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댁의 창고
한 명 란
요즘 우리 집 냉장고 안을 생각하면 큰 부자라도 된 듯 든든하다. 새로 담근 배추김치, 적당히 익은 깍두기, 향기만으로도 입맛 도는 깻잎, 냉이무침, 멸치 볶음 등 맛깔스런 반찬으로 꽉 채워져 있다. 엊그제 손 맛 좋은 친구가 손수 해서 땀 뻘뻘 흘리며 가져다 준 귀한 음식이다. 차 한 잔의 답례도 불편하지 않게 거절하고 돌아갔다. 퇴직을 하고 전업주부가 된지 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부엌일은 서툴다. 특히 음식 만드는 일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맛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 다이어트 핑계를 데며 식탁에서 깨작거리던 딸이 밥 한 공기를 맛있게 뚝딱 해 치운다. 세상 더 없이 뿌듯하고 행복하다. “새끼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좋았제” 돌아가신 친정엄마 전주댁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람들은 친정엄마를 전주댁이라고 불렀다. 대문 옆 감나무 까치밥이 외롭게 달려있는 계절이 오면 전주댁은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엌에는 굴이 있었다. 나무로 된 작은 사각문을 들어 올리면 사다리가 놓여있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될 만큼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전주댁은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어느 날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를 따라 굴 안으로 내려가 보았다. 한쪽에는 고구마가 천장에 닿을 만큼 쌓여 있다. 수수대로 울타리가 만들어져 있어서 높이 쌓여 있는 고구마는 바닥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 옆에는 주황색 흙더미가 있었다. 흙을 손으로 한 참을 긁어내면 밭에서 금방 캐 온 것 같은 무우가 툭 튀어 나왔다. 또 그 옆에는 호박말랭이, 무말랭이, 고사리 등이 들어있는 대나무 소쿠리가 층층이로 쌓여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잘 말린 시레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동굴 안에 조금 오래 있으면 한기가 느껴지고 급기야는 에취하고 재채기가 나왔다. 전주댁은 깜짝 놀라 어서 올라가자고 어린 나를 번쩍 들어 사다리에 올려놓았다. 전주댁의 창고는 또 있었다. 그 창고도 부엌 안에 있었다. 들어가는 문이 별도로 있고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곳은 엄마 없이는 절대 누구도 혼자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열쇠는 엄마만이 가지고 있었다. 창고 안에는 장독대의 간장독 보다 더 큰 항아리들이 있었다. 항아리에는 하얀 쌀이 들어있고 보리쌀이 들어있고 수수가 들어있고 노란 좁쌀이 들어있었다. 그 옆에는 방아를 찧지 않은 벼 가마 몇 개가 쌓여 있었다. 전주댁은 항아리 안에 손을 넣어 휘이 휘이 젓고는 뚜껑을 잘 닫았다. 가마니들이 쓰러지지 않게 벽으로 더 밀어 붙여놓고 창고를 나와 자물쇠를 잠그고 자물쇠통을 몇 번 흔들어 보곤 하셨다. 그리고는 졸졸 따라 다니는 어린 나를 의식하셨는지 내 손을 꼭 잡고 마당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두 손바닥을 몇 번 탁탁 치고,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풀어 발목까지 오는 긴 앞치마도 툭툭 털어내셨다. 그리고는 나를 번쩍 안고 말없이 볼을 부비며 웃으셨던 기억이 아련하다. 부엌의 굴과 창고를 채우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장독대 옆 텃밭에 묻어둔 김장독이 더 있었다. 바람 부는 날이었던 것 같다. 전주댁은 텃밭으로 가서 볏짚으로 덮여진 김장독 주변을 정리하며 발로 꾹꾹 밟아주었다. 그것으로 전주댁의 월동준비는 끝이 났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가난한 그 시절, 전주댁이 가득 채운 창고 덕분에 삼촌, 고모들 입까지 더해진 대가족이 보리 고개까지 잘 넘길 수 있었다. 이웃의 연세 드신 소란양반네한테도, 동네 끝집 재수네한테도 보리쌀이라도 넉넉하게 꾸어 줄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처럼 봄이 되면 쑥을 뜯어다 주고 냉이를 캐다 주었다.
친구의 정성이 더해진 냉장고가 전주댁 친정엄마의 창고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식구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 닮은 것 같다. 어린 내 얼굴을 부비며 웃으셨던 친정엄마가 많이 생각나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