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궁예, 견훤, 이들은
후삼국시대를 풍미했던 주역들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이었던 마의태자이다.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홀로 풀을 베어먹으며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
과연 마의태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최후를 맞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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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에 전해 내려오는 마의태자의 전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르다.
마의태자는
산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부흥운동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인제군 여기저기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구체적인 유적과 생생한 전설들이 널려 있었다.
인제지역 전설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마의태자였던 것은 아니다.
인제에 김부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김부리’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전설의 주인공이 경순왕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어 왔었다.
하지만 김부리의 대왕각신위를 보면
전설의 주인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이다.
그렇지만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일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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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행적을 추적해본다.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 과연 김부(金富)는 누구인 것일까?
위치와 이름으로 봤을 때
김부대왕동은 마의태자와 분명히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 김부와 김일,
마의태자는 이 이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인제 갑둔리에서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마의태자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인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마의태자의 유적이 있는 인제는
금강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경주와 금강산, 인제. 이 세 지역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기 위해
선택했던 길을 살펴봐야 한다.
신라시대 때 흔히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기 위해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마의태자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자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뜻에 강력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그런 마의태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금강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더욱이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려에 항복한지 200년이 흐른 뒤에도 각지에서는 신라부흥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려에 항복한 후
마의태자가 택한 곳은 '강원도 인제'였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
신라인들의 부흥의지는 만주대륙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