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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고린도후서 제 3장 1~4
절
=====3:1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 본절의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바울에 대한 두 가지 비난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되풀이하여 선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천거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
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바울에 대한 이런 도전은 적대자들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천거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
도라고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거짓됨을 은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
해 바울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선교사들로서 누가 보아도 현혹당하기 쉬운, 찬사로 가득찬 추천서를 소지(所
持)하고 있었고, 바울과 아무런 상관없이 고린도에 와서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
을 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들은 2:17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
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의 범주에 들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적인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본다(Harris).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근본이라고 믿었던 자들
로, 율법보다 믿음을 중요시했던 바울을 못마땅히 여겼을 것이다.
천거서 -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일종의 소개장으로 어떤 사람의 직
분과 권한에 대한 위임장 또는 신임장 역할을 하였다(행 9:2;18:27;고전 16:3, 10).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이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위임에 근거
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행 26:12-18). 여하튼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악선전을 하고 다녔
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이 추천서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서를 이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8:16-24;롬 16:1, 2;고전 16:3, 10,
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칭찬과 승인과 위임보다 하나님의 승인이 훨씬 더 우위에
있고 또한 한통의 추천서보다는 사도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열
매에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眞正性)이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서
추천서를 얻어다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거나, 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고전 9:2에서 이와 유사한 의미의 구절이 발견된다. 거기
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무시한 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자신의 전도사역의 열매임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사도권을 논증한 바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앞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
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자신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새
겨진 추천서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몇가지 점에서 비교된다. (1) 적대자들이 지
니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마음에 쓰여진 것이
다. (2) 적대자들의 추천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하나님의 영(靈)으로
쓰여진 것이다(3절). (3) 적대자들이 가진 추천서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므로 몇몇 제
한된 사람에게만 보여질 수 있으나 바울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썼고 - 혹자는 이 구절에서 렘 31:33의 새 계약 즉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
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
여'가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Barrett). 이것은 다음 절(3절)의 '돌비'와 '육의 심비'
의 대조와 연관시켜 볼 때 적절한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천거서에 대한 논쟁을
`율법과 복음', '육과 영'이라는 신학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3:3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 본절은 적대자들의 천거서가 사람에게서 유래한 반
면 바울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울의
사도직이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可視的)인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사역(事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
로 세움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그리스도의 편지'(*
, 에피스톨레 크리스투)에서 '그리스도의'는 표면상 소유격이지만 실제로는 주격의 의
미를 갖는다. 즉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는 점을 말해준다(R.
Martin).
돌비...심비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먹으로 쓰인 천거서를 가지고 율법을 강요
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
에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
서 모세에게 수여한 옛 계명에(출 24:12) 매여있는 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심
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즉 새 계명을 새겨 넣은 것이다(렘 31:33;겔
11:19;36:26). 이로써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제기된 추천장 문제는 바울의 일방적 승
리로 끝나게 되었다. 적대자들은 율법을 강요했으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과,
적대자들은 분열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하는 생명
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해진다.
=====3: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결코
자화자찬하거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자신의 확신의 근
거가 자신의 재능이나 성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
고 있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혹자는 이
것을 "그것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말한 심정에서의 확신이요,
비판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확신이다"고 하였다(F. G. Carver).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5)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을 비유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대사,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는 사도 바울을 싫어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교사로 유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비록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지만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유대의 전통을 따라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은 폐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강조한 사도 바울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음만을 강조한 사도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했습니다.
특별이 이 거짓교사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는 예루살렘 사도회에서 인정한 추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추천서가 없는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사도라고 말할 뿐이지, 어떤 공적으로 파송을 받은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주의 거짓교사들 때문에 교린도 교회 내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오늘 1절 말씀에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아니오”라는 대답을 전제한 질문입니다.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하는 말들이나 악평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대꾸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 교회가 준 추천서 때문에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위임해 주셨고, 보장해 주셨는데, 어찌 사람의 추천서가 없다고 사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2절 말씀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내준 추천서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추천서요, 너희가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심비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보여지고, 그리스도가 전해져야 합니다.
마 5: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빛이 어두움을 물리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 거짓과 불의를 물리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이 길을 보여 주고 인도하듯이 죄악의 어두움에서 갈 길을 못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보여 주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를 세상 사람들은 주목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님에게 한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친구에게 찾아가 자세히 물어보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을 살피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병들어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편지로 가야 합니다. 실패한 이들에게는 승리의 약속을 주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가야 합니다. 가정의 불화 때문에 괴로워하는 가정에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낙심한 자에게는 위로와 용기의 편지로, 절망한 자에게는 소망의 편지로, 가난한 자에게는 믿음의 부요한 그리스도의 편지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편지를 받는 순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런 면에서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불렀습니다. 즉 사람들의 눈에 안디옥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낸 확실한 편지가 된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칭찬하며 본이 되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살전 1:6-7절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을 보이는 삶,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만 같으면 나도 예수 믿겠어!” 또는 “저런 사람 때문에 교회 갈 마음 이 없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광고이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편지란 그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편지는 내용에 따라서 붙여지는 이름도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는 ‘연애편지’라고 부릅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고맙다는 내용을 실어 보내는 편지를 ‘위문편지’라고 합니다. 어버이날 학교에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보낸 편지는 ‘효도편지’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종류의 편지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전달해 주어야 할 편지의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것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롬 5: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할 때에, 죄에 빠져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을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달하는 자는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요, 생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데, 그 놀라우신 사랑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가 받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도록 그들 앞에 공개된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책을 보고 예수를 믿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를 믿는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믿음 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성품으로, 우리의 습관이나 언어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위한 하나의 광고판입니다. 교회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성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나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공개장이며, 광고판이 된다는 엄숙한 책임을 지녀야만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작은 삶의 자취들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얼굴에 묻어나는 잔잔한 미소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이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편지는 누구의 편지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편지냐에 따라서 받는 사람의 기쁨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누구의 편지라고 말씀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마음과 영에 글을 새겨주신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보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편지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면 안 됩니다.
어떤 미국 사람이 프랑스에 관광을 갔다가 파리에 있는 어느 골동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가운데 진열장 구석에 전시되어 있는 진주 목걸이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서 이미 색깔은 다 바랬지만, 진주 목걸이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이 그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5백 달러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좀 비싼 듯 했지만 장식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샀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자기의 보석 상자에 넣어서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급히 돈이 필요해서 프랑스에서 샀던 그 진주목걸이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 근처에 있는 보석상에 가지고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이 돋보기로 쳐다보며 한참동안 감정을 하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2만 달러를 줄테니 팔라고 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5백 달러를 주고 샀는데 2만 달러를 주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기 위해서 일단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그것을 가지고 꽤 알려진 골동품 가게를 찾아가 감정을 해 보았습니다. 그 골동품 가게의 주인도 한참동안 감정을 하더니 옆에 있던 몇 사람을 불러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고는 5만 달러에 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더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이 진주목걸이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 진주 목걸이에 자세히 보니 거기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라는 글귀와 함께 나폴레옹 황제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주 목걸이만으로는 값이 나가지 않지만 그러나 목걸이에 적혀 있는 글씨와 친필 사인 때문에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입니다. 목걸이 자체가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 거기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의 사인이 있기에 값나가는 목걸이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이 왜 귀중합니까? 왜 우리 인생이 값나가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사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편지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에 당신의 친필 사인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 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은 가졌노라.”
여러분, 우리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겨진 그리스도의 흔적,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예수의 흔적이 우리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에 나가도 결코 망신당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