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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문명의 기원,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인류 문명을 일으킨 다섯 가지의 원소, 나무(木)와 흙(土)과 물(水)과 그리고 철(金)과 불(火), 지금부터 그 기원을 찾아 거대한 여정을 떠납니다. 옛날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나무는 신성한 존재란다. 뿌리는 지하세계를, 줄기는 지상세계를, 나뭇 가지는 하늘을 의미한단다. 우리의 영혼은 이 나무에서 나왔고 그것을 일탕 가다르가 라고 하지, 우리는 숲을 존경해야 한단다. 겨울이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러시아 동부 시베리아에 위치한 브라트 공화국의 한 작은 섬, (동영상),
발렌틴 하그데이예프 60세/시베리아 샤면: 샤먼들에게 나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 신화에서 샤먼은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에서 힘을 얻게 된다고 해,
내레이션: 올해 예순 살의 샤먼인 발렌틴씨는 적어도 매주 한번씩은 두 딸과 함께 이 험한 눈길을 오간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발렌틴씨의 9대 조상, 그러니까 300년 전부터 지속해 왔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슈리탄 할라산에 있는 샤먼의 숲, 숲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염원을 담아 색 천을 나무에 묶는다. 그리고 왜 이 숲이 신성한 곳이며 어떻게 존경을 나타내야 하는지를 배운다.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래된 교육과정인 셈이다.
발렌틴: 여기 묶인 다양한 색 천은 신들에게 바쳐지는 것인데,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령 붉은 색은 생명의 피를 의미하고 녹색은 땅, 푸른 색은 하늘, 노란 색은 태양, 흰색은 달과 영혼의 순결을 의미하지요. (나무 불을 피워놓고 북을 두드리는 동영상),
내레이션: 높은 하늘 아버지여, 넓은 땅 어머니여, 하늘 신 탱글이여, 우리의 육체를 보호하소서, 우리를 진실의 길로 인도하소서, 발렌틴씨는 이런 염원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조상들의 영혼에 닿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런 샤머니즘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지구상에서 가장 외지고 깊고 혹독한 기후를 가진 호수 바이칼 호, 이 호수 가운데에 올혼 섬이 있다. 샤먼들에게 성지라 여겨지는 곳, 바이칼 호수를 지구의 배꼽이라 여겼던 시베리아 샤먼들은 하늘과 가장 소통하기 좋은 공간을 이곳이라 여겼고 수백 리 길을 말 타고 달려와 동굴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한 때 수천 명에 달했지만 이제 수백 명에 불과한 시베리아의 샤먼들, 그러나 발렌틴씨는 지금도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며 세르게라 불리는 이 나무기둥이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라 믿는다.
발렌틴: 나무는 세계를 상징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나무죠. 뿌리는 지하세계를, 그리고 줄기는 하늘 세계를 뜻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우리 샤먼의 영혼인 이 나무에서 자라난다고 하죠. 브라트어로는 ‘알탕 가르다가’ 라고 해요. 이 신성한 나무에서 우리는 숲과 타이가의 혼에게 기도를 합니다.
내레이션: 그랬다. 시베리아 기마 민족에게 나무는 신성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통로였다. 그리고 이런 샤먼 사상은 동아시아 곳곳으로 전해져 권력의 상징이 됐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릴 것 같은 선비족의 금관, 나무 위에 하늘의 전령인 매가 앉아있는 흉노족의 금관,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호부라칭 무덤에서 발굴된 이 금관 역시 사슴과 나무로부터 지혜를 전달 받는 여신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나무는 고대인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세계 곳곳에서 나무는 지속적으로 지혜의 코드를 담기 시작했으며 우즈노 세계수 지혜의 나무와 같은 다양한 샤먼 사상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주 적성군 목각본에서 발굴된 5세기 신라금관에 나무와 사슴과 새가 등장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은 것이다.
최성애/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에서 나오는 금관이 여섯 개가 있는데요. 금관을 나뭇가지 형상으로 만들었던 건 신라 사람들도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신성한 존재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금관에 나무를 형상화한 조형미를 가지고 금관을 제작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나무는 필연적으로 태양을 향하고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 동양사상에 나무가 동쪽을 의미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태양빛에 성장한 나무는 권력자의 그것처럼 생명을 건사하고 생존의 질서를 관장한다. 이렇듯 인간에게 지혜의 전달자였던 나무, 그러나 나무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훗날 보편적 지식 전달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것은 종이였다. 중국 동부의 안휘현성에 있는 징현 마을은 매년 가을이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 돼 뜰에서 가져온 볏짚을 석회가루에 묻혀 마을 뒷편에 있는 사이탄이라 부르는 자갈 언덕으로 오르는 것이다. 대나무 지렛대 양쪽에 40킬로그램씩 볏짚을 지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언덕,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고단한 일을 천년 넘게 해왔고 그것은 중국 종이가 걸어온 길이이기도 했다.
황희년(黃喜年)/40세: 저희는 지금 볏짚을 말리고 있어요. 5~6개월 동안 햇볕에 쬐고 비에 젖게 놔두면 자연적으로 표백이 되거든요.
내레이션: 볏짚을 돌산에 건조하는 것은 빨리 마르고 배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이 볏짚은 매일 뒤집으며 건조하길 5~6개월, 그러나 이건 종이 제조공정에선 시작에 불과하다.
형춘형(邢春滎)/제지장인: 선지(宣紙)는 줄고 두 가지 섬유로 만드는데 하나는 긴 섬유, 즉 나무껍질에서 나오는 섬유고, 다른 하나는 짧은 섬유예요. 짧은 섬유는 볏짚에서 나고요. 짧은 섬유가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먹이 퍼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내레이션: 볏짚이 보조적인 재료라면 주재료는 나뭇 껍질이다. 때문에 징현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담 나무, 이 청담 나무는 섬유질이 풍부하고 질겨 징현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종이를 만드는데 사용해 왔죠.
황춘형: 이 나무의 섬유는 조상들의 삶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어요. 그 때문에 저희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이 나무는 자신의 몸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학자들을 키워냈고 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세상 밖으로 내보냈을까. 청담 나무의 껍질은 10시간 넘게 삶은 다음, 여러 번의 세척과정을 거치면 고운 흰색의 섬유질이 남는다. 그리하여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남은 순도 높은 상태의 섬유질이 종이의 원재료다. 얻어진 나무의 섬유질은 볏짚과 일정한 배율로 섞어 여러 번 찧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섬유질이 잘 엉켜 질긴 종이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섬유질을 찧고 자르기를 하다 보면 어느덧 길고 거칠었던 섬유질은 부드럽게 변하게 된다. 흰죽처럼 변한 이것을 종이 죽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지통에 넣어 고루게 풀어내면 종이를 뜰 준비가 끝났다.
채전백(蔡全柏)/47세: 원재료를 갈아서 고르게 해야 하니까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야 해요. 고르지 못하면 만들어낸 종이가 오돌토돌 예쁘지 않아요. 종이면이 예쁘지 않게 돼죠. (종이 작업하는 동영상),
내레이션: 나무나 볏짚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다. 오로지 장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분말처럼 가늘고 얇은 섬유질뿐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백번 이상의 손길이 갔고 2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종이는 뜨거운 벽에 건조되어 완성된다. 천년 前 한 제지공이 이사 와서 만들기 시작한 이래 오로지 구전으로만 비법이 전수되어 왔다는 선지, 그렇다면 이 종이는 언제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중국 내륙의 유서 깊은 도시 한중, (채륜 종이문화박물관), 여기 종이의 神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채륜(蔡倫, 63~121년), 인류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장본인인 채륜이다. 한나라 시대였던 서기 63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채륜은 12살에 환관으로 궁에 들어가 20대 중반에 궁중의 물품을 담당하는 관리가 된다. 당시 품목들은 모두 죽간에 기록됐고 매일 들어오는 수백 근의 죽간은 보관조차 어려웠다. 죽간의 대체품을 찾았던 채륜, 고민하던 채륜은 결국 나무 속에 그 비밀이 있음을 알아냈고 切割(자르기)-洗조(씻기)-浸灰水(잿물에 담기)-蒸煮(삶기)-打漿(물에 풀기)-抄紙(종이 뜨기)-여紙(종이 말리기)-揭紙(완성), 서기 105년 최초의 종이 채후질을 만들어낸다.
한지운(韓智運)/채륜 종이문화박물관 관장: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무겁고 부피가 큰 죽간이나 나무 조각 비싸고 얇은 비단을 대체해 사용할 수 있었어요. 종이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글을 쓰는데 편리해 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거에요.
내레이션: 이곳은 누군들 붓을 기대고 싶지 않겠는가. 학자들은 머리 속에서만 지식을 담아놓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장미운(張美云)/중국 제지학회 부회장: 당송 시기 중국의 시가, 서예가 회화는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이것은 종이의 사용과 큰 관계가 있어요 왜냐면 시인이나 화가들이 자기의 생각을 종이에 그려내서 서로 충분히 교류하고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 기교의 발전을 촉진한 거죠.
내레이션: 나무의 변신, 나무는 샤먼 곁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나왔고 급속도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울의 인사동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시안의 슈원만걸, 당송 시대에 세워진 이곳은 중국 종이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며 지금도 수많은 성화를 비롯하여 문방사우 도장탁본 등 종이와 관계된 가게들이 즐비하게 성업 중이다. 한 나라로부터 당송에 이르는 시절에도 이 골목엔 매일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학문을 논했을 것이다.
형춘형: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일부는 화가가 그리는 게 아니에요. 붓의 움직임을 통해 종이에 흡수시켜 표현하는 부분이 많아요. 예를 들면 구름이나 안개 것들이죠. 이런 것들 을 그릴 수 있겠어요? 그릴 수 없어요. 완전히 종이에 달린 거예요. 종이의 흡수성에 의해 먹물이 퍼지게 하는 거에요. 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 휘종 북송,
내레이션: 문화의 황금시대인 당송 시대를 지나 중국 역사의 수많은 명인 서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오우도(五牛圖) 한황 당나라, 노산고도(盧山高圖) 심주 명나라, 국죽도(菊竹圖) 서위 명나라, 방왕유강산설제도(倣王維江山雪霽圖) 왕시민 청나라, 과연 그것이 종이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1600년 고찰 초당사, 동아시아의 불교의 본향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까지 중국 전역에서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이 동아시아 불교의 본향이라 불리는 까닭은 5세기초, 인도에서 찾아온 한 유명한 불교학자가 일궈낸 업적 때문이다. 일찍이 인도학 해다학에 관하여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습득했으며 현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이곳 초당사에 머물며 수많은 불경들을 한자로 번역해냈다. 석가에 의해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와 철학사상을 중국에 전파했던 그의 이름은 쿠마라지바(344~413년),
석체성(釋諦性)/초당사 주지: 쿠마라지바는 불경을 아주 세심하게 번역했어요. 불경 한 권 한 권을 다 직접 검사했죠. 다 함께 토론하고 한 구절씩 직접 검사를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불경은 사회전반, 세계 각지로 널리 전파됐어요.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등지로요.
내레이션: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중국의 사상가들과 논쟁하며 74부 343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해낸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은 그렇게 초당사에 머물던 한 승려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이처럼 석가가 인도 사르나트(Sarnath)에서 설법을 시작한 이래 파미르(Pamir)를 넘어 어렵게 중국에 도착한 불교, 이후 불교는 급속도로 주변에 전파되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 불경을 담아내는 종이였다. 글쓰기가 좋고 휴대가 간편했던 종이, 그래서 기록 문명의 시대를 연 종이는 이제 필연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중앙 아시아의 관문 도시 사마르칸트는 지난 2300년에 실크로드의 주역이자 동서 무역의 교차로였다. 사마르칸트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하듯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이고 흩어졌다는 이곳, 보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 빵, 내표시카는 과거 대상들의 식량이었고 세상 곳곳에서 온 온갖 종류의 종자는 이곳을 통해 번져나갔다. 실크로드의 시대, 사마르칸트야 말로 오늘날의 맨해튼이었던 것이다. (아프라시압 유적), 그러나 아프라시압, 진짜 사마르칸트의 전성기는 이 땅 속에 묻혀있다. 지난 3세기 몽골군이 들어와 처참하게 짓밟기 전만해도 이 길을 따라 중국과 서역의 대상들이 끊임없이 낙타 등에 비단과 보석, 도자기 등을 싣고 오갔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AD7세기), 아프라시압 유적에서 발굴된 벽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당시의 모습을 증언한다. 여기서 아프라시압 왕을 만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망라되어 있다. 7세기 북방 초원의 강자였던 돌궐인, 당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동쪽의 티베트인들, 실제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까지 등장한다.
사마리딘 무스타포 쿨로브/아프라시압 박물관 관장: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에 소그드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에 위치한 곳이었으며 소그드 교역가들이 실크로드에서 교역했습니다. 교역에 사용된 언어도 소그드어라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이 시대는 소그드 실크로드의 황금기로 불립니다.
내레이션: 실크로드의 황금기, 이슬람 세력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그러던 751년 오늘날 키르스탄에 있는 탈라스에서 운명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고구려인 고산지가 이끄는 당 나라군과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대결, 이것은 이슬람 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작은 전쟁에 불과했지만 문명의 전파로를 바꾸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시압강), 기록에 의하면 당시 포로로 잡힌 당나라 병사의 수는 약2만여 명, 여기엔 수많은 제지공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마르칸트를 가로 질러 흐르는 시압강 주변에 정착했다. 오늘날에도 시압강 주변에선 종이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는 뽕나무, 일찍이 비단 길을 통해 전해졌고 자생력이 좋으며 무엇보다 줄기 속에 섬유질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한 때 시압 강에만 2천여 개의 물레방아가 있었고 이들 중 300여 개는 종이공장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제지과정 역시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줄기를 삶고 찧고 찜통에 넣어 풀어낸 다음 대나무발로 한 장 한 장 떠내는 것, 다만 크기가 작고 뽕나무를 사용한다는 것이 중국 종이와 다를 뿐이다.
자리프 무타로프/사마르칸트 지 복원가: 사마르칸트 지는 일반 종이들과 달리 뽕나무 가지로 만듭니다. 만들 때 모든 과정이 물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종이는 물에 강합니다. 쥐와 벌레가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비단 같은 재질이기 때문에 좀먹지 않습니다. 종이 색깔도 노래서 눈이 덜 피로하고 양초나 전등 밑에서도 오랫동안 보고 쓰기 좋습니다.
내레이션: 제지의 마지막 과정은 대리석 판 위에 올려놓고 광을 낸다. 이 과정을 거치면 종이는 비단처럼 반들거리는데 이것이 바로 중앙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사마르칸트 지이다.
나짐 하비불라 예프/사마르칸트 지 전문가: 종이 발명 이전에는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수량이 제한되어있고 비쌌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내레이션: 여기 세계 12억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보물이 하나 있다. (우스만의 무스하프 꾸란 651년), 7세기 우스만 칼리파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고대 아랍어인 쿠픽체로 쓰여진 꾸란의 유일한 정본, 가죽으로 된 이 꾸란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 40 마리 이상의 사슴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의 전파와 함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종이는 가죽보다 싸고 얇고 가벼웠으며 대나무를 깎아 만든 펜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필사할 수 있었다. 종이가 꾸란의 전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경사들은 꾸란 외에도 수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 등을 잉크도 마르기 전에 출판했다.
나짐: 우리의 모든 지식이 종이에 옮겨지면서 세대를 넘어 전 세계로 널리 보급됐습니다. 종이는 혁명적인 발명품입니다.
내레이션: 8세기 당나라와의 탈레스 전투에서 승리한 이래 줄기차게 꽃피어 왔던 중앙 아시아의 푸른 이슬람, (이슬람 오타모스크),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무슬림들이 각자의 일손을 놓고 사원으로 모여든다. 어느 사원이나 마찬가지듯 손과 발, 얼굴을 씻는 우두는 예배 전에 무슬림들이 반드시 행해야할 예법, 하나의 염원, 구원을 향해 마음을 모우는 지금, 하루에 다섯 번 전 세계 12억 무슬림들은 오로지 한 방향 메카를 향해 신을 경배한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신 알라의 가르침을 전달받은 곳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 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고 알라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알라의 가르침은 사원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지식은 세상의 영광이고 무슬림의 명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은 지식의 전당이 된다. 모스크 곳곳에는 교육기관인 마드라사와 도서관이 설립됐고 학생들은 책을 통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마음 껏 습득했다. 이슬람 학문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학자들의 탄생과 함께 이슬람 학문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 (알 비루니 동양학 연구소), 중앙 아시아 필사본 중 가장 중요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이곳에 당시 이슬람 학문을 대표하는 고서가 있다. 그리스와 아랍의 의학을 집대성한 필사본, 유럽 학자들에게 까지 의성이라 칭송받던 사람, 이븐 시나의 의학 전도입니다.
시리 카리모바/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 부회장: 이슬람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이슬람 학문이었습니다. 이슬람 시대 학문의 정점은 9~11세기 였죠. 즉 이븐 시나가 살았던 시대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과 언어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주제가 이 사람의 손끝에서 쓰였고 과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이븐 시나(980~1037년), 어린 시절 의학에 입문한 이븐 시나는 이미 열 일곱의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븐 시나가 사용한 당대의 의료기구), 장대나물(Arabis glabra), 낙타봉(Peganum harmala), 그는 병리현상과 세계 각지에 있는 수많은 약초들을 분석했고 최초로 암의 전이과정을 알아냈으며 폐결핵이 어떻게 전염되는가를 밝혀냈다. 이는 당시 의학수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후 서양의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시리: 12세기에 그의 책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널리 보급되어 18세기 유럽의 의과대학에서 의학전범은 기본참고서가 되었습니다.
바흐롬 압두할리모프/알 비루니 동양학연구소: 이슬람 황금시대에는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 전체의 학자들이 이슬람 과학 최고의 저서들을 펴냈죠. 이슬람 황금시대에 출판된 다수의 저서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대학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습니다.
내레이션: 나무의 또 다른 얼굴인 종이, 중국에서 탄생한 종이는 이렇듯 대평원 중앙 아시아의 학문적 향기를 불어넣었다. 꾸란의 가르침대로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무슬림, 이렇게 중앙 아시아에 지식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종이는 여기 머물지 않고 다시 필연적인 여정을 계속한다. 중국에서 만들어졌고 (장안 105년-둔황 150년-두루판 296년/누란 260년-니야 300년-타슈켄트/사마르칸트 751년-바그다드 793년-다마스커스-알렉산드리아 900년-시칠리아 1056년-뉘른베르크 1319년), 중앙 아시아로 전해졌던 종이, 그 종이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탄생한지 무려 1000년이 넘은 12세기였다.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 그러나 이 작은 도시는 유럽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을 갖고 있다. (비텐베르크 성 부속 성당), 바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한 위대한 선각자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이곳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 (1483~1546년), 루터가 신학자로 있던 중세시대를 일컬어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유럽의 암흑기라 부른다. 오로지 교회의 성직자들만이 지식을 독점했고 독점된 지식을 바탕으로 절대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성직자들의 부패는 날로 거듭됐다. 급기야 문란한 성직자들은 대중을 현혹해 죄를 사해준다는 문서, 즉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그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동전이 돈 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오른다. 그것은 종교적 양심을 봉해버린 神權의 몰락이었다. 자연스럽게 교회 내부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직자로서 강한 책임감을 느꼈던 루터는 면죄부의 상업화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윽고 그는 부당함을 반박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어쩌면 목숨을 버려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만 해도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 몰랐을 것이다. 21조 사람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24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분별하고 얼토당토 않은 약속에 버젓이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박문은 교회 정문에 부쳐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필사되거나 전단지로 인쇄돼 단 2주만에 全 유럽에 전달됐다. 최초의 팸플릿 혁명이었다.
미르코 구치하/루터 하우스 학예사: 루터는 값싼 문자를 통해서 기존에 성서나 신학 사상 등에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보급할 수 있었죠. 많은 것들이 팸플릿, 즉 전단지로 보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단지는 몇 장 안 되는 값싼 종이에 표지없이 인쇄해서 빨리 재작할 수 있었고 제목에 바로 그림을 넣어서 구매자가 내용을 좀 더 오래 보게 했어요.
내레이션: 유럽의 암흑시대, 조종을 울리는 종교개혁의 또 다른 이름 팸플릿 혁명, 이것은 종이나 인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독일 마인츠에 있는 구텐베르크 박물관, 이곳은 지식의 독점이 아닌 지식의 보편화를 일궈냈던 인물이 구텐베르크를 위해 건립한 박물관이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1398~1468년), 주형으로 만든 활자, 15세기 금쇄공업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이 활자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인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활자만 맞추면 어떤 책도 혁명적인 속도로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노련한 인쇄공들은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책을 생산했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한 대 만으로도 일주일에 500권 이상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1500년까지 유럽에서 인쇄된 책이 약50종 2천만권,
엘케 수흐트킴/구텐베르크 박물관 부관장: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성공적일 수 없었을 겁니다. 구텐베르크 성서가 인쇄되어 나오고 얼마 안 되서 다른 내용들이 책으로 나왔어요. 개혁과 혁명,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의 많은 진보와 달성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종이를 손에 쥐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내레이션: 종이와 인쇄기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식을 얼마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 중세의 지식이 쌓여있어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마르차나 도서관, 16세기에 건립된 이곳은 만3천점에 달하는 중세의 개인 기록물과 기관 기록물 그리고 구텐베르크 시대의 인쇄물 2883점이 보존되어 있다.
엘리자베타 시아라/국립 마르치나도서관 컬렉션 관리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초판입니다. 마두치오가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인쇄했습니다. 그 당시 유업에서는 그리스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르네상스 시기인데요. 베네치아 (마르치나 도서관)가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 산치오, 1509~1511년), 역사엔 우연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너 자신을 알라고 부르짖었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수학의 아버지 피타고라스를 알 수 있었을까.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오늘날 유럽의 르네상스가 종이와 인쇄술 없이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종이는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을 밖으로 꺼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며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고 삶을 향기롭게 만든 또 하나의 숲이었다.
장미운: 채륜이 나무 껍질과 같은 식물섬유로 종이를 발명한 지도 1900년이 지났어요. 제지기술도 상당히 현대적으로 발전해서 종이가 없는 곳이 없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종이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심지어 종이의 존재를 망각해 버렸어요. 만약 종이의 발명과 광범위한 사용이 없었더라면 인류문명은 자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내레이션: 종이가 탄생한지 1800년, 오늘날 우리는 유례없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더 이상 종이를 찬사하지 않는다. 나무들이 빼곡했을 자리는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차지했고 종이가 아닌 전자문명이 지식문화를 대신하고 있다. 이제 전자문명에게 자리를 내놓고 홀연히 뒤로 물러서 있는 나무, 그러나 나무야 말로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준 문명의 어머니였다. 끝. (EBS 다큐프라임 1450회 5원소, 문명의 기원 1부 나무, 지식을 담다 에서 정리).
① 문명의 기원,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인류 문명을 일으킨 다섯 가지의 원소, 나무(木)와 흙(土)과 물(水)과 그리고 철(金)과 불(火), 지금부터 그 기원을 찾아 거대한 여정을 떠난다. 옛날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나무는 신성한 존재란다. 뿌리는 지하세계를, 줄기는 지상세계를, 나뭇 가지는 하늘을 의미한단다. 우리의 영혼은 이 나무에서 나왔고 그것을 ‘일탕 가다르가’ 라고 하지, 우리는 숲을 존경해야 한단다. 겨울이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러시아 동부 시베리아에 위치한 브라트 공화국의 한 작은 섬, 샤먼들에게 나무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져, 신화에서 샤먼은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에서 힘을 얻게 된다고 해, 올해 예순 살의 샤먼인 발렌틴씨는 적어도 매주 한번씩은 두 딸과 함께 이 험한 눈길을 오간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발렌틴씨의 9대 조상, 그러니까 300년 전부터 지속해 왔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슈리탄 할라산에 있는 샤먼의 숲, 숲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염원을 담아 색 천을 나무에 묶는다. 그리고 왜 이 숲이 신성한 곳이며 어떻게 존경을 나타내야 하는지를 배운다.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래된 교육과정이다.
② 여기 묶인 다양한 색 천은 신들에게 바쳐지는 것인데, 각각의 의미가 있다. 가령 붉은 색은 생명의 피를 의미하고 녹색은 땅, 푸른 색은 하늘, 노란 색은 태양, 흰색은 달과 영혼의 순결을 의미한다. 높은 하늘 아버지여, 넓은 땅 어머니여, 하늘 신 탱글이여, 우리의 육체를 보호하소서, 우리를 진실의 길로 인도하소서, 발렌틴씨는 이런 염원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 조상들의 영혼에 닿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런 샤머니즘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지구상에서 가장 외지고 깊고 혹독한 기후를 가진 호수 바이칼 호, 이 호수 가운데에 올혼 섬이 있다. 샤먼들에게 성지라 여겨지는 곳, 바이칼 호수를 지구의 배꼽이라 여겼던 시베리아 샤먼들은 하늘과 가장 소통하기 좋은 공간을 이곳이라 여겼고 수백 리 길을 말 타고 달려와 동굴에서 수행했다. 한 때 수천 명에 달했지만 이제 수백 명에 불과한 시베리아의 샤먼들, 그러나 발렌틴씨는 오늘도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며 세르게라 불리는 이 나무기둥이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라 믿는다. 나무는 세계를 상징한다. 바로 어머니의 나무다. 뿌리는 지하세계를, 그리고 줄기는 하늘 세계를 뜻한다. 신화에 따르면 샤먼의 영혼인 이 나무에서 자라난다고 한다. 브라트어로는 ‘알탕 가르다가’ 라고, 이 신성한 나무에서 우리는 숲과 타이가의 혼에게 기도를 한다. 그랬다. 시베리아 기마 민족에게 나무는 신성한 하늘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통로였다. 그리고 이런 샤먼 사상은 동아시아 곳곳으로 전해져 권력의 상징이 됐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릴 것 같은 선비족의 금관, 나무 위에 하늘의 전령인 매가 앉아있는 흉노족의 금관,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호부라칭 무덤에서 발굴된 이 금관 역시 사슴과 나무로부터 지혜를 전달 받는 여신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나무는 고대인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세계 곳곳에서 나무는 지속적으로 지혜의 코드를 담기 시작했으며 우즈노 세계수 지혜의 나무와 같은 다양한 샤먼 사상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주 적성군 목각본에서 발굴된 5세기 신라금관에 나무와 사슴과 새가 등장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③ 신라에서 나오는 금관이 여섯 개가 있다. 금관을 나뭇가지 형상으로 만들었던 건 신라 사람들도 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신성한 존재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금관에 나무를 형상화한 조형미를 가지고 금관을 제작하지 않았을까. 나무는 필연적으로 태양을 향하고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 동양사상에 나무가 동쪽을 의미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태양빛에 성장한 나무는 권력자의 그것처럼 생명을 건사하고 생존의 질서를 관장한다. 이렇듯 인간에게 지혜의 전달자였던 나무, 그러나 나무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훗날 보편적 지식 전달자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것은 종이였다.
④ 중국 동부의 안휘현성에 있는 징현 마을은 매년 가을이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 돼 뜰에서 가져온 볏짚을 석회가루에 묻혀 마을 뒷편에 있는 사이탄이라 부르는 자갈 언덕으로 오르는 것이다. 대나무 지렛대 양쪽에 40킬로그램씩 볏짚을 지고 올라야 하는 가파른 언덕,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고단한 일을 천년 넘게 해왔고 그것은 중국 종이가 걸어온 길이이기도 했다. 볏짚을 돌산에 건조하는 것은 빨리 마르고 배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이 볏짚은 매일 뒤집으며 건조하길 5~6개월, 그러나 이건 종이 제조공정에선 시작에 불과하다. 선지(宣紙)는 두 가지 섬유로 만드는데 하나는 긴 섬유, 즉 나무껍질에서 나오는 섬유고, 다른 하나는 짧은 섬유다. 짧은 섬유는 볏짚에서 나오고, 짧은 섬유가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먹이 퍼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다. 볏짚이 보조적인 재료라면 주재료는 나뭇 껍질이다. 때문에 징현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담 나무, 이 청담 나무는 섬유질이 풍부하고 질겨 징현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종이를 만드는데 사용해 왔다.
⑤ 나무는 자신의 몸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학자들을 키워냈고 또 얼마나 많은 지식을 세상 밖으로 내보냈을까. 청담 나무의 껍질은 10시간 넘게 삶은 다음, 여러 번의 세척과정을 거치면 고운 흰색의 섬유질이 남는다. 그리하여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고 남은 순도 높은 상태의 섬유질이 종이의 원재료다. 얻어진 나무의 섬유질은 볏짚과 일정한 배율로 섞어 여러 번 찧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섬유질이 잘 엉켜 질긴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이렇듯 섬유질을 찧고 자르기를 하다 보면 어느덧 길고 거칠었던 섬유질은 부드럽게 변하게 된다. 흰죽처럼 변한 이것을 종이 죽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지통에 넣어 고루게 풀어내면 종이를 뜰 준비가 끝났다. 나무나 볏짚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다. 오로지 장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분말처럼 가늘고 얇은 섬유질뿐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백번 이상의 손길이 갔고 2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종이는 뜨거운 벽에 건조되어 완성된다. 천년 前 한 제지공이 이사 와서 만들기 시작한 이래 오로지 구전으로만 비법이 전수되어 왔다는 선지, 그렇다면 이 종이는 언제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⑥ 중국 내륙의 유서 깊은 도시 한중, 여기 종이의 神이라고 불리는 사람 채륜(蔡倫, 63~121년)이 잠들어 있다, 인류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장본인이다. 서기 63년 한나라 시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채륜은 12살에 환관으로 궁에 들어가 20대 중반에 궁중의 물품을 담당하는 관리가 된다. 당시 품목들은 모두 죽간에 기록됐고 매일 들어오는 수백 근의 죽간은 보관조차 어려웠다. 죽간의 대체품을 찾았던 채륜, 고민하던 채륜은 결국 나무 속에 그 비밀이 있음을 알아냈고 切割(자르기)-洗조(씻기)-浸灰水(잿물에 담기)-蒸煮(삶기)-打漿(물에 풀기)-抄紙(종이 뜨기)-여紙(종이 말리기)-揭紙(완성), 서기 105년 최초의 종이 채후질을 만들어낸다.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무겁고 부피가 큰 죽간이나 나무 조각 비싸고 얇은 비단을 대체해 사용할 수 있었다. 종이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글을 쓰는데 편리해 졌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⑦ 학자들은 머리 속에서만 지식을 담아놓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당송 시기 중국의 시가, 서예가 회화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것은 종이의 사용과 큰 관계가 있다 왜냐면 시인이나 화가들이 자기의 생각을 종이에 그려내서 서로 충분히 교류하고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 기교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나무의 변신, 나무는 샤먼 곁을 떠나서 세상 밖으로 나왔고 급속도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울의 인사동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시안의 슈원만걸, 당송 시대에 세워진 이곳은 중국 종이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며 지금도 수많은 성화를 비롯하여 문방사우 도장탁본 등 종이와 관계된 가게들이 즐비하게 성업 중이다. 한 나라로부터 당송에 이르는 시절에도 이 골목엔 매일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학문을 논했다.
⑧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일부는 화가가 그리는 게 아니다. 붓의 움직임을 통해 종이에 흡수시켜 표현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구름이나 안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그릴 수 있겠나? 그릴 수 없다. 완전히 종이에 달렸다. 종이의 흡수성에 의해 먹물이 퍼지게 하는 거다. 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 휘종 북송, 문화의 황금시대인 당송 시대를 지나 중국 역사의 수많은 명인 서화들이 등장한다. 오우도(五牛圖) 한황 당나라, 노산고도(盧山高圖) 심주 명나라, 국죽도(菊竹圖) 서위 명나라, 방왕유강산설제도(倣王維江山雪霽圖) 왕시민 청나라, 과연 그것이 종이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중국 산시성 시안에 있는 1600년 고찰 초당사, 동아시아의 불교의 본향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까지 중국 전역에서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이 동아시아 불교의 본향이라 불리는 까닭은 5세기초, 인도에서 찾아온 한 유명한 불교학자가 일궈낸 업적 때문이다. 일찍이 인도학 해다학에 관하여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습득했으며 현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이곳 초당사에 머물며 수많은 불경들을 한자로 번역해냈다. 석가에 의해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와 철학사상을 중국에 전파했던 그의 이름은 쿠마라지바(344~413년), 쿠마라지바는 불경을 아주 세심하게 번역했다. 불경 한 권 한 권을 다 직접 검사했다. 다 함께 토론하고 한 구절씩 직접 검사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불경은 사회전반, 세계 각지로 널리 전파됐다.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중국의 사상가들과 논쟁하며 74부 343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해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은 그렇게 초당사에 머물던 한 승려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이처럼 석가가 인도 사르나트(Sarnath)에서 설법을 시작한 이래 파미르(Pamir)를 넘어 어렵게 중국에 도착한 불교, 이후 불교는 급속도로 주변에 전파되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 불경을 담아내는 종이였다. 글쓰기가 좋고 휴대가 간편했던 종이, 그래서 기록 문명의 시대를 연 종이는 이제 필연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⑨ 중앙 아시아의 관문 도시 사마르칸트는 지난 2300년에 실크로드의 주역이자 동서 무역의 교차로였다. 사마르칸트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하듯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이고 흩어졌다는 이곳, 보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 빵, 이는 과거 대상들의 식량이었고 세상 곳곳에서 온 온갖 종류의 종자는 이곳을 통해 번져나갔다. 실크로드의 시대, 사마르칸트야 말로 오늘날의 맨해튼이었다. 그러나 아프라시압, 진짜 사마르칸트의 전성기는 이 땅 속에 묻혀있다. 지난 3세기 몽골군이 쳐들어와 처참하게 짓밟기 전만해도 이 길을 따라 중국과 서역의 대상들이 끊임없이 낙타 등에 비단과 보석, 도자기 등을 싣고 오갔다.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AD7세기), 아프라시압 유적에서 발굴된 벽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당시의 모습을 증언한다. 여기서 아프라시압 왕을 만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있다. 7세기 북방 초원의 강자였던 돌궐인, 당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동쪽의 티베트인들, 실제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까지 등장한다.
⑩ 그 당시에 소그드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에 위치한 곳이었으며 소그드 교역가들이 실크로드에서 교역했다. 교역에 사용된 언어도 소그드어라는 것이 증명됐다. 이 시대는 소그드 실크로드의 황금기로 불린다. 실크로드의 황금기, 이슬람 세력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그러던 751년 오늘날 키르스탄에 있는 탈레스에서 운명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고구려인 고산지가 이끄는 당 나라군과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대결, 이것은 이슬람 세력의 승리로 끝나는 작은 전쟁에 불과했지만 문명의 전파로를 바꾸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당시 포로로 잡힌 당나라 병사의 수는 약2만여 명, 여기엔 수많은 제지공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마르칸트를 가로 질러 흐르는 시압강 주변에 정착했다. 오늘날에도 시압강 주변에선 종이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는 뽕나무, 일찌기 비단 길을 통해 전해졌고 자생력이 좋으며 무엇보다 줄기 속에 섬유질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한 때 시압 강에만 2천여 개의 물레방아가 있었고 이들 중 300여 개는 종이공장에서 사용했다. 제지과정 역시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줄기를 삶고 찧고 찜통에 넣어 풀어낸 다음 대나무발로 한 장 한 장 떠내는 것, 다만 크기가 작고 뽕나무를 사용한다는 것이 중국 종이와 다를 뿐이다.
⑪ 사마르칸트 紙는 일반 종이들과 달리 뽕나무 가지로 만든다. 만들 때 모든 과정이 물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종이는 물에 강하다. 쥐와 벌레가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비단 같은 재질이기 때문에 좀먹지 않는다. 종이 색깔도 노래서 눈이 덜 피로하고 양초나 전등 밑에서도 오랫동안 보고 쓰기 좋다. 제지의 마지막 과정은 대리석 판 위에 올려놓고 광을 낸다. 이 과정을 거치면 종이는 비단처럼 반들거리는데 이것이 바로 중앙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사마르칸트 紙다. 종이 발명 이전에는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수량이 제한되어있고 비쌌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여기 세계 12억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보물이 하나 있다. 7세기 우스만 칼리파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고대 아랍어인 쿠픽체로 쓰여진 꾸란의 유일한 정본, 가죽으로 된 이 꾸란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 40 마리 이상의 사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이의 전파와 함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종이는 가죽보다 싸고 얇고 가벼웠으며 대나무를 깎아 만든 펜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필사할 수 있었다. 종이가 꾸란의 전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필경사들은 꾸란 외에도 수학 물리학 천문학 역사 등을 잉크도 마르기 전에 출판했다.
⑫ 우리의 모든 지식이 종이에 옮겨지면서 세대를 넘어 전 세계로 널리 보급됐다. 종이는 혁명적인 발명품이다. 8세기 당나라와의 탈레스 전투에서 승리한 이래 줄기차게 꽃피어 왔던 중앙 아시아의 푸른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무슬림들이 각자의 일손을 놓고 사원으로 모여든다. 어느 사원이나 마찬가지듯 손과 발, 얼굴을 씻는 우두는 예배 전에 무슬림들이 반드시 행해야할 예법, 하나의 염원, 구원을 향해 마음을 모우는 지금, 하루에 다섯 번 全 세계 12억 무슬림들은 오로지 한 방향 메카를 향해 神을 경배한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神 알라의 가르침을 전달받은 곳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 神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고 알라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알라의 가르침은 사원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지식은 세상의 영광이고 무슬림의 명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은 지식의 전당이 된다. 모스크 곳곳에는 교육기관인 마드라사와 도서관이 설립됐고 학생들은 책을 통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마음 껏 습득했다. 이슬람 학문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학자들의 탄생과 함께 이슬람 학문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됐다. 중앙 아시아 필사본 중 가장 중요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알 비루니에 당시 이슬람 학문을 대표하는 고서가 있다. 그리스와 아랍의 의학을 집대성한 필사본, 유럽 학자들에게 까지 의성이라 칭송받던 사람, 이븐 시나의 의학 전도다
⑬ 이슬람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이슬람 학문이었다. 이슬람 시대 학문의 정점은 9~11세기 였다. 즉 이븐 시나가 살았던 시대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철학과 언어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주제가 이 사람의 손끝에서 쓰였고 과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븐 시나(980~1037년), 어린 시절 의학에 입문한 그는 이미 열 일곱의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는 병리현상과 세계 각지에 있는 수많은 약초들을 분석했고 최초로 암의 전이과정을 알아냈으며 폐결핵이 어떻게 전염되는가를 밝혀냈다. 이는 당시 의학수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후 서양의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2세기에 그의 책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널리 보급되어 18세기 유럽의 의과대학에서 의학전범은 기본참고서가 되었다. 이슬람 황금시대에는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 전체의 학자들이 이슬람 과학 최고의 저서들을 펴냈다. 이슬람 황금시대에 출판된 다수의 저서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대학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⑭ 나무의 또 다른 얼굴인 종이, 중국에서 탄생한 종이는 이렇듯 대평원 중앙 아시아의 학문적 향기를 불어넣었다. 꾸란의 가르침대로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무슬림, 이렇게 중앙 아시아에 지식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종이는 여기 머물지 않고 다시 필연적인 여정을 계속했다. 중국에서 만들어졌고 중앙 아시아로 전해졌던 종이, 그 종이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탄생한지 무려 1000년이 넘은 12세기였다.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 그러나 이 작은 도시는 유럽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을 갖고 있다. 바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한 위대한 선각자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이곳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 (1483~1546년), 루터가 신학자로 있던 중세시대를 일컬어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유럽의 암흑기라 부른다. 오로지 교회의 성직자들만이 지식을 독점했고 독점된 지식을 바탕으로 절대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성직자들의 부패는 날로 거듭됐다. 급기야 문란한 성직자들은 대중을 현혹해 죄를 사해준다는 문서, 즉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그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동전이 돈 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오른다. 그것은 종교적 양심을 봉해버린 神權의 몰락이었다. 자연스럽게 교회 내부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직자로서 강한 책임감을 느꼈던 루터는 면죄부의 상업화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윽고 그는 부당함을 반박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어쩌면 목숨을 버려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만 해도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 몰랐다. 21조 사람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이다. 24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분별하고 얼토당토 않은 약속에 버젓이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반박문은 교회 정문에 부쳐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필사되거나 전단지로 인쇄돼 단 2주만에 全 유럽에 전달됐다. 최초의 팸플릿 혁명이었다.
⑮ 루터는 값싼 문자를 통해서 기존에 성서나 신학 사상 등에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보급할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팸플릿, 즉 전단지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전단지는 몇 장 안 되는 값싼 종이에 표지없이 인쇄해서 빨리 재작할 수 있었고 제목에 바로 그림을 넣어서 구매자가 내용을 좀 더 오래 보게 했다. 유럽의 암흑시대, 조종을 울리는 종교개혁의 또 다른 이름 팸플릿 혁명, 이것은 종이나 인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일 마인츠에 있는 구텐베르크 박물관, 이곳은 지식의 독점이 아닌 지식의 보편화를 일궈냈던 인물인 구텐베르크(1398~1468년)를 위해 건립한 박물관이다. 주형으로 만든 활자, 15세기 금쇄공업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이 활자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인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활자만 맞추면 어떤 책도 혁명적인 속도로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했다. 노련한 인쇄공들은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책을 생산했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한 대 만으로도 일주일에 500권 이상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1500년까지 유럽에서 인쇄된 책이 약50종 2천만권,
@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성공적일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 성서가 인쇄되어 나오고 얼마 안 되서 다른 내용들이 책으로 나왔다. 개혁과 혁명,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의 많은 진보와 달성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종이를 손에 쥐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았다. 종이와 인쇄기의 만남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식을 얼마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 중세의 지식이 쌓여있어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마르차나 도서관, 16세기에 건립된 이곳은 만3천점에 달하는 중세의 개인 기록물과 기관 기록물 그리고 구텐베르크 시대의 인쇄물 2883점이 보존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판은 마두치오가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인쇄했다. 그 당시 유업에서는 그리스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바로 르네상스 시기이다. 베네치아가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 산치오(1509~1511년), 역사엔 우연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너 자신을 알라고 부르짖었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수학의 아버지 피타고라스를 알 수 있었을까.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오늘날 유럽의 르네상스가 종이와 인쇄술 없이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종이는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을 밖으로 꺼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했으며 문화와 예술을 꽃피웠고 삶을 향기롭게 만든 또 하나의 숲이었다.
ⓑ 채륜이 나무 껍질과 같은 식물섬유로 종이를 발명한 지도 1900년이 지났다. 제지기술도 상당히 현대적으로 발전해서 종이가 없는 곳이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종이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심지어 종이의 존재를 망각해 버렸다. 만약 종이의 발명과 광범위한 사용이 없었더라면 인류문명은 자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 종이가 탄생한지 1800년, 오늘날 우리는 유례없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더 이상 종이를 찬사하지 않는다. 나무들이 빼곡했을 자리는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차지했고 종이가 아닌 전자문명이 지식문화를 대신하고 있다. 이제 전자문명에게 자리를 내놓고 홀연히 뒤로 물러서 있는 나무, 그러나 나무야 말로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달해준 문명의 어머니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