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Hawaii, 가장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 미국 대학에서의 Workshop, 이러한 나의 바램이 용옥 장학 문화재단의 덕택으로 현실로 다가 왔다.
그곳에 가게 된다는 통지를 받고 준비를 하던 중 국가 경제위기로 “용옥 97-38(‘97. 12. 1) 중등영어교사 해외연수 중지에 따른 협조 요청” 공문으로 해외여행 중지 등의 예상 밖의 상황 발생으로, 나의 꿈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용옥 제98-20호(’98. 9월 중순) ’98중등교원 해외연수 실시” 에 따른 가정통신문이 왔으나, 반신 반의 하며 바쁜 학교일정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던 중 “용옥98-40호 ‘98년도 해외연수 교사 출국일정 확정” 에 따른 업무연락으로;
출국: ’98. 1. 4(월) 19:30 대한항공 051편.
귀국: ‘99. 2. 1(월) 16:00 대한항공 052편. 그리고 탑승수속에 유념하라는 소식이었다. 그래도 해외연수 중지는 계속되고 있었기에 “정말 내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나에게 “학무81842-52(’98. 11. 28) 공무 국외여행 허가” 공문이 (도)교육청에서 내려왔다. “아! 이번에는 정말로 가는가 보다” 고 생각하니 바쁜 일과 중에도, 그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다.
계룡대 전통매장에 가서 Home Stay, 방문학교 선생님이나 학생들, 하와이 대학에서의 강의해 주시는 교수님들의 선물을 전통적인 우리 민속품인 등잔, 전통 결혼식, 농악놀이, 신랑각시, 그리고 윷 1세트를 구입했고, 그밖에 필름, 반찬준비 등 필요한 생활용품 등을 구입했다. 그 밖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마음만 급하지 학교 일정에 쫓기어 시간만 보내며 방학을 맞았다.
방학은 했어도 계속되는 보충수업, 부장근무, 숙직 과 연말의 바쁜 분위기 등으로 12월 31일 송년의 마지막 밤 숙직을 끝으로 새해를 맞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후 자동차를 집에두고 버스로 집에 와서, 밤에 짐을 꾸렸다.
한 달을 생활할 여름옷이며, 반찬 류(쌀, 라면, 김치 통, 고추장, 김), 선물 류 등을 꾸리니, 큰 가방이 두 개, 등 가방이 하나로 가득했다.
잠을 이루려 했으나 설레 임 과 긴장감으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에 미주 연수 단으로 캐나다 와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건만, 한달 간 workshop에 참가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작용한 것 같았다.
아침식사 후 아이들과 함께 모여 하와이 체류 중, 나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기도가 끝난 후, 나 혼자 나가려 하는데, 모두가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 나온다.
아내는 다리가 안 좋은 듯 하고, 또 감기 몸살 기운까지 있어 걱정을 안고 떠나야만 했다. 아이들과 작별한 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역전에서 10시 36분 기차를 기다리는데, 기어이 지현이와 병준이가 걸어서 대합실까지 나왔다.
그 추운 날씨에 그들이 안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아내의 서울대학병원 진찰일정에 맞추어 열차표를 예매해서 지현이 한테 주고, 탑승 구역으로 나왔는데, 그들이 대합실 밖으로 나와 둘이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은 왜인지!
기차를 타고 가며 조용히 눈을 감고 상념에 잠겼다. 가족들, 부모형제들, 가정문제들, 학교일 들 등, 모두가 잠깐씩 떠오르곤 사라졌다.
그리고 미주 여행 때의 일들, 그 끝없이 펼쳐지던 대자연의 축복 받은 국가, 다시 아내의 아픈 모습, 투병과정, 나오는데 어려워 하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 내가 한달을 비우는 동안 잘, 견뎌낼 수 있을련지, 걱정을 크게 안고 창밖을 보니, 우리 귀여운 병준, 지현, 지영이 모습이 멀리서, 또 가까이서 그 영상이 되어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기차는 벌써 수원을 넘어서고 있었고, 유난히도 김밥 파는 아저씨가 자주 통로로 왕래하고 있었다.
이따금 위에 올려놓은 큰 가방과 무릎에 올려 놓은 backpack을 꼭 끌어 안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탄열차(무궁화호)는 1월 4일 (월) 13:30 pm에 영등포 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서 다시 지하철5호선을 타야 했으므로 가방2개를 끌고, 들면서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려야 했는데 대단히 힘들었다.
국철을 타고 1구간인 신길 지하도는 깨끗한 편이었으나, 계단이 많아 바뀌는 사용 할 수 없었다. 가방을 들고 가야 했는데 장애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이것도 너무나 감사하다.
지하철을 타니 사람들이 별로 없고 조용했다. 바람이 차고 추웠는데 이제는 그곳도 온화하다. 이마에 땀이 흐를 양 좀 힘들었나 보다. 우리의 수많은 장애인들은 어떻게 나들이를 하는지 그들을 생각하니 우리 시설들이 그들을 위한 시설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날까, 정말 우리 현실이 안탑깝다. 신길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13번째에 김포공항에 내리니 지하도가 깨끗하고 길게 공항 대합실로 뻗어 있어, 짐을 끌고 가는데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공항 2청사 2층 신한은행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어, 우선 장소를 확인하고 나니 시간이 2시 50분경 이었다. 우선 식사도 하고 시간을 보내야 했으나 짐이 있어 다니기가 불편하였다. 그래서 3시에 2층에 있는 화물보관소에 가방 2개를 보관시켰는데 3,100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4층에 있는 장터국수에서 우동을 먹었다. 청사 안에 있어서 너무 비쌀 것 같아, Hotel 에서 경영하는 식당에는 가지 못하고, 장터 국수를 먹었는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논산에서 만든 KT카드를 시험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3층에 있는 한국통신 사무소에서 재 신청하여 발급 받고, 기존카드는 반납했다. 재 개통을 잘 부탁하고 보관한 가방을 찾아 신한은행 2층 앞에 가니 몇몇 선생님들이 오신 것 같았는데, 서로의 얼굴을 모르니 확인 할 수가 없없다.
4시에 용옥재단에서 이사장님, 국장님, 그리고 서울에 계신 인솔 책임 교감 선생님 과 총무 선생님이 나오셔서 출석을 확인하고, 여행사에서 나온 분이 출국과 입국할 항공표를 나누어 주고, 그 행동요령을 지도하고 출국 신청서도 작성하여 주었다. 또 다시 긴 시간을 기다린 후에 우리는 드디어 출국 수속을 하였다.
오후 5:30분에 KE 051편으로 가방 2개를 부치고, 세관과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통과해 면세지역으로 들어섰다. 면세상점에 많은 사람들이 갔지만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부모님, 형님, 정희, 그리고 집으로 전화를 한 후 17번 출구를 통해 탑승했다. 나의 좌석은 61D로 Economy Class 의 중간 좌측 통로였다.
8:00 pm에 사방은 어두워지고 드디어 우리를 태운 KE 051은 Hawaii를 향하여 힘차게 이륙했다. 큰 도시들의 불빛조명을 받으며, 기수를 동으로 돌려 고도를 더하고 있었다. 인천, 수원, 강릉을 지나자, 사면이 암흑으로 쌓이고, 나는 승무원이 주는 Earphone을 꼿고 방송을 들으며 비행기 Screen에 나오는 비행뉴스에 눈을 고정 시켰다.
높이 11,300m. 속도 983Km. 외부온도 -60°C. 7 시간의 비행에서 저녁과 아침을 기내에서 먹은후에 Hawaii 시간으로
1월 4일 월요일 아침 08:02에 Honolulu 국제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