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실록 1권, 단종 즉위년 6월 28일 己丑 4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 윤 이선제의 상서문
경창부 윤(慶昌府尹) 이선제(李先齊)가 상서하였다.
"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閭巷)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畿縣)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民戶)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200) 기미년201) 간에 집현전에 입직(入直)하는데 봉산군(鳳山郡)에 사는 서리(書吏) 오성우(吳成祐)가 직소(直所)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癘氣)202) 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세종께서 마음에 극히 아프게 여기어 전의 부정(典醫副正) 김여생(金麗生)을 보내어 그 도의 의원 5인을 거느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여러 방법으로 구료(救療)하고 또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문화·장연·황주·재령·신천 등지 주현(州縣)에 모두 여제단(癘祭壇)을 설치하고 전물(奠物)을 풍성하게 갖추어, 여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재계하고 제사를 행하여 여기(癘氣)를 사라지게 하라.’ 하였으니, 그 구제하는 법이 사책에 펴서 있으므로 성려(聖慮)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랠수록 병은 더욱 치성하여 다른 지방에 파급되고 남김없이 전염하여 죽으니, 만연하는 해(害)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마음에 이리저리 생각한 지가 오랩니다. 지금 사초(史草)를 편수하는데 무신년203) 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觀)이 상서하기를,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입니다.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인데 단군 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재[嶺]가 높고 커서 연접하였는데 그 산 허리에는 신당(神堂)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북쪽 벽에 단인 천왕(檀因天王)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이 있고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삼성당(三聖堂)이라고 칭하고 그 산 아래에 사람이 사는 곳도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칭합니다. 당의 안팎에는 까막까치가 깃들이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이 산 아래에 삼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을의 동쪽에 장당경(藏唐京)이라고 이름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단군이 처음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기자(箕子) 사당에 합하여 있어야 한다.」 고 합니다. 대개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아울러 섰는데 기자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니, 어찌 아래로 기자 사당에 합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신 이선제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상고하니 이에 이르기를,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貪求)하므로 아비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三危)·태백(太伯)204) 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弘益人間]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205)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렸으니, 곧 지금의 묘향산이다.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장[主穀]하고, 명을 주장[主命]하고, 병을 주장[主病]하고, 형벌을 주장[主刑]하며, 선악을 주장[主善惡]하니,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 일을 주장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熊]과 한 호랑이[虎]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사는데 항상 신(神)인 환웅에게 기도하여 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이 영애(靈艾)206) 1주(炷)와 마늘 20(枚)매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얻어 먹고 삼칠일(三七日)207) 을 기하였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熊女)가 혼인을 할 데가 없어서 매양 단수(檀樹) 아래에서 잉태가 있기를 주언(呪言)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호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요(唐堯)208) 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209) 에 평양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에 옮기어 어국(御國)한 지 1천 5백 년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또 장당경(藏唐京)에 옮기었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천 9백 8세를 수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백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代)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世)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백 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는 병합한 지 2백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백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이 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土人)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東明王)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 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土人)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오성우(吳成祐)의 말을 듣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유관의 소(疏)를 보니 말 뜻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의논하여 신의 뜻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예전 당(堂)을 수리하고 새로 신상(神像)을 만들기를 엄연히 중국 조천궁(朝天宮)에 있는 열수(列宿)210) 의 상과 같이 하거나 또 삼차하(三叉河) 해신(海神)의 모양과 같이 하여 좌우에 나누어 앉히어서 존경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며, 조관(朝官)을 명하여 보내어 성당(聖堂)에 고해서 가만히 돕도록 빌면 어찌 밝게 이르러[昭格] 복을 내리는 것이 없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천제가 단수(壇樹) 아래에 내려와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일이 괴탄(怪誕)한 데에 가까와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합니다. 그러나 신인(神人)의 출생은 상민(常民)과 다릅니다. 간적(簡狄)은 현조(玄鳥)의 알[卵]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고, 강원(姜嫄)은 천제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后稷)을 낳았으니, 이것은 중국의 상고의 일입니다. 어찌 용이하게 의논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신라 처음에 양산(陽山) 기슭에 말이 있어 꿇어 울므로 사람이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大卵]이 있었습니다. 깨뜨리니 어린 아이가 껍질 속에서 나왔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니 대단히 숙성하였습니다. 육부(六部) 사람들이 신이(神異) 하게 여기어 추존하여 세워서 임금을 삼았으니, 곧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북부여(北扶餘)의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河伯)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室中)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곧 동명왕입니다. 이것이 모두 상류(常類)와 달라서 혹자들이 함께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적(古籍)에 써서 사람들이 다른 말이 없는데 어찌 홀로 단군을 괴이하다 하여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혹자가 또 말하기를, ‘괴기(怪氣)가 어떻게 여기(癘氣)를 일으키는 일이 있겠느냐? 문화(文化) 여항(閭巷)에 해가 되었다는 말은 또한 믿을 수 없다.’ 합니다. 신이 《송감(宋鑑)》을 보니 휘종(徽宗) 3년211) 7월에 검은 재기(災氣)가 금중(禁中)에 보였는데, 기록하는 자가 말하기를, ‘원풍(元豊)212) 말년에 일찍이 물건이 있어 크기가 자리[席] 만하여 침전(寢殿) 위에 보였는데 신종이 붕(崩)하였고, 원부(元符)213) 말년에 또 보였는데 철종이 붕하였다. 정화(政和)214) 이래로 크게 일어나서 매양 사람의 말소리만 들으면 먼저 나오는데, 열옥(列屋)이 꺾어져 무너지는 소리 같고, 그 형상이 겨우 한 길 남짓하고, 번개와 방불하고, 금눈[金明]이며, 행동에 갱갱(硜硜)215) 하게 소리가 있고, 검은 기운이 덮어씌웠는데, 크지는 않고 요료(了了)216) 하며 기운이 미치는 곳에 비린내 나는 피가 사방으로 뿌리어 병인(兵刃)을 모두 능히 쓸 수가 없다. 또 혹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고, 또 혹시는 나귀가 되어 주야로 때없이 나오는데 많이는 액정(掖庭)217) 궁인이 사는 곳에 있으며, 또한 내전(內殿)까지 미쳐 상습이 되었다. 또 낙양부(洛陽府) 기내(畿內)에는 혹 물건이 있어 사람 같고 혹은 개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 빛이 새까매서 미목(眉目)을 분별할 수 없고, 처음에는 밤이면 작은 아이를 노략하여 먹었는데 뒤에는 대낮에 사람의 집에 들어와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르는 곳마다 떠들썩하여 불안해서 그것을 흑한(黑漢)이라고 하였다. 힘이 있는 자는 밤에 창을 가지고 스스로 호위하였다.’ 하였습니다. 대저 괴이한 기운이 상(像)을 이루어 해가 되는 것은 예전에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의 전염병 증세는 여러 가지로 괴상하니, 어찌 허탄하다 하여 그 근본을 연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세종의 생각을 따르시어 대신에게 고루 물어서 천제가 아들을 단수(檀樹)에 내린 근원과, 신주를 옮겼기 때문에 괴이한 것을 일으키는 연유를 연구하여 의논하고 문화·장연·신천·재령의 늙은 사람과 원평·교하의 전염병 증세를 널리 물어 권도에 따라 의논을 정하여 다시 성당(聖堂)의 신주를 세워 전시병(傳尸病)의 뿌리를 끊으면 온 나라가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 [주-D001] 무오년 : 1438 세종 20년.
[주-D002] 기미년 : 1439 세종 21년.
[주-D003] 여기(癘氣) : 못된 돌림병을 생기게 하는 나쁜 기운.
[주-D004] 무신년 : 1428 세종 10년.
[주-D005] 삼위태백(三危太伯) : 삼위산과 태백산.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은 장백산이라고도 함.
[주-D006] 천부인(天符印) : 천자의 위, 곧 제위의 표지로서 하느님이 내려 전한 세 개의 보인.
[주-D007] 영애(靈艾) : 쑥.
[주-D008] 삼칠일(三七日) : 21일.
[주-D009] 당요(唐堯) : 중국 요임금.
[주-D010] 경인년 : B.C. 2333년.
[주-D011] 열수(列宿) : 여러 성인.
[주-D012] 휘종(徽宗) 3년 : 1102 고려 숙종 7년.
[주-D013] 원풍(元豊) : 송나라 신종 연호. 1078년~1085년.
[주-D014] 원부(元符) : 송나라 철종 연호. 1098년~1100년.
[주-D015] 정화(政和) : 송나라 철종 연호. 1111년~1117년.
[주-D016] 갱갱(硜硜) : 돌을 문지르는 소리.
[주-D017] 요료(了了) : 명확한 모양.
[주-D018] 액정(掖庭) : 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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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昌府尹李先齊上書曰:
臣聞, 黃海道人民之病, 驟發閭巷, 漸染四方, 北至平安, 南至畿縣, 死亡相尋, 民戶掃地, 豈無致然而然歟? 臣於戊午、己未年間, 入直集賢殿, 居鳳山郡, 書吏吳成祐隨入直所, 臣問黃海道人民發病之由, 答曰: "嚮文化縣 檀君之祠, 移於平壤之後, 怪氣結聚, 若有神狀夜行, 黑氣成陣, 有行動聲, 有一人望而驚怪, 隱避之。" 以是播告, 閭里人相語曰: "此病之發, 實移檀君之故也, 厲氣先起於九月山間, 民戶漸漬於文化、長淵、載寧、信川等處, 傳染殞命者頗多, 民生可哀。" 恭惟, 世宗痛極宸衷, 遣典醫副正金麗生, 率其道醫五人, 巡行州里, 多方救療, 又傳旨于監司曰: "於文化、長淵、黃州、載寧、信川等處州縣, 皆設厲祭壇, 豐備奠物, 令諸邑守令, 至誠齋戒行祭, 以消厲氣。" 其救濟之法, 布在史策, 聖慮至矣。 然年愈久, 而病愈熾, 波及他方, 染死無遺, 蔓延之害, 將如何? 臣輾轉於心, 久矣。 今修史草, 至戊申, 有右議政致仕柳觀上書曰: "文化縣, 臣之本鄕。 父老云: ‘九月山, 是縣之主山, 在檀君時, 名阿斯達山。’ 山之東嶺高大邐迤, 其山之腰, 有神堂, 不知創於何代。 北壁有檀因天王, 東壁有檀雄天王, 西壁有檀君天王, 縣人稱之曰: ‘三聖堂。’ 其山下人居, 亦稱曰: ‘聖堂里’。 堂之內外, 鳥鵲不栖, 麋鹿不入, 檀君入阿斯達山爲神, 此山之下三聖堂, 至今猶存, 其迹可見。 縣之東有地名曰: ‘藏唐京。’ 父老傳以爲檀君之都, 或者以爲: ‘檀君, 初都王儉城。 今宜合在箕子廟。’ 蓋檀君與堯竝立, 至箕子千有餘歲, 豈宜下合於箕子之廟歟?" 臣先齊, 夷考《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 數意於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ㆍ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使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卽今妙香山也。 將風伯雨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雄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 百日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得人身。 熊女者, 無以爲婚, 故每於檀樹下, 呪言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檀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 始稱朝鮮, 又都白岳山 阿斯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 封箕子於朝鮮, 檀君又移於藏唐京, 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夫檀君, 離平壤四百餘歲, 而還隱於阿斯達爲神, 則爲君於斯, 爲神於斯, 不厭於此地, 明矣。 箕子傳四十代, 燕人衛萬, 都王儉城, 傳二世, 高句麗傳七百五歲, 新羅竝二百餘歲, 高麗 王氏傳四百餘年, 則檀君之去平壤, 遐哉邈矣。 其肯顧戀於平壤乎? 且爲山神, 致土人之尊祀, 豈有樂遷於平壤, 與東明王同廟哉? 《遺事》註云, 桓因天帝, 卽柳觀書所謂檀因也, 桓雄天帝之庶子, 卽所謂檀雄也。 邃初之人, 不忘其本, 創立寺宇, 改桓爲檀, 號稱三聖, 果不知創於何時也。 向者移檀君於平壤, 而置二聖於何地? 是檀君不獨起怨於土人, 二聖必有騁怪作癘, 爲害於民矣。 臣初聞吳成祐之言, 暫不介意, 今見柳觀之疏, 語意不相(予)〔矛〕 盾, 豈不更議以求神意乎? 臣愚以爲, 修葺舊堂, 新作神(象)〔像〕 , 儼若中朝朝天宮列宿之像, 又如三叉河海神之容, 分坐左右, 尊敬如舊, 命遣朝官, 致告聖堂, 以祈陰祐, 則豈無昭格降福耶? 或者以爲: "天帝降於檀樹下, 生檀君。" 事涉怪誕, 不足信也。 然神人之生, 異於常人, 簡狄呑玄鳥卵而生契, 姜嫄履帝敏而生后稷, 此中國上世之事, 豈易議爲也? 以我國之事言之, 新羅初, 陽山麓有馬跪而嘶, 人往觀之, 馬忽不見, 只有大卵剖之, 嬰兒出殼, 年十餘歲岐嶷, 六部人以其神推尊之, 立以爲君, 卽始祖奕居世也; 北扶餘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語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是東明王將興之兆也。 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遮河伯之女於鴨綠江邊室中私之, 王幽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身, 生一大卵, 王棄之, 與犬豕不食, 置之路中, 牛馬避之, 野鳥覆翼之, 王剖之不能破, 還卵於其母, 母以物裹之, 置之暖處, 男兒破殼而出。 是高句麗始祖高朱蒙, 卽東明王也。 此皆異於常類, 或者之所共疑也, 然書之古籍, 人無異辭, 豈獨以檀君爲怪, 而不講哉? 或者又以爲: "怪氣, 何有作厲爲害? 文化閭巷之語, 亦不足信。" 臣觀《宋鑑》, 徽宗三年七月, 黑眚見于禁中, 記者曰: "元豊末嘗有物, 大如席, 夜見寢殿上, 而神宗崩。 元符末又見, 哲宗崩。 政和以來大作, 每得人語聲則出先, 若列屋摧倒之聲, 其形僅丈餘, 彷彿如電, 金眼行動, 硜硜有聲, 黑氣蒙之, 不大了了, 氣之所及, 腥血四灑, 兵刃皆不能施, 又或變人形, 亦或爲驢, 晝夜出無時, 多在掖庭, 宮人所居, 亦及內殿, 習以爲常。 又洛陽府畿內, 或有物如人, 或遵居如犬, 其色正黑, 不辨眉目, 始夜則掠小兒, 食後雖白晝, 入人家爲患, 所至喧然不安, 謂之黑漢, 有力者, 夜持搶自衛。" 夫怪氣成像爲害, 古亦如此, 今之傳染病證, 作怪多般, 豈以爲誕, 而不究其本乎? 伏惟, 殿下聿遵世宗之念, 延訪大臣, 究論天帝降子於檀樹之源, 與夫遷主作怪之由, 廣問文化、長淵、信川、載寧耆老之人, 及原平、交河傳染病證, 從權定議, 復建聖堂之主, 以斷傳尸之根, 滿國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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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6월 14일 을미 5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유관이 단군이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의혹을 없애주기를 상서하여 청하다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046)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註 046]삼성(三聖) :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
○右議政仍令致仕柳寬上書曰:
黃海道 文化縣, 是臣本鄕, 自爲幼學, 下去多年, 聞諸父老之言, 乃知事迹久矣。 九月山是縣之主山, 在檀君 朝鮮時 名阿斯達山, 至新羅改稱闕山, 其時文化始名闕口縣, 至前朝陞爲儒州監務, 至高宗代, 又陞爲文化縣令, 山名闕字, 緩聲呼爲九月山。 山之東嶺, 高大而長, 至一息安岳郡而止。 嶺之腰有神堂焉, 不知創於何代, 北壁檀雄天王, 東壁檀因天王, 西壁檀君天王, 文化之人常稱三聖堂, 其山下居人, 亦稱曰聖堂里。 堂之內外, 鳥雀不棲, 麋鹿不入。 當旱暵之時祈雨, 稍有得焉。 或云檀君入, 阿斯達山, 化爲神, 則檀君之都, 意在此山之下。 三聖堂至今猶存, 其迹可見。 以今地望考之, 文化之東, 有地名藏壯者, 父老傳以爲檀君之都, 今只有東、西卯山, 爲可驗耳。 或者以爲檀君, 都于王儉城, 今合在箕子廟。 臣按檀君與堯竝立, 至于箕子千有餘年, 豈宜下合於箕子之廟? 又或以爲檀君, 降於樹邊而生, 今之三聖, 固不可信, 然臣又按遂古之初, 混沌旣開, 先有天而後有地。 旣有天地, 則氣化而人生焉。 自後人之生也, 皆以形相禪, 豈得數十萬年之後至堯時, 復有氣化, 而生之理? 其樹邊之生, 固爲荒怪。 伏惟聖鑑裁擇, 命攸司講求所都, 以祛其疑。
命留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