보여주지 말고 당당하게 의연하게 투쟁해 온 역사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고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한이 서리는 고통과 아픔도 가슴에 품고, 또한 의기와 기개로 싸운 혁명가와 전사들도 가슴에 품고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느낌과 상념에 든 채, 임청각을 나왔다. 시간은 2시 30분. 시간이 어떻게 간지 모르게 갔구나. 멍먹한 가슴을 안고 다시 한번 차분하게 방문할 것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