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아지매
서 영 윤
비포장 신작로에 버스가 멈추자 하꼬방은 희뿌연 먼지 속에 갇힌다. 버스는 다시 먼지를 달고 사라진다. 몸보다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진 한 아낙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따리 짐에 눌리는 듯, 삐딱 걸음으로 한참을 걸어 집으로 들어선다. 대문을 넘으며 “아이고 내가 왔스라” 전라도와 경상도 말이 뒤섞인 사투리로 기척을 알린다.
마산 아지매는 서해 부안에서 칠백 리길, 남해 마산으로 시집왔다.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었건만 온몸에 보따리로 무장하여 산골 십리 길을 오가는 여전사였다. 우리 집 소 마구간에 붙어있는 도장은 마산 아지매의 해산물 보급소이다. 여기서 싸리골, 옥산골, 녹갈로 짭짤한 바다 냄새를 보따리에 담아 팔러 다닌다.
어릴 적, 나는 종종 도장 안을 기웃거렸다. 서 너 평 남짓 도장 안은 소금에 절인 미역 줄거리, 멸치젓, 빵게, 말린 새우들이 팔려나가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해산물들은 어부들의 거친 손바닥을 훑고 바닷물처럼 짭조름한 땀방울을 적시고서야 이곳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들의 짠 내음을 들어 마시며 갈매기 우는 푸른 바다를 상상했다.
마산 아지매는 마산어시장에서 어물을 보따리에 담아 기차에 실어 삼랑진에서 경부선을 갈아타고 청도로 온다. 또다시 먼지를 토해내는 버스와 함께 사 십리 길을 돌아 이곳 산간벽지에 바다 냄새를 뿌린다.
이처럼 마산 아지매는 도장 안에다 조그마한 바다를 옮겨 놓았다. 봄이 오면 도장 안은 봄 바다로 생동감으로 넘쳐났다. 다시마, 톳, 모자반 등 해초류와 고등어, 간 재미 생선들로 식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대식구 밥상에 고등어 한 마리 구워 올릴 수 없어 고등어를 삶아 뼈를 발라 시래기와 달랭이를 넣어 국을 한 솥 끓여 놓으면 한 끼 만에 솥바닥이 말랐다. 아버지는 간 갈치를 좋아했다. 너무나 짭짤한 나머지 꼬리 한쪽으로도 머슴 밥 한 그릇을 훌떡 비웠다.
지금도 그 맛을 떠올리면 침 뭉텅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마산 아지매 보급소 덕분에 우리 집 밥상에 어물 반찬은 떨어지지 않았다. 내 몸집과 키가 큰 것은 어릴 때 바닷고기를 많이 먹은 덕분이 아닌지.
따뜻한 봄날에도 도장 안은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쪼그려 앉아 고등어 비린내를 따라간다.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 고등어의 고향인 바다를 쫓았다. 그곳은 수평선과 파도가 있는 곳이야. 가끔 고래들이 등에서 분수처럼 물을 뿜고 무서운 물고기 상어들도 볼 수 있을 거야, 어린 나는 장딴지에 쥐가 날 때까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난생처음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통영과 한산섬에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면서였다. 처음 대면한 통영 앞바다는 마산 아지매가 도장 안에 꾸려놓은 바다 내음과 똑같았다. 짜고 비리함을 풍기는 냄새는 친숙한 듯 코를 파고들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잔물결에 부서지는 은빛 조각들이 눈을 시리게 했다. 더 넓은 바다의 시야는 수평선에 가로막혔지만, 가슴을 뻥 뚫어내는 시원한 전율은 도장 안의 상상의 바다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와 달리 항구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바다는 섬과 섬을 육지를 이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포구의 사람들에게는 고기를 잡고 미역을 키우고 전복을 따서 가족을 부양하는 생명줄이었다. 마산 아지매 역시 바다를 등에 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산골, 집집마다 소금에 절은 바다 내음을 쉼 없이 풀어 놓았다.
배고픈 시절, 해산물과 산골의 농산물은 모두 돈이었다. 물물교환으로 도장 안의 마산 아지매의 보급소는 소금기의 바다 냄새와 구수한 보리쌀 향이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내음으로 가득했다.
간혹, 살아있는 빵게가 도장 안에 들어오면 몇 마리를 들고나와 친구들과 담벼락 밑에서 놀았다.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달리기도 시키며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짭짤하고 오래 씹으면 고소한 맛이 나는 말린 새우를 먹는 맛에 길들어 보쌀 소쿠리에 쥐가 달라들 듯, 도장 안을 자주 들락거렸다.
어린 나이에 훔친다는 죄책감은 있었지만, 재미와 새우 맛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마산 아지매는 나의 소행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으리라. 그 아량으로 부끄럽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새기게 되었다.
가끔 식당에서 빵게 반찬이 올라오면 철없던 시절과 마산 아지매를 떠올린다. 저 멀리 마산에서 목이 쪼그라 들고 허리가 휘도록 지고 온 빵게와 새우란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에 자책을 한다.
며칠을 멀다 하고 마산과 청도를 오가던 마산 아지매의 바다와 산골길은 물질문명 앞에 서서히 끊어졌다. 읍내에는 마트가 생겼고 트럭에 온갖 먹거리를 실어 스피커로 ‘고등어 왔습니다,’ ‘새우 왔습니다.’라며 동네 골목을 울리면서였다.
십여 년이 넘도록 풍성했던 도장 안의 조그만 바다에는 해산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얼마 후, 억척스럽고 인정이 넘치는 마산 아지매는 보급소를 정리했다. 마산 아지매가 떠나는 날, 동네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엄마는 하꼬방까지 전송하며 눈물로 이별을 달랬다.
수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름날, 말끔하게 차려입은 새댁이 찾아왔다. 마산 아지매의 딸이었다. 엄마는 늘 ”청도 곽당마을 새터 댁에 신세를 갚지 못했다. 청도를 지나거든 꼭 들려 안부를 전해라“란 말을 자주들어 찾아왔다고 했다.” 엄마의 비린내 나는 땀방울로 우리 남매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나름 뿌리를 내리고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있다“ 고 했다.
마산 아지매의 보따리 장사는 지난한 삶이었지만 고등어와 간 갈치, 빵게들이 있었기에 가족들에게는 가슴을 펴고 살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보다 높았던 인생의 파고를 가족에게 헌신하는 사랑으로 넘었으리라.
짠내 나는 도장 안에서 바다를 동경하면서 나를 성숙시킨 것 또한 마산 아지매였다. 그 덕분으로 조금이나마 바다를 알게 되었다. 바다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마산 아지매처럼 바다를 등에 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알았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식탁 위에 반찬도 변한다. 엄마가 끊인 고등어국이 그립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간 갈치가 먹고 싶어진다. 불쑥, 도장 안에서 젓국을 담아내던 마산 아지매 뒷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