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저녁, 제7여단은 사파드 Safad의 전진기지에서 2천 년 전 사사 Sa'sa 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23대의 잡다한 전차와 하프트랙을 장비한 기계화보병대대가 선봉에 섰고 그 뒤를 갖가지 차량을 탄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아랍군의 매설한 지뢰지대를 개척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다음 날 새벽부터는 빠른 진격이 가능했다. 많은 계곡과 구릉이 있고 도로망이 빈약한 지역이어서 기계화 부대의 투입은 위험했지만 속도를 위해 모험을 했던 것인데, 멋지게 성공했다. 여단은 산꼭대기에서 퍼붓는 아랍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맹공을 가했고 작전개시 6시간 만에 사사를 함락시켰다. 남쪽에서 공격을 가한 골라니 여단을 비롯한 다른 부대들도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이렇게 60여 시간 만에 히람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물론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스승인 독일군 못지않은 훌륭한 성과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인종 청소는 계속되었고,《팔레스타인 비극사》에 의하면 여단 병사들에 의한 강간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중동 전쟁》104쪽 지도)
아랍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레바논과 시리아로 도주했다. 이스라엘군은 남쪽으로는 리타니 Litani 강, 북쪽으로는 마리키야 Malikiya 협곡에 이르는 지역을 모두 점령했다. 남부 전선에서도 이스라엘 군이 네게브 사막에서 연전연승하였고, 여세를 몰아 시나이 반도의 거의 절반을 손에 넣을 정도에 이르렀다. 남쪽과 북쪽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의 기동전은 계속 이어질 연전연승의 전조였다. 4차 중동전까지 이스라엘 국방군 기갑부대의 오랜 동료가 될 셔먼 전차로 이루어진 중대가 첫 번째로 편성된 시기도 이 때였는데, 중대장은 아단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아랍 국가들은 1949년 2월부터, 이집트를 시작으로 레바논과 요르단이 차례로 휴전에 동의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끝났지만, 시리아와의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949년 7월에야 공식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9월에 둔켈만은 여단을 떠났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불리 우는 1차 중동전쟁은 이렇게 신생 이스라엘 군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대가는 컸다. 전체 전쟁 기간은 1년이 넘었지만, 실제 전투기간은 61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병사 4천 명, 민간인이 2천 명이나 죽었는데, 전체 인구의 거의 1%에 달할 정도로 모든 중동전쟁을 통틀어 이스라엘로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었다. 물론 유럽 기준에서는 작은 전쟁이었지만 막 태어난 작은 공화국으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아랍 측의 전사자는 약 1만 5천 명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결과는 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유엔이 인정한 영토에다 6350㎢를 추가하여 팔레스티나 면적의 79%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승리라는 결과는 해외의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자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들게 만들어, 이민의 획기적인 증가를 가져왔다는 것도 전승의 아주 중요한 결과물이었다.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땅 중 가자 Gaza 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차지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 군은 2년 사이에 많은 경험을 쌓고 엄청나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치를 세 차례의 전쟁에서 전 세계를 감탄시킨다. 한 편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모체역할을 다한 제8기갑여단은 해체되면서, 제82전차대대를 제7여단에게 넘기면서 짧은 역사를 끝내지만 탁월한 후계자를 남긴 셈이 되었다. 이때부터 제7여단은 제7기갑여단으로 변신했다. 여단의 주둔지는 영국군이 있었던 라말라 Ramallah 였는데,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오스만 제국군과 독일군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7여단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의 인종청소는 1949년 봄까지 진행되었고, 그 숫자는 무려 75만 명에 이르렀다. 이런 인종 청소는 명백하게 유엔이 규정한 전쟁범죄에 해당되지만 이것이 유엔에 상정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이스라엘은 75만 명을 내쫓고 그들의 토지와 과수원, 가옥, 상점을 거의 빼앗고 그 위에 건설한 ‘강탈국가’인데, 현대에 들어와 세계에서 이렇게 세워진 나라는 이스라엘 하나 뿐 이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아랍인들이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떠났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거짓 주장임을 밝혀냈다. 영국군 정보장교 출신으로《중동일기》의 저자인 리처드 마이너츠하겐 Richard Meinertshagen 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주고 원주민인 아랍인에게는 보상을 주는 방식으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팔레스타인 보다 100배 더 넓은 미개척지에 사는 소수의 아랍인에게는 ‘아주 조금’ 부당할 뿐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팔레스타인 에 사는 아랍인 전부가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남은 이들도 적지 않고, 현재도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지만 2등 국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중 46만 명은 요르단에, 가자지구로 20만 명이, 레바논에 10만 명, 시리아로 9만 명이 ‘이주’했는데, 물론 거의 빈손 이었다. 이 나라들도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그들을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유엔의 원조로 지어진 난민촌에서 당장 살 수는 있었지만 부족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했다. 아랍 세계의 유대인들의 빈 자리에 그들을 정착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자리는 현지인들이 모두 차지해버려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돌아올 몫은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에서 넘어온 동포들을 국가정책적으로 재정착 시켰다. 이 차이가 이후의 중동 정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어쨌든 아랍 국가들도 어쩔 수 없이 휴전협정을 맺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을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전쟁은 언제 다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적어도 군사적인 관점으로는 이스라엘 군이 늘 이겼고, 그 선봉에는 늘 제7기갑여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