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3월 8일 임오 2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유생 이용서 등이 상소하여 정구와 장현광의 문묘 종사를 청하다
경외(京外)의 유생 이용서(李龍舒) 등이 상소하여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京外儒生李龍舒等上疏, 請以文穆公 鄭逑、文康公 張顯光從祀文廟, 不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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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7년 정묘(1807) 3월 29일(신미)
07-03-29[03] 경상도 유생(儒生) 이광리(李光理) 등 800인이 상소하여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문묘(文廟)에 올려 배향해 달라고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선조(先朝) 신해년(1791, 정조15) 봄 칠도(七道)의 유생들이 문목공 정구와 문강공 장현광을 올려 배향해 달라고 올린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에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조헌(趙憲)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일들을 많은 선비들이 누차 호소하였다. 너희들이 청한 바가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하셨습니다. 성의(聖意)가 특별히 김인후와 조헌을 지목한 것은 정구⋅장현광 두 신하를 공경하는 뜻을 보이신 것인데, 얼마 되지 않아 문정공(文正公)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는 일에 대해 먼저 윤허하는 하교를 받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사문(斯文)의 도통(道統)을 이은 오현(五賢) 가운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더욱 성대합니다. 그 문하에서 배운 선비로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 문충공 유성룡(柳成龍)이 정구와 함께 훈도(薰陶)를 더욱 절실히 받았고 장현광 또한 올바른 연원을 이어받았기에 모두 문묘에 올리는 일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네 신하를 일시에 함께 거행할 수 없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차라리 선조 때 이미 상소한 두 신하를 가지고 다시 호소하여 선왕의 비지에 담긴 유지(遺旨)를 따르고자 합니다.
정구는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외손(外孫)으로 징사(徵士)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유학(遊學)하였는데, 심법(心法)이 근엄하고 규모가 광대하여 우주 간의 허다한 사물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음이 없었고 예학(禮學)을 더욱 심오하게 공부하였습니다. 선묘(宣廟)가 산야(山野)의 선비를 뽑으라고 명하니, 팔징(八徵)에 비로소 응하였습니다. 혼조(昏朝) 때 모후(母后)를 별궁(別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간언을 올리는 차자(箚子)에서 대순(大舜)의 말을 인용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수의(收議)와 서로 표리가 되어 정인홍(鄭仁弘)을 배척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가 저술한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과 《가례(家禮)》의 〈부록(附錄)〉과 〈보주(補註)〉 등의 책은 상세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 대례(大禮)가 있을 때면 의조(儀曹 예조)가 와서 질문하였습니다. 또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치란제요(治亂提要)》, 《심경발휘(心經發揮)》 등의 책들은 모두 후학(後學)에게 지남(指南)이 되었습니다.
장현광은 약관(弱冠)에 학행(學行)이 특출해서 천거에 뽑혔는데 누차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 혼조에서 제수하였지만 그때마다 어기곤 하였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우선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제수되었습니다. 국초(國初)에는 이러한 관직이 없었는데 사유(師儒)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 영양(永陽)의 입암(立巖)에 깊이 들어가 죽음을 달게 여기겠다는 의리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정승에 막 의망되었을 적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저술한 《역학도설(易學圖說)》, 《상제수록(喪制手錄)》, 《관혼의(冠昏儀)》와 같은 편(篇)들은 모두 세상을 깨우쳐 주는 지결(旨訣)입니다.
두 현인은 모두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문묘에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난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선조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것은 마치 오늘날을 기다린 것과 같으니, 삼가 원컨대 특별히 문목공 정구와 문강공 장현광을 문묘에 배향하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해당 조로 하여금 내게 물어 처리하게 하겠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學業)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 오현(五賢) :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주-D002] 팔징(八徵) : 인재를 식별하여 등용하는 8가지의 기준이다. 그 내용은 “첫째 질문을 하여 답변하는 것을 살피고 둘째 말로써 궁하게 하여 변화를 살피며, 셋째 주변 사람과 함께하여 그 성실한지 살피고 넷째 명백하고 단순한 질문으로 덕성을 살피며, 다섯째 재물을 주어 청렴한지 살피고 여섯째 여색으로 시험하여 정조를 살피며, 일곱째 어려운 상황을 고하여 용맹함을 살피고 여덟째 술에 취하게 하여 태도를 살핀다. 이와 같이 팔징을 시험해 보면 어진 사람인지 불초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六韜 選將》[주-D003] 간언을 …… 인용하였고 : 〈계축년에 두 번째 올린 차자〉에서 폐모(廢母) 논의를 반대하면서 순(舜) 임금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이 세상에는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난날 섬기시던 그 자세를 한결같이 변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였다. 《국역 한강집 1 제2권 계축년에 두 번째 올린 차자》[주-D004] 약관(弱冠)에 …… 뽑혔는데 : 원문은 ‘弱冠被學行特異之薦’인데,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被’ 뒤에 ‘選於’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5] 국초(國初) : 원문은 ‘國朝’인데,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朝’를 ‘初’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 원문은 ‘樑木已摧矣’인데, 《승정원일기》 이날 기사에 의거하여 ‘已’를 ‘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민영 (역) | 2019
강 :
慶尙道儒生李光理等八百人陳疏請文穆公鄭逑 文康公張顯光躋享聖廡賜批
목
疏略曰先朝辛亥春七路儒生陳文穆公鄭逑 文康公張顯光躋享之疏批旨若曰先正金麟厚趙憲從祀文廟事多士屢籲爾等所請何異於是聖意之特拈金趙二臣以示欽尙於鄭張二臣而未幾文正公金麟厚先蒙允兪竊以斯文統緖五賢之中文純公李滉尤有盛焉及門之士文忠公金誠一 文忠公柳成龍與鄭逑薰陶益切張顯光亦承淵源之正故幷請陞廡之擧而旣承不可一時幷擧之敎則毋寧以先朝已徹之二臣更爲陳籲以追聖批之遺旨耳鄭逑以文敬公金宏弼外孫游於徵士曺植之門心法謹嚴規模宏大宇宙間許多事物無不以爲己責尤邃於禮學宣廟命擢山野之士八徵始應及昏朝別宮異處之議發而諫箚所引大舜之語與文忠公李恒福收議互相表裏以至斥絶仁弘所著五先生禮說及家禮附錄補註等書無不纖悉朝家有大禮則儀曹來質又有洙泗言仁錄治亂提要心經發揮諸書皆可爲後學指南張顯光弱冠被學行特異之廌屢召不起而昏朝有除輒違仁祖改玉首除國子司業國朝無是職而爲師儒特設也丙子後深入永陽之之巖以寓蹈海之義甌卜才擬樑木已摧矣所著易學圖說喪制手錄冠昏儀諸篇皆是牖世之旨訣兩賢俱以李滉嫡傳躋享之論殆近二百年先朝未遑之擧似若有待於今辰伏乞特下文穆公鄭逑 文康公張顯光躋享聖廡之命批以疏辭令該曹稟處爾等退修學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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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예(司藝) : 고려(高麗) 때 국학(國學)에 두었던 종4품 벼슬로서 주로 음악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국자감(國子監)이 국학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사업(司業)이 사예로 고쳐졌으나, 다시 사업ㆍ악정(樂正) 등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국학에서 바뀐 성균감(成均監)이 성균관(成均館)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다시 사예로 바뀌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