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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와 순교자 신심
이 석 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Ⅰ. 여는 말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년, 辛酉年)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서, 1월 10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순조의 계증조모) 김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되어, 12월22일(음)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박해의 저변에는 영․정조 시대의 당쟁과 탕평책으로 인한 정치적 희생자들간의 암투와 음모가 서려 있었고, 18세기 후반 사회변동을 촉진시킨 천주교 신앙의 유포와 신학문의 파급으로 인한 종교적․사상적 마찰과 투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후기조선왕조의 전근대적 통치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서학, 실학 등)의 유입, 전통적인 신분체제의 문란, 상업 자본주의의 대두, 농업생산력의 향상, 민중의 의식 변화 등은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시기의 “천주교의 유포(流布)는 조선후기 사회의 내재적 요청이며, 이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당시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고수하려던 이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봉제사 포기의 태도나 외국 세력 유입 시도, 신분 질서를 초월하는 공동체 형성이나 여성(교우)들의 활약 등은 박해의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고, 정적(政敵) 제거의 호기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힘으로 신앙인들을 제거할 수는 있었으나 한 번 전래된 천주교 신앙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Ⅱ. 몸말
1. 신유박해의 주요 사건과 과정들
박해의 암운은 1800년(정조 24년, 당시 49세) 6월 28일(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펴 왔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면서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녀는 11월 하순 국상(國喪)이 끝나자마자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들을 모조리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 첫 단계로 신유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1월 15일(음)에 금교령을 반포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역률(逆律)로 다스리라 하였고, 아울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히 시행하여 신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벌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월 19일(음),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책롱」(冊籠)이 기찰 포교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고, 몇몇 사람들의 상소의 빌미가 되어 서울(漢城)과 기호(畿湖) 지방 외 여러 곳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3월 12일(음) 포도청 자현(自現)으로 인해 더욱 가열되게 되었다. 주 신부의 의도는 박해의 불길을 끄려 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와 연관된 많은 이들이 순교의 영관(榮冠)을 쓰게 되었다.
박해는 9월 15일(음) 황사영(알렉시오)이 배론(舟論)에서 체포되고 그가 작성한 「백서」(帛書)가 발각됨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백서」와 연루되었거나 혐의를 받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정부측에서는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에 대한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상주(上奏)하였고, 그 증거물로 ‘가(假)백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황사영 백서」 사건 정리 이후 대왕대비 김씨는 미결된 신자들에 대한 신문(訊問)을 연말까지 마치도록 분부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인 「척사윤음」을 어린 순조의 이름으로 12월 22일(음)에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신유년 세밑에 각 지역에서는 또 다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고, 이 같이 철저한 한 해의 박해로 인해 교회는 대부분의 주요 활동가들을 잃고 말았다.
2. 신유박해의 주역 정순왕후와 척사윤음(斥邪綸音)
1)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인 그녀는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治罪)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이러한 당쟁의 과정 속에 그녀는 오빠 김구주와 일가친척을 잃어 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信西派)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송 마리아)과 며느리(신 마리아)를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시켰다. 그녀는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1801년 1월 10일(음)에 반포된 「금교령」(禁敎令)
“先王(정조)은 바른 도리를 빛나도록 힘쓰면 사악한 도리는 저절로 소멸되리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말에는 상궤(常軌)를 벗어난 도리가 아직도 존재하며 서울에서 시골구석에 이르기까지, 특히 湖中에 날로 더 퍼진다 하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人倫을 지킬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며, 한 나라는 지식과 참 도리에서 비로소 그 생명을 찾아낸다. 그런데 문제의 邪學은 부모도 국왕도 몰라보고 일체의 근본을 배척하여 사람을 오랑캐와 짐승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무식한 백성은 점점 더 그것을 받아들여 그릇된 길을 방황하고 있으니, 강으로 달려가 빠져 죽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찌 마음의 충격을 받지 않겠으며, 어찌 저 가련하고 불행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각 고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저 무식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새 敎를 믿는 자들은 진심으로 행실을 고치고, 그 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단단히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왕이 그렇게도 너그럽게 주려고 힘쓰신 가르침과 빛나게 한 광명을 짓밟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엄한 금령이 내린 뒤에도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 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 책임을 지는 五家作統의 法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중에 사학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統首)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改心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다시 나지 않도록 뿌리뽑아 버리라. 나의 뜻이 이러하니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그것을 알아 시행하라.”
이 반교문의 반포로 인하여 이후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따라서 박해 후 교회 재건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3) 1801년 12월 22일(음)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
역설적이게도 이 윤음에서 표현되고 있는 교우들에 대한 폄하(貶下)된 죄목들은 해당되는 순교자들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요약해 옮겨본다.
“…승훈은 북경 사신 일행을 따라가서 타락된 책들을 사가지고 왔고, 서양인들의 교당에 가서 그 외국 민족의 제자가 되었으며, 약종은 온 집안과 형과 아우와 함께 이 敎에 물들었으며, 철신의 1향(鄕)과 역적 희(禧)의 사생아 창현은 거기에서 학식과 박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낙민(홍 루가)은 그 무리들의 대장이 되어 국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끝까지 자기의 사악한 사상을 바꾸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창현과 필공보다도 한층 더 부패하여 조상들의 사당을 헐고 인륜을 파괴하여 지충과 상연의 고질이 된 악의를 능가하였다.”
“…사악한 책을 연구하여 이마를 문지르게 한(세례 때) 건순(健淳), …부끄럽고 점잖지 못한 소책자를 내놓은 말벌눈과 늑대 목소리를 지닌 가환(家煥) … 진짜 두목은 그의 생질인 역적 李承薰이니, 그는 그 악을 전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그 친구 檗과 힘을 합하였다. … 가환의 무서운 계획을 비밀히 두둔한 李存昌, … 바로 그 때 주문모가 나타나 서양인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그것은 소매 속에 독을 품은 말벌 한 마리가 들어온 것과 같았다. 璜(池사바)과 一(윤유일) 같은 인물들이 앞에서 그를 도와 주고, 뒤에서는 沁(황 토마스)과 禧(옥천희)가 심부름꾼이었으며, 천성이 교활하고 문란한 여자인 완숙(강 골롬바)은 그가 머물러 있는 집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들은 仁吉(최 마티아)을 매수하여 邪敎의 두목 대신에 죽음을 당하였다.
…마음이 호랑이 같고 얼굴과 눈이 산개와 담비 같은 사영(황 알렉시오)은 마술과 요술에 이름이 알려져 있음을 기화로 감히 도망을 하였고, …감히 비단 조각에 세 가지 무서운 계략을 상세히 기록할 생각을 먹었다. …어떻게 8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서양 배를 불러다가 … 외국과의 관계는 황심과 합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현계흠은 전라도에서 소란을 일으켰고, 항검은 준비를 하여 수천냥의 돈을 뿌렸으며, … 역적 裀 왕자의 妃와 며느리가 賜藥으로 죽었으며, 가환과 철신은 매를 맞아 죽고, 주문모는 군문효수를 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으며, 승훈, 약종 등등, 어리석은 두목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다. 8월에는 사영이 잡혀 항검, 지헌, 황심, 천희 및 그 공버자들과 함께 법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백성을 미혹케 한 자들은 각기 출신 도로 압송되어 거기서 처형되었다. …이 악을 없애려면 그 밑둥과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 蔡 大臣을 추탈관직(追奪官職)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 오늘 12월 22일부터 우레와 비가 백성 위에 그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큰 평화가 하늘과 땅에 돌아오니, 이는 옛날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다행한 일이다. 가장 위대한 속성은 생명을 주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용서하였어야 할 것이나, 사실에 있어서 이 사교는 그 추종자들의 마음을 변하게 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할 수 없으니, 그 狂信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하여는 그들을 사형으로 벌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 내가 내리는 지시의 목적이 이러하니, 각 사람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1) 신유년에 순교한 이들의 일자(日字)별 목록
신유년에 순교한 이들을 달레의 자료와 김옥희 수녀의 자료 및 기타 자료들(글 말미의 참고자료 참조)을 참조하여 일자별로 정리해 보았다. 표로 만들다보니 한 면 전체를 차지하기에 면 조절상 뒷부분으로 배치하게 되었다. ☞ [표] 참조
2) 순교자들의 지역별․사건별 목록
① 서울에서 순교한 이들
1800년(경신년) 12월 17일(음) 中人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이 체포되었고, 12월 19일(음) 새벽에는 그의 사촌 동생인 최필제(崔必悌, 베드로)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서울의 큰길 옆에 있는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오현달(吳玄達,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이 무렵 두 양반 신자들이 양근(陽根)과 충주 읍내에서 잡혔는데, 한 사람은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기연(李箕延)이었다. 1801년(신유년) 1월 9일(음)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이 체포되었다.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체포된 이는 주인의 책롱을 옮기다 적발된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이 있다(음력 1월 19일). 이 책 궤짝 사건이 있었으나, 채제공의 외조카인 포도 대장 이유경(李儒慶)의 무보고로 10여일 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고, 2월 2일(음)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신대현(申大顯)은 오히려 옥에 가득 차 있는 배교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최필공․최필제․최창현․임대인 등 주역 신자 4명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벽파들의 잇단 상소로 인하여 신자들을 가볍게 처리한 신대현이 잡혀 들어갔고, 포도청에 갇혀 있던 네 사람도 의금부(義禁府)로 옮겨져 반역죄로 처리되었다. 아울러 2월 9일(음)에는 이가환․정약용․이승훈․홍낙민(洪樂敏, 루가) 등을 잡아다가 국문(鞠問)하기 시작하였고, 11일(음)에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丁若銓)을, 16일(음)에는 이기양(李基讓)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과 천주교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에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정약종․홍낙민․최창현․최필공․이승훈 등 5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하였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長鬐縣)과 신지도(薪智島)로 각각 유배되었다.
② 경기․충청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
박해는 지방에서도 일어나 지도층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使徒)’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2월 5일(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2월 26일(음)에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다시 공주(公州)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또 이 무렵 청주(淸州)에서 체포된 이종국도 공주에서 처형되었다.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아들 홍인(洪鏔, 레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그도 2월 26일(음)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여주와 양근에서는 1800년에 이미 잡혀 온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결안(結案)이 확정된 뒤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신유(1801)년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 원경도(元景道, 요한)․임희영(任喜永)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정종호(鄭宗浩) 등 5명이 처형되었고, 이 때 같이 체포된 조용삼(베드로)은 옥사하였다. 또한 양근에서 같은 무렵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尹有一의 동생)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丁哲祥, 가롤로)과 최필공의 사촌인 최필제, 中人 정인혁(鄭仁赫), 정광수(鄭光受)의 처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 칸디다), 이합규(李鴿逵)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③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자수와 박해의 확산
1794년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였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서도 주 신부는 북경에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는 모임의 본을 떠 ‘명도회’ 즉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를 세웠다. 명도회 설립 목적은 우선 회원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 다음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줌에 있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이 회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 주 신부는 시내에서 회합을 가져야 하는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하여야 할 지도자들을 임명하였다. 주 신부의 열성에 감화되어, 모든 회원은 지도자들이 매달 각 회원에게 나누어주는 표지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에는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의 표지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천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한 결과를 냈다.
주 신부는 많은 신자들이 자기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현실의 상황을 타개해보기 위하여 많은 고뇌 끝에 포도청에 자수하게 된다. 주 신부의 초사(招辭)에 따르면 2월 20일(음) 폐궁(廢宮 = 良娣宮)으로 피신했다가 2일 후 황해도 황주(黃州)로 북행, 거기서 서울로 되돌아와 自現하였다고 했다. 주 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주 신부의 유해가 땅에 묻혔을 때 신자들은 그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자리를 보아 두었으나 파수꾼들이 몰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박해는 주 신부와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우선 주 신부를 한 때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 받은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처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3월 17일(음) 사사(賜死)되었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갔던 은언군도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또 주 신부의 진술로 입교 사실이 밝혀진 노론인 양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종형 김백순(金伯淳)과 많은 종교화를 그린 이희영(李喜英, 루가)이 3월 29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김건순도 4월 20일(음)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5월 22일(음)에는 주문모 신부를 6년 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여성 회장 강완숙과 궁녀 강경복(姜景福, 수산나), 前 궁녀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동생 최인철(崔仁喆, 마티아), 김범우(金範禹)의 일곱째 동생 김현우(金顯禹, 마태오), 이희영의 조카 이현(李鉉),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가까운 친척인 홍정호(洪正浩),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 한신애(韓新愛, 아가다)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김범우의 셋째 동생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도 이때 포청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 또 이날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鄭順每), 윤유일의 사촌누이 윤점혜(尹占惠, 아가다), 평산(平山) 출신의 고광성(高光晟), 음성(陰城) 출신의 이국승(李國昇), 봉산(鳳山) 출신의 황(黃) 포수 등도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여주․양근․평산․봉산․공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들 외에도 이 시기에 공주에서 문윤진이라는 여종이, 양근에서는 배석골 전주 이씨 양반 집 이재몽과 이괘몽, 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의 두 딸, 지여울 사는 양반 집안 출신 김원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의 먼 친척이자 이동지(李同知)의 딸인 이 아가다 등 많은 사람이 참수를 당하였다. 양근에서 순교자가 특별히 많았던 것은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잔인하게 신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④ 전라도에서의 박해
전주에서는 3월(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되어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그의 동생 유관검(柳觀儉)과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동생 윤지헌(尹持憲), 유항검의 집안과 인척간인 이우집(李宇集) 등도 체포되어 3월 28일(음)부터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고, 중인 김유산(金有山)도 유관검의 고발로 붙잡혀 4월 26일(음) 문초를 받았다. 또한 이들의 고발로 전주․금산․고산․영광․무장(茂長)․김제 등 여러 고을에서 2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우집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이 탄로되었고, 이 계획에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 등이 관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배교자들은 석방하거나 귀양보내고 중요한 인물들만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판결을 받게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무관한 양반 집안 출신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유항검 집의 종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등은 7월 13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인 김제․전주․무장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관련된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 등은 9월 11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⑤ 「황사영 백서」 사건과 황사영과 연루된 순교자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2월 11일(음)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7개월이 넘도록 붙잡히지 않고 도피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피신 중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을 따라 충청도 배론으로 가 김귀동(金貴同)의 집에 은거한 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한 박해 과정을 기록하면서 교회의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 이때 황심(黃沁, 토마스)이 김한빈을 만나기 위하여 제천(堤川)으로 찾아왔다. 황사영은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자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하였다. 황심은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한 옥천희(玉千禧)와 함께 「백서」를 북경에 가져가기로 결정하였으나,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체포되고 옥천희의 고발로 황심이 9월 15일(음) 체포됨에 따라 발각되고 말았다. 이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는데, 황심의 고발로 황사영과 김한빈이 9월 29일(음) 제천에서 체포되었고, 동래(東萊) 앞바다에 정박한 외국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역관 집안 출신 현계흠(玄啓欽)도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아울러 정약용․약전 등도 황사영과의 공모 여부를 캐기 위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백서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이튿날 참수되었으며, 황사영․옥천희․현계흠은 11월 5일(음)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정약용․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진(康津)과 흑산도(黑山島)로 각각 유배되었다.
대왕대비 김 씨는 청에 진주사를 파견하여 「백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게 하고, 아울러 아직도 죄상을 추궁하지 못한 사학 죄인에 대한 신문을 연말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을 12월 22일(음)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22일(음) 귀양가 있다 다시 체포된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등이 모두 출신지인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12월 26일(음) 16명에 대한 사형 선고도 있었는데, 이윤하(李潤夏)의 아들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손경윤(孫敬允)․김계완(金啓完,시몬)․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최설애(崔雪愛)․김의호(金義浩)․송재기(宋再紀)․장덕유(張德裕)․변득중(邊得中) 등 9명은 서울에서 처형되었고, 정광수는 여주에서, 김귀동과 황일광(黃日光)은 홍주(洪州)에서, 김일호(金日浩)와 권철신의 양자인 권상문(權相問)은 양근에서, 한덕운(韓德運)은 광주에서, 홍교만의 아들 홍인은 포천에서 각각 처형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다.
황사영은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이들과 옥사한 이들을 300여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신유박해 때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표] 辛酉(1801)年 순교자들과 순교 일지
양 력 | 음 력 | 순 교 자 들 과 순 교 내 용 및 기 타 일 지 |
1월 | ||
2월 21일 22일 | 1월 9일 10일 | 최창현(요한, 초대 총회장) 밀고자 김여삼에 의해 체포 김 대왕대비(정순왕후, 순조의 계증조모) 공식 박해령인 ‘척사윤음’ 선포, 오가작통법 실시 |
3월 3일 22일 24일 27일 | 1월 19일 2월 9일 11일 14일 | 책롱사건 발생(임대인 토마스가 포천 홍교만의 집에 있던 책롱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 천주교 서적과 주문모 신부 서한, 정약용 집안의 서한이 들어 있었다.) 이가환, 정약용(요한), 이승훈(베드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체포, 의금부로 이송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명도회 초대회장, ‘주교요지’의 저자), 권철신(암브로시오) 체포 조용삼(베드로) 여주에서 순교(옥중 杖死) |
4월 3일 7일 8일 10일 24일 25일 27일 29일 | 2월 21일 25일 26일 28일 3월 12일 13일 15일 17일 | 권철신 포청에서 매맞아 장독으로 치명 이가환 포청에서 매맞아 장독으로 치명 최창현,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등 서소문에서 순교 이존창(루도비코, 충청도 교회 사도) 공주에서 순교, 충청도와 전라도로 박해확산 주문모(야고보) 신부 의금부에 자수 이종국 공주에서 참수 최창주(마르셀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정종호, 임희영 여주에서 참수 윤유오(야고보, 윤유일의 동생), 유한숙 양근에서 순교 은언군 인의 처 송 마리아, 며느리 신 마리아 사사(賜死) |
5월 11일 14일 30일 31일 | 3월 29일 4월 2일 18일 19일 | 이희영(루가, 종교화 화가), 김백순(예비신자) 서소문에서 순교 정철상(가롤로, 정약종의 장남), 최필제(베드로, 최필공의 종제), 윤운혜(마르타, 정광수의 처) 정복혜(간디다), 정인혁(다두), 이합규(세례명 미상) 서소문에서 순교 경기 광주 출신 박중환(세례명 미상) 옥중 장사(杖死) 주문모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50세 때에) |
6월 1일 | 4월 20일 | 김건순(요사팟) 서소문에서 순교 |
7월 2일 4일 7일경 | 5월 22일 24일 27일경 | 강완숙(골롬바, 초대 여회장), 최인철(이냐시오, 최인길의 동생), 김현우(마태오, 김범우의 일곱째 동생), 김연이(율리안나), 강경복(수산나, 폐궁나인), 문영인(비비안나), 이현(순교자 이희영의 조카), 홍정호(홍필주의 가까운 친척), 한신애(아가다) 서소문에서 순교 윤점혜(아가다, 윤유일의 사촌) 정순매(발바라, 정광수의 누이) 여주에서 순교 고광성(聖 고 바르바라의 부친), 황 씨(포수) 평산에서 순교, 이국승(베드로) 공주에서 순교 |
8월 25일 26일 27일 27/28일 | 7월 17일 18일 19일 19/20일 | 김광옥(안드레아) 예산에서 참수, 김정득(베드로) 대흥에서 참수 한정흠(스타니슬라오) 김제에서 순교 최여겸(마티아) 무장에서 순교 김천애(안드레아, 유항검의 종)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 |
9월 | ||
10월 4일 24일 29일 | 8월 27일 9월 17일 22일 | 홍필주(필립보, 강완숙 아들), 김종교(프란치스코) 서소문에서 순교/ 이부춘․이기연․ 李阿只連 충주에서 참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유관검, 윤지헌(프란치스코), 김유산(토마스), 이우집 전주에서 순교 황사영 백서 완성 |
11월14일 19일 | 10월 9일 14일 | 유중철(요한, 유항검의 아들, 이순이와 동정부부), 유문석(요한, 유항검의 2남) 전주에서 순교 황심(토마스, 밀사), 김한빈(베드로) 서소문에서 순교 |
12월 2일 10일 | 10월27일 11월 5일 | 동지사 조윤대 주문모 신부 처형과 신유박해 결과 적은 토사주문과 가백서 갖고 북경행 황사영(알렉시오), 옥천희(요한), 현계흠(베드로) 서소문에서 순교 |
1월25일 29일 30일 31일 2월 2일 | 12월22일 12월26일 12월27일 12월28일 12월30일 | 김사집(프란치스코) 청주에서 장사(杖死), 덕산 이씨의 아내 골롬바 순교 이경도(가롤로) 서소문밖 참수/ 정광수(바르나바) 여주 正法/ 손경윤(제르바시오), 김백심(시몬), 홍익만(안토니오) 최설애 참수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양근에서 참수/ 홍인(레오) 포천에서 참수/ 이석중 충주에서 참수 이육희(유관검의 처), 신희(유항검의 처), 이순이(루갈다), 유중성(마태오, 유항검의 형인 유익검의 아들)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 경기 광주의 우덕운 참수 김귀동, 황일광(알렉시스, 白丁집안 출신) 홍주에서 참수/ 한덕원(토마스) 참수 |
1801년 순교일 미상 | 1801년 순교일 미상 | 김이우(바르나바, 김범우의 셋째 동생) 포청 장폐(杖斃)/ 배 마티아 순교/ 홍익만의 처 순교 이명호(요한) 3월 이전 부친에 의한 독약순교 / 4월초 : 심아기(발바라) 옥중 장사(杖死) 5월(음) : 양근 배석골의 이재몽․이괘몽, 그들 중의 두 딸, 지여울 사는 양반 김원성 순교/ 문윤진(여종) 공주읍에서 처형/ 조 토마스(조동섬의 아들) 10월초 옥사 이 화백, 吳씨 등 영광에서 순교, 최일안 전주에서 형벌사, 금산 元씨 전주에서 참수 연말 경, 변득중․김경서(염색업자)․박명관의 부친 순교 여주의 이씨 과부, 벽정의 최씨, 덕산의 김 토마스(주 신부 순회시 마부 역할)․윤 바오로, 면천의 한 토마스, 공주의 원씨 집안 남녀 각 1명, 전주 신광서․이국 참수 |
4. 본받아야 할 신유년 순교자들의 신심
1) 교리서 저술 활동과 순교에 관한 기록을 하려 했다
주문모 신부는 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를 발간하여 신자들의 성사생활을 도왔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여 서민들과 부녀자들의 교리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최창현(요한)은 「성경직해」를 저술하여 신자들의 성서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황사영(알렉시오)는 「백서」 기록을 통해 신유년 순교자들에 대한 정보를 교회 공동체에 남겼다.
김건순(요사팟)은 「천당지옥편」을 저술하였다.
이순이(루갈다)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언니․올케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이순이의 오라버니 이경도(가롤로)도 순교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강완숙(골롬바)은 옥에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선교사의 사도적 업적을 썼다. 한 성인을 그렇게도 잘 알던 성녀에 의하여 옥에서 쓰여진 그 성인의 이 행적은 그 비단 조각을 맡았던 여교우의 소홀로 불행히도 없어지고 말았다.
순교자에 관한 한국교회의 최초의 기록은 북경 교구의 구베아(de Gouvea) 주교가 1797년 8월 15일 중국 사천(四川) 교구장에게 보낸 서한일 것이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조선 교우들의 편지를 참조하여 이 편지를 저술하여 후대에 ‘조선 교회의 기원’과 ‘조선교회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해(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순교를 예상하여 정하상과 현석문 남매 그리고 이문우, 최희원 등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위임하였다.
달레 신부가 「조선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에 조선 파견 선교사들의 편지나 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저술하였는데, 특별히 조선에 전교 신부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1592~1835)에 관해서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참조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허약한 건강에다 바쁜 사목생활로 직접 교회사 편찬을 하지 못하게되자, 1862년 그간 수집한 모든 수기(手記)와 문헌들을 그대로 빠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던 것이다.
2) 순교자들은 신앙서적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친하게 알았던 황사영(알렉시오)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그는 세속 사정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연구하느라고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혀내기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들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들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 데 신기하리만큼 능숙하였다. 그는 조선말로 「주교요지」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 놓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백히 설명하는 데 힘썼다. 이 책은 이 나라의 새 교우들에게 귀중한 책이며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교우들을 만나면 관례적인 첫인사를 나눈 후 곧 교리 이야기를 하며 하루 종일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 주면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별 문제를 다 질문하였는데, 그 머리의 기막힌 정확성과 단순하고 명백한 그이 말 덕택으로 그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하였다. 그의 덕이 총회장 최창현(요한)의 덕보다 덜할지도 모르고, 그의 명성도 최 요한의 명성보다 덜 빛날지는 모르나, 자질과 지식으로는 그보다 더 우수하였다.”(황사영 백서 36~38행)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할 때에 떼르툴리안의 말을 인용하였고, 이웃 나라 일본의 교회 소식을 인용하였다(백서 87줄).
3) 순교자들은 순교하기까지 기쁨을 잃지 않았다.
황일광(알렉시스)은 포졸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었다. 그는 체포될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리들은 나를 남원(南原) 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 고을로 옮겨가게 하시니, 이 큰 은혜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선말에 ‘나문’은 나무를 가리키고 ‘옥’은 獄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모시던 그는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을 만나 잡혀서 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4) 여성 순교자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초기 조선천주교회 여성 신자들은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 선교활동, 여성신자들의 공동생활(오늘날의 수도회 공동체처럼), 자선사업, 동정녀들의 수정생활(守貞生活) 등 많은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여성은 강완숙(골롬바, 1760~1801) 순교자라 할 수 있는데, 그녀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여성단체를 조직
불행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그의 집에서 살게 하며 敎理를 가르침
㉡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시작
* 權化全家 旁及隣里(황사영백서에서)→ 媤母와 전처 아들 홍필주와 친정부모 입교시킴
* 지체 높은 양반집 여러 부녀자들이 그녀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아 입교함
* 왕가의 부녀들과 궁내의 나인(內人)들에게도 전교함(은언군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당시의 국법에 역적이 아니한 양반의 부녀자들은 형벌로부터 제외되었기에 그들은 禁敎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주문모 신부→이 점 감안해 여교우들 厚待 여성의 활약이 컸다
㉢ 신입교우들 위해 교리강습회․강연회 등을 자주 개최함
㉣ 童貞女들이나 寡女들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함
교육과정이 끝나면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케 해 천주를 믿도록 권유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킴/ 修道會적인 성격의 단체를 처음으로 조직함
㉤ 明道會의 女會長職 수행
남인 兩班과 中人들로 구성된 남교우들과 더불어 다양한 선교 활동을 펼침/ 선교와 자선적인 교회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공헌
㉥ 1791년 신해박해 시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갇힌 교우들을 방문
㉦ 교회 지도자와 회장인 남녀 교우들과의 잦은 교류
Ⅲ. 맺는 말
신유박해는 조선의 교회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받은 타격도 컸지만 정치적인 충격도 컸었다.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대부분의 교역자들을 잃었고,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30여 년을 다시 더 목자를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 반포는 종교의 유입을 차단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아울러 서구 문명의 이기조차 유입되지 못하게 만들어 나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녀의 의도된 박해는 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는데, 순교자들의 피는 오히려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전국 각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지도층 인물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순교나 배교로 떠나갔지만 중인 이하 신분의 교우들이 등장하여 그 맥을 이어가게 되었고, 또 다시 성장하여 오늘의 교회 모습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제 이들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교회를 쇄신하고, 활발했던 초기 평신도들의 교회 모습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03위 성인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자들에 대한 철저한 자료 수집과 기록에 의해 가능했듯이 다시 또 신유박해와 그 이전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과 기록 및 기도의 몫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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