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아련한 말, ‘소명’
고교시절, 성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을 때였다. 교리를 가르치는 젊고 생동감이 넘치는 수녀님으로부터 ‘소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자기 인생에서 소명을 가진 사람들을 즐겨 찾아보았다. 성인들, 현자들, 예술가들, 영웅들, 위인들... 그러다 어느 순간인지 알 수 없지만, 사회적 현실에 침잠하게 되었고, 최소한 내 개인적인 삶에서는 ‘소명’이라는 말이 매우 멀리 느껴진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린시절 영혼에 각인된 그 ‘소명’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여전히 나의 뇌리에서 가장 의미있는 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이러한 ‘소명’이라는 말을 ‘완전한 도덕’처럼 간주하고 있다.
“성인들에게는 왜 모방자가 생기고, 위대한 덕행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왜 사람들이 몰려드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획득한다. 그들은 권유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소명이다(leur existence est un appel)’. 이러한 것이 바로 또 다른 도덕(즉, 완전한 도덕)의 본질이다. 자연적인 의무(obligation naturelle)가 [개인 의식이나 사회 규법을 통한] 압박이나 압력이라면, ‘완전하고 완벽한 도덕(morale complète et parfaite)’에는 소명(부르심, appel)이 있다.
(... ...)
이러한 소명의 진정한 의미는 ‘위대한 도덕적 인격을 지닌 사람(présence d'une grande personnalité morale)’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평소의 행동 원칙이 불충분하다고 느껴질 때, 그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했을지 궁금해하곤 한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중에서 -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 어느때 보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한 때인 듯 하다. 소명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적인 자아의 깊은 지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사회적 자아’를 초월하고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으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적인 프레임으로 비난하거나 질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그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마치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지는 못하더라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박해하거나 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최소한 악의 세력에 가담할 필요는 없는 것이 최소한의 도덕적인 삶이 아닌가?
현대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악’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이 말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은 것이 선과 악은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공존할 것이며, 어느 쪽도 완전히 승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말을 서슴없이 하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말에 알르레기 반응을 보인다. 이것이 곧 그들이 악의 편에 서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진실, 그것은 선과 악의 대립에서 인간은 어느 편에도 설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며, 이 자유의지 앞에서는 ‘신’도 멈추신다는 것이다. 그 자유의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이것은 일찌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유의지론』에서 말하고자 했던 결론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실을 가장 잘 보여준 이들이 ‘영웅’ ‘현자’ ‘성인’ ‘위인’ 등이며, 이것이 ‘소명의식’에서 나타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