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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내 안에 선한 “나”이고 또 하나는 악한 “나”입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레르소나라고 합니다. 페르소나는 영어의 퍼슨(person), 즉 사람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persona의 어원은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7)라고 하여 인간의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미지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또한 이 말은 가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두 얼굴,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얼굴이며 다른 또 하나의 내 안에 악한 나는 세상적으로 찌들고 휩싸이고 갖은 추악한 내면을 가진 나의 또 다른 변신입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싸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리 속에서 싸우는 두 개의 “나” 때문에 가책과 고통과 무기력속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해서 우리의 삶이 반드시 승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지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안 것입니다. 2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나”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죄의 법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법입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아 항상 투닥 투닥 서로 싸웁니다.
그중에서도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내 마음의 선한 법을 자주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죄“를 “법”이란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때 법은 별 것이 아닌데 일단 법을 어기면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은 power를 말하고 지배를 말합니다. 롬7:1절에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power입니다. 힘입니다. 지배력입니다. 그래서 “법”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칸”,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는 방문객이 아닙니다. 아예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바울이 구원받지 않은 것입니까? 아직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까? 롬1장이 아니라 7장입니다. “롬1-3장에서 인간은 죄인이다. 롬3: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죄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그 피로 구원하셨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속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계좌이체하셨다.
그래서 우리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그 결과 5장,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받았다.
셋째 다만 이뿐 아니라 환란중에도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6장을 지나 7장으로 왔는 데 7:20,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23절, 그 죄가 나를 사로잡는다?“ 이해가 됩니까? 아니 하나님의 의가 우리속에 들어왔다면 우리속에 죄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했다면 우리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죄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구원받은 우리에게 죄가 거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를 지배하고 괴롭히고 있다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어떤 성질급하는 사람이 바울에게 항의합니다. “아니, 바울 사도님, 말이 안되잖아요? 당신안에 죄가 거한다는 것이 맞아요? 죄때문에 곤고한 자라고 한 말 맞아요? 어떻게 대 사도가 그럴 수 있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아니예요?” 하면 바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맞다니까요. 내가 날마다 그렇게 살고 있다니까요. 아마 당신도 그럴걸요.
한번 잘 살펴보세요. 그런가 안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나도 내 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보다 악이 강해서 내가 늘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기도도 안되고 하나님도 없는 것 같고 믿음도 포기하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집사, 권사가 아닌 것도 아니고, 모태신앙, 주일학교때부터 믿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부흥회때 방언받고, 새벽기도도 안하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여러분 속에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것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는 것 맞잖아요? 이유를 무엇이라고 둘러 대더라도 그 본질적인 이유는 죄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죄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롬7장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제가 며칠전 딤전1:15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할 때 그것을 과거형으로 말해야 합니다. “내가 전에 박해자였였고 폭행자였는 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였다“. 이렇게 말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중의 괴수“를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I am the worst sinner“. ”나는 지금 죄인중의 괴수다.
과거에 박해자였고 폭행자였는 데 지금도 죄인중의 괴수다“. 디모데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주후 약 63-4년에 디모데서를 썻습니다. 내일 모레 순교할 바울, 그는 그때 거의 성자였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자신이 지금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었지만 지금도 죄인이다. 죄인중의 괴수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롬7장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과거에 죄인이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지금도 죄인입니까? 욥기에서 최고의 감동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욥9:1-2절입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이 그 길고 긴 고난속에서 발견한 것이 이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몇 년전 제가 외국에 나갔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마침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았는 데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높이뛰기 하는 선수가 장대를 넘는 모습이 실려 있었습니다. 어떤 선수가 2미터 40센티를 뛰어넘었답니다. 사진으로 보았더니 대단합니다. 아슬 아슬하게 장대를 뛰어 넘는 데 스릴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비행기 창가에 앉아 있었는 데 마침 비행기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육상선수가 떠 오르면서 그가 뛴 2미터 40센티가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운동장에서 목숨걸고 뛰었겠지만 저 구름밑에, 어느 저 산밑에 작은 운동장에서 일어나 인간의 일이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그럴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구름 밑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선과 함께 악이 있고 우리 속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것이 reality,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거룩해졌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죄는 우리의 “현실적 자아”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합니다.
그냥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속에 거할 뿐 우리가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It is sin living in me“. ”내안에 사는 죄“입니다. 죄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는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나는 죄를 가진 존재일 뿐 내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롬7장에 내 안에 죄가 있다고 3번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이란 말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는 자는 ”현실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본성적 나“가 또 있습니다. 그 ”나“는 죄와 상관없습니다. 17절 봅니다. 롬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죄속에 거하는 “나”와 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나는 죄를 짓기 원치 않습니다.
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현실적인 나는 죄와 함께 삽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나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합니다. 현실적인 내가 죄를 짓는다고 본래적인 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나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본래적인 나를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옛사람, 곧 죄가 거하는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이 생겼는 데 그것이 본질적인 “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이 롬7장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려는 “나”입니다. 본래 죄의 지배를 받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께끗해지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롬5:19을 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담 이래 우리를 지배했던 옛 본성이 죽고 새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죄를 다 없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이고 죄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오래전 자녀들을 키우면서 경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는 데 제가 집앞에 도착하자 멀리서 아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아빠”하고 달려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뛰어오는 아들을 보니까 옷이 온통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순간 제가 어떻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아들을 피해야 하나? “너 옷부터 씻고 아빠한테 와” 해야 하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들은 달려왔고 제 옷은 순간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것은 아들을 데리고 세면장으로 간 것입니다. 먼 훗날 제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아들의 옷이 더럽지 않았나? 왜 그때 씻기기부터 안하고 안아주기부터 했니?” 답은 딱 하나였습니다. 아빠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은혜는 흙탕물부터 씻기는 것이 아니라 안아주기부터 하는 것입니다. “네 몸에 흙탕물 있잖아. 그것 씻고 와”.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나는 네 아빠야. 내가 너를 안아줄게“. 그날 아들이 흙탕물을 묻히지 않고 달려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아들이 흙탕물 뒤집어 쓰고 달려왔다고 더 나쁜 아들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가흙탕물 뒤집어 썻다고 아들에 대한 제 사랑도 흙탕물처럼 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은혜는 상대방에 따라 내 사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에 따라 상대방이 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상대방을 고친 후에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주고 고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속에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은 맞지만 로마서 어디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롬3:21절 이전입니다. 롬3:2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후” 로마서는 한번도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제가 2000년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수술하고 무릎에 쇠를 박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철들었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통사고 나고 철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몸에 철이 있다고 제가 철인은 아닙니다. 제 몸에 철이 있을 뿐이지 제가 마징거 제트는 아닙니다.
우리안에 죄가 거하여 우리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롬3:21절 이후 성경은 예수믿고 달라진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 수가 무려 63번이나 됩니다.
자, 이 부분을 정리할 때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에게는 타락한 본성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나님의 의가 들어가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본성이 바뀐 것입니다. 사람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없으면 좋지만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몇 가지로 현대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금단현상이다. 금단현상은 마약을 끊은 사람의 후유증입니다. 헤로인이나 대마초같은 마약을 끊었지만 하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끊은 뒤에 몸이 떨이고 정신이 혼미하고 다시 마약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는 현상입니다. 금단현상은 마약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면서 갖는 부작용이 아니라 안하려고 하다가 생긴 부작용입니다. 견뎌내면 점점 마약이 멀어집니다.
두 번째 죄의 패잔병이다. 6.25 이후 공산당들이 지리산에 숨어 오랫동안 양민을 괴롭혔습니다. 괴롭힌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패잔병은 본진은 사라진 것입니다. 대장, 주력부대는 철수했고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군인 얼마가 남아 있습니다. 전쟁때보다 더 잔인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점점 세력을 잃고 있습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셋째 옛날 사귄 남자친구가 결혼한 옛 애인을 괴롭히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옛날 남자친구가 전화하고 몇 번 괴롭히지만 법적 권한이 없습니다. 여자만 흔들리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릭안에 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가진 의인이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새로운 본성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두 개의 내가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와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잘못입니다. 다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나쁜 것을 좋아할 때 그것 하지 말라고 하지 말고 더 좋은 것을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들이 어릴 때 닌텐도에 미쳤습니다. 하루 종일 그것만 합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고민을 많이 하다가 하루는 농구장에 데리고 가서 농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농구에 재미붙이다 보니 닌텐도를 안합니다. 그러다가 대학들어갔는 데 예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농구 끊으라 안 했는 데 슬금슬금 안하더니 여학생만 따라 다닙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은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을 버린다“. 자, 우리가 죄속에 사는데 죄와 싸운다고 쉽게 죄가 끊어집니까? 예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동쪽에서 해가 뜨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어둠과 싸우지 않아도 빛이 비치면 어둠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21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아들이라 불러 달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아들이 아니니 이제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지었다는 아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아들이 아니라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종이라 불러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의 잘못보다 아버지의 자비가 더 컷습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아들의 잘못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힙니다. 옷은 사람을 입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필요하지만 옷이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잘못도 덮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잘못한 것은 마치 더러운 옷을 입은 것과 같아. 더러운 옷은 벗고 다시 입으면 돼. 옷이 너는 아니야. 너는 옷보다 귀해. 옷이 잘못됐지 네가 잘못된 것은 아니야. 괜찮아. 힘내. 내가 옷을 바꿔줄게”.
아들은 자기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줍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네가 잘못한 것은 맞아. 그렇다고 네가 내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니야. 내가 너를 낳았는 데 네가 아들이 아니라고 아들이 안되는 것은 아니야. 자, 반지를 끼어봐. 이 반지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신호야. 이 반지는 내 모든 재산이 네 것이라는 뜻이야. 내가 죽으면 네가 주인이라는 뜻이야. 네가 잘못했다고 내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야”.
자기를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신발을 신깁니다. 옛날 노예들에게는 신발이 없었습니다. 신발을 신기면 도망가기 때문에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기를 종으로 여겨 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깁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니까 신발을 신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너는 자유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맞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로운 본성의 사람과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싸워 자주 죄의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괜찮아. 너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이야. 너의 본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의로워졌고 너는 이미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지금 짓는 죄는 죄의 패잔병이야. 곧 모두 사라질거야. 힘내”. 또 말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아니야. 너는 여전히 내 자녀야. 자, 네손에 반지를 끼워줄께. 아들이 한번 실수했다고 버리는 아버지는 없어. 괜찮아. 나는 네가 죄를 짓는 것보다 죄짓고 실망하여 낙심한 것을 더 슬퍼한단다. 괜찮아. 힘내”. “하나님, 이제 저는 종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종이라니. 종 아니야. 내가 네 발에 신을 신겨줄게. 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야. 너는 두려워 하는 종이 아니라 자유하는 아들이다. 자유를 누려라. 행복해라. 승리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할게. 네가 나와 함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이윤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