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년(원성왕 10) 신라시대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연산군 4년(1498)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성종의 능(宣陵)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선능 동편이 있던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됐다. 이때부터 이름을 성종의 은혜를 받는다는 뜻의 봉은사(奉恩寺)로 바꾸었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던 곳이며 서산(西山) ·사명(泗溟)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하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화를 입었으나 다시 복원되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불탄 것을 숙종 때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였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전각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 재건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피난을 가던 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빠져 익사하였는데 그들의 혼을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齊)가 봉은사에서 열렸으며 현재도 매년 윤달에 수륙제가 열린다.
봉은사는 우리나라 선종(禪宗)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법왕루(法王樓) ·북극보전(北極寶殿) ·선불당(禪佛堂) ·천왕문(天王門) ·일주문(一柱門) 등의 당우(堂宇)가 있다. 철종 때 승려 영기(永奇)와 남호(南湖)가 조각한 《화엄경(華嚴經)》(81권) 《금강경(金剛經)》 《유마경(維摩經)》 등 불경판(佛經板) 13종, 3,479장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경판이 보관된 전각이 판전(板殿)인데 판전의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사망하기 3일전에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보물 제321호로 지정된 지정4년고려청동루은향로(至正四年高麗靑銅縷銀香爐)는 동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는데 이 향로는 사명대사가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한다. 홍무 25년 장흥사명동종(長興寺銘銅鐘)은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은 1392년에 주조된 종으로 원래 장흥사에 있던 것을 봉은사로 옮겨왔다.
일주문은1886년 건립되어 경내 법위 축소로 현재 위치로 옮겨진 뒤 1986년 양평 사나사로 이견 되었다. 이후 2011년 오봉산 석굴암으로 옮겨 불이문 역할을 하다가 2020년 5월 현재 자리로 돌아왔다.
진여문 앞쪽에 현판은 서예가 청남 오재봉이 썼고, 뒷쪽은 봉은사 주지를 지낸 석주스님 작품이란다
법왕루 뒷쪽에는 "선종종찰대도량(禪宗宗刹大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근대의 대표적 명필가였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전서체 글씨이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이며 세한도에도 찬의 글을 남긴 인물이다.
많은 분들이 대도량(大道場)으로 읽어야 하는데 대도장(場 마당장)으로 잘못 읽고 있다. 불교에서는 한자로 ‘도장(道場)’이라 쓰고 ‘도량(道場)’으로 읽는다. 부처님이 머무는 신성한 곳을 의미하므로 도량(道場)의 량(場)은 제단량(場)이나 장소량(場)으로 읽으면 된다.
편액의 禪宗宗刹大道場(선종종찰대도량)이라는 글을 禪宗甲刹大道場(선종갑찰대도량) 으로 읽는 분들도 있는데 쓰여진 전서는 甲(갑)이 아닌 宗(종)입니다. 禪宗다음에 宗刹의 宗(종)이 연속해서 나오므로 글의 멋스러움을 더하기 위하여 다른 유형의 전서체 宗(종)을 쓰신 것입니다.
* 참고로 봉은사를 선종갑찰 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봉은사 편액의 글씨는 종찰이다. 선종종찰(禪宗宗刹)은 선종갑찰(禪宗甲刹)과 같은 말로 봉은사가 조선 선종의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대도량 편액의 불기 2970년은 북방불기로 서기 1943년입니다. (서기년도 + 1027년)
진관사 대웅전 편액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다.
판전 현판은 세로 77㎝, 가로 181㎝.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3호. 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가 1856년(철종 9)에 썼다. 판전은 1856년 새겨진 『화엄경(華嚴經)』 목판을 비롯한 여러 경판(經板)을 보관하는 건물인데, 이 현판은 화엄경판의 각성을 봉축하기 위해 쓴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1852년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果川)에 있는 자신의 별서(別墅) 과지초당(瓜地草堂)과 봉은사를 왕래하면서 서예와 신앙생활로 한가롭게 보내다가 1856년 10월 10일에 71세로 별세하였는데, 이 현판은 그가 별세하기 사흘 전에 쓴 것이라고 전한다. 자형이 어리숙하고 점획에 꾸밈이 없는 졸박(拙樸)한 필치인데, 흔히들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특히 ‘殿’자의 왼삐침을 삐치지 않고 중봉세(中鋒勢)를 유지하여 위아래로 그은 다음 “七十一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란 낙관으로 마무리한 점은 청정무구한 심상(心想)을 드러낸 듯하다. 낙관에서의 ‘果’자는 그가 노년에 썼던 별호(別號)인 과로(果老)·노과(老果)의 줄임이다. 봉은사에는 이외에도 그가 쓴 대웅전 현판이 있는데 이 또한 꾸밈없는 필치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봉은사김정희서판전현판(奉恩寺金正喜書板殿懸板))]
1856년 추사 김정희가 별세 3일 전에 쓴 현판으로 판전은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영기스님이 판각한 화엄경 주석본 경판을 보존하고 있다. 판전 글씨 옆 낙관의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은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칠십일과'는 71세가 되어 사용한 추사의 호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카카오맵] 봉은사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http://kko.to/jTaq80kKq
답사 누락분
1, 미륵전 주춧돌에 시주자 명칭중에 창시개명자의 이름이 있다고한다.
2.흥선대원군 불망비
3.김정희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