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활용사업 회의 : 비중리 발제/2022. 1. 17(월)/이영순
비중리는 어떤 곳인가?
(1) 비중리의 위치와 환경
비중리(飛中里)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의 북단부에 위치한, 청주 중심지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외곽 마을이다.
청주의 산지 지형은 동고서저(東高西低)형이다. 내수읍은 청주의 북부에 위치해 있으므로 남쪽이 높은 산악 지형이고, 북쪽은 낮아져서 평야 지대가 발달한 남고북저(南高北抵) 지형을 형성했다. 남쪽의 산악 지형 중 높은 편에 속하는 봉우리로 비상리 남쪽에 위치한 해발 고도 484mm인 구녀산이 있다. 비중리는 구녀산 자락이 있는 비상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지대가 높지 않은 준평원 마을에 속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주택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쌀, 배추, 무, 블루베리, 인삼 등의 농사를 짓고 있다.
비중리는 기러기가 나는 형세의 땅이라고 해서 조선 영조 때(1750~1776)는 비홍리로 불렸는데, 경술국치(1910년) 직전 비홍리가 비상리·비중리·비하리로 분리되는 등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이 있은 후 지금의 비중리로 이르게 되었다.
비중리의 중심 마을은 양지편이고, 양지편 북쪽에 행정이, 행정 북쪽에 선돌거리[입석가]가 있다. ‘양지편’은 마을의 양지 쪽이라서 붙은 이름이고, ‘행정’은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선돌거리는 거대한 바위더미로 된 구릉지에 석조여래삼존상과 석불입상이 있어 ‘선돌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양지편과 행정 동쪽 비상·비중리 땅에는 ‘내수문화마을’이 들어섰다.
비중리의 양지편은 일찍부터 안정나씨(安定羅氏)의 세거지였다. 안정나씨의 시조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한 나천서(羅天瑞)이다. 공민왕 19년(1370)에 동녕부를 평정한 공로로 안천(안정)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안정을 관향으로 삼았다. 공의 5대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은 파평윤씨 윤형의 사위가 되어 회덕현(대전 신탄진)에서 문의현(현도)으로 이주하여 안정나씨 입향조(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가 되었다. 나유선은 3남을 두었는데, 2남인 나연종의 증손자인 나흡(羅洽)이 나유선의 묘소 수호를 위하여 현도면 양지리에 이주한 이래 그 후손(회덕파)들이 세거하였다. 나유선의 부인인 파평윤씨는 친정어머니인 청주곽씨로부터 상속받은 청원구 북이면 선암리에 묻혔다. 나유선의 삼형제 중 막내였던 나사종의 아들 나운걸(羅云傑)은 파평윤씨 묘소(북이면 선암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내수읍 비중리(청주파)에 이주하여 정착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600년 이어져 온 집성촌 마을)
행정과 선돌거리 쪽은 초계 변씨(낭성팔현)들이 주로 살고 있다.(현재 10여 가구) 행정에는 국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뒤쪽에는 초계 변씨의 선산이 있다. 선돌거리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불상군이 있다.
내수문화마을은 1997년10월 1일~1999년 5월 9일에 청원구(당시는 청원군)에서 발주한 마을로 외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화마을의 조성면적은 62.652㎡로, 모두 72호 건축 계획으로 분양되었다.
마을 내에 있는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는 다목적공원과 경로당, 마을회관이 있다. 또한 나기창 교수님이 고향에 개관한 ‘홍산 지질 과학관’도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비중리의 인구는 2021년 10월 31일 시점으로 85세대 167명이며, 남자가 75명, 여자가 92명 살고 있다.
(2) 마을의 문화유적
비중리는 내수읍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 동네이다.『청원군 69년사(1946~2014)』에 의하면 청원군 홈페이지에 등록된 24개의 내수읍 문화유적 중 9개, 즉 37.5%에 달하는 문화유적이 비중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① 성곽유적, 구라산성(마을과 연관 유적)
삼국시대 청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자 치열하게 싸우며 서로 세력을 다투었던 각축장이었다. 그 증거 유적으로 청주 곳곳에 산성자락과 성곽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중리 일대에 있는 성곽 유적으로는 구라산성이 있다.
②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
비중리 석조불상군은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1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후 1992년의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발굴 단장이셨던 정영호 박사님은 석조여래삼존상이 국내 유일의 고구려 일광삼존석불로 추정됨을 감안할 때 보물급으로 지정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할 것을 제언하였다. 이후 2017년 문화재청에서는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을 보물 제1941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③국계서원(菊溪書院)
국계서원은 비중리 행정에 세워져 있다. 본래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에 국동리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교리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 1466~1494), 백음(栢陰) 변경복(卞景福, 1538~1629), 관찰사 이유당(怡愉堂) 이덕수(李德洙, 1577~1645) 등 세 분을 봉안하였으나, 후에 정간공 지중추부사 농계(聾溪) 이수언(李秀彦, 1636~1679)을 추향하였다. 또한 원생은 15명을 두었다. 그러나 사액되지는 못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60년 현 위치인 내수읍 비중리에 다시 세우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하고 있다. 현재 초계 변씨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백음 변경복(栢陰 卞景福, 1538~1629)이 국계서원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백음 변경복은 조선 중기의 효자로 부친 변충남은 천안 땅 직산에 세거하였는데, 전염병이 돌아 이 지역으로 내려와 파평윤씨와 결혼하였는데 그 사이에서 공이 출생하였다.
청원구 북이면 선암리에 부친과 변경수(변경복의 형), 그리고 변경복의 묘소가 있고 후손들이 음력 10월 4일 시사를 지내고 있다.
④ 홍양사(鴻陽祀)
‘홍양사’는 안정나씨(安定羅氏) 일문(一門)에서 충절·효행·학덕이 뚜렷한 육현(六賢)의 신위를 봉안한 사우이다. 비중리 110-1번지에 소재한다. 1970년에 청주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고, 세 차례에 걸친 도·군비 보조를 받아 1978년에 완공하였다. 홍양사의 석축 담장에는 정문 ‘경의문(景義門)’과 ‘홍살문’이 있다. 경내 마당에는 재실인 ‘모충당(慕忠堂)’이 있다. 모충당에서 바라보는 앞쪽에는 ‘홍양사묘정비(鴻陽祠廟庭碑)’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안정라씨삼세충효비(安定羅氏三世忠孝碑), 충신문(忠臣門), 삼효문(三孝門), 충의비(忠義碑)가 있다. 그리고 묘정비 뒤로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이 있다. 사당(祠堂)은 건평 12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집이다. 상량문에는 단기 4305년(서기 1972년) 9월 4일 미시(未時)라고 되어있다. 특히 충신문(忠臣門)과 삼효문(三孝門)은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후손 및 지방인의 충효 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생생문화재 대상> :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 안정나씨 삼세충효문, 손병희 생가
대상문화재가 갖고 있는 유교, 불교, 동학의 인문적 가치를 드러내고, 유·불·동학의 최종심급인 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였다. 이후 2017년 문화재청에서는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을 보물 제1941호로 지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