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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 行由品- 6
書此偈已하니 徒衆이 總驚하야 無不嗟訝하야
各相謂言하되 奇哉라 不得以貌取人이로다
何得多時를 使他肉身菩薩이런고하더라
祖- 見, 衆人이 驚怪하시고 恐人損害하사
遂將鞋하야 擦了偈曰, 亦未見性이라하시니
衆人爲然이러라
次日에 祖- 潛至碓坊하사 見能의 腰石舂米하시고
語曰, 求道之人의 爲法忘軀함이 當如是乎인저하시고
卽問曰, 米熟也未아
慧能이 曰, 米熟이 久矣나 猶欠篩在이니다
祖- 以杖으로 擊碓三下而去어시늘
慧能이 卽會祖意하고 三鼓에 入室하니
祖- 以袈裟로 遮圍하사 不令人見케하시고
爲說金剛經하실새 至應無所住而生其心하야
慧能이 言下에 大悟一切萬法이 不離自性하고
遂啓祖言하되
何期自性이 本自淸淨이며
何期自性이 本不生滅이며
何期自性이 本自具足이며
何期自性이 本無動搖며
何期自性이 能生萬法이리까하니
***
여기서 南頓北漸(남돈북점).
수행에 있어서 남쪽은 한꺼번에 된다.
頓敎(돈교).
북쪽은 점차적으로 수행해 간다.
남쪽에는 한꺼번에 수행하는 것이지,
무슨 뭐 점차적으로 그게 어디 있느냐?
그래서 그것을 좀 부연하면
남쪽은 頓悟頓修(돈오돈수)라고 하는 말이 되고,
북쪽은 頓悟漸修(돈오점수). 이치로는 알지마는
그러나 그 업장을 녹이는 데는 漸次的(점차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돈오점수.
이런 말이 그것이 여기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서두에서 처음에 이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봤기 때문에, 마음의 돈 적인 입장을 강조를 했고,
신수스님은 마음의 점적인 입장을 강조를 했지요.
그래서 禪(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는 의례히...
남은 돈.→ 한꺼번에.
북은 점.→ 점차적으로.
사전을 보면 몰록이라고 나왔는데,
몰록이라는 말을 저도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어요.
“한꺼번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한꺼번에.
수행이라고 하는 것도 한꺼번에.
이렇게 돈오돈수.
북쪽에는 점수를 말하는데, 깨닫는 것은
이치를 깨닫는 것이니까,
그거는 한꺼번에 될 수가 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은 이렇게 하는데,
말하자면 닦는 것은 차츰차츰 닦아야 되기 때문에,
점수라고 보는 것이지요.
또 이것이 심한 경우 漸悟漸修(점오점수)
이렇게도 표현을 해요. 돈 자를 아예 빼버리고요.
그래서 禪學(선학)에 대한 어떤 책을 보던지 하면
의례히 저런 말이 나오게 되는데,
그 始原(시원)이 여기서부터 시작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수스님은 북쪽에서 점수점오.
또는 돈오점수. 자기 사상대로 교화를 폈고,
“차츰차츰 우리가 번뇌를 제거한다.”
라고 하는 것을 시종일관 그렇게 가르쳤고,
육조스님은 계속 돈오돈수를 가르쳐서
우리 마음의 兩面(양면)을
두 분의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 보였고, 또 그 양면으로 닦아가는 방법을
잘 제시해준 것입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 맞는 말인데,
“어느 건 틀렸다.” 이렇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런 입장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서
요 대목은 중요 하지요.
※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라 외우라고 했는데,
요것도 같이 외워야 돼요.
提本無樹(보리본무수)요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라
本來無一物(본래 무일물)이어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리오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진애가, 먼지가 끼겠는가?
書此偈已(서차게이)하니→
이 게송을 쓰니
徒衆(도중)이→
거기 모였던 무리들이,
總驚(총경)이라→
모두들 깜짝 놀랐지요. 글은 읽을 줄 아니까요.
얼른 보니까 대단하거든요.
본래무일물이라 얼마나 건사한 말입니까?
본래무일물 인데 하처야진애.
이 육조스님의 이말 때문에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
사람들이참 많이 씁니다. 선가에서. 절에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써서 추궁 받을 때 그때,
대답으로 하는 소리가, 변명으로 하는 소리가
“뭐 본래무일물인데 그걸 가지고 그러냐?”고...
그 뭐 본래무일물인데 그걸 가지고 썼다고
그렇게 뭐 따질 것 있냐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그렇게 하면 딱 들어맞아요. 맞기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물건 좀 썼기로서니...
도중이 총경하여
無不嗟訝(무불차아)라→
모두들 놀랐다. 의아해 했다 이 말이지요.
놀라고 의아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各相謂言(각상위언)하되→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말하기를,
奇哉(기재)라→
아~~! 대단하다. 신기하다.
不得以貌取人(부득이모취인)이로다→
부득이모취. 모양으로써 사람을 취할 것이 아니다.
육조스님은 어지간히 촌놈으로 생겼던 모양이에요.
그래 모양으로써 사람을 취할 것이 아니구나.
“아이고 저렇게 생긴 사람에게서
저런 당당한 기상과 뛰어난 안목이
저렇게 있을 수 있다니...” 하고서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아예 사람취급도 아니했던 것이지요 뭐.
何得多時(하득다시)를
使他肉身菩薩(사타육신보살)이런고하더라→
어찌하여 우리가 이렇게 오랜 세월. 8개월 동안이나
저 육신보살을 부려먹었던가?
使 자는 이럴 때, 저 육신보살을 부려먹었던가?
육신보살 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보살로 화현한 사람!
보살의 행을 하는 사람이지요.
역사적인 인물로서 보살이 되는 것은
그건 육신보살 그래요.
그 외에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이는
化顯菩薩(화현보살) 보살이 되겠지요.
祖-見, 衆人(조-견, 중인)이 驚怪(경괴)하시고→
오조스님이 이제 그런 상황을 알게 되었지요.
보니까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거예요.
“아! 이 사람이 법을 받겠다.”고, 뭐 그런 소리.
수군수군 하고요.
“아 저 신수대사 글 보다 낫다.”하고요.
그렇게 하니까 아 이거 문제가 일어나겠거든요.
그래서 恐(공)→ 염려했다.
恐人損害(공인손해)하사→
사람들이 손해를 입힐까?
노행자를 어떻게 구타를 한다든지
쫓아낸다던지 뭐 해칠까? 하는 그런 염려를 하고서,
遂將鞋(수장혜)하야→
드디어 신. 짚신을 들어가지고서,
擦了偈(찰료게)라→
문질러 버렸어. 지워 버렸어요.
그것은 신발을 가지고 게송을 지웠다.
라는 그것은 그만치 무시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
曰 亦未見性(왈 역미견성)이여→
아직 이것도 또한 견성. 성품을 보지 못한 말이다.
이렇게 오조스님이 한 마디로 딱 잘라 버리니까,
衆人爲然(중인위연)이러라→
대중들이 모두 그렇게 여기더라.
次日(차일)에→
다음 날,
그래 그걸 보고는 오조스님은
벌써 마음속에
‘아! 저 사람이 다 깨달았구나!
이제 공부 다 됐구나!’ 그렇게 여기고
기분 좋았지요. 그리고는 그 다음 날,
※
祖(조)→ 조사께서
潛至碓坊(잠지대방)하사→
방앗간에 몰래, 다른 대중들이 안 볼 때
몰래 방앗간에, 혼자 방아를 찧고 있는데
거기 떡~ 가가지고서는
見能(견능)→
보니까 혜능이
腰石舂米(요석용미)하고→
용자는 방아용자 예요. 돌을 허리에 차고
방아를 찧었다. 이것이 요석용미.
큰 절에 벽화 보면
이 그림. 혜능대사가 아직 머리도 깎지 않은 채,
행자의 모습으로, 어떤 데는 머리 깎은 것도 있고요.
몸이 가벼우니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허리에다가 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다.
쌀을 찧었다.
용자는 찧었다는 그런 뜻이지요.
쌀을 찧는 것을 보시고는
語曰(어왈),→
말해 가로대,
求道之人(구도지인)의→
구도. 도를 구하는 사람의
爲法忘軀(위법망구)함이 當如是乎(당여시호)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림이 마땅히 이래야 된다.
하~!
정말 이렇게 해야 법을 구하는 것이지,
빈들빈들 놀기나 하고 그래 가지고
뭘 법을 구한다고 하겠나?
이런 뜻으로 칭찬을 했지요. 그리고는
卽問曰,(즉문왈)→
곧 물어 가로대,
米熟也未(미숙야미)아→
(재미있는 말이예요.) 쌀이 다 익었느냐?
이건 찧어졌느냐? 이런 말이지요.
“쌀이 다 찧어졌느냐?” 그렇게 물으니까
慧能(혜능)이 曰(왈),→
혜능이 말하기를,
[지금 방앗간에 쌀이 찧어졌느냐
안 찧어졌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 말의 뜻이 중요한 겁니다.]
米熟(미숙)이 久矣(구의)나→
쌀이 찧어진 것은 오래 됐어요. 다 찧어졌어요.
그런데,
猶欠篩在(유흠사재)이니다→
[이것은 오히려 요것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재. ←
키질. 쌀은 다 찧어졌는데, 그 키질을 해가지고
쌀하고 겨 하고 분리하는 일. 그것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認可(인가)만 남았습니다.” 그 말입니다.
내 공부는 다 됐는데,
“쌀이 다 찧어졌느냐?” 하는 것은,
“공부 다 됐느냐?”그런 말이고,
“쌀은 다 찧어졌는데, 키질을 못했습니다.”
그러니 공부는 다 됐는데
어느 누가 와서 인가를 안 해준다. 이겁니다.
그러니 스님이 나 좀 인가해주면 좋겠다. 이겁니다.
한 번 점검 좀 해 달라 이겁니다.
키질 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점검 아니겠어요?
쌀이 다 찧어졌으면, 찧어진 것을,
쌀만 뽑아내는 일이 키질이니까요.
그러니까
“좋다. 내가 점검 해주겠다.”
하는 그런 속뜻이 담겨 있지요.
祖(조)가→ 오조가
以杖(이장)으로→ 주장자로써
擊碓三下而去(격대삼하이거)어시늘→
격대삼하. 방아를 탁. 탁. 탁. 세 번 때리고 가 버렸어요.
그것은 “三更(삼경)치거든 오라.” 이 뜻이지요.
慧能(혜능)이 卽會祖意(즉회조의)하고→
혜능이 조사의 뜻을 곧 알아차렸지요.
이럴 때는 會자는 알 회자입니다.
조사의 뜻을 곧 알아차리고,
三鼓(삼고)에→ 북을 세 번 치면,
삼경에 북을 세 번 치는데, 그 때에
入室(입실)하니→
입실을 했어요. 그 때 조실 방을 찾아갔어요. 그러니
祖-以袈裟(조-이가사)로→
오조스님이 가사로써
遮圍(차위)라→
가사로써 문을 딱 가리고,
가사로써 문을 가려 놓으면
불빛이 아니 새어나가거든요.
어쨌든 삼경 치면 무조건 불을 꺼요.
개인 방은 소등하게 돼있어요.
요즘은 전기가 하도 흔하니까
그런 일이 없는데,
큰 방에는 지금도 무조건 꺼요.
큰방생활 하는 데는...
개인 방은 그런 걸 좀 봐주지요.
가사로써 불빛을 딱 가려가지고,
不令人見(불령인견)케하시고→
사람으로 못 보게 했다.
예를 들어서 밖에 누가 나왔다가,
조실방에 삼경 친 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사람그림자가 보이고, 사람소리가 나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까?
조실은
公人(공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대중들이 와서
확인할 수가 있다고요. 그러다가 들키면 곤란하지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못 보게 하고는,
爲說金剛經(위설금강경)하실새→
그를 위해서 金剛經을 다시 정식으로 설해주는 거예요.
금강경을 쭉 설해주는데,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하니
至應無所住而生其心(지응무소주이생기심)하야→
응무소주이생기 이라고 하는
그 대목에 이르렀더라. 거기에 이르러서
慧能(혜능)이 言下(언하)에
大悟(대오)라→
크게 깨달았다. 무엇을 크게 깨달았는가하면,
一切萬法(일체만법)이 不離自性(불리자성)이라→
모든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마음의 범위와 마음의 능력을
確撤大悟(확철대오) 한 것이지요. 활연히 깨달았다.
應無所住而生其心.
글자대로 해석하면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그리고 이것을 또 달리
바꾸어서 말 하면, 마음은 끝없이. 끝없이 흘러간다.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데,
그 마음은 머물지 않는 존재니까,
머물러 두지 말라. 이런 의미도 되지요.
또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은, 부단히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뜻도 되고요.
글자의 한도 안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마음에다 비추어 봐야 돼요.
心不觀照(심불관조)면
看經無益(간경무익)이라 그런 말이 있어요.
마음에다 아니 비추어 보면,
경을 봐야 이익이 없다.
淸凉宗師(청량종사)의
十種無益(십종무익) 이라고 하는 그런 글 속에 있는데,
불교는 뭐니 뭐니 해도
전부 마음의 도리를 설명한 것이고,
마음의 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요.
그래서 특히 조사스님들의
이런 心要法門(심요법문).
이런 것을 심요법문이라고 그래요.
심요법문은
우리 마음에다 가만히 비추어 봐야 돼요.
생각하기 싫은 사람은
이 불교공부 잘 안 된다고요.
물론 思量分別(사량분별)로써 공부가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思惟(사유). 瞑想(명상). 불교는
이 것이 참 필요해요.
그래서 가만히 마음에다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착착 맞아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앞에서 本來 無一物(본래무일물)인데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랴.
그런 것들도, 이 마음의 세계는 ??????????
一切萬法(일체만법)이
不離自性(불리자성)이라→
일체만법이 자성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그러면,
우리가 알든 모르든,
알고 있는 것이든 모르고 있는 것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내 자성 안에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 자성의 크기는 저 끝 간 데 없는
하늘. 저 우주를 다 포함하고도 남는 그런 크기지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수억 광년 끝에 있는 벌들마저도
결국은 불리자성입니다.
“내 자성을 떠나지 않고 있다.”
“내 자성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뜻이니까요. 그러면
이 자성의 그 크기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法性(법성).
自性(자성).
佛性(불성).
비슷한 그런 낱말들이 많은데...
※
遂啓祖言(수계조언)→
드디어 조사에게 펴서 말한다. 열어서 말한다.
여기서부터 오도송 입니다.
육조스님의 오도송! 하기자성 이라는 말부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自淸淨(본자청정)이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不生滅(본불생멸)이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自具足(본자구족)이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無動搖(본무동요)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能生萬法(능생만법)이리까→
여기까지가 육조스님의 첫 법문이고, 오도송이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조사에게 자기의 깨달음을 펴서.
열어서 말하는데,
하기자성 본자청정 여덟 자씩 그렇게 되었지요.
넉자 게송으로...
何期自性(하기자성)이→
어찌 내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이 기약할 期(기)자를 그렇게 이해하면 돼요.
어찌 내가 알았겠는가?
내가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하는데 대해서,
정말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뜻이에요.
※
本自淸淨(본자청정)이며→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어찌 내가 알았겠는가?
언제 그런 것을 염두에나 두었겠는가?
추호라도 그런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자성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더라. 뜻은 그래요.
새기려면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알았겠으며,"
어떤 해석에는
"기약했겠으며" 했는데 기약이라는 해석은 안 맞지요.
글자대로 해석하면 그러는데 그것은 안 맞아요.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줄 알았겠으며,"
何期自性(하기자성)이→ 어찌 자성이
※
本不生滅(본불생멸)이며→
본래 생멸이 아닌 줄을,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으며,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혀 내가 상상도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천민 출신이고 그 당시로서는...
옛날 조상이야 어쨌든 간에 자기로서는
아주 천한 백성으로서, 일자무식꾼에다가
나무장사나 해서 겨우 연명해가던 사람이고,
또 그렇게 살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 자질구레한걸
가지고 시시비비 하고, 옳다 그르다 하고,
온갖 부정이, 시원찮은 부정이지만
그런 것들이 막 그냥 저질러지고,
마음속에 그런 것들은
하나의 번뇌와 때와 악으로 있다고 하는 사실을
늘 보아왔고, 그런 세상사에 찌들려 왔는데,
알고 보니까 아니에요
알고 보니까 우리 자성이 본래 깨끗한 존재예요.
너무나도 청정한 존재거든요.
우리 인간은 뭐 그 더럽고 부정부패 투성이고,
그냥 형편 없다고 하는 것만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또 그런 사회에서 살았고요.
안다는 것이 그것뿐이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아니에요, 전혀 아니더라.
우리 自性(자성)이 本自淸淨(본자청정)이예요.
그래 대승계 보살계 같은 데서도 이야기를 하면,
제대로 해석해 놓은데 보면 그래요.
“뭘 하지 마라. 不殺生(불살생). 살생하지 마라.”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인즉슨.
그 자성 자리엔 살생이라고 하는 악이
도대체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살생이라는 악이 없어요. 그렇게 해석을 해요.
그 다음에 우리의 생각의 동요. 변화는
얼마나 참 변화무쌍합니까?
그야말로 조석지변이지요.
그것이 生滅(생멸)인데,
여기는 생멸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육조스님은 생멸하지 않는 면을 보는 거예요.
不生佛滅(불생불멸)의 面(면)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本不生滅(본불생멸)이라
본래 생멸하지 않는 면! 그러니까
“생사가 없다.” 하는 것이 된 것이지요.
생사가 없는 것이 본불생멸이고,
생사가 없으면 生死解脫(생사해탈)이지요.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생멸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이 아닌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自具足(본자구족)이며→
이 사람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어요?
참 찢어지게 가난 하게 살았는데 아니에요.
모든 것을 다 구족 하고 있어요.
우리 자성 속에 없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성에 본래 구족하고,
모든 만행만덕을 다 구족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어찌 그동안 알았겠는가?
깨닫고 보니까 그렇더라 이것이지요.
깨닫고 보니까
그런 것을 내가 그동안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꿈엔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
하기자성이 본자구족.
우리 자성을 이야기 하고,
불교의 생명인 마음을 이야기할 때,
육조스님의 이 법문이 참 좋아요.
마음의 여러 가지 좋은 면들을,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 했던
좋은 면들을 그대로 들어내 보였어요.
이 분은
자기출신이 그렇고, 또 무식꾼이고,
또 천하게 살았고, 없이 살았고,
그리고 저 밑바닥에서 그냥 시골 사람들이
막 사는 대로 그렇게 살던 사람으로서,
이것이 거기에서부터 표현된 것이지요.
청정 이라는
말이나 본불생멸.
이것은 일반적으로 다 쓰는 말이지만,
본자구족 이라는 말이 더욱더 그렇지요.
모든 만행만덕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자기는 너무 가난하게, 너무 없이,
너무 서글프게 살아온 거예요.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하고, 그런데 아니에요.
알고 보니까 내 자성 속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는데,
내가 그런 사실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無動搖(본무동요)라→
사람의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그런데 동요하는 그런 이면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런 세계가 있더라.
본무동요.
본래 동요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何期自性(하기자성)이
能生萬法(능생만법)→
모든 만법을 전부 내 자성이 만들어 낸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이지요.
일체를 오직마음이 만들어 낸다 하는 사실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이렇게 자기 깨달음의 소감을
스승인 오조스님에게 다 피력을 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