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 주일예배 <말씀대로 남았더라> 왕하 4:38~44절 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영적인 흉년은 육적인 흉년으로 이어졌다. 흉년 때문에 말씀이 들려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1. 흉년의 때에 말씀의 공동체에 머물러 앉아야 합니다. 기적의 삶은 연대기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엘리사의 기적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오므리왕족의 악행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기근과 결핍이 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살펴야 한다. 기근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삶의 결론이다. 흉년의 악순환을 가장 가까운 북한에서 보고 있다. 1900년 조선에 살다. 2008년출간. 아주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 20년이상 양주 춘천에서 교회개척을 하고 설립한 선교사님의 역할. 그 당시 생활상. 민며느리를 데려오려면 20끼 식사값만 주면 데려올 수 있었다. 아주 가난한 집 태어나자 마자 2-3살부터 시댁으로 보내어져 노예로 살게 됨. 우물에 빠져죽어도 그 다음날 다시 새 며느리를 데려옴.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였다. 너무 가난하니까 밥 한 끼에 노예로 팔려감. 흉년 기근 가뭄이 반복에 반복. 기독교가 들어오고 반만년의 기근을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가 들어와 자의식이 고취되니 산업이 발달하고 태풍 가뭄이 와도 딸과 며느리를 밥 한 끼에 팔아먹지 않는다. 얼마나 진정한 개혁이 중요한지 알겠는가? 미국의 열차에서 승객이 40분동안 성폭행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신고를 안하고 핸드폰으로 찍기만 했다. 인간의 악은 끝이 없다. 선지생도 공동체. 흉년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 이런 공동체가 무슨 힘이 있을까? 흉년 앞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기가 더어려운 공동체였다. 43절 그런데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이 100명. 밥을 줄수 있는 어용 사이비로 가면 굶지 않는데. 해결책이 가정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창2장24절, 마태복음. 말씀으로 가정과 교회를 세우셨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떠날 곳이 아니라 더욱 굳게 머물러야할 공동체이다. 붙어만 있으면 수지 맞는 공동체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 앉은 사람만 흉년 가운데 먹고 남은 것을 경험했다.
적용질문. 어떤 흉년을 겪고 있습니까 흉년을 핑계로 떠나려고 하는 곳은 가정 교회 어디입니까? 내 역할의 자리에 딱 앉아 있습니까? 어정쩡하게 서 있습니까? 딴곳을 바라보며 억지로 있습니까?
2.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38-39절) 엘리사는 흉년의 극복을 위해 설교하지 않는다. 국을 끓이라고 한다. 고대사본에는 이 사환이 게하시라고 한다. 국을 끓이려면 국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말씀 듣는 와중에 한사람이 국거리를 찾으러 나갔다. 흉년앞에 무슨 변변한 채소가 있었겠는가? 들호박은 겉모습은 호박인데 독성이 있었다. 흉년의 때는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분별이 안된다. 유혹이란 들호박처럼 교묘하기에 유사호박에 너나 없이 넘어갈 수 있다. 40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솥에 죽음의 독이 있다고 외친다. 엘리사말만 듣고 국을 끓였는데 먹다가 독이 있다고 한다. 평소에 먹지도 않을 것을 가지고 왔는데 독과 함께 가지고 왔다. 내 수준에 전혀 안맞는 배우자 학교를 낮추고 낮추어서 택했는데 거기에 독이 함께 온것이다. 날마다 복통과 흉통이 함께 온다. 조선의 여인들 중에는 너무 예쁘고 괜찮은 여인들이 잡혀가고 보쌈당하고 버림당하고.... 그래서 우물에 빠져죽은 여자들이 많았다. 교회다니고 인도받으며 결혼했는데 살아보니 독이 올라와서 함께 살수가 없다. 그 회사에 학교에 가정에 독이 함께 왔다. 내가 적용해서 갔는데 그럼 이것은 실패인가? 그래서 그렇게 이혼을 부르짖고 있는가? 우리가 말씀듣고 적용한 일중에도 실패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우리 해독공동체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내 결혼에 내 직장에 독이 있어요!! 이렇게 공동체에서 함께 외쳐주었다. 독이 있다고 날마다 기도하고 나누며 외치면 된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도와주신다. 금송아지 안섬기고 말씀 섬기겠다고 와 있는 건데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겠는가? 엘리사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41절) 가루를 가져오라고 했다. 더럽혀진 여리고의 물을 정화할 때도 소금을 뿌렸다. 흉년이니 뭔가 특별한 가루는 아니었을 것이고 가장 쉽게 구하고 흔하고 싼 밀가루를 던졌을 것. 이 흉년에 그 아까운 밀가루마저 버리게 된 일 아닌가? 가루를 솥에 던진 행위는 상식을 버린 처방같다. 독을 맛보았는데 다시 한번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여기 와서 다시 한번 남편이랑 살아라 부인이랑 살아라~ 하니까 도저히 못산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독이 사라졌다. 쓴 맛의 기억을 넘어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믿고 먹었더니 능히 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절대로 못살아 못살아 하는데 다 살게 된다. 먹기로 작정을 하면 그 옛날맛이 다 사라지고 생명의 맛으로 바뀔 줄 믿습니다. 죽을 것 같은 결혼생활 회사생활을 하고자 하면 마음만 먹으면 다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복음의 가루. 주님이 가루를 넣어서 도와주신다. 아무것도 아닌 목장에서 다들 살아난다. 용서란 과거를 흘러떠내려 보내며 내가 내린 선택이라는 것이다.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 끝없이 생각할 때 너를 이해하는 나의 지경이 넓어진다. 목장에서 이런 훈련을 끝없이 할 때 관계의 폭이 넓어져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없게 되어 흉년을 넘어서게 된다. 점점 케파가 넓어지게 된다. 이해 안되는 식구들과 살면서 이해하는 훈련은 돈주고도 못할 훈련이라는 것이다. 갈등에서 참고 인내하는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적용질문. 말이 안되는 적용으로 결혼하고 회사 가고 했는데 죽음의 독이 올라옵니까? 죽음같은 고난에서 채소캐러 가는 경험이 있습니까? 말씀의 해독가루로 없애야 할 내안의 독은 무엇입니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씀하신대로 독이 없어진 구원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모든 관계는 나를 위한 것임이 이해되십니까?
3.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2-44절) 바알 살리사에 사는 한 사람이 흉년중에 수확한 보리로 처음만든 떡을 가지고 옴. 바알 살리사 - 농사가 잘 됐지만 기복이 뭉쳐있는 곳. 그러나 그곳에도 한 사람이 있다. 셋째우상 셋째남편이란 뜻. 셋째남편을 만나서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 첫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러 가지고 온 믿음.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4번) 엘리사는 끊임없이 무리에게 줄것이 있는가 생각하는데 믿음이 없는 사환은 내가 어찌?가 전공이다. 말씀이 들어가면 가난해질 수 없다. 엘리사에게 이런 처방을 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먹고 남으리라 말씀하셨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알 살리사의 한 사람이다. 흉년과 기근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 헌물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가까워야 드릴 수 있다. 화목제. 하나님께 드리려고하면 사람들에게 줄 것이 많아진다. 처음 만든 떡을 드리는 믿음으로 먹고남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실 일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예배가 회복된 한사람입니까? '내가 어찌 이것을?' 이라며 지체들과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집과 목장은 해독 공동체입니까? 갈등 공동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