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의 진상
참혹한 병인박해는 조선 천주교회의 크나큰 승리로 장식되었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애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갈매못에서 순교한 안 다블뤼 주교, 민 위앵 마르띠노 신부, 오 오매트르 신부에게 박해의 먹구름이 몰려온 것은 국제적인 문제와 흥선대원군의 정치 야욕의 희생물로 제단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385-391)
수년 전부터 러시아인들은 만주(満洲)까지 와서 부동항을 개척하기 위해 조선 쪽으로 불안스러운 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합에 병합을 거듭하며 그들은 작은 강 하나만으로 경계를 이루는 함경도 북쪽 국경에까지 내려왔습니다. 1866년 1월에 러시아 선박 한척이 원산에 나타나, 거기서 통상의 자유와 러시아 상인들이 조선에 정박할 수 있는 권리를 아주 강압적으로 요청하는 서한을 조선 정부에 보냈습니다. 이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와 동시에 군부대가 함경도의 국경을 월경하였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이 사건은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황제의 허가 없이는 어떤 다른 나라와도 교섭할 수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북경으로 즉시 특사를 파견한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매우 불안하였고, 대신들은 그들의 난처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꽤 냉담했던 신자로 박해 기간에 총애를 잃었던 서울의 몇몇 양반들은, 러시아인들의 이 교섭을 천주교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얻어 주고, 그와 동시에 자기들로서는 수완과 애국심이 많다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김면호(金勉浩) 도마와 교구장이 거처하는 집주인 홍봉주(洪鳳周) 도마와 이퇴일(李堆-) 안또니오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하여 러시아인들에게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과 불란서와 동맹을 맺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편지를 쓰고,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이용하면 그보다 더 쉬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들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졸렬한 솜씨를 발휘해서 꾸민 이 편지가,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晋)이라는 사람의 손으로 대원군에게 제출되었습니다. 대원군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습니다. 징조가 좋지 못한 이 침묵에 김면호 도마는 몹시 겁을 집어먹고 곧 지방으로 내려가 숨었습니다.
김면호 도마가 도망 간지 2일 후에 왕의 유모 박 마르타가, 대원군의 부인을 보러 가니 부대부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왜 이렇게 가만히들 있는거요. 러시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빼앗는데, 아마도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을 주교가 여기 있는 것이 그렇게도 필요한데 지방 순회를 떠나는구려.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하시오. 내가 장담하겠소. 그 편지는 성공 할거요. 그리고 나서 즉시 주교를 돌아오시게 하시오.” 박 마르타가 홍봉주(洪鳳周) 도마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하니, 홍봉주 도마는 곧 승지 남종삼(南鐘三) 요한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편지를 다시 쓰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학식이 매우 높은 신자로 여러 선교사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리델(Ridel)신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궁중에 머무르면서 조정 대신의 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남종삼 요한은 편지를 쓰기로 동의하였고, 그것을 직접 대원군에게 제출하러 갔는데 그때 대원군의 주위에는 5, 6명의 고관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매우 주위 깊게 편지를 읽고좋소. 대신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하시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튿날 그는 남종삼 요한을 다시 불러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교리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참됨을 인정하였습니다.다만 내가 비난하는 것이 한가지 있소. 당신들은 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소하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이렇게 물었습니다.주교가 러시아인들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해요?물론입니다하고 남종삼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주교가 지금 어디에 있소. 서울에 있소?”
아니올시다.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렇지! 황해도에 천주교인들을 둘러보러 갔겠구먼.네 황해도에 계십니다.그러면 내가 좀 보았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알리시오.남종삼 요한은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방금 가졌던 대화를 이야기하였다.
종교 자유의 시간이 마침내 이르렀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신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우리나라 수도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지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김면호 도마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교를 만나 보기를 희망했는데도 아직 아무도 교구장과 그분의 보좌 주교를 모시러 가지 않은 것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두 분이 다 서울에서 엿새 길이 되는 곳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먼길을 가기에 필요한 돈이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북쪽에, 다블뤼 주교는 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딸의 시아버지 조기진이 이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비로 70프랑과그의 교군 중의 하나와 교군 두 사람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면호 도마는 베르뇌 주교에게 알리러 떠났고, 이퇴일 안토니오는 다블뤼 주교를 모시러 갔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베르뇌 주교는 4일 뒤에 도착하였습니다. 31일 남종삼 요한은 주교들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대원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꽤 냉정하게 맞아들였고, 입을 열기도 전에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니, 당신 아직 여기 있었소. 춘부장을 뵈러 시골에 간줄 알았었는데.”사실 시골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중요한 일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그렇고 말고요.” 하고 대원군은 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하나도 없소. 나중에 봅시다. 그리고 춘부장을 뵈러 간다니 모든 일에 대해서 그이와 좀 상의하시오.”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南尚教) 아우구스띠노는 84세의 노인으로 훌륭한 천주교 신자였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들의 입으로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너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일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너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너에게 사형 선고에 서명하라고 하면 거기에서 천주교의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도록 명심해라.”
남종삼 요한에 대한 대원군의 대접은 얼마간의 불안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설날이 가까웠다는 핑계로 회견을 늦추는 것을 보고. 그의 주교 순시를 공연히 중단한 것을 후회하였고, 주교는 이웃에 있는 부천과 인천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거기서 3일을 지내고 2월 5일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내포로 돌아가 늘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아니하였고, 5일부터는 집에서 외출한 것이라고는 북쪽지방의 몇몇 신입 교우에게 견진과 그 밖의 성사들을 주기 위하여 5분 거리에 있는 정의배(鄭義培) 마르꼬 회장 집에 두세 차례 간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2월 10일 페롱(Feron)신부에게 보낸 다음 쪽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 이 나라의 평화와 모든 사람의 머리를 번거롭게 하는 사정들이 다행스럽게 타결되기 위해, 미사 한대를 드리라고 신부에게 요청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임금의 모친이 각 선교사에게 이런 뜻으로 미사 한대씩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시오. 뭔가 좀 수상하지만, 그것이 이내 밝혀지지 않는구려 나더러 급히 돌아오라는 요청이 있었던 만큼 내가 돌아오는 즉시 대원군과의 면담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지금까지 아직 아무 일도 없어요. 면담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우리는 자유를 향해 커다란 전진을 했어요. 우리 주님과 착하신 성모님께 이 중대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시라고 기도합시다. 또 신자들에게도 아주 조심성 있게 행동하라고 부탁합시다.”
슬프다! 바로 그 시각에 그와 그의 모든 동료의 죽음과 조선의 천주교를 제거하기 위한 박해의 결정이 의결된 길이었습니다.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조정은 거의 복음에 대한 철저한 적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차례 박해령을 다시 선포하기를 요구하였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들은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는 러시아인들의 문제가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의 배가 물러가고 그들의 군대가 국경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처음에 불러 일으켰던 공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한편 1865년 12월에 북경으로 떠나간 조선 사절단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중국인들이 나라 안에 흩어져 있는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습니다. 이 편지가 1월 하순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4명의 중요한 대신들은 주교들에 대한 대원군의 교섭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서양인들을 증오해야 합니다. 그들과 동맹을 맺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끝장입니다. 서양 오랑캐를 모두 죽입시다. 천주교도를 모두 죽입시다하고 외쳤다. 대원군은 영불 연합군의 중국 원정과, 조선이 침입 당할지도 모른다는 점 등등을 상기 시켰습니다. 그들은아니올시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벌써 서양인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가 일찍이 그들의 죽음을 보복하려고 했습니까. 우리가 그때문에 무슨 손해를 입었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정 신부를 빗대고 말하는 것이었고, 또 어쩌면 여러 시기에해안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난파자들도 암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의견을 달리하던 흥선대원군은 그들이 내놓는 이유에 설복 당하고 그들의 광신에 질질 끌려갔던 것인가, 혹은 흥선대원군 자신의 권위를 위태롭게 하고, 자기의 지위를 위험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격류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나중에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그 시기에 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더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든 흥선대원군은 굴복하여 모든 서양인 주교와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판결과 천주교인들에 대한 국법으로 박해하는데 서명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