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 1-2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예루살렘을 총 다섯 번 정도 올라간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즉, (1) 다메섹을 떠난 후의 방문(행 9:26-30; 갈 1:18-20), (2) 기근 때의 방문(행 11:27-30), (3) 예루살렘 총회(공회) 참석차(행 15:1-30), (4) 두 번째 선교여행을 마치고(행 18:22), (5) 마지막 방문과 가이사랴 감옥에 갇힘(행 21:15-23, 35)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 1절에서 말하는 것은 (2)와 (3) 중 어디에 해당할까?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방문이 예루살렘 총회전인가의 문제인데, 만약 전이라면 예루살렘 기근 때를 말하게 된다. 바울처럼 논리 정연한 사람이 앞의 1차 다음에 2차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3차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히 2차를 말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2절을 중심으로 율법과 복음전파,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점에 대한 논쟁이 예루살렘 총회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여기 1절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방문은 위의 (3)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1절에서 말하는 “십 사년 후”라는 말을 근거로 바울의 회심은 A.D 32년, 예루살렘 1차 방문은 A.D 35년, 2차방문은 A.D 46년,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가 있었던 3차방문은 A.D 49년이었으므로, 처음 방문 때부터 계산을 해 보면 14년 정도로 맞아진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14년이라는 것은 사도가 정확한 년도를 말하려는 것보다는 회심 후 그의 복음 전도 사역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점과 그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리고 1절 끝에서 “디도”(Τίτον, Titon)를 데리고 갔다는 의미도 좀 중요하다. 사실 디도는 이방인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그의 제자(영적 자녀) 겸 동역자였다(딛 1:4, 5). 그럼에도 이 문제가 예루살렘 총회에 중심안건인 점에서 보면, 사도는 이처럼 할례 없는 이방인도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아마 이 견해가 그동안 많은 지지를 받아온 것 같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과 여기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에 이어지는 내용이 동일한 예루살렘 총회 때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다소 부족한 점이 발견된다. 우선 연대를 말하려면 사도행전이 아니라 바울이 직접 적은 갈라디아서가 더 우선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바울 스스로 여기 14년을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올라 갔다는 의미는 두 번째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계속 읽어 가면 그 내용이 분명해지겠지만, 사도행전 15장의 총회가 있기 전에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분명히 여기 1절에서 10절까지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앞으로 우리가 그 내용을 살피겠지만,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사로이 유력자들을 만났으며, 공개적인 공회에서의 논의과정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10절에서 보면 앞으로도 예루살렘 교회의 빈곤자들을 위한 구제에 더 관심을 쏟아줄 것을 당부하는 것을 볼 때,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세 번째의 방문이 아닌 두 번째의 방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더구나 우리는 10절을 지나, 11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교제를 하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뜬 것과 관련하여, 바울 사도의 호된 비판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여기 1절에서 10절의 기록이 예루살렘 총회 때의 일이었다면, 11절 이하의 베드로의 이중적인 행위가 드러난 안디옥사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분명 시기적으로 모순이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는 할례(율법주의)가 아닌 비할례(오직 믿음)에 대해서 고넬료 사건을 경험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이방인들에게 짐(멍에)을 지우지마라고 권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11절을 경계로 예루살렘 총회 전 후로 나눈다면, 베드로의 안디옥 사건은 그의 이전의 언행과는 도저히 일치가 되지 않는 모습을 확인케 될 것이다. 물론 백보를 양보하여 인간이기에 총회 이후에도 이럴 수 있다고 본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갈라디아서 2장 12절의 야고보에서 온 사람과 사도행전 15장의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가르친 사람과 별개로 볼 수 있는가, 왜 야고보는 총회 후에 사람을 보냈을까 또한 의문이며, 만약 이것을 달리 본다면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역사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갈라디아서 2장의 내용과 사도행전 15:1-2 모두 예루살렘 공회 이전에 있었던 것이며, 갈라디아서의 기록 역시 총회 이전에 된 것으로 보려고 한다. 나아가 이와 같은 일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 총(공)회가 열린 것이다.
2절에서 “계시를 따라 올라가”(ἀνέβην δὲ 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라고 먼저 시작을 한다. 즉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사도들에게 그가 그동안 전한 복음과 성경적 이론(교리)에 대한 수정을 위한 것이었다는 유대주의자들의 말을 논박하기 위하여,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셨음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이라 이어 적고 있는데, 유대주의자들은 항상 그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 및 야고보를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들은 바울의 교리를 승인하지 않았다며 사도를 깔보려는 모습도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이 권위로 이용하는 사도들을 빗대어 풍자적으로 “유력한 자들”(τοῖς δοκοῦσιν)이라고 표현하면서(다만 사도가 이들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라), 이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사사로이”(ἰδίαν, idian) 제시하였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사사로이”는 영어로 individually에 가까운 의미이기에 “개별적이며”, “하나하나”, “낱낱이”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모든 것을 제시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리고 2절 끝에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함은, 위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유력한 사도들(예루살렘 원사도)에게 사사로이 제시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그의 이방인 사역을 달음질 하듯 줄 곳 복음 사역을 감당해 왔던 것을 지지해주고, 율법주의에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다른 사도들과의 충돌로 그의 노력이 “헛되지”(κενόν, kenon)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도의 태도는, 그가 14년 동안 전한 복음에 의심이나 불안감을 품은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사역이 물거품이 되어버릴까 우려했던 마음에서 나온 결과였다.(이하 계속/ 구모영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