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허심(虛心)
허심을 위한 공부로 첫째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것’과 ‘저 것’을 나누는 ‘피차’(彼此)는 ‘나’를 세우는 성심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나’를 주체로 세우고, 상대를 대상화하는 한, ‘나’와 ‘너’를 나누어 양 방을 모두 실체 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피차는 이쪽(차, 此=이것)과 저쪽(피, 彼=저것)인데, 이것과 저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각이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면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태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피차의 이분법적 의식을 걷어내는 일이다.
장자는 이를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이라고 했다. 피차, 즉 주체와 객체라는 말은 기준으로 삼는 시각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김민철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자』에서 ‘피차’(彼此)라는 말 대신에 ‘피시’(彼是)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是)는 ‘이것’이라는 뜻과 함께 ‘옳다’는 의미도 있다. 즉 피시의 구분에는 이미 시비판단의 계기가 전제되어 있다. ‘나의 쪽’이 옳다는 판단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는 ‘자아’ 문제와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 인식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다. 그러나 이런 의식 자체는 비난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거의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시비가 훨씬 더 줄고 평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주변을 둘러보면, 시비가 벌어지며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성심(成心)을 사심(師心)으로 삼는다. 사심은 성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허심으로 상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어리석은 자는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다. 성심이 없는데도 시비가 붙었다는 것은 오늘 월나라로 간 자가 어제 도착했다는 것과 같다. 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 것이라 했다”. 장자에 따르면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만이 동시적인 사태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과 사, 가와 불가처럼 짝을 짓는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장자는 “바야흐로 생이 있으니 바야흐로 죽음이 있고, 바야흐로 죽음이 있으니 바야흐로 삶이 있다”고 했다.
장자는 시비를 중단하라거나 소멸시키라고 하지 않고, 화(和)하라고 한다. 단(斷)도 멸(滅)도 아니고, 시비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화를 주장한다. '화하라'는 것은 시비를 잠재워버리거나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앎'에 기초한 시비의 근거가 서로 허구적인 것임을 깨달아서 스스로 풀어지도록(해소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시비’(和是非')는 시비하지만 시비가 없는 것이고, 시비가 없으면서도 각자의 시비가 모두 인정되는 것, 즉 양행(兩行)이다. 이런 화시비를 위해서는 자아의 판단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조화에 맡겨 분별지를 쉬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자연의 균형에 맡기는 것, 즉 ‘휴천균’(休天鈞)이다.
허심을 위한 다음 공부는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는 것이다. 생사, 가와 불가, 시비는 모두 상대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인데, 결국 상대하여 발생하는 것은 연관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 연관 역시 고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피차와 시비의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를 해체한 도추(道樞)에 서서 조지어천하라 권한다. 여기서 도추는 문을 여닫는 ‘지도리'이다. 지도리는 열림과 닫힘에 모두 다 관계 하나 어느 하나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열림과 닫힘의 근원이면서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나 모든 움직임을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 여닫히는 문의 움직임에 제한 없이 반응하나 열림이나 닫힘에 매이지 않는다. 도추는 텅 비어있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는 허심의 은유이다. 도추에 서면 시비를 가르는 기준점이 해소되기 때문에 개별자의 무궁한 시비에 자유롭게 응할 수 있다. 시비에 대한 ‘자아’의 편중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시비를 ‘부득이’라는 상황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즉 시비하려는 마음이 없이 ‘시비의 근거가 없는 시비’를 천균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도 동시적이고, 시비 역시 동시적으로 이 둘 모두를 상관적으로 포용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가와 불가, 생과 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도추의 관점이고, 조지어천이며, 밝게 비추는 허심이다.
허심을 위한 다음 공부는 각득기의(各得其意)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는 것이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장자>의 핵심이다. 장자의 기본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 있다고 본다.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는다.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 하늘의 무지개라 표현한다.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한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 할 때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다.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성은 상정(相正)이 아니라 상존(相存),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이게 자정(自正)이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 방식이다.
*요약 : 허심을 통한 시비 극복법
첫째, 피시방생지설’(彼是方生之說).
둘째, 화(和是非)하라.
셋째, 도추에 서서 조지어천(照之於天)하라!
넷째, 각득기의(各得其意)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