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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불길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다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이틀간에 놀랍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네 곳에 분산되어 예배를 드렸던 여자 성도들의 1월 19일 토요일 저녁 집회 때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다음 월요일과 화요일 곧 21일과 22일에 다시 이들 가운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 일 후 장대현교회에는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들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셔서 그곳에 모인 이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성령의 불길은 곧 평양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세 가지 방향에서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평양 대부흥 운동의 진원지였던 장대현교회가 사경회 이후에도 영적 각성 운동의 진원지로 계속해서 쓰임 받은 것입니다. 1월 14일과 15일 이후 장대현교회에서는 집회 때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16일 수요예배 때 그리고 20일 주일예배에서 다시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둘째는 평양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였던 남산현교회 담임목사가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처음 부흥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 시각이 완전히 변해 부흥 운동의 적극적인 옹호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1월 14일, 15일에 일어난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곧 전국의 감리교 중 가장 큰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가운데 가장 큰 두 교회가 먼저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고, 그 부흥이 불길이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어 교단을 초월하여 평양 전역의 교회들이 은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셋째, 미션스쿨들의 변화입니다. 평양 시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래서 이 학교들 가운데서 부흥 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1월 16일, 사경회가 끝난 이튿날 수요일 아침에 김찬성이 인도하는 숭덕학교, 스눅(Velma L. Snook) 여선교사가 맡고 있던 숭현여학교에서도 같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스눅은 바로 그날 아침 성경을 읽은 후 기도를 시작하자 한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어 나머지 다른 여학생들도 일어나 똑같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고, 오전 전체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들 학교 외에도 평양에는 숭실고보와 평양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2월과 4월에 이 두 학교 학생들 가운데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1. 성령께서 선교사 공동체에 찾아오시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1월 16일 선교사들의 정오 기도회 때 성령께서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경회 기간에도 계속되던 이 날 16일 정오 기도회에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모였으나 성령께서는 이들 가운데 똑같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선교사들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냉정을 잃지 않은 의료선교사 웰즈마저 그다음 날 흥분에 겨워 미국의 브라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어제 외국인 학교 작은 건물에서 모인 정오 기도회 때 똑같은 일이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위해 기도하면서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이 모임을 가져왔는데 우리의 기도가 놀랍게 응답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한국인들과 선교사 모두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오신 정도가 아니라 놀랍게 임하신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보고서를 보낸 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만큼이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현실감 있게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양 대부흥 운동의 역사를 글을 통해서 접하는데도 그때 임했던 그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가 아주 강력했던 것입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울면서 우리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나는 전에 그와 같은 기도회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말 그대로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 모두는 울부짖으며 우리들의 죄를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거슬리거나 죄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우리의 공동체에서 정결케 하시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날 얼마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선교사들 가운데 임했는지는 16일 정오 기도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한 스왈른이 1월 18일 브라운에게 보낸 서신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선교사들 또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힘입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꼭 놀라운 은혜의 소낙비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1월 16일 정오 기도회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시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함께 모였고, 그곳에 모인 이들은 2시간 동안이나 자신들의 죄악과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통회를 하면서 매우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로는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가져다주신 그 기쁨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와 같은 은혜의 역사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한 임재의 권능을 직접 보고 느끼는 그런 특권을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이 영적 운동이 교회의 최고 직분자들 가운데 가장 큰 권능으로 시작되었다는 참된 증거입니다.
1903년 하디로 인해 촉발된 원산 부흥 운동으로 한국인들만 아니라 업아력(Alexander F. Robb)을 비롯한 선교사들도 큰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평양 대부흥 운동에서도 한국인들과 선교사들 모두가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모두 다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선교사들 가운데 진정한 회개, 참된 부흥이 없었다면 한국교회 부흥 운동은 온전한 부흥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의 어느 부흥 운동이나 웨일즈, 인도 부흥 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 모두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2. 부흥의 진원지, 장대현교회
1월 16일 저녁 장대현교회 수요예배 때 전날의 성령의 역사가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 주 장로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자기 내면에 숨겨둔 죄악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는 앞에 나와 울면서 간음과 공금유용을 통회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그 현장에 있던 이길함 선교사가 증언한 대로 주 장로는 “무서운 심령의 비탄 속에 그는 ‘이제까지 세상 어디에 나와 같은 무시무시한 죄인이 있을까요?’”라며 울부짖고는 온 힘을 다해 자기 주먹으로 강단을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바닥에 주저앉고는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극심한 고통 가운데 뒹굴었습니다.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통회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날 또 하나의 놀라운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찬성이라는 한 젊은이의 고백이었습니다. 태평동에 살았던 그는 15살 때 결혼하고 3개월 만에 아내와 다투다 격분, 아내를 죽이고 집에서 도망 나온 것입니다. 행여 살인자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움 속에서 지내던 그에게 자비와 용서의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찬성이라는 이름을 쓰며 자신의 과거를 철저하게 숨기던 그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자신의 죄를 통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월 14일 월요일과 15일 화요일에 놀랍게 임했던 성령의 역사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통회하면서도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수요일 저녁 기도회 때 또다시 성령께서 그의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날 예배를 인도한 이길함 선교사의 간곡한 부탁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오늘 밤 여전히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심령이 있다면 그리고 아직도 평안을 얻지 못하는 영혼이 있다면 바로 이 시간, 그 죄의 짐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왜 홀로 그 죄를 지고 가려 합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죄를 오늘 밤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더 이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김찬성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떨리는 입술로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모든 죄인 가운데 제가 가장 큰 죄인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 날 동안 저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죄가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비록 제가 죽을지라도 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고 여러분 모두를 속였습니다. 저의 이름은 예찬성이 아닙니다. 저는 김찬성입니다. 10년 전 저는 태평동에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아직도 그곳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싸웠습니다. 저는 악한 분노 가운데 아내를 때려죽이고 도망쳤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이런 저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고 그곳에 참석한 온 교우들은 고개를 떨구고 그와 함께 통회했습니다. 바로 전날, 15일 강유문과 한 숭실고보 학생의 철저한 죄의 고백이 모인 이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회개의 불꽃으로 작용했던 것처럼 이날 주 장로와 김찬성의 고백은 마치 뇌관에 불을 댕긴 것처럼 폭발적인 회개의 역사를 촉발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찬성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던 바로 그 현장에 죽었다던 그의 아내가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남편 김찬성이 울면서 통회 자복하는 것을 처음부터 지켜본 것입니다. 아내는 집을 떠나 행방을 알지 못했던 남편을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만났고, 남편은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후 그들 부부는 다시 만나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고, 태평동에 살아 계신 김찬성이 아버지도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미션 스쿨 학생들 가운데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그다음 날 목요일, 1월 17일 아침에도 수요일과 마찬가지로 강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고, 그날 예배는 정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금요일에도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 금요일 오전은 수요일 아침이나 목요일 아침과 같이 회개와 눈물과 기도로 보냈습니다. 이처럼 장대현교회 사경회 마지막 이틀 동안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사경회가 끝난 16일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남녀 학생들 가운데 계속되었습니다. 상당수의 남학생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여러 시간 동안 대단히 비통에 젖어 있었고, 여학생들도 진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런 후 교실을 가로질러 자신들이 범한 몇몇 사람들의 손을 잡고 용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3.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는 불길
1907년 1월이 가기 전에 상당수의 평양의 교회마다 영적 대각성 운동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길함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도 마찬가지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공유했으며, 전에는 결코 불가능했으나 이제 평양은 한국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선교사, 한국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남학생, 여학생, 선생, 교회 직분자, 모든 계층과 신분의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합심하여 한 사람같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직되어 그들이 평양 시내와 한국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 선교사 웰즈(J. H. Wells)의 지적처럼 성령의 역사가 장로교를 넘어 감리교에서도 놀랍게 확산되었습니다. 2월 24일 일요일,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무어(J. Z. Moore)는 바로 그다음 날 25일, 감격과 흥분 속에 “어제 평양은 놀라운 날, 아니 가장 놀라운 날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그 현장에 참여하여 평양에서 놀라운 영적 각성 운동을 직접 목도한 감리교 선교사 노블(W. A. noble)도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습니다.
한국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을 부어주심의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사함이나 아직 회심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탄식하며 집에서 온밤을 지새웠습니다. …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많은 악기에서 나는 화음보다 더 조화를 이루는 수백 명의 기도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수백 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던 평양의 어느 감리교회에서 한 불신자가 난입하여 갑자기 “불이요 불”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여성 신도들의 자리 뒤편에 주로 앉아 있던, 집회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불신 여성들이 동요되면서 실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동요하여 한꺼번에 문 쪽으로 몰려가면서 현관 문짝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소리 지르고 절규하였습니다.
무어와 노블을 비롯한 문제의 현장에 있던 선교사들은 “그들은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분노한) 수많은 야수와 흡사했다.”라고 증언합니다. 많은 사람이 심하게 다쳤으나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몇 유아들이 거의 죽을 뻔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극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거친 신을 신은 미국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그런 사태가 발생했다면 분명히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마귀가 교회에 침입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 불신자 가운데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저녁 집회에는 많은 여자들이 참석하지 못했으나 선교사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국인 강사가 마무리 기도에서 그 장면을 심판 날에 비견하여 “그날에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무시무시한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외쳤던 것은 너무도 시의적절했습니다. 이날 있었던 거짓말 같은 난동 사건은 현장을 직접 목격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무어(Moore)와 노블(Noble)이 매큔(George McCune)을 비롯한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알려주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증언대로 영적 대각성 운동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역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평양 대부흥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미션 스쿨 학생들이 큰 은혜를 경험하더니 곧 숭실고보 학생들이 그 같은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숭실고보의 북감리교 선교사 베커가 증언한 대로 “수업 중에 가진 그 기도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여 그 교실은 통회의 외침과 흐느낌으로 가득 차 그것은 학생들 자신들의 죄의식으로 압도되고 전율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블레어(William N. Blair) 선교사의 말대로 “심지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울면서 그들의 잘못을 서로 나누느라 수업을 중단하기까지 했습니다.” 개학 후 2주간 성령의 역사가 숭실 학생 가운데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했던 놀라운 회개의 영이 숭실고보에 임한 것입니다. 학생들은 온갖 죄악을 다 토해내었습니다. 은밀한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학생들 가운데 일어난 이와 같은 놀라운 부흥 운동 이후 학생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학생들의 수업 태도와 경건 생활이 달라졌고,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또한 복음 전도에 뛰어들었습니다. 부흥 운동이 학교생활에 미친 결과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은 모든 학생들에 의해 밤과 아침에 충실하게 수행되었고, 반면 전 학생의 3분의 2가 방과 후 매일 기도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에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었습니다. 1907년 북장로교 선교회 평양 선교부가 보고한 대로 4월 한국 전역에서 교회의 사역을 비우고 온 신학교 학생들이 학기가 개강하는 주간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4월 6일 토요일 밤과 4월 8일 월요일, 그리고 4월 9일 화요일에 또다시 성령의 역사는 반복되었습니다.
이처럼 1907년 겨울 남자사경회에서 일어난 평양의 성령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어 평양 시내 남녀 어른들은 물론 보통학교,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 때 “한국에서 가장 희망 없는 지역”으로 알려진 평양이 기도와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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