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여름인가봅니다. 배움터경당 새들학당 중 한 친구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찐빵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나를 넘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마주침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상반기 '몸우주성숙'세미나 열 번째 시간 -'십신(十神)-타자와의 마주침'>
오행(목화토금수)은 상생과 상극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생극의 파노라마에는 어떤 위계도 결핍도 없다. 서로는 서로에게 배경이 된다. 나무에겐 돌과 내가 배경이고, 돌에겐 나와 나무가 배경이다. 이런 식의 흐름 속에서 결핍이나 불만족은 있을 수 없다. 물론 길흉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과는 거리가 멀다.
길흉이란 순환의 여부에 달려있다. 매끄럽게 순환하고 있으면 '길', 어딘가에 고착되거나 리듬이 정체되면 '흉'이다. 봄날의 꽃이 아무리 좋아도 떨어져야 할 때 떨어지지 않는다면 흉하다. 깊은 산속 계곡물이 아무리 맑고 그윽하다 해도 그것이 흘러야 한다. 흘러야 할 때 흐르지 않으면 흉하다.
십신 : 팔자와 '표상'의 마주침
십신은 오행이라는 자연이 사회체와 마주칠 때의 욕망과 힘의 배치다. 그것은 오행에 시공간적 좌표를 부여한 것으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토대가 된다.
비겁(비견, 겁재), 식상(식신, 상관), 재성(편재, 정재), 관성(편관, 정관), 인성(편인, 정인)
이 열 개의 배치는 존재의 리듬이 '사회체'와 마주칠 때 각인되는 기본코드에 해당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 인생에는 이 열 개의 힘들이 각축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식상이 재성으로, 재성에서 관성으로, 관성에서 인성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막고 마치 신분사회와 같이 재성과 인성으로 팔자의 방향을 고집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편향된 고정성을 벗어나 십신의 순환을 거치고 나면 일간인 내가 막힘없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 힘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끊임없이 내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육친법: 팔자의 '오이디푸스화'
육친(六親)은 말 그대로 ‘패밀리’다. 나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말한다.
계보학적으로 근대 이전의 가족관계와 생활방식을 전제로 한 ‘주체화 방식’이다. 이때의 가족이라 함은 당연히 가문 중심, 마을 중심의 친족관계를 뜻하며 가문이라 함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노비들과 하인들까지 포함된 ‘사회체’다.
근대 이후 우리 시대의 가족은 ‘엄마,아빠,아이’라는 삼각형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국가-자본-가족’의 삼위일체의 권력구조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회로가 결합한 결과가 바로 핵가족 제도다. 지금의 육친은 가족 삼각형에 갇혀 있을뿐더러 공동체는 물론 자연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닫힌 구조’인 것.
오이디푸스의 ‘배후’ 국가와 자본
생명의 원동력인 ‘정(精)·기(氣)·신(神)’은 우주적 네트워크다. 몸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따라서 무의식 혹은 욕망 또한 당연히 ‘전우주적’이다. 결코 가족적이지 않다. 사회적이며 역사적이고, 또 초역사적이다.
욕망이 ‘오이디푸스화’ 되는 그 배후에는 국가와 자본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혈연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적 열정 따위는 인생의 지도에서 아웃된지 오래다. 생태계의 파괴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듯, 개인들의 운명에서도 문명과 자연 사이의 왜곡과 간극은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운명의 ‘덫’ 자의식 혹은 트라우마
자본주의가 덧씌운 운명의 굴레 혹은 ‘덫’!
외부와 연결되었던 다양한 채널들이 막히면서 그 힘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타자와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할 기운이 출구가 막히자 자신을 물어뜯고 괴롭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핏줄의 장막을 벗어나 세계와 현실을 직접 대면한다는 뜻이고, 그 과정에서 가족 삼각형과는 전혀 다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친구를 만나고, 선배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혹은 영웅과 라이벌을 만나고 적을 만나고 원수를 만나고.
오이디푸스의 ‘탈주’ 관계와 배치의 철학
시공간은 어떤 사회체와 마주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대의 표상구조와 욕망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주명리는 철저히 관계와 배치의 철학이다.
명리의 이치를 알게 되면, 일단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보게 된다. 인연의 그물망이란 아주 다양한 가치들의 범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기존의 가치들이 무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 삼각형’의 정상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