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10
문종
<가계도>
<가족관계>
첫 번째 부인 휘빈 김씨는 김오문의 딸로 4살 연상이었다. 문종은 어머니 소현왕후의 시녀 효동이와 덕금이를 좋아해 김씨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휘빈 김씨가 세자(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압승술을 써 문종의 사랑을 받으려다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압승술이란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태워 가루를 술에 타 먹으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술이다.
김씨를 쫓아내고 3개월 후 둘째부인 순빈 봉씨를 두 번 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봉씨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세자(문종)이 가까이 하지 않았다. 1430년 세종은 왕세자의 후궁제도를 법제화 했다. 그런 가운데 권전의 딸과 홍심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여 각별히 사랑했다.권전의 딸이 임신하여 딸(경혜공주)를 출산하자 세자를 원망했고 거짓으로 임신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나인 소쌍과 동참한 동성애자로 밝혀져 폐위하고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1441년에 홍위(단종)를 낳았지만 난산으로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현덕왕후로 추승되었다. 권씨는 겸손하고 공손하여 법도를 따랐고 마음가짐을 오로지 하고 경계하여 어김이 없었다. 부모를 잘 모시고 아랫사람들에게 온화하고 화목하여 숙녀로서 믿음성 있는 좋은 짝이었다. 죽기 전에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홍위를 부탁했다. 양씨는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현덕왕후 권씨 원혼이 세조를 복수 하다 1442년부터 대리청정을 한 문종은 1450년 왕위에 오른 후 권씨의 시호를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안산의 능호를 소릉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문종은 승하할 때까지 새 중전을 맞이하지 않았다. 현덕왕후는 세조 때 폐위되고 어머니 최씨와 동생 권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후일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하고 나서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었다. 화가 난 세조는 소릉을 파헤치고 관을 강물에 던졌다. 하지만 사림들은 계속 복위를 요청했고 1699년 숙종 때에 신원되었다. |
측우기 발명과 군권안정을 위해 노력하다.
1421년 세종이 즉위 한지 3년 만에 이향(문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29년 동안 세자로 머물렀다. 문종은 체격도 크고 수염도 풍성하여 마치 삼국지의 관우 같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 학문하기를 좋아하고 인간미도 넘치며 시에도 능했다. 세자 시절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 한 쟁반을 보냈다. 집현전 학자들이 먹고 보니 쟁반에 문종의 친필 시가 드러났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운치 있는 내용에 글씨도 명필이었던지라 집현전 학사들은 서로 돌려보며 쟁반을 쉽게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즉위 초부터 각종 질환으로 고생한 세종이 병상에 누운 것은 집권 18년차인 1436년으로 세자나이 23세 때 왕세자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겼다. 이른바 섭정을 결심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업무량을 줄이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했다. 정도전이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했다가 태종이 6조 직계제로 바꿨던 것을 세종이 다시 환원하는 셈이다.1442년 세자나이 29세 때 세종은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세자의 섭정체제로 바꿨다.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를 세자가 결재했다.
섭정攝政이란 임금이 직접 통치하지 못할 때 누군가가 대신 정치를 맡아서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렴청정과 대리청정이 있다. 수렴청정은 황태후나 대왕대비(임금의 윗대 왕비)가 맡아서 하는 것을 말하고, 대리청정은 임금의 아들이 맡아서 하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너무 어리면 수렴청정을 하고, 임금이 장성하면 대리청정을 하는 것이다. 대리청정代理聽政이란 "대리하여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임금 대신 왕세자가 자리에 앉아 대신들의 보고를 받는다. 왕이 병이 나거나 사정이 있을 경우 세자가 대신 하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엔 세자의 경험을 쌓기 위해 일부러 대리 통치를 맡기기도 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발을 쳐놓고 정사를 듣는다"는 뜻이다. 사극에서 어린 왕의 뒷자리에 발이 처져 있고, 그 뒤에 대비가 앉아서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장면. 뒤에 앉은 대비는 직접 대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임금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그러면 어린 임금이 이것을 듣고 정사의 결정을 했다. |
1450년 2월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8년의 섭정을 끝내고 왕위에 올랐다.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량도 많아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학문을 좋아했던 문종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나 측우기를 만들었다.
가뭄을 걱정하던 세자(문종)가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다. 정확히 얼마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고인 빗물의 푼수(分)를 조사했다.<세종실록> |
세자시절에 1445년 용이버천가와 1446년 훈민정음 창제에도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권력욕이 강한 동생들 때문에 후사를 걱정하다.
문종은 재위기간 2년3개월 대부분 병상에서 보냈다. 어의 전순의는 대신들에게 “성상의 종기에서 농즙이 많아 침이 저절로 뽑혔습니다. 오늘은 아픈 증세를 보이지 않으니 평소의 모습과 같았습니다.”고 했다. 병환에 차도가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1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수양대군(세조)가 독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 증거로 세조가 찬탈 후 전순의가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있다.
문종이 죽기 전에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러 세자(단종)을 잘 보위하라고 했다. 문종의 능은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