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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악령의 덫
베러가 물었다.
「당신은 믿어지세요?」
그녀는 필립 롬버드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세찬
바람에 흔들려 유리창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필립 롬버드는 고개숙이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범인이 우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판사가 이야기한 것 말입니까?」
「그래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판사의 말이 맞지
만 그러나…….」
베러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겠지요.」
롬버드는 얼굴을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수 없는 일뿐입니다. 다만 매커서 장군이 죽고
나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실이나 자살이 아
닙니다. 살인인 거지요. 이미 세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러는 몸을 떨었다.
「마치 악몽 같아요!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요.
」
「알고 있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침차를 날라다 주면 좋겠다는
평화로운 생각이겠지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1초도 방심해선 안 됩니다.」
베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만일 범인이 우리들 속에 있다면 누구라고 여기세요?」
롬버드는 갑자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우리들 두 사람을 범인에서 제외하고 있군요. 나도 같은 의견
입니다. 내가 범인이 아닌 것은 스스로 알고 있고, 당신도 정신이 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나는 여러 여자를 알고 있지만, 당신같이 머리가 영리한 여자는 없습니
다. 당신이 미쳐 있다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베러는 가냘프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그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 쪽에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군요.」
베러는 좀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인간의 목숨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 말했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그 레코드가 불어대는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
「그렇습니다. 내가 만일 살인을 한다면, 나에게 큰 해로움이 없는 한
하지 않습니다. 대량 살인 같은 건 나에게 맞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 둘을 뺀 다섯 사람을 생각해 볼 때 누가 UN 오윈일까요.
아무 증거도 없지만, 내 생각으로는 워그레이브가 수상해 보입니다.」
「어머나!」
베러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뚜렷이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 그는 나이가 들었고 오랫동안 판사
일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오랫동안 신의 대리 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과 사
를 맡고 있다는 기분이 되어 머리가 이상해지고, 그것이 다시 한걸음 나
아가 신을 대신하여 인간을 응징하려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군요.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롬버드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라고 여깁니까?」
베러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암스트롱이에요.」
롬버드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암스트롱? 나는 맨 마지막으로 그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데.」
베러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살인 가운데 둘은 독살이었어요. 아무래도 의사가 가장
수상해요. 또 지금까지 알고 있는 대로 말한다면 로저스 부인이 먹은 것
은 의사가 준 수면제뿐인걸요.」
「그건 그렇소.」
「의사가 정신이상이 된다 해도 겉으로는 여간해서 알 수 없어요. 더욱
이 의사는 과로하기 쉽고 신경도 피로하거든요.」
「그러나 매커서 장군을 죽일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내가 그와 떨어져
있었던 건 겨우 몇분 동안이었습니다. 잠깐 동안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
본디 장소로 돌아올 만큼 몸이 날랜 사나이는 아닙니다.」
베러가 말했다.
「그때 죽인 게 아니예요. 뒤에 기회가 있었어요.」
「언제?」
「장군을 부르러 갔을 때예요.」
롬버드는 다시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군! 그때에.」
베러는 말을 이었다.
「조금도 위험이 없잖아요? 의학 지식을 지닌 사람이 따로 없으니 죽
은 지 한 시간 지났다고 해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으니까요…….」
롬버드는 꼼짝 않고 그녀를 지켜 보았다.
「과연 그럴듯하군요. 아니면…….」
「누구일까요, 블로어 씨. 가르쳐 줄 수 없습니까?」
로저스는 표정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가죽 허리띠를 손으로 꽉 움켜
잡고 있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그게 문제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누구일까요?」
「모두들 그것을 알고 싶어하오.」
「그러나 당신은 짐작하겠지요.」
블로어는 천천히 말했다.
「짐작이야 하고 있소. 그러나 잘못 짐작했는지도 모르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범인은 꽤 냉정한 인간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오.」
로저스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로저스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같이…….」
블로어는 로저스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짐작되는 게 있소?」
로저스는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무서워서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암스트롱 의사는 격렬하게 말했다.
「이 섬에서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끽연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안경
다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기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 우리의 위험한 입장을 알
았다 해도 24시간 안으로는 배가 오지 못할 거요. 더욱이 24시간이 지나
도 태풍이 잠잠해질지 어떨지 알 수 없소.」
암스트롱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듯 말했다.
「그동안 우리들은 모두 같은 침대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온갖 수단을 다하여 경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소.」
의사는 생각했다. 판사 같은 노인은 젊은이보다 오히려 생명에 집착을
갖고 있다. 직업상의 경험으로 보아도 그런 사실에 자주 놀랄 때가 있다.
그는 판사보다 20살은 젊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열의는
판사에 비해 훨씬 뒤져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생각했다. 같은 침대에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의사
들은 무엇이나 자기 직업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평범한 두뇌밖에 갖고 있
지 않는 것 같다.
의사가 말했다.
「아무튼 이미 세 사람의 피해자가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경계를 게을리했기 때문이오. 우리들은 그들과 경우가
다르오.」
암스트롱은 괴로운 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누가 범인인지도 모르는데…….」
판사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암스트롱은 눈을 빛냈다.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워그레이브 판사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증거물은 아직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있소. 그러나 모든 사건을 자세히 검토하면 어느 한 사람을 확실히 지목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
암스트롱 의사는 판사의 얼굴에 눈을 못박았다.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밀리 브랜트는 2층 자기 방에 있었다. 그녀는 성서를 들고 창가로 갔
다. 그녀는 성서를 폈으나, 잠시 생각하고 나서 다시 덮은 다음 화장대
서랍을 열고 조그만 검은 표지의 수첩을 꺼냈다. 그녀는 수첩을 펴고 쓰
기 시작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매커서 장군이 죽었다. 장군의 사촌 형세는 엘
시 맥퍼슨과 결혼했다. 살인임에 틀림없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판사가 매우 흥미있는 말을 했다. 그는 범인이 우
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악령의 포로
가 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이번 일을 살펴 왔다. 누구일까? 모든 사람이 마음
속으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만은 알고 있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눈빛이 흐려져 왔다. 손가락 사이
에 끼워진 연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리고 있는 커다란 글자를 한 자
씩 쓰며 말했다.
――범인의 이름은 비트리스 테일러다……그녀의 눈이 감겨졌다. 갑자
기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떴다. 그리고 수첩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놀라 소리지르며 어설픈 글씨로 씌어진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내가 이것을 쓴 것일까. 내가……나는 머리가 돈 것일까…….
태풍이 맹렬해졌다. 바람이 저택을 뒤흔들며 울부짖었다.
모두들 거실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수선한 마음으로 한덩어리가 되
어 서로 경계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로저스가 차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커튼을 내릴까요? 그편이 더 마음놓일 것 같습니다.」
커튼이 내려지고 램프에 불이 켜졌다. 방안에 조금 밝은 공기가 감돌았
다. 내일이 되면 태풍이 자고 배도 오겠지.」
베러가 크레이슨이 말했다.
「차를 따라 드릴까요., 미스 브랜트?」
「네, 당신이 따라 줘요. 그 주전자는 무거워요. 나는 회색 털뭉치를 두
개나 잃어버려서 기분이 몹시 나빠요.」
베러는 차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사기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차! 오랜만에 맛보는 오후의 차!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밝은 기
분이 되었다.
롬버드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자 블로어가 장단을 맞췄다.
암스트롱 의사는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다른 때는 차를 들지 않던
워그레이브 판사도 맛있게 마셨다.
이 밝은 분위기 속에 로저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불안한 태도였고, 얼
굴빛도 달라져 있었다.
「어느 분이든 욕실 커튼이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롬버드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욕실 커튼이라고? 그것이 어떻다는 거요?」
「없어졌습니다. 저택 안의 커튼을 모두 내리고 다녔는데, 욕실 커튼이
없어졌습니다.」
판사가 물었다.
「아침에는 있었나?」
「있었고말고요.」
블로어가 말했다.
「어떤 커튼이오?」
「진홍빛 울 실크입니다. 진홍빛 타일에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
롬버드가 말했다.
「그것이 없어졌단 말이오?」
「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블로어가 억지로 지어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할 것 없소. 어차피 모든 게 다 이상스러우니까. 울 실크 커튼으
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소. 내버려둬도 괜찮을 거요.」
로저스는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방안에 새로운 공포가 일었다. 모두들 다시 경계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
다.
식사가 날라져 와 먹고 치워졌다. 거의 통조림뿐인 간단한 식사였다.
식사가 끝나 아까 모여 있던 거실로 되돌아온 그들 사이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9시가 되자 에밀리 브랜트가 일어섰다.
「나는 자겠어요.」
베러가 말했다.
「나도 자겠어요.」
두 여자는 2층으로 올라갔다. 롬버드와 블로어가 함께 나가 층계를 다
올라간 곳에서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두 방의 문
에 열쇠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블로어가 쓴웃음지으며 말했다.
「안쪽에서 잠가 두면 주의할 필요가 없지.」
롬버드가 말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 모두 오늘 밤에는 안전하겠지.」
그는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블로어가 뒤따랐다.
네 남자는 한 시간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은 함께 2층으로 올라갔
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다음날 아침 식사 때 쓸 식기를 정리하며 네 사람
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네 사람은 2층에 오르자 걸음을 멈췄다.
판사가 말했다.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열쇠를 채워 두는 게 좋소.」
블로어가 말했다.
「문 손잡이 밑에 의자를 놓아두십시오. 밖에서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롬버드가 말했다.
「블로어, 당신은 쓸데없는 것까지 알고 있군!」
판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들 자시오.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사히 만납시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나와 층계를 중간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네 사나이
가 저마다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열쇠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
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됐다.」
그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 준비는 완전히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조그만 일곱 개의 도자기 인형에 멈췄다.
「오늘 밤에는 아무도 장난치지 못하게 해야지!」
그는 식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고 다른 문으로 복도
에 나와 그 문도 잠근 다음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전등을 끄고
빠른 걸음으로 층계를 올라가 새로 옮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숨을 곳이라곤 한 군데밖에 없었다. 커다란 옷장이었다. 로저스
는 급히 옷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뒤 문을 잠그고 침대 옆으로 걸어
갔다.
「오늘 밤에는 인디언이 장난치지 못할 거야. 모든 문을 엄중히 잠가
두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