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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성지순례 자료 모아보기 . 1편
1. 필리핀, 국가(나라) 소개
필리핀어: Republika ng Pilipinas
영어: Republic of the Philippines
필리핀 공화국은 서태평양에 있는 동남아시아의 섬나라이다. 북쪽의 루손 해협 건너편에는 중화민국, 서쪽의 남중국해 건너편에는 베트남이 있다.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 필리핀은, 크게 루손섬, 비사야스 제도, 민다나오섬의 세 지역으로 나뉜다. 주요 도시로는 마닐라, 다바오, 케손시티, 세부 등이 있다.
인구는 1억명으로, 세계에서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또한, 약 1,100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해외에 살고 있다. 필리핀에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존재한다. 선사시대에 필리핀에 거주했던 사람들 중에는 네그리토가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착했고, 말레이인의 문화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전래되었다. 또한, 무역으로 중국 대륙의 문화가 필리핀에 영향을 끼쳤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 스페인이 필리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식민 지배 동안에 마닐라는 아카풀코와의 무역 연결점이 되었으며, 필리핀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19세기 말에 필리핀 혁명이 일어나고, 짧은 기간동안 유지된 필리핀 제1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뒤를 이어 미국-스페인 전쟁과 필리핀-미국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이후,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필리핀이 독립을 할 때까지,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미국이 필리핀의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지배를 계기로 영어와 서양 문화가 필리핀에 전해졌다.
필리핀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경제 사정이 좋은 나라였으나, 마르코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 과도한 빈부 격차로 인해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수도는 마닐라이며, 공용어는 필리핀어, 영어, 스페인어이다.
1870년대, 필리핀 원주민(중국계 혼혈 여성)들은 여러 섬에 각기 다른 부족들이 나뉘어 있어 통일 국가는 형성되지 않았다.
1521년에 포르투갈의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 도중 막탄섬에 상륙하면서 유럽세계에 알려지게 되고 이후 에스파냐의 필리핀 식민통치가 시작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 300년 이상 계속된 에스파냐의 통치는 필리핀을 동남아시아 유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로 만들어서, 필리핀은 수도사의 천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은 파리 강화 조약에 따라 미국에게 2,000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 괌 등 지배권을 양도했다.
필리핀 혁명과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필리핀인의 최초의 공화국인 필리핀 제1공화국이 건립되었으나 곧바로 미국의 불인정과 함께 식민화가 시작되어 이에 저항하는 필리핀인과 미국-필리핀 전쟁이 일어났다.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지휘아래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압도적인 미국의 군사력에 많은 희생자를 낳고 굴복하여 필리핀 제 1공화국은 붕괴하였다.
그 후에도 로마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주동하는 필리핀 민중들의 독립투쟁은 계속되고 혁명 정부도 수립되었으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4년 미국 의회에서 타이딩스-맥더피 법이 통과되어 10년 후에 필리핀이 독립하기로 예정되었다.
1935년에는 필리핀 연방이 조직되었고 마누엘 케손이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은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일본은 1943년에 필리핀 독립을 승인했고 대통령에는 호세 파키아노 라우렐이 선출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미국은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승인, 공화제를 채택한 필리핀은 마누엘 로하스를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 뒤 필리핀은 아시아권에서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지만, 국민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정치적/경제적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필리핀은 미국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는 대신, 공군/해군기지를 빌려주기로 한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의 동북단에 있으며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대륙 사이에 자리 잡은 7,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무인도에 불과해 사람이 사는 섬은 약 880개뿐이며 이름이 붙여진 섬도 약 2,700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필리핀 군도의 섬들은 환태평양 화산대에 속하기 때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화산 활동도 활발하다. 섬들의 지형은 대체로 산이 많으며, 평야는 해안에 접한 저지대를 흐르는 하천 유역에 한정되어 있어서 농경지는 별로 없다. 가끔 농경지가 발견되어도 거의 계단식의 형태를 띠고 있을 것이다.
필리핀은 화산 덕택으로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많다. 특히 이 나라 최대의 섬인 루손 섬의 마욘 산은 원뿔형의 활화산으로 무척 아름답다. 루손 섬과 민다나오 섬의 면적이 전 국토의 70%를 차지한다.
필리핀 기후는 열대성이며 몬순과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1년 내내 기온이 높은 마닐라의 연평균 기온은 27도이다. 몬순은 6월부터 10월까지는 남서에서, 11월부터 3월 말까지는 북동에서 불어온다. 계절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며 군도의 동쪽과 서쪽에서는 건기와 우기가 서로 엇갈린다. 태풍은 7월에서 10월까지의 시기에 내습하는데 특히 루손섬은 매년 태풍의 통로가 되고 있다.
12 ~ 2월
이 시기는 필리핀의 겨울이며, 여름보다 비교적 기온이 낮고 비도 적다. 이런 경향은 마닐라를 포함한 루손 섬 북서부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건기라 해도 태평양 동해안에서는 큰 비가 내리기도 한다.
3 ~ 5월
이 시기는 다른 나라의 봄에 해당하며, 필리핀에서는 아주 빨리 여름이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5월 무더위의 낮 온도는 35 ~ 40도까지 오르기도 한다. 밤에도 기온은 아직 남아있어서 대개 25도 정도이다. 하지만, 아직 건기이기 때문에 더워지진 않다. 하지만, 바기오 지방은 이 시기가 되어도 시원하다.
6 ~ 12월
대개 5월에 여름이 끝나고 6월부터 우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최근엔 기상이변으로 우기의 시작이 늦어지고 있다. 1983년에는 7월 중순까지 건기가 계속되기도 했다. 우기는 11월까지 계속되어서 이로 말미암아 비사야스 제도 지방, 민다나오섬 북동부, 루손섬 동해안에서는 매년 태풍에 의해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필리핀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 2000년 인구조사에서 필리핀인 중 28.1%는 타갈로그족, 13.1%가 세부아노족, 일로카노족 9%, 비사야족 7.6%, 힐리가이논족 7.5%, 비콜족 6%, 와라이족 3.4%, 그리고 25.3%가 기타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는 85%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신봉한다. 이 밖에 군도의 남쪽에 거주하는 모로족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도이프가오족 등의 민족은 정령을 숭배한다.
복잡한 민족만큼이나 언어 또한 많아 70종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공용어는 영어, 타갈로그어, 스페인어이다. 필리핀 국민은 말레이족을 근간으로 하여 중국인, 미국인, 스페인인 및 아랍 혈통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5월 기준으로 필리핀 인구는 76,500,000명이며 각 인종의 구별은 거의 없다. 서구 국가의 오랜 식민 통치 역사와 무역 상인들의 혈통이 섞여 외모와 문화 모두에서 동양과 서양이 독특하게 혼합된 국민이 나타났다. 중국어 사용 주민도 조금 있다.
로마 가톨릭 전통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국가로서 플라자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생활 관습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짙게 풍긴다. 주요 도시마다 대부분 화려한 바로크양식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있는데 특히 필리핀의 로마 가톨릭 교회행사는 열광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에는 많은 참회자가 실제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묶고 못까지 박아 예수의 고난을 연출하기조차 한다. 한편, 사도신경에 근거하여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신자들간의 통공(communion)을 믿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따라 각 바랑가이(최소 행정단위)의 수호성인을 공경하는 축제도 신앙생활의 중요한 단면이다.
미국의 영향은 무엇보다 영어의 사용이나 교육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국민의 3/4이 영어를 할 줄 알며 학교, 정계, 재계에서도 영어가 많이 쓰인다. 교육 수준은 높은 편으로 초등 교육과 중학교 과정이 의무 교육제이며 문맹률은 10% 정도이다.
필리핀 사회는 빈부 격차가 다른 동남아 나라들보다 심각하여 일부 부유한 상류층은 거액의 재산을 축적했지만 빈민가 촌에는 상수도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누추한 판잣집이 가득하며 매춘과 범죄가 횡행하고 있다. 수도 마닐라 중심부에는 옛 에스파냐 요새와 기독교 공동묘지 등 과거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며 사람이 많고 교통 혼잡이 극심한 편이다.
과거 미군이 철수하고 남긴지프를 개조하여 요란한 장식물을 부착한 지프니가 눈에 띄는 명물이다.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환락가에는 동양에서도 손꼽히는 요리로 유명한 레스토랑과 최고의 나이트클럽 등이 있다.
국어는 필리핀어(표준화된 타갈로그어), 공용어는 필리핀어와 영어이지만, 모국어로 사용되는 언어는 합계 172개에 이른다. 이것들은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으로 분류되지만 거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 그 밖에 사용되는 언어에는 중국어(베이징어나 푸젠어), 스페인어 식민지 시절의 스페인어와 차바카노어(스페인어 크리올), 이슬람교도 사이에 사용되는 아랍어, 말레이어가 있다. 특히 스페인어는 2008년 1월부터 공용어로 지정되었으며, 학교에서도 필수과목으로 가르친다.
2. 필리핀 가톨릭
적도의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서 태평양에 산재하는 섬들로 구성된 도서국가. 면적은 30만㎢, 총 인구는 5,074만명(1982년 현재)이다. 1521년 마젤란의 스페인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소국(小國)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사들을 파견했으며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도미니코회 수사 살라자르(Salazar)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되어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교회행정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의 그리스도화에 힘썼다.
1521년 4월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사마르(Samar)와 레이떼(Leyte)를 거쳐 세부(Cebu)에 도착한다. 이때 마젤란에 동행한 스페인 선교사가 세부의 주민 800명에게 세례를 주고 로만 가톨릭(Roman Catholic)으로 개종을 시킨다.
이때부터 필리핀의 선교는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후 마젤란이 부족전쟁에 참가했다가 전투에서 죽음 으로서 그의 필리핀 탐험 계획은 끝나게되고 그의 탐험대도 결국은 필리핀을 일단 포기하고 고국으로 회항하게 되어 잠시의 단절이 발생한다.
1559년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spy)를 파견하게 되고 이들은 1565년 필리핀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식민지화와 복음화를 동시에 착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가톨릭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330년간의 스페인 식민통치기간동안 100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노동문제나 세금문제 등이 문제가 되었고, 이 중 종교적 이유에 의한 반란도 상당수였으며, 반란 때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수도사들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필리핀은 인구의 약 90%가 기독교이고, 그 중 80%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톨릭 국가이며, 필리핀에서의 카톨릭은 그 문화에 맞게 변형된 요소도 있다. 일부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지금도 매년 성 금요일에 일부 카톨릭 신자들은 속죄의 의미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몇 명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한다.
성주간에는 이렇게 속죄와 단식으로 우울하게 보내지만, 부활절 당일에는 대 축제의 분위기다. 필리핀 성당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필리핀 가톨릭 상징적인 성상이있다. 산토니뇨상과, 블랙 나자렛, 까다루페 성모마리아상, 마젤란 클로스 등이다.
3. 필리핀의 종교적 특성
필리핀 사람들 신앙심이 깊다. 그리고 종교는 필리핀인의 삶에서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종교는 많은 필리핀인들의 삶에 녹아내려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종교는 정치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헌법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 조항이 있지만, 사실상 교회는 아주 강력한 존재이다.
필리핀의 가장 큰 종교는 카톨릭이다. 인구의 약 90%가 기독교이고, 그 중 80%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다. 엄청난 숫자이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톨릭 국가이다. 필리핀에 카톨릭이 들어오게 된 경로는 16세기 스페인 복자들이 당시 필리핀을 식민지화를 하는 과정에 전파하였다.
그 전에는 부족국가로써 부족마다 다른 그들만의 종교가 있었다. 대부분은 자연을 숭배하는 형태였는데, 식민지 시절을 걸치며 그 기록이나 흔적이 지워지고 남아있지 않다. 필리핀에서의 카톨릭은 그 문화에 맞게 변형된 부분도 있다. 일부는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성주간 (부활절) 기간에 일부 카톨릭 신자들은 속죄의 의미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몇 명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한다. 성주간 에는 이렇게 속죄와 단식으로, 한 주를 보내지만, 부활절 당일에는 축제의 분위기다.
필리핀에는 가톨릭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을 벗어나 아래지방인 방사모로 지방과 민다나오 지역에는 무슬림들이 많다. 이 지역은 지방 자치제로써 필리핀 정부가 관여를 하지 못하고, 필리핀으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실정에 있다. 이 지역은 수도 쪽과 끊임없이 대치 중에 있으며, 민다나오에 숨어있는 테러리스트 소탕작전 중 특전사요원들이 지역의 혁명 군대와 충돌, 전사하는 참사도 있었다. 현재 필리핀 정부가 평화 협정 중에 있다.
▲ 십자가 형을 실제로 재현하는 모습
4. 필리핀 가톨릭 교회의 역사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1521년 마젤란의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됐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자들을 파견했고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후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돼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교회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전파되면서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했고 결국 1898년 독립을 선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쳐 필리핀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1902년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필리핀 독립교회」가 설립돼 다른 교의나 전례는 모두 로마 가톨릭과 같으면서도 교황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의 분파를 형성해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07년 필리핀에 자치권을 부여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며 이듬해에는 필리핀 연방 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러한 일정은 중단됐고 1945년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듬해 총선을 거쳐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필리핀 가톨릭 교회는 400여년 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가톨릭 신앙과 종교적 실천을 유지해왔다.
대중 신심 행사들
필리핀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대중 신심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필리핀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전례보다도 오히려 대중 신심들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전례가 필리핀 문화와 괴리를 보일 때 필리핀의 문화에 보다 가까운 대중 신심들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전례운동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개혁이 도입됨으로써 이 괴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대중 신심 중에서 성탄 대축일 전 새벽미사는 주목할 만하다. 필리핀에서는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며칠 동안 새벽미사와 성야 행사를 거행하는데, 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농부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른 시간에 미사를 했다고 한다.
「심방 가비」(Simbang Gabi)는 마리아를 기리는 9일간의 새벽미사이고 「파눌루얀」(Panuluyan)은 자정 미사 전인 12월 24일 저녁에 거리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다.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여관을 찾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환대가 마리아와 연결된다. 즉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마리아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성주간에는 성모 마리아 상을 중심으로 수난을 겪은 성인들의 상을 실거나 장식한 수레를 끌고 행렬을 한다. 성모상 앞을 행진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찬미가를 부름으로써 성모님의 슬픔을 함께 나눈다.
부활 대축일 새벽의 만남 행사는 필리핀 마리아 신심의 절정이다. 검은 천으로 가린 마리아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상을 모신 행렬이 마을 광장에 모여 마리아가 부활한 아드님을 만나는 것을 기념한다.
필리핀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필리핀 교회는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신앙에 자신들 고유 문화와 전통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한다. 토착화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필리핀 사람들 자신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행일2003-11-02 [제2371호, 10면]
가톨릭신문 박영호 기자
세부, 교구 편
5. 필리핀 세부, 막탄섬
필리핀은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에 있다.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1시간 빠르며, 인천이나 부산에서 마닐라공항, 세부공항
모두 직항이 있다.
막탄 섬(Mactan Island)은 필리핀 중부 세부 주에 있는 섬이다. 세부 동해안, 세부 시의 앞바 다 불과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세부 본섬과 막탄 만다우에 다리와 마르셀 페르낭 다리, 2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은 라푸라푸 시와 코루도봐 시의 두 자치 단체로 나뉘어 있다. 섬 중앙 부분은 세부와 국내외의 많은 도시를 연결하는 필리핀 제2의 막탄 세부 국제공항이 있고, 세부에 위치한 측면에서 수출 경제특구 등 산업 기지와 쇼핑센터 등 관광 명소, 맞은 편 동해안에는 해변, 리조트 호텔이 늘어서 있다.
공항에서 세부 시내까지는 차로 30 ~ 40분, 비치 리조트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막탄 섬은 경치가 아름다우며 통풍이 좋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부 리조트"는 여기 막탄 아일랜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외국인 이민자도 많다.
이 섬은 "막탄 전투"의 무대이며, 마젤란이 임종한 땅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유럽에서 서향 항로로 필리핀에 도달하여 세부 영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 왕을 준수했다. 그러나 무슬림 영주(다투)인 라푸라푸가 그것을 따르지 않자 서로 대립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서 마젤란은 전사했다. 이것은 필리핀인과 서양인 최초의 전쟁이며, 이때 마젤란을 격퇴했던 라푸라푸는 나중에 침략자에 대한 저항 영웅으로 여겨졌다.
섬에는 마젤란의 필리핀 기독교 선교와 세계 일주 도중에 죽음을 기념하는 《마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는 마젤란 함대의 병사와 싸운 《라푸라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일랜드 최대의 도시 라푸라푸 시는 그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막탄 섬은 세부 주의 주요 관광지로, 대다수의 관광객들이 막탄 섬에서 투어를 즐긴다. 막탄 섬은 산호섬으로 다이빙, 스노클링, 아일랜드 호핑투어, 젯스키, 세일링 등 최적의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섬이다.
비사야 지방의 유일한 아쿠아리움이 막탄 섬에 위치해 있다.
6. 마젤란선교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페르디난드 마젤란(영)]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마젤란이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독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마젤란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마젤란은 12살 때 왕궁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모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관계가 좋지못했고 늘 불화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과 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지만)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5척의 선박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는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마젤란에게 포르투갈로의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별한 허락을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 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 하에 선박 5천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목적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
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 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 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마젤란, 라푸 라푸 부족과의 전투장면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 상륙해 현지 원주민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 및 아랍인 이슬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 백년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 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트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부족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국 왕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그들이 별거 아닌 야만족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49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가 막탄 섬에서 부족들을 다스리던 부족왕 라푸 라푸를 죽이려 했고 라푸 라푸가 쫄아서 100명 남짓한 수 밖에 안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점도 있지만 부하들이 아무래도 불안하니 더 많은 병력을 데려가려고 충고했는데 산호초나 여러가지 환경 때문에 도저히 스페인 원정대 배가 막탄 섬에 다가갈 수 없었던 점이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병력을 조금 데려갔다. 게다가 대포를 챙기지 않았고 약간의 화승총만 챙겼으며 그나마 총알과 화약과 화살조차도 조금만 챙겨간 것도 화근이었다.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바닷가에서부터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와 무장, 지리적에서도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스페인인 부하 14명, 세부인 지원군 150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그러나 마젤란이 이끌던 선박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물론 그들이 수월하게 나머지 일정을 마친 것은 절대 아니다.
필리핀 막탄섬에 마젤란 기념비와 라푸 라푸 동상
하지만, 정작 라푸 라푸에 대해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를 영웅으로서 교과서에 쓰는 필리핀에서조차 자세한 삶에 대한 걸 찾고자 노력하지만 스페인이 쳐들어와 막탄과 세부의 많은 부족들을 학살하면서 그들 기록도 불태우는 통에 이제 더 연구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 마젤란 기념비.
▲ 라푸라푸 동상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진 마젤란과 스페인 선원들의 죽음은 스페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보복을 결심하고 대규모 원정대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원정대는 조직적인 공격으로 적대적인 필리핀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특히 저항이 심했던 사이판 섬의 차모로족은 잔혹하게 학살당했고 다른 섬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하면 스페인은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으나 포르투갈과 시라고사 조약을 새로 맺으면서 필리핀과 그 근처의 괌- 북마리아나 제도 등은 스페인령 동인도라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미국-스페인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식민지로 변한다.
그리고 마젤란을 기리는 큰 십자가가 필리핀에 세부에 세워져있는데 이걸 조금씩 떼어내서 먹으면 몸에 좋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로 십자가가 손상되어 지금은 보호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반대로 침략자 수괴를 뭐하러 기리냐며 허구 헌날 십자가에 불을 지르거나 저주하거나 하는 글귀를 적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마젤란 여정 지도
* 1519 -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
* 1521 - 마젤란은 필리핀 원주민에 의해 5월 27일 살해당함.
* 1522 - 9월 6일 마젤란의 선원 중 18명과 배 1척만이 귀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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