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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강 - 般若品- 10
世人이 若修道하면 一切盡不妨하나니
常自見己過하야 與道卽相當하
色類自有道라 各不相妨惱어늘
離道別 覓道하야 終身不見道하고
波波度一生하야 到頭還自懊로다
欲得見眞道인댄 行正이 卽是道니
自若無道心이면 闇行不見道하리라
若眞修道人인댄 不見世間過하나니
若見他人非하면 自非- 却是左니라
他非我不非라면 我非- 自有過니
但自却非心하야 打除煩惱破하고
憎愛에 不關心코서 長伸兩脚臥하라
欲擬化他人인댄 自須有方便하니
勿令彼有疑하면 卽是自性現하리라
法이 在世間하야 不離世間覺이니
離世覓菩堤하면 恰似求免角이니라
正見은 名出世요 邪見은 是世間인데
邪正을 盡打却하면 菩提性宛然하리라
此頌은 是頓敎며 亦名大法船이니
迷聞經累劫이나 悟則刹那間이니라
師- 復曰,
今大梵寺에 說此頓敎하니
普願法界衆生이 言下에 見性成佛이로라
時에 韋使君이 與官僚道俗으로
聞師所說하고 無不省悟하야
一時에 作禮하고 皆嘆善哉라
何其嶺南에 有佛出世리요하니라
***
世人(세인)이 若修道(약수도)하면
一切盡不妨(일체진불방)하나니→
세상 사람이 만약에 도를 닦을 것 같으면
일체가 방해 될 것이 없나니.
여기에 이 법석에서는 뒤에 나오지마는,
여기 僧(승). 尼(니). 道(도). 俗(속).
처음에 刺史(자사)가 법을 청해서,
이 법문하는 자리에는 많은 일반신도들이 함께 있어요.
특히 법석을 마련한 것이 그 당시 자사이고
그런 이들이 절을 세우고 또 법석을 마련해서
스님을 청하고, 이렇게 해서 불교가 흥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육조스님의 어떤 법이 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법을 청한 주인이 거사이기 때문에
거사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인이 수도를 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이 방해롭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세상에 산다고 해서 자기가
“도 닦는데 장애가 된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겁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일체진불방.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말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常自見己過(상자견기과)하야→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봐.
그러면 자기의 허물을 늘 보고,
자기의 허물에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이 그렇게 산다면,
與道卽相當(여도즉상당)이예요.→
도하고 그대로 바로 맞아 떨어져요.
상당. 서로 맞아 떨어진다. 이겁니다.
뭐 도가 별거냐 이것이지요.
세인이 약수도하는데 일체진불방이예요.
세상에 있다고 해서 전혀 도 닦는데
방해 될 일이 없다. 어떻게 하느냐?
항상 자기허물만 봐요. 그러면 바로
도 하고 맞아 떨어딘다.
與道卽相當
서로 맞아 떨어질 것 같으면,
色類自有道(색류자유도)라.→
그러면 색류에 저절로 도가 있다.
색류라고 하는 것은 일체사물을
불교에서는 色類라고 그러지요.
일체사물이, 온 삼라만상 전체가
그대로 도라는 거예요. 거기에
도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사물들이,
各不相妨惱(각불상방뇌)예요.→
나를 어떻게 괴롭히지 아니해요.
언제나 내 허물만 보는데,
옆에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이 나한테는 하등의 고뇌로울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방해 하거나
또는 괴롭힐 일이 아니라는 그 말 입니다.
各不相妨惱.
방해 되거나 괴로워 할 일이 아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정치를 어떻게 하고,
또 어떤 사물이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그것이 방해되고 괴로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離道別覓道(이도별멱도)하야→
도를 떠나서 도를 따로 찾을 것 같으면,
終身不見道(종신불견도)라→
이것이 도인데, 이렇게 사는 것이 도인데,
거기에서 그 도를 떠나서 도를 따로 찾는다면,
그거는 종신토록 도를 못 본다. 그래서
波波度一生(파파도일생)하야→
여기 파파라고 하는 것은 아주 허둥지둥
아주 바쁘게 정신없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어떤 그런 사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정신없이 일생을 지내 보내서.
다 흘려보내가지고,
度= 건너가 버린다. 지나가버린다. 이 말입니다.
정신없이 일생이 지나가서,
到頭(도두)에
還自懊(환자오)로다→
도두. 머리에 이르러서는, “죽음에 이르러서”
이런 말입니다. 죽는 마당에 이르러가지고
그 때는 “하, 내가 뭐 했지?
저까짓 것 회사해 놓으면 뭐 하나?”
뭘 해 놓은들 그때 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사실은 어지간히
좀 철이 든 사람입니다.
뉘우칠 줄도 모르고, 그냥 가 버리는 겁니다.
뉘우칠 줄도 모르고 그냥 가 버린다고요.
그 정신없이 그렇게 사는 줄...
온통 세상이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냥
거기에 떠 밀려가지고 자기도 그렇게 살았지요.
그것도 또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죄가 아니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마는 그 사람의 인생은
누구도 어찌 다른 시람이 대신 못하니까 어떻게요?
“아이고 이것은 내 죄가 아니고 세상이 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세상이 자기인생 책임 안 져주거든요.
세상은 자기인생 책임 안 져주니까
그것 뭐 그때 가서 세상을 탓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지요. 여기 육조스님의
정신대로라면, 겨우 그저 연명할 수 있을
만치 생명유지 겨우겨우 유지 할 수 있을
만치만 돼 있으면, 어쨌든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지고 도 닦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그런 이야기지요.
세상이 자꾸 발전하면
자기 시간이 많아야 할 텐데,
그게 안 되는 것을 보면 그것 참 이상해요.
자꾸 좋은 세상이 될수록,
발달된 세상이 될수록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해야 되는데...
그 나머지는 놀아도 충분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요.
한 시간이나 두 시간만 일하고 그 나머지
시간 전부 참선을 하던지 경을 보던지...
잘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뭐 잘은 모르지마는,
어쨌든 시간을 좀 많이 내는 방향으로
생각을 좀 해야 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到頭(도두)에
還自懊(환자오)라→
죽음의 마당에 떡 이르러 가지고서는
도리어 스스로 고뇌하는 것이지요.
欲得見眞道(욕득견진도)인댄→
진도. 참 도를 보고자 할 진댄,
行正(행정)이
卽是道((즉시도)니라→ 행이 바른 것이 도다.
“행이 바른 것이 그것이 즉시 도다.”
여기서 “행이 바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사람 도 닦는데 아무런 방해가 안 된다.
”그래놓고 “항상 자기허물 보는 것”
그 자기허물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그 허물이라고 하는 것도 ‘내가 죄 지었나?
젠장 내 허물 보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
내가 뭐 죄 지었나? 내 허물이 뭐 있노?’
벌써 이것이 허물이지요. 그것도 수행의 차원에서
본다면 수행 못하는 것 보다 더 큰 허물이 어디
있겠어요? 뭐 어디 가서 나쁜 일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요. 나쁜 짓 했다는 뜻이 아니예요.
인생난득.
사람의 몸을 받기 어려운 것을 겨우겨우
몇 겁을 돌다가 받아 가지고서, 그리고
또 다행히 부처님 법 만났는데... 이건
순전히 저 보고 하는 소리예요. 여러분들에게
하는 소리 아닙니다. ㅎㅎㅎㅎㅎㅎ
열심히 안 한다면 그 보다 사실은 더 큰 허물이
어디 있겠어요?
맨날 말은
人生難得(인생난득)
佛法難逢(불법난봉)이라고 자꾸 하면서...
行正. 행이 바른 것이 그것이 즉시 도다.
自若無道心(자약무도심)이면→
스스로 만약에 도심이 없다면,
闇行不見道(암행불견도)하리라→
어둡게 행해서 도를 못볼 것이다.
도심이 있어야 돼요. 이 도심!
道에 대한관심! 이 도라고 하는 것은
따로 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삶의 어떤 실상! 인생이라고 하는 삶의 문제!
사는 방법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한 어떤 관심!
그것이 道이지요. 그것이 道心이지요.
불교에서의 표현은 우리가 좀 약간 제대로
번역을 못해서 그런지, 거리가 좀 있고 요즘
인도 성자들이 쓴 책 보면. “나는 누구인가?”
거 얼마나 멋있어요? 그 도심이라고 하는 말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道心을 얼마나 잘 표현한 말입니까?
나에 대한. 내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갖는 그 자세!
그자세가 바로 道心이거든요.
若眞修道人(약진수도인)인댄→
만약에 참다운 수도인 이라면
不見世間過(불견세간과)하나니→
세간의 허물을 안 보나니, 나 이외의
모든 것은 전부 세상이거든요.
나 이외의 모든 것은 전부 세상이다.
세상의 허물을 안 본다. 진짜 수도인은
세상의 허물을 볼 시간이 없어요.
우리가 道 놔두고 그냥 일상 생활하는 데도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말씀이지요.
若見他人非(약견타인비)하면→
만약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기 시작할 것 같으면 어떻게요?
우리가 그러지요? 손가락 하나가
남을 향하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기를 향한다. 아주 딱 그 말이거든요.
若見他人非하면
만약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기 시작하면,
自非却是左(자비각시좌)니라→
자기허물이 도리어 옆에 딱 와있어요.
그러니까 손가락 하나는 남을 향하지만
네 개는 자기를 향한다. 이겁니다.
他非我不非(타비아불비)라→
다른 사람은 잘못이 있고,
나는 잘못이 없다 이렇게 하면,
我非自有過(아비자유과)니→
나의 잘못이 저절로 허물이 된다.
但自却非心(단자각비심)하야→
다만 스스로 비심. 그릇된 마음.
잘못된 마음을 물리친다.
(却 :여기서는 물리칠 각자로 봐야 돼요)
비심 을 물리쳐서
打除煩惱破(타제번뇌파)하고→
번뇌를 타제. 쳐서 제거해서 깨뜨려 버리고,
憎愛(증애)에 不關心(불관심)코서→
미움과 사랑에 마음을 관계하지 말고,
長伸兩脚臥(장신양각와)하라→
길게 두 다리 뻗고 누워 자라.
우리는 사실은 누가 잘 했느니 누가 옳으니
그르느니, 계속 그거지요 뭐. 눈만 뜨면
그저 잘 잘못. 그저 눈만 뜨면 잘 잘못. 그겁니다.
그것이 번뇌예요. 눈만 뜨면 잘 잘못. 잘한 놈은
사랑스럽고 못한 놈은 밉고... 그저 눈만 뜨면 그것인데,
그것을
육조스님께서 여기서 잘 지적하고, 이것이
아주 길고긴 반야품 끝맺음을 하면서,
아주 멋진 무상송이라는 게송을 턱 하고
그리고 도를 너무 고차원적으로 했다고
느껴졌던지, 반야를 좀 더 거리감 있게 설명 했다고
느껴졌는지, 여기에서는 세상사람. 세속인이
도 닦는데 하등의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하면서
사실은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 같으면서도,
일상적인 훈계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깊이 있는 가르침이예요.
“남의 허물 보지마라.”
그 허물. 잘 잘못을 보다 보니까
증애심이 생기고 그럽니다.
증애심이 만약에 없다면 두 다리 뻗고
아주 편안히 잠잘 것 아닌가?
長伸兩脚臥하라.
欲擬化他人(욕의화타인)인댄→
다른 사람을 교화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감화를 주고자 할 진댄,
自須有方便(자수유방편)하나니→
스스로 모름지기 방편이 있어야 돼요
勿令彼有疑(물영피유의)하면→
저 사람에게 의심이 있지 않게 하려면.
의심이 있게 하지 않으려면,
卽是自性現(즉시자성현)하리라→
곧 자기의 성품이 나타나리라.
그러니까 의심이 다 떨어지면 이 말이지요.
佛法(불법)이 在世間(재세간)하야
不離世間覺(불리세간각)이니→
이런 말도 법을 청한 자사. 그 사람에게...
화엄경에도 있는 이치이고,
법화경에도 있는 이치이고
이것은 유명한 말입니다.
불법이 재세간하야 불리세간각이다.→
불법은 세간에 있는 겁니다.
연꽃은 더러운 늪 속에 있지,
늪을 떠나서 연꽃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지요. 연꽃이 만약에 불법이라면
그 불법의 根柢(근저). 뿌리는 세간이다.
세상이지요. 연꽃의 뿌리는 늪에 뿌리를
내리고 있듯이...
불법이 연꽃이라면
불법의 뿌리는 세상이다.
佛法이 在世間해서 不離世間覺이예요.→
세간을 떠나지 않고 깨닫는다 이겁니다.
이것을 또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세간의 깨달음을 떠나지 않는다.’
‘世間의 覺을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도 해석합니다.
그래도 좋지요.
離世覓菩堤(이세멱보리)면→
세상을 떠나서 보리를.
깨달음을 만약에 찾는다면,
恰似求免角(흡사구토각)이니라→
兎(토)자라야 돼요 兎.
免(면)자로 되어 있는데, 토끼 뿔이다
이 말입니다. 토끼 뿔!
토끼에 뿔 있는 것 봤어요?
없는 말을 깨달은 사람들은
잘도 지어내요 가만히 보면...
그저 말 지어내는데 명수예요.
거북이 털. 거북이에게 무슨 털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세상 사람들은 전혀 상상도
못하는 말을 깨달은 사람들은 없는 것을
지어내 가지고는 이렇게 표현을
적절하게 하는 것이지요.
“세상을 떠나서 보리를 찾는 것은
마치 토끼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 말입니다.
그건 뭐 아예 없다는 겁니다.
아예 없는 것.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서
깨달음을 구하는 일은 아예 안 되는 일이다.
이겁니다. “아예 당치도 않는 일이다.”
正見(정견)은 名出世(명출세)요.→
바른 소견은 이름이 “출세” 라고 하고,
出世. 그것이 출세입니다. 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 출세입니다. 장관 돼가지고
걸려 들어가는 것이 출세가 아니고요.
바른 소견! 인생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고 사는 그 사람이 출세입니다.
邪見(사견)이 是世間(시세간)이다→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살면
그것은 세속에 사는 것이고,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살면
그것은 출세다 이겁니다.
邪(사)와
正(정)을
盡打却(진타각)하면→
사와 정을 모두 다 쳐서 물리칠 것 같으면,
菩提性宛然(보리성완연)하리라.→
깨달음의 성품이 완연 해질것이다.
뚜렷이 들어난다 이겁니다.
此頌(차송)은 是頓敎(시돈교)며
亦名大法船(역명대법선)이니→
대법선.
(이거 아주 불명 좋네요. 얼른 주우세요. 누가...)
大法船이라. 이 게송은 돈교다. 이겁니다.
한꺼번에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가르침!
그것이 頓敎(돈교)지요. 이름이 “큰 진리의 배다.”
“큰 법의 배다.”
迷聞經累劫(미문경누겁)이나→
미혹해서 듣는다면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지만,
悟則刹那間(오즉찰라간)이니라→
깨달음은 순간이다 이겁니다.
깨닫기만 하면, 금방. 금방 바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미혹하면, 누겁이 지나지만, 깨닫는 것은
찰나간이다.”이렇게 해서
[無相頌] 사구 게
네 구절 씩 네 구절 씩 해서
상당이 여러 개가 됩니다.
한번 다시 볼까요?
偈頌(게송)! 韻(운)이 어지간히 있어요.
밑에 보면: (23강)
[說通及心通(설통급심통)하면이지요?
[如日處虛空(여일처허공)하나니]이지요?
通. 空.
그 옆에
[唯傳見性法(유전견성법)하야
出世破邪宗(출세파사종)이로다.]宗.
그 위에 셋째 구절은 안 보니까요.
[法卽無頓漸(법즉무돈점)이언만
迷悟有遲疾(미오유지질)하나니]
[只此見性門(지차견성문)을
愚人(우인) 不可悉(불가실)이로다]
疾. 悉. 밑에 두자.
위에 것은 생략 하고요. 그러니까
운을 壓韻(압운)을 했어요. 그 다음에
[卽雖萬般(설즉수만반)이나
合理還歸一(합리환귀일)하나니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하라]
一. 日. 그것도 운이고요.
[邪來煩惱至(사래번뇌지)요
正來煩惱除(정래번뇌제)인데
俱不用(구불용)하면
淸淨至無餘(청정지무여)하리라.]
除. 餘. 이것도 운 이예요.
[菩提本自性(보리본자성)은
起心卽是妄(기심즉시망)이라
淨心(정심)이在妄中(재망중)하니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하라]
妄. 障. 운이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一切盡不妨(일체진불방)하나니
常自見己過(상자견기과)하야
與道卽相當(여도즉상당)하면]
妨. 當.
[色類自有道(색류자유도)라.
各不相妨惱(각불상방뇌)어늘
離道別覓道(이도별멱도)하야
終身不見道(종신불견도)라]
惱. 道.
[波波度一生(파파도일생)하야
到頭(도두)에 還自懊(환자오)로다]
[欲得見眞道(욕득견진도)인댄]
懊. 道.
[行正(행정)이
卽是道(즉시도)니라
自若無道心(자약무도심)이면
闇行不見道(암행불견도)하리라
[若眞修道人(약진수도인)인댄
不見世間過(불견세간과)하나니]
道. 過.
[若見他人非(약견타인비)하면
自非却是左(자비각시좌)니라
[他非我不非(타비아불비)라
我非自有過(아비자유과)니]
左. 過.
[但自却非心(단자각비심)하야
打除煩惱破(타제번뇌파)하고
憎愛(증애)에 不關心(불관심)코서]
[長伸兩脚臥(장신양각와)하라]
破. 臥.
[欲擬化他人(욕의화타인)인댄
自須有方便(자수유방편)하나니] [
勿令彼有疑(물영피유의)하면
卽是自性現(즉시자성현)하리라]
便. 現. 밑에 음이 같지 않습니까?
[佛法(불법)이 在世間(재세간)하야
不離世間覺(불리세각)이니]
[離世覓菩堤(이세멱보리)면
恰似求免角(흡사구토각)이니라]
覺. 角. 세간 각 하고 구토각하고.
覺. 角.
[邪見(사견)이 是世間(시세간)이다
邪(사)와 正(정)을
盡打却(진타각)하면]
[菩提性宛然(보리성완연)하리라.]
間. 然. 간이나 연이나 운이 같은 거예요.
[此頌(차송)은 是頓敎(시돈교)며
亦名大法船(역명대법선)이니]
[迷聞經累劫(미문경누겁)이나
悟則刹那間(오즉찰라간)이니라]
船. 間.
대법선. 찰라간. 밑에 토씨가 같거나
모음이 같거나 우리하고 똑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거의 비슷해요. 거의 한 80% 는 같습니다.
우리 음이나 중국 음이나요. 그렇게 운 까지
이렇게 맞춰가면서 게송이 되어졌다하고,
이 무상송에 대해서 아주 좋은 평이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게송이지요.
師復曰(사부왈)→ 육조스님이 다시 말하기를,
今大梵寺(금어대범사)에→ 지금 대범사에서
說此頓敎(설차돈교)하니→ 이 돈교를 설하니
普願法界衆生(보원법계중생)이→ 널리 원하오니
법계의 중생들이
言下(언하)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見性成佛(견성성불)이로다.→ 견성성불이로다.
이것은
어떤 차원에서 견성성불 했다는 뜻도 아니고,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보원하니까
널리 원하옵노니 법계중생들이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견성성불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축원하는 형식이지요.
그렇게 법문이 끝났어요.
時(시)에
韋使君(위사군)이→ 위 자사지요.
위사군이
與官僚道俗(여관료도속)으로→ 관료도속으로 더불어
聞師所說(문사소설)하고→
스님이 설하신바 설법을 듣고는,
無不省悟(무불성오)하야→
다 그 나름대로 성오한바가 있다.
살필 성. 깨달을 오. 이랬기 때문에...
불교에서 깨달음을
“성오”라. 이렇게 표현합니다. “살폈다.”
우리가 뭘 “반성했다.” 이럴 때도 이렇게 쓰지요.
그 나름대로 깊이 깨달은 이도 있겠고,
조금 그래도 뭔가 자기 허물 보지 말고
남의허물 봐라. 또 남의허물 보지 말고,
자기 허물만 봐라. 그런 허물의 문제.
사실 우리가 무심코 지내면서 매일 범하는 일들이지요.
남의 잘못만 자꾸 살피는 그것은 업이 되어있어요.
어지간한 중생은 그 업. 다 가지고 있어요.
보통 우리가 자기 업은 잊어버리고
“저 사람은 맨날 남의허물만 봐”
이런다고요. 그럼 그거는 허물이 아닐까?
그렇게 지적하는 그것도 이미 허물입니다.
그런 정도로 무심코 이미 우리는 그런 허물에
젖어있다는 것입니다. 좀 심한 사람도 있지요
있기는...
無不省悟(무불성오)하야
一時(일시)에 作禮(작례)하고→
일시에 모두 예배를 드리고서는,
皆嘆善哉(개탄선재)라→ 야~! 참 훌륭하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두 번째 법문이거든요.
처음에 행유품. 당신이 걸어온 길을 쭉
소개한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반야품”해가지고
제대로 된 법문을 여기에 반야품 에서 한 번
제대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중들이
뭐라고 탄식을 했는가 하면,
何其嶺南(하기영남)에
有佛出世(유불출세)리요→ 이렇게 했어요.
이 영남. 그 영남땅 이라고 하는 곳은 남쪽에
무지렁이들이 산다. 그래 가지고 촌놈들.
아주 무식한 촌놈들이 산다. 그런데서
뭐 인간 같은게 나오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곳이었어요. 원래 중국 사람들은 변방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잖아요. 그렇게 했는데
그 영남 땅에서 어떻게 부처님이 출세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기는 어찌 기약이나 했겠는가? 그런 말입니다.
영남에서 부처님이 출세하리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기약이나 했겠는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영남 땅에서 부처님이 나오셨다 이거예요.
이 법문을 듣고 그렇게 아주 모두들 탄복을 했다고
하는 대중들의 소감까지도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