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 시기에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시험인 과거(科擧) 제도에는 크게 문과(文科)와 무과(武科)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과는 문신. 행정 관료를 뽑는 시험이며, 무과는 무관(武官) 곧 고위급 무장들을 뽑는 시험입니다.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켜낼 간성(干城)들을 가려 뽑는 제도이죠. 요즘으로 말하면 육해공 사관학교 입학시험이라 할까요? 무과는 문과보다 좀 뒤늦게, 중국에선 당나라 때부터 시작됐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전기 광종 때 문과가 처음 시행된 데 비해, 무과는 이후 예종~인종 연간 때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십여 년간 처음으로 시행되다가 국정을 주도하던 문신들의 반대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말 공양왕 때는 말만 나오다 결국 시행은 못했다고 합니다. 곧바로 고려가 망했기 때문이죠. 그 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 태조 이성계는 문과 시험과 함께 무과도 시행하겠다 선포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이후 태종(1402년) 때 처음 시행이 됐습니다. 그 뒤 여러 번 내용이 조금씩 바뀌면서 이어지다가, 성종 때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무과가 문과 시험과 크게 다른 점은, 소과(小科)[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 일단 여기 붙어야 본 시험인 대과를 볼 수 있음]와 대과(大科)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거쳐, 임금님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까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초시는 보통 본 시험인 복시가 있기 전해 가을에 서울과 지방에서 치렀으며, 복시는 식년(式年)[3년마다 돌아오는 ‘~자’ ‘~묘’ ‘~오’ ‘~유’ 년] 봄에 서울에서 치렀습니다. 초시에서 270명, 복시에서 28명을 뽑았는데 바로 복시 합격자 28명이 무과 급제자였습니다. 이들 스물여덟 명은 임금 앞에서 다시 시험을 봐, 갑(甲)과 3명, 을(乙)과 5명, 병(丙)과 20명으로 순위를 나누었습니다. 문과 시험과 마찬가지로 갑과의 1등이 바로 장원(壯元)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말한 것이 3년마다 보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입니다.
하지만 무과도 문과처럼, 식년시 외에 수시로 보는 별도의 시험들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는 증광시(增廣試), 성균관에서 공자 위패에 배례를 마친 뒤 보는 알성시(謁聖試), 창덕궁의 춘당대에서 치렀던 춘당대시(春塘臺試)가 있구요, 특히 각 행정부서의 하급 실무관리를 뽑는 취재(取才) 가운데 병조(兵曹) 취재에서는 내금위(內禁衛)나 갑사(甲士) 등의 특수 무관들을 뽑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관무재(觀武才)라 해서 병졸부터 고위 무관들까지를 대상으로 무예 능력을 평가해 관직과 상을 내리는 별도의 시험도 있었지요. 또 하나, 조선 왕조 내내 세조와 영조 때 두 번밖에 있지 않았지만, 등준시(登俊試)라 해서 고위 문무관료와 왕실 친척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시험도 있었습니다. 정3품 이상의 고위 관료인 당상관도 응할 수 있었고, 급제자에겐 품계를 올려 주고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참고로, 불과 몇 년 전 우리 국궁계에 알려진, 조선 활쏘기의 보배 같은 문헌인 ‘사예결해’의 원저자라 할 수 있는 웅천 이춘기 공(사진)이 바로 영조(1774년, 영조50) 때 등준시 무과에서 장원을 하신 분이죠. 이미 스무 살 때 식년시(1756년, 영조32) 무과에서도 장원으로 급제했구요. 그 분은 영정조 대에 명궁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노년에도 편곤(鞭棍), 월도(月刀)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무예의 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무과의 시험과목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까요. 시험과목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이론과 실기로요. 이론이란 곧 책을 말함인데, 무경칠서(武經七書)로 지칭되는 7종류의 군사학 책만이 아니라 사서오경으로 알려진 일반 경서(經書)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도 얼마간 알아야 했습니다. 물론 더 중요한 부분은 당연히 무예 실기 종목이었겠지요. 모두 6종입니다.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擊毬)가 그것들인데 이는 주로 임진왜란 이전에 시행한 종목이구요, 이후에는 기사가 기추(騎芻)로 바뀌고, 유엽전(柳葉箭), 조총(鳥銃), 편추(鞭芻) 등의 종목이 추가되기도 하였답니다. 새로운 필요에 의해 좀더 실전적인 종목이 들어간 것이지요[참고로, 여기서 ‘추(芻)’라는 글자는 짚으로 만든 사람크기의 인형을 말합니다. 기추는 말을 타고 화살로 인형 표적을 맞추는 것이고, 편추는 쇠도리깨인 편곤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각 종목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건 생략하도록 하구요..^^
아무튼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모든 무과 실기 종목 가운데 기창과 격구, 조총과 편추를 제외하면 나머지가 모두 활쏘기라는 것이지요. 시험의 절반 이상이 활쏘기니, 무과에서 활쏘기 능력이 얼마나 중요시됐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철전(육량전) 활쏘기는, 19세기 초의 일급 무장이자 <정사론正射論>의 저자인 장언식 공에 따르면, 무장들의 활쏘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능력이었습니다. 곧, 일개 한량, 선비들이 철전을 못 쏘면서도 편전이나 유엽전을 얼마간 다룰 수는 있겠지만, 무릇 조선의 정식 무장이라면 철전 활쏘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고, 그것을 먼저 잘 익혀야지만 나머지도 제대로 쏘게 된다고 장언식 공은 정사론에서 강조하여 말합니다(특히 4,8,9편). 바꿔 말하면, 조선 시대 내내 무과의 정식 종목이었던 철전 활쏘기는 우리 전통 활쏘기의 핵심, 근본, 나아가 ‘궁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 실록사전: 무과, 등준시, 관무재 등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C%80%EB%AC%B8
- <정사론> (장언식 원저, 안대영 역주, 지식과 감성)
-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최형국, 인물과 사상사)
- ‘사예결해의 작성배경-문무의 합작품’ (김기훈, 세미나 발표자료)
- ‘등준시무과도상첩’(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8666
- ‘북새선은도’(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1324
첫댓글 자료를 조사하다가, 위 참고자료에도 있는 책을 쓴 무예전문가 최형국 씨가 최근에 '철전사법'에 관한 논문을 하나 쓴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아주 피상적이고 알맹이가 거의 없어 보이더군요. 조선 시대 무예사의 전문가이고 나름 활도 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논문에 철전사법의 일급 사료라 할 수 있는 정사론을 전혀 참조하지 않았고, 실록이나 개인문집 등에 나오는 활쏘기 문외한들의 피상적 관찰자료에 주로 의존하면서, 아마도 사법 자체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해보지 않은 까닭이라 여겨집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좀더 구체적으로 논평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과에 대하여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 특히 우리 활을 쏜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귀중한 지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배움이란 것은 매번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